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가 쓴 무쇠의 역사] (31) 단군 이야기 (상) (중) (하)
이영희 교수가 쓴 무쇠의 역사] (31) 단군 이야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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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가 쓴 무쇠의 역사] (32) 단군이야기 (하) | ||||||||
단군 ‘최고의 무쇠 산’에 도읍 | ||||||||
서기전 1000년께 철기 도입ㆍ한반도서 벼농사 본격화 | ||||||||
환웅, 삼천명 제철집단 이끌어ㆍ3개 천부인은 제철 비법서 | ||||||||
‘단군고기’는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의 개국 사실을 알려 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유사에는 ‘고기(古記)’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단군은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돼 있다. 국가가 성립되자면 그 사회는 적어도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청동기시대란 인류가 청동(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각종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대를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서기전 1000년 이상 올라가지 않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따라서 고조선국이 건국된 연대도 ‘고기’의 기록대로 서기 2333년께가 아니라, 서기전 1000년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돼 왔다. ‘초기 철기시대’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되는 연대로 벼농사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벼농사와 철기문화가 일본에 건너간 시점부터 일본 초기 철기시대는 시작된다. 그런데 최근 놀라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지난해 5월 20일자 일본의 각 신문이 종전의 일본 초기 철기시대의 ‘서기전 300~400년 시작설’을 뒤엎고, 이보다 500년 더 앞선 서기전 800~900년에 시작됐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는 일본 국립역사민족박물관이 ‘가속기 질량 분석계에 의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AMS법)’을 이용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라고 한다. 이 AMS법은 현재 유물의 제작 연대를 측정하는 최첨단 조사법이다. 일본 학자들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본격화한 것은 서기전 1000년께로 따라서 한반도의 벼농사 문화가 그로부터 100~200년 후인 서기전 800~900년 무렵 일본에 전해졌다면 연대적으로도 아귀가 맞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반드시 철기문화와 더불어 이동한다. 논을 효율적으로 일구려면 무쇠 도끼와 보습, 괭이가 필요했으며, 벼 수확을 위해서는 무쇠 칼이나 낫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학설에 의하면 한반도에 철기가 처음 들어온 연도가 서기전 300~400년으로 꼽히고 있다. 압록강 중류지방과 서북지방에 연(燕)나라 철기가 들어온 것이 그 시초라는 것이다.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사용된 시기를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초기 철기시대로 치부하고 있다. 이 시대를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전 1세기 사이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본격화됐다는 서기전 1000년에서 철기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다는 서기전 300년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동기나 석기만으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얘기이다. 더군다나 근래 일본의 초기 철기시대에 관한 측정 결과가 정확하다면, 일본의 철기시대는 우리의 철기시대를 훨씬 앞서는 엉뚱한 결과가 빚어진다. 제철기술이 고대 한국에서 고대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일본인 중에도 별로 없다. 철기와 제철 유적에 관한 한 ‘출토되지 않았으니까 없었다’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무쇠는 구리보다 낮은 온도인 700~800도의 열로 구워서 두드려 단조(鍛造)를 할 수 있다. 자연풍을 이용해 노천의 야철(冶鐵)터에서 제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의 무쇠 원료로는 사철이나 철광석 외에 갈철광(褐鐵鑛)이라는 것이 있었다. 갈철광은 물 속에서 자란다. 침전된 수산화철이 철 박테리아의 증식작용에 의해 갈대 등의 풀뿌리에 주렁주렁 붙어 자라며 , 50~55%의 철분을 함유하는 연한 무쇠 원료다. 갈철광으로 만든 철기는 산화해 흙으로 환원하는 것도 빨라서 현대까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노천 야철터는 그때 그때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에 후대에 발견될 리도 만무하다. 비록 철기와 야철터는 출토되지 않을 망정 우리 상고(上古) 때에도 제철은 있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의 ‘단군고기’요, 중국의 ‘위서’이다. 이 두 책에는 다같이 ‘아사달(阿斯達)’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단군이 도읍으로 삼았다는 고장 이름이다. ‘아’는 ‘최고의’, ‘최초의’ 또는 ‘맨 가장자리의’를 뜻하는 우리 고대어. ‘사’는 ‘무쇠’, ‘달’은 ‘산’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아사달이란 ‘최고의 무쇠 산’ 또는 ‘맨 가장자리의 무쇠 산’을 뜻한 도읍 명이다. 단군 왕검은 아세아대륙 맨 가장자리에 위치한 최고의 무쇠 산을 서울로 삼은 것이다. 무쇠 산에 도읍을 정했다는 것은 그 곳에서 나는 무쇠로 제철을 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사달에서 채취된 무쇠 원료가 강모래 사철이었는지 철광석이었는지 갈철광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읍으로 삼을 만큼 품질이 좋고 풍요했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사달은 사철이 무더기로 쌓여 있던 ‘초사흘달지대’였으리라. 단군 왕검의 아버지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의 아버지 환인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도 얻어 왔다. 삼천의 무리와 세 개의 천부인. 한자의 ‘석 삼(三)’자는 ‘심을 삼(森)’자와 같은 계통의 글자다. 엄청난 나무를 불태워 이룩되는 제철에는 그 후속 조치로 반드시 식목이 따라야 한다는 철학이 여기에 깔려 있다. 그리고 ‘하늘 천(天)’자는 제철을 뜻했다. ‘천도’(天道)는 제철법을, ‘천신’(天神)은 제철을 다스리는 신을 가리켰다. 천신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주었다는 천부인은 제철법을 기술한 비법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왕검의 아버지는 어디서 온 제철집단이었을까. 그리고 서기전 2333년이라는 구체적인 고조선 건국 연도를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말 ‘아침’과 일본말 ‘아사’ 우리말 ‘아침’의 옛말이 ‘아참’이다. ‘아’는 ‘맨 가장자리의’, ‘최고의’, ‘최초의’라는 뜻이다. ‘참’은 ‘끼니때’ 또는 ‘쉬는 동안’을 뜻한 옛말이다. 아참이란 최초의 끼니 시간을 가리키는 말인 셈이다. 아침의 일본말이 ‘아사’(あさㆍ朝). 현대어인 동시에 고대어다. 이 ‘아사’의 ‘아’에도 우리 옛말의 ‘아’처럼 ‘맨 가장자리의’, ‘최초의’라는 뜻이 있다. ‘사’는 날이 밝는 것을 표현하는 ‘새’의 옛말이다. ‘아사’란 동쪽 하늘의 맨 가장자리가 하얗게 새어 올 무렵을 의미하는 우리 말이요, 동시에 일본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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