나이 일흔에도 여전히 공자는 욕망의 인간이었다
입력 2019.03.16 17:56
② 공자의 불멸성
비록 현실정치에서 실패했지만
납작하고 안이한 삶 경멸
소소한 일상을 살더라도
끝내 위대한 것의 일부 되려 해
삶 속에서 분투했던 사람
결핍 느꼈기에 과잉을 꿈꾼 사람
제자들은 그런 그를 사랑했고
'논어'를 남겨 그를 불멸케 했다
‘논어’가 그리는 공자
<논어> ‘향당’ 편은 공자가 예식에 참여하는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와 같은 텍스트를 통해 편집된 공자의 페르소나는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왔다. 필멸자(必滅者)로서의 육체를 가진 공자는 손아귀 속의 공기처럼 사라졌다 해도. <공자가어>(孔子家語), <공자세가>(孔子世家),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공총자>(孔叢子), <공자시론>(孔子詩論), <이삼자문>(二三子問), <노방대한>(魯邦大旱), <유가제언>(儒家諸言), <한시외전>(韓詩外傳), <춘추사어>(春秋事語) 등 오늘날까지 공자의 페르소나를 전하는 텍스트는 매우 많으며, 논어는 그 경쟁하는 많은 텍스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어떤 텍스트는 음험한 패배자의 상징으로서 공자를, 또 다른 텍스트는 패권을 구현할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공자를, 또 어떤 텍스트는 신적인 존재로서 공자를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 현행 <논어>가 하필 특징적으로 전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유려한 전례의 집행자 말고도, 논어의 편집자가 기어이 불멸케 하고 싶었던 공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예수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병자를 고쳐주는 이야기가 14번이나 나온다. <공동번역 성서> 마태복음 8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나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절하며 ‘주님, 주님은 하시고자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공교롭게도 논어에도 공자가 나병 환자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 역시 나병에 걸린 환자에게 손을 대기는 댄다. 그러나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하는 대신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그러고 끝이다.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한 예수의 행적을 상기한다면, 맥빠지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아픈 이를 고치기는커녕 한탄이나 하고 말다니. <논어>는 불타는 무능의 기록이다.
전능한 신에 비교한다면야, 공자가 무능해 보이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선생으로서 공자의 모습은 어떤가. 공자는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느냐 여부에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거듭 가르친 바 있다. 이를테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라든가 “군자는 무능함을 근심하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와 같은 언명들이 <논어>에 전한다. 그런데 <논어>의 편집자는 기어이 <논어> 텍스트 내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구나!”(莫我知也夫)라는 공자의 탄식 역시 수록해 놓았다. 스스로의 가르침마저 배반하는 사람이라고 공자를 망신 주고 싶었던 것일까.
(정론직필 주: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라....이 부분은 번역이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즉, "내가 남의 정신의식 수준이 높음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라고 봅니다. 즉, 상대가 자신 보다 뛰어난 인재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는 경고라고 해석합니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구나! ... 이 부분도 잘못 해석된 부분이라고 봅니다. 즉, 공자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판이 나빠서 한탄하는 내용이 아니라, 있는그대로의 공자의 정신의식수준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참고: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000&key=20130625.22027201808 / http://news.donga.com/List/CultureAcad/3/0720/20091207/24645114/2)
벌써 10년도 더 전 일이다. 관운이 좋아 높은 관직을 두루 누렸던 어떤 정치인이 노환으로 조용히 별세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당시 현직 신문기자였던 선배가 내게 그 별세 과정의 보도되지 않은 진실을 전해주었다. “사실, 그 사람 그 날 아침에 화장실에서 똥 싸려고 힘주다가 죽었어. 모양새가 빠지니까 그런 건 기사화하지 않은 거지.” 그리하여 그 정치인은 관운을 누릴 대로 누리다가 우아하게 선종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논어>의 편집자는 가차 없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구나!”라는 공자의 탄식을 기어이 수록해서, 공자를 모순에 찬 인물로 만들어 놓고 만다.
이리하여 <논어>가 전하는 공자는 생각보다 무능하고 예상보다 모순적인 인물. 이는 공자가 우리처럼 보통 인간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질병에 취약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의외의 부분에서 까탈스럽고, 남들의 험담에 시달리고, 불건전한 생각도 종종 해가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다가 손에 묻히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거라는 말이다. 나중에 성인(聖人)으로 둔갑하게 되는 공자의 나날들도, 그의 살아생전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적당히 방만한 순간들과, 충분히 진실하지 못했던 순간들과, 최선을 다하지 못하여 안타까운 순간들과,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던 순간들로 채워져 나갔을 거라는 말이다. 그도 우리처럼 비틀거리면서 인생이라는 시간의 철로를 통과해갔을 거라는 말이다.
서투른 열정의 인간
다만 놀라운 것은, 그가 끝내 욕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다 갔다는 점이다. 그는 비록 현실 정치에서 실패한 인간이었으되, 납작하고 안이한 삶을 찬양했던 사람은 끝내 아니었다. 다이소 진열대 위에 쪼그려 앉아 먼지를 이고 있는 이쑤시개같은 이들은 가차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아! 그 잘디잔 사람들이야, 따져볼 가치도 없다.”(噫, 斗?之人, 何足算也.) 공자는 차라리 과잉을 찬양한다. “중도의 길을 가는 사람을 얻어 함께 할 수 없다면, 반드시 뜻이 높은 사람이나 소신을 지키는 자와 함께 하겠노라!”(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乎.) 현행 <논어> 텍스트가 전하는 공자는 소소한 일상을 살더라도, 끝내 위대한 것(斯文)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만약 하늘이 이 문명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광 지역 사람들이 나를 감히 어쩌겠는가?”(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그 어떤 감정적 격동이나 미련도 없이 차갑게 목전의 합리적 선택에만 골몰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공자는 거듭 반문한다. 어떤 열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가 “인한 사람”일 수 있겠느냐?(焉得仁)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공자 평생의 종착점을 읽어보자. “70세에,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멋대로 해도 다 도리에 맞는 경지, 스스로 기준이 되는 경지. 이 찬란한 혹은 오만하게까지 들리는 자기 자랑. 더 얄미운 것은, 그러한 경지를 타고 난 자질로 가정하지 않고(非生而知之者), 부단한 인생 역정 속에서 멈추지 않았던 배움의 결과로서 설정하는 태도이다.(不如丘之好學也) 오늘의 자신은 늘 어제보다 조금이나마 나은 자신이었으며, 그 결과 멋대로 해도 되는 경지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선언. 그러나 진정 감탄스러운 것은 나이 일흔에도 여전히 공자는 욕망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보니 욕망이 사라진다고 말하거나, 오랜 수양 끝에 욕망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은 욕망을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질주해도 여전히 궤도 위에 있는 기차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공자는 영생하는 신이 아니었기에,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부터 거리를 둔 사람이었기에, <논어>가 전하는 이러한 공자의 페르소나는 실로 삶이라는 유일무이의 이벤트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이벤트에서 끝내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사람, 과잉을 찬양했던 사람, 노년에 이르러도 그치지 않는 배움이라는 긴 마라톤에 출전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사람. <논어>는 그렇게 분투한 사람에 대한 재현이다. 누가 그랬던가. 아무리 배고프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있어도 누군가 밥을 짓지 않으면 굶주림이라는 난관은 타개되지 않는다고. 인간은 생각보다 게으르다고. 보통 사람들은 사채를 빌리지 않는 한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공자는 사채빚 없이도 삶 속에서 분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동시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정치라는 현실의 철로를 달리고 싶었으나 달리는 데 실패한 사람이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질문의 책’이라는 시에서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차보다/더 슬픈 게 세상에 있을까?”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이나 <논어>의 편집자는 유려한 예식의 집전자로서의 공자만큼이나 현실에서의 실패한 선생의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다. 결국, 기적과는 인연이 멀었던 사람, 신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했던 사람, 결핍을 느꼈기에 과잉을 꿈꾸었던 사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을 사랑했던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때로 완벽하게 계산하고 행동하는 합리적 인간보다는 서투른 열정의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끌리곤 하지 않던가. 누가 그랬던가, 완벽한 복근을 가진 사람보다는 쥘 수 있는 한 줌의 뱃살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된다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고 여기는 사람보다는 매미가 오래 살기를 바라며 흐느끼는 사람에게 매료된다고. 매료된 이들은 텍스트를 남기고, 남겨진 텍스트는 상대를 불멸케 한다
https://news.v.daum.net/v/2019031609260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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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 모른다는 것,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
입력 2019.06.08 09:16 수정 2019.06.08 14:46⑧ 메타시선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려면
자신을 바라보는 메타시선이 필요
인생을 두배로 살게 하지만
많은 에너지 필요한 고단한 일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쳐야 하는 삶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잘못을 저질러도 그 잘못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잘못을 안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어떤 말을 비수처럼 남기고 상대를 떠나버린다. 이를테면, 영화 <무산일기> 주인공 승철의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승철씨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죠? 그게 바로 잘못이에요.” 마치 논어에서 “잘못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라고 부른다”(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무지한 존재다. 따라서 인간이 뭘 잘 모른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뭘 잘 모르더라도 자신의 무지를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무지를 안다고 해서 자신의 무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을 채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는 가짜 지식을 섬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버나드 쇼는 말했다. 무지보다 위험한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무지보다는 가짜 지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마치 논어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따라서 인간에게 결함이 있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결함이 있더라도 자신의 결함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결함을 안다고 해서 곧 결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함을 보완하고자 노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가 결함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결함을 모를 때, 사람들은 배움에 매진하기보다는, 오지랖을 통해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스스로 폭로하는 데 분주하다. 논어에서 공자가 자신은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교학(敎學)에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다(爲之不厭, 誨人不倦)고 하자, 제자 공서화(公西華)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경지입니다!(正唯弟子不能學也)
무지의 선언만으론 부족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려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려면, 무능을 넘어 배우는 일 자체에 대해 배우려면, 메타(meta) 시선이 필요하다.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극복 대상이 된 3인칭의 자아뿐 아니라, 대상화된 자신을 바라보는 1인칭의 자아가 동시에 있다. 메타 시선을 장착한 사람은 대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는 사람, 자신이 알 수 없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지를 선언한다고 해서 그가 곧 메타 시선을 장착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뭔가 배울 의지가 없는 사람일수록 질문을 하자마자, 냅다 “모르겠는데요!”라고 대꾸하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무지를 선언하는 데는 나름의 쾌감이 따르므로. 그러나 과연 무엇을 모르는가.
메타 시선이 있는 이는 무지를 그저 선언하기보다, 질문한다. 논어 속의 공자는 제자들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질문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공자는 묘당에 들어가면 매사를 물었다.(子入太廟, 每事問) 늘 그렇듯, 인기를 끄는 이에게는 시기와 험담을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마련. 사람들은 말한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매사에 묻기만 하는데.”(孰謂?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그러자, 공자는 말한다. “그렇게 묻는 것이 예이다.”(是禮也)
정교한 질문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훈련된 행위이며, 대상을 메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 외워 받아쓰기하듯 척척 행하는 것이 곧 예를 아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척척 행동하는 대신 오히려 질문을 일삼는 공자를 비웃는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그러나 공자는 질문한다. 몰라도 아는 척을 하거나, 알아도 침묵하거나, 아는 것을 가지고 ‘꼰대질’을 하는 대신, 질문하기를 선택한다.
이러한 태도는 신으로부터 복을 갈구하기 위해 예식을 일삼던 이들의 자세와 사뭇 다르다. 공자의 시대 이전에는, 그리고 공자의 시대에도, 심지어 공자의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안다는 것’은 인간사를 좌우하는 귀신의 뜻을 알아채는 것을 의미하곤 하였다. 그러나 제자 번지가 안다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사람 세계의 합당함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거리를 두면 知라고 할 수 있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고 대답한다. 귀신을 덮어놓고 경배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귀신을 공경하는 동시에 멀리하는 이 절묘한 자세보다는 차라리 쉬울지 모른다. 이 절묘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메타 시선, 앎의 한계와 인간 능력의 한계에 민감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그런 정신력은 제자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삶도 아직 모르겠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라고 대답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자아 수양에 필수적인 이러한 정신력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존의 예가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을 때, 기복신앙에 의존해서만은 더 이상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힘들 때, 특히 필요하다.
(정론직필 주: 사람 세계의 합당함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거리를 두면 知라고 할 수 있다. 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군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할 도리를 다하고 멀리 있는 귀신은 다만 공경하면 된다" https://news.joins.com/article/4060307 )
메타 시선은 인생을 두 배로 살게 한다. 여행을 하는 동시에 여행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여행 체험을 곱절로 만들듯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동시에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행복감을 곱절로 만들듯이. 그러나 메타 시선을 유지하는 일은 많은 심리적, 육체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고단한 일이기도 하다. 송나라 때 논어 주석가인 형병은 극기복례의 과정을 전쟁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욕심과 예의가 전쟁을 할 때, 예의가 욕심을 이기게끔 하면, 자신은 예로 돌아갈 수 있다.”(嗜慾與禮義戰, 使禮義勝其嗜慾, 身得歸復於禮)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쳐야 하는 전쟁 같은 삶. 삶은 고단하기에, 때로 죽음은 해방감을 가져온다.
공자의 제자 증자는 “맡은 바가 무거운데 갈 길은 멀다. 인을 자기가 맡은 바로 삼으니 무겁지 아니한가? 죽고 난 뒤에야 그치는 일이니, 멀지 아니한가?”(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던 증자는 죽음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삶의 고단한 책임을) 면하게 됨을 알겠도다!”(今而後,吾知免夫) 아, 개운해. 이제 나는 더 이상 자기반성으로 점철된 고단한 삶을 살지 않아도 돼! 그런데 이 마지막 순간에서마저도 증자는 메타 시선을 유지한다. “나는 이제 삶의 책임과 걱정을 면한다!”(吾免夫)고 기뻐 날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삶의 책임과 걱정을 면함을 ‘안다’”(吾‘知’免夫)고 말한다. 즉 삶의 긴장, 구속, 고단함을 면한다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를 메타 시선으로 바라보아 “안다”(知)는 선언이다.
하지만 때로는 쉬어야 한다
이토록 고단한 것이 인생이기에, 인간은 때로 쉬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한 휴식과 이완의 순간이 논어에도 있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있는 제자들에게 공자는 어느 날 묻는다. 사람들이 너희를 알아주면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거창한 계획을 늘어놓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증점은 엉뚱하게도 소풍 계획을 늘어놓는다. “늦은 봄에, 봄옷이 다 지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아이 예닐곱 사람과 어울려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 흥얼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감탄하며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이때 목욕하러 가는 공자의 무리를 간밤에 과음하고, 사우나에 허겁지겁 몰려가는 중년 남자들로 상상하면 안 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의 목욕은 수계(修?) 의식, 즉 물가에 가서 향초를 피우고 세수하고, 나쁜 기운을 없애고 행복을 기원하는 행사이다. 즉 이완의 순간에마저 공자는 예를 떠나지 않는다.
인간은 발전이나 긴장만큼이나 이완과 휴식을 열망하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이 틈만 나면 누우려고 들어도 놀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일중독에 빠지는 잘못을 저질러도 그 잘못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일중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중독이 곧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휴식과 이완을 찾아 나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쉬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쉴 수 있는데도 쉬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쉬었어도 아직 더 쉴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잘 쉬어야 자아 수양도 가능하다.
이에 인간이 쉴 수 있는 가장 화끈한 방법을 소개하겠다. 그 비결은 바로, 주기적으로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어떻게? 문명의 핵심은 언어. 고도의 언어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인간이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인간의 언어를 포기하는 것이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가장 화끈한 방법이다. 일주일에 1시간 정도는 누가 뭐라고 하든 인간의 말을 쓰지 않고 짐승의 말을 쓰는 거다. “이번 달 회계 보고를 해주세요”라고 요구하거든 이러저러해서 재정이 적자라고 피곤하게 설명하는 대신, 그냥 으르렁대는 거다. “으르렁!” “이번 달 연수 장소를 어디로 할지 비교 검토해서 보고해주세요”라고 명하거든, 수고롭게 파워포인트를 만드는 대신 그냥 짖어대는 거다. “왈왈!” 누가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있는데 방해하거든,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저음을 내는 거다. “으르르!” 그리고 아랑곳하지 않고 디저트를 퍼먹는 거다. 누가 다가와서 남의 험담을 늘어놓거든, 꺼지라고 소리 지르는 거다. “캬오!”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떤 귀찮은 자극에도 다 이렇게 으르렁, 왈왈, 으르르, 캬오로 반응하다 보면 어느덧 피곤이 스스르 풀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런 이완의 시간은 일주일에 1시간이면 족하다. 너무 오래 하다가는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https://news.v.daum.net/v/2019060809161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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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기, 누가 강제하는가
입력 2019.05.11 09:26 수정 2019.05.11 15:56⑥ 국가와 자기통제
중앙에서 원형감옥 안 볼 수 있는
벤담의 파놉티콘 장점은 가성비
스스로 자기감시하도록 만들어
'논어', 자기통제 중요성 수차례 강조
자성은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통제
자신의 못남을 적극 탐색하는 행위
프랜시스 코폴라의 영화 <대부>는 사상 최고의 갱스터 영화라고 한다. 그런데 <대부>는 갱스터의 현실보다는 갱스터의 꿈을 그렸다.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는 도덕적 딜레마 속에서 묵상하고, 고뇌 끝에 충복을 처단하고, 충복은 자크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포즈로 욕조 속에서 피를 흘리며 자결한다. 영화 내내 폭력을 행사하는 갱스터는 불온한 예식을 집전하는 성직자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현실 속 갱스터는 웅려한 성직자와는 거리가 멀다. 어느 날 현실의 갱스터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문자를 내게 자랑스레 보여주며 말했다. “전국구 조폭 아무개 이름 들어보셨죠. 그 형님하고 제가 얼마나 친한지 아세요? 이거 지난주에 받은 문자예요.” 국민 대다수가 이름을 들어보았을 법한 갱스터 우두머리가 보낸 문자에는 “방가방가”와 같은 글귀들과 몸서리치게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가득했다.
사회과학자 맨서 올슨(Mancur Olson)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 역시 일종의 갱스터다. 갱스터가 금품을 갈취하고, 지주가 소작료를 걷듯이,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는다. 국가가 꾸는 꿈은 제복을 입은 관리가 세금을 차곡차곡 걷고 치안을 그럴싸하게 유지하는 상태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국가의 꿈이 가장 잘 실현되는 때는 질서가 가장 위협받는 때이다. 전쟁이 일어날 때, 질병이 창궐할 때, 사람들은 평소 이상의 통제를 갈구하고, 국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원기왕성하게 자원을 징발하고 치안을 강화한다. 그 대표적 예가 전염병이 유행하는 상황이다. 푸코가 전하는바, 뱅센 육군 고문서관 소장 원고에 따르면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국가는 다음과 같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사람들의 외부출입은 금지되며, 그 규칙을 어기면 사형당하고, 유기묘와 유기견들은 모두 살해되고, 집 열쇠는 감독관이 관리하고, 모든 길에는 보초가 있고, 감독관은 매일 순찰하며 모든 사건을 기록한다 등등.
그러나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국가는 자주 실패한다. 대규모 반란군을 진압한 국가는 종종 마이클 콜레오네처럼 개폼을 잡지만, 피지배층은 미시적인 저항을 통해 결국 국가를 곤경에 빠뜨린다.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의 연구에 따르면, 피지배층은 지연 전술, 은근한 의무 불이행, 좀도둑질,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공유지 무단점유, 험담, 경멸적 침묵 등 각종 미시적 수단을 통해 국가에 저항한다. 국가가 실패하는 것은 꼭 조직화된 대규모 투쟁이나 영웅적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투쟁 속에서, 국가 권력은 잠식된다.
가능하면 싼값에 통제하기
실패가 두려워 그 많은 피지배층을 한명 한명 일일이 통제하려다 보면, 국가도 쉬이 피로해진다. 그리하여 국가는 가능하면 작은 힘을 들여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페스트 관련 규정 이후 약 한 세기 반 뒤에, 제러미 벤담은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가랑에게 편지를 쓴다. 국가가 감시자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알려주겠다고. 싼값에 원하는 통제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그 방책이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파놉티콘 건축도면에 따르면, 원형 건물 안에 갇힌 수감자들은 중앙 감시탑 안을 볼 수 없는 반면, 중앙 감시탑에서는 원형 감옥 안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 양식으로 말미암아, 수감자들은 누가 감시하는지는 몰라도 늘 자신이 감시받을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스스로 조심하고 자신을 통제한다.
푸코가 강조하고 있듯이, 파놉티콘의 장점은 그 가성비에 있다. 파놉티콘은 “감각보다는 상상을 자극하며 그 감시 테두리 안에서 항상 어디든지 존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수백 명의 사람을 맡긴다.” 어쩌면 단 한 사람의 감시자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밖에서는 파놉티콘의 감시탑 안을 볼 수 없으므로, 감시자가 설령 자리에 없다 해도 마치 거기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내므로. 감시자는 “유령처럼 군림한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 혹은 그가 인(仁)과 같은 덕성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파놉티콘의 원리는 감옥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벤담은 파놉티콘의 원리가 감옥뿐 아니라 학교나 병영, 더 나아가 소수가 다수를 감독하는 사안에 모두 적용 가능함을 강조한다. 즉 파놉티콘은 국가의 운영 원리이기도 하다. 푸코는 거론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 벤담의 글을 읽어보면, 파놉티콘 구상 속에는 연좌제의 아이디어도 포함되어 있다. 수감자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연대 책임을 지게 된다. “동료의 수만큼 감시자가 있는 셈이 되어 피감시자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결국 전체 안전에 공헌하게 된다.” 즉 파놉티콘은 단순히 국가가 자기 감시를 강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끼리의 감시도 강제한다.
공자의 시대는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역사학자 마크 루이스가 명료하게 정식화한 바 있듯이, ‘중국’의 고대 국가는 주(周)나라의 도시 국가에서 전국시대의 대규모 국가(macrostate), 그러다 마침내 진나라에 의한 제국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진화해 갔다. 그 흐름의 이면에는 귀족들의 대단위 친족 조직이 붕괴되는 현상이 있었고, 친족 조직으로부터 느슨하게 풀려난 이들을 국가는 ‘직접’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후대에 가서 그 쓰임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오가작통(五家作統)이라는 연좌제 혹은 이웃 간의 감시 시스템도 이 무렵에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후대에 편집된 텍스트이기는 하나, <상군서>(商君書)와 같은 텍스트가 이러한 국가주의적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
자성,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고통
<논어>에는 이웃 간의 감시 시스템이나 국가의 물리적 통제력 강화를 옹호하는 부분은 없다. 대신 자기 감시 혹은 자기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언명은 여럿 있다. “안으로 반성하며 거리끼지 않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內省不?, 夫何憂何懼) 이 반성 과정에서 자신을 통제하는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문장에 나오는 내성이라는 단어를 양나라 황간(皇侃)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보는 일(內省謂反自視己心也)이라고 풀이했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면에서야, 파놉티콘의 세계나 논어의 세계나 다를 바 없다.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은 볼 수 없는 중앙탑 내부 대신 자기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통제한다. 혹시라도 감시당하고 있을까 봐 알아서 긴다. 파놉티콘은 자기 감시의 메커니즘을 외부에서 강제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자기반성이란, 국가가 사람들 일반에 대해 행하는 통제가 아니라, 통치 엘리트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통제이다. “안으로 반성하며 거리끼지 않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는 말도 사마우(司馬牛)가 군자(君子)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이었다. 또 공자는 못난 사람을 보면 속으로 자성하라는 취지의 말도 했다.(見不賢而內自省也) 주희(朱熹)에 따르면, 여기 나오는 자성이란 자신에게도 이러한 못남이 있지 않나 두려워하는 일이다.(內自省者, 恐己亦有是惡.) 즉 자성이란, 세끼 밥을 통해 자신에게 영양을 주는 행위나, 막연히 몽상에 빠져 있는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못남을 탐색하는 행위, 즉 자기 파괴적 속성이 있는 행위이다. 자신의 못남을 탐색하는 행위는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이라는 면에서 국가가 가하는 고통과는 다르다.
https://news.v.daum.net/v/2019051109260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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