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이영희 교수가 쓴 무쇠의 역사] (31) 단군 이야기 (상) (중) (하)

우전작설차 2019. 1. 8. 11:24



이영희 교수가 쓴 무쇠의 역사] (31) 단군 이야기 (상)                 


정철

2004.07.26. 19:39
   

서울 암사동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 서기전 3000년대의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예’(濊)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먼저

 ‘고조선(古朝鮮)’에 관한 설명부터 해야 한다.


고조선이란, 지금부터 4천 몇백 년 전

 동북아시아에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이름이다.


 이 땅은 날이 샐 때 햇빛이 맨 처음 비치는 곳이란 뜻으로

‘첫 샌’이라 불린 것이 그 소리에 맞춰

 ‘아침 조(朝)’ 자와 ‘밝을 선(鮮)’ 자의 두 한자를 빌려다 기록한 데서

‘조선’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육당 최남선 선생은 말했다.


태고 때에는 ‘위만조선’ 등 조선으로 불린 나라가 셋이나 있었기 때문에

그 중 ‘가장 오래된 조선’이란 뜻에서

‘옛 고(古)’자를 붙여 ‘고조선’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햇빛이 맨 처음 비치는 곳 ‘조선’



삼국유사 첫머리에 이 고조선이 등장한다. ‘단군신화’로 알려져 있는 대목이다.


위서(魏書)에 의하면,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

그는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위서’란 서기 554년에 완성된 중국 북위의 역사책으로 ‘북위서’ 또는 ‘후(後)위서’라고도 불린다.

또 ‘고와 같은 시기’라고 한 것은 중국 고대 전설상의 임금 요(堯)와 같은 시기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상고 때 역사를 적은 책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이 단군 얘기가 소상히 실려 있다.


옛날, 환인의 아들 환웅은 천하를 얻고자 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이 같은 뜻을 알고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여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인간 세계를 다스리게 한다.


 환웅은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다. 그를 환웅천왕이라 일컫는다.


…이 곳에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안에 살고 있어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청했다.

 환웅은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으며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지내면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그가 시킨 대로 했더니 곰은 삼칠 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변했는데,

호랑이는 시킨 대로 하지 못해 사람이 되는 데 실패했다.

곰여인 웅녀가 결혼할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녀와 결혼한다.


웅녀는 곧 잉태해 아들을 낳는다. 그가 단군 왕검이다.


단군 왕검은 요왕이 즉위한 지 50년째 되는 해에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그러다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그는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이 단군고기와 위서의 기록을 살펴 헤아리면 단군이 고조선국을 연 것은 올해로 4337년째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태백산이란 요즘의 북한 묘향산이라고도 하고, 백두산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백악산은 지금의 평양 부근에 있는 백악산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단군고기를 인용해 삼국유사가 책 서두에 상세히 전하고 있는 이 단군 이야기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역사를 서술한 것이라면 호랑이와 곰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신화를 엮은 것이라면 이 구체적인 연대 표시와 지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단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곤혹감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역사로 보기엔 너무나 설화적이고, 신화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실질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 역사서에 기록돼 있는 서술은 그것이 아무리 황당무계한 것이라 하더라도

 왜 그런 형태로 묘사돼 왔는지 밝혀야 한다.


무쇠로 만들어진 3세기 소와 말의 모형. 강원도 철령에서 출토.


‘예’는 상대부터 일본에 살아온 주민


이 같은 추구야말로 잃어버린 우리 역사 찾기의 첫걸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헌 속에는 우리 나름의 잣대가 있기 마련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런 기술도 있다.



명주(요즘의 강릉)는 옛날의 예국이었다.

 농부가 밭갈이 하다 예왕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요즘의 춘천)는 옛날의 맥국이었다.

혹은 삭주와 평양성이 맥국이다.…



이 예(濊)와 맥(貊)에 주목하기 바란다.


한자 ‘여덟 팔(八)’자를 일본인들은 ‘야’(や)라 부른다.

일본서기 등 고대 역사 책에서는 상대(上代)부터 일본땅에 살아온 주민을 말한다.

 ‘예’의 일본식 호칭인 셈이다.


한편 ‘맥’은 ‘코마’라 불려 고구려와 고구려인을 의미했다.

코마는 곰의 우리 옛말 고마가 일본말이 된 것이다.

 ‘맥=곰’의 등식이 성립된다.


맥과 대칭되는 것이 예다.

 따라서 예는 호랑이로 가늠된다.

7, 8세기의 일본사에 등장하는 예 사람은 호랑이에 비유되고 있다

.(1월 29일자 포스코신문 ‘무쇠의 역사’ 참조)



‘맥=곰’은 고구려와 고구려인 의미


삼국유사에는 또 우리의 고대국가 동부여와 북부여 얘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동부여는 예, 북부여(고구려의 전신)는 맥으로 간주되고 있다.


 같은 부여국 사람이었지만 분열한 백성들이다.

‘같은 굴’에 살고 있다가 갈라선 것이다.

 이것이 예와 맥, 즉 호랑이와 곰의 실상이다.


그럼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고 지내기를

삼칠 일 만에 곰이 사람으로 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옥편에는 한자 ‘맥’에 대한 재미있는 풀이가 실려 있다.

한자 맥(貊)은 ‘이’라고도 읽히는데,

이 ‘맥 이(夷)’는 ‘무쇠를 먹는 곰과 같은 오랑캐’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무쇠를 먹는 곰.


중국 역사책 사기에는 상고 때의 우리 제철왕 치우천왕(蚩尤天王)도 ‘무쇠를 먹은’ 것으로 돼 있다.

 곰, 즉 맥은 제철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부족으로 믿어진다.


단군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자.




우리말 ‘곰’과 일본말 ‘쿠마’



우리말 ‘곰’의 옛말 ‘고마’가 일본에 가서 코마(こま) → 쿠마(くま·熊)가 됐다.


곰은 옛말로 ‘고모’라고 불렸는데

이 고모도 ‘틀어박히다’, ‘숨다’라는 뜻의 일본말 ‘코모루’(こもる·隱る·籠る)가 됐다.

곰은 굴에 틀어박혀 동면하는 습성이 있어 그 습성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영희 교수가 쓴 무쇠의 역사] (32) 단군이야기 (하)
단군 ‘최고의 무쇠 산’에 도읍
서기전 1000년께 철기 도입ㆍ한반도서 벼농사 본격화

환웅, 삼천명 제철집단 이끌어ㆍ3개 천부인은 제철 비법서


농경문 청동기.대전시 괴정동에서

출토됐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군고기’는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의 개국 사실을 알려 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유사에는 ‘고기(古記)’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단군은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돼 있다.

국가가 성립되자면 그 사회는 적어도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청동기시대란 인류가 청동(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각종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대를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서기전 1000년 이상 올라가지 않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따라서 고조선국이 건국된 연대도 ‘고기’의 기록대로 서기 2333년께가 아니라,

서기전 1000년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돼 왔다.

‘초기 철기시대’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되는 연대로 벼농사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벼농사와 철기문화가 일본에 건너간 시점부터 일본 초기 철기시대는 시작된다.



그런데 최근 놀라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지난해 5월 20일자 일본의 각 신문이 종전의 일본 초기 철기시대의 ‘서기전 300~400년 시작설’을 뒤엎고,

 이보다 500년 더 앞선 서기전 800~900년에 시작됐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는 일본 국립역사민족박물관이 ‘가속기 질량 분석계에 의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AMS법)’을 이용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라고 한다.

 이 AMS법은 현재 유물의 제작 연대를 측정하는 최첨단 조사법이다.



일본 학자들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본격화한 것은 서기전 1000년께로

따라서 한반도의 벼농사 문화가 그로부터 100~200년 후인 서기전 800~900년 무렵 일본에 전해졌다면

 연대적으로도 아귀가 맞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반드시 철기문화와 더불어 이동한다.

논을 효율적으로 일구려면 무쇠 도끼와 보습, 괭이가 필요했으며,

 벼 수확을 위해서는 무쇠 칼이나 낫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학설에 의하면 한반도에 철기가 처음 들어온 연도가 서기전 300~400년으로 꼽히고 있다.

압록강 중류지방과 서북지방에 연(燕)나라 철기가 들어온 것이 그 시초라는 것이다.


농경문 청동기의 한 부분.따비로

밭갈이 하는 사나이가 리얼하게

부각돼 있다.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사용된 시기를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초기 철기시대로 치부하고 있다. 이 시대를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전 1세기 사이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본격화됐다는 서기전 1000년에서 철기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다는 서기전 300년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동기나

 석기만으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얘기이다.


더군다나 근래 일본의 초기 철기시대에 관한 측정 결과가 정확하다면,

일본의 철기시대는 우리의 철기시대를 훨씬 앞서는 엉뚱한 결과가 빚어진다.



제철기술이 고대 한국에서 고대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일본인 중에도 별로 없다.

철기와 제철 유적에 관한 한 ‘출토되지 않았으니까 없었다’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무쇠는 구리보다 낮은 온도인 700~800도의 열로 구워서 두드려 단조(鍛造)를 할 수 있다.

 자연풍을 이용해 노천의 야철(冶鐵)터에서 제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의 무쇠 원료로는 사철이나 철광석 외에 갈철광(褐鐵鑛)이라는 것이 있었다.

갈철광은 물 속에서 자란다.

침전된 수산화철이 철 박테리아의 증식작용에 의해 갈대 등의 풀뿌리에 주렁주렁 붙어 자라며

, 50~55%의 철분을 함유하는 연한 무쇠 원료다.



갈철광으로 만든 철기는 산화해 흙으로 환원하는 것도 빨라서 현대까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노천 야철터는 그때 그때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에 후대에 발견될 리도 만무하다.



비록 철기와 야철터는 출토되지 않을 망정 우리 상고(上古) 때에도 제철은 있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의 ‘단군고기’요, 중국의 ‘위서’이다.



이 두 책에는 다같이 ‘아사달(阿斯達)’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단군이 도읍으로 삼았다는 고장 이름이다.

‘아’는 ‘최고의’, ‘최초의’ 또는 ‘맨 가장자리의’를 뜻하는 우리 고대어.

‘사’는 ‘무쇠’,

 ‘달’은 ‘산’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아사달이란 ‘최고의 무쇠 산’ 또는 ‘맨 가장자리의 무쇠 산’을 뜻한 도읍 명이다.



단군 왕검은 아세아대륙 맨 가장자리에 위치한 최고의 무쇠 산을 서울로 삼은 것이다.

 무쇠 산에 도읍을 정했다는 것은 그 곳에서 나는 무쇠로 제철을 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사달에서 채취된 무쇠 원료가 강모래 사철이었는지 철광석이었는지 갈철광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읍으로 삼을 만큼 품질이 좋고 풍요했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사달은 사철이 무더기로 쌓여 있던 ‘초사흘달지대’였으리라.



단군 왕검의 아버지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의 아버지 환인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도 얻어 왔다.


삼천의 무리와 세 개의 천부인.

 한자의 ‘석 삼(三)’자는 ‘심을 삼(森)’자와 같은 계통의 글자다.

엄청난 나무를 불태워 이룩되는 제철에는

그 후속 조치로 반드시 식목이 따라야 한다는 철학이 여기에 깔려 있다.



그리고 ‘하늘 천(天)’자는 제철을 뜻했다.

 ‘천도’(天道)는 제철법을, ‘천신’(天神)은 제철을 다스리는 신을 가리켰다.


천신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주었다는 천부인은 제철법을 기술한 비법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왕검의 아버지는 어디서 온 제철집단이었을까.

그리고 서기전 2333년이라는 구체적인 고조선 건국 연도를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말 ‘아침’과 일본말 ‘아사’



우리말 ‘아침’의 옛말이 ‘아참’이다.

 ‘아’는 ‘맨 가장자리의’, ‘최고의’, ‘최초의’라는 뜻이다.


‘참’은 ‘끼니때’ 또는 ‘쉬는 동안’을 뜻한 옛말이다.

아참이란 최초의 끼니 시간을 가리키는 말인 셈이다.



아침의 일본말이 ‘아사’(あさㆍ朝). 현대어인 동시에 고대어다.


이 ‘아사’의 ‘아’에도 우리 옛말의 ‘아’처럼 ‘맨 가장자리의’, ‘최초의’라는 뜻이 있다.

 ‘사’는 날이 밝는 것을 표현하는 ‘새’의 옛말이다.


‘아사’란 동쪽 하늘의 맨 가장자리가 하얗게 새어 올 무렵을 의미하는 우리 말이요,

 동시에 일본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