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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조종사 87명 베트남전 참전 14명 사망 미군기 26대 격추

우전작설차 2019. 1. 2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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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조종사 87명 베트남전 참전 14명 사망 미군기 26대 격추



월남전 참전 북한군 희귀 사진 공개

2014-11-18 오후 6:04:00

월남전 참전 50주년 기념 출판기념회 갖는 안용수 목사
월남전서 실종 후 월북자 분류됐던 형 명예회복 과정 소설로 써

글 | 김성동 조선pub 기자

2014년이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50주년을 맞은 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난 9월이 정확히 50주년이 되는 달이었지만

정부 차원에서 참전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행사는 없었다.

우리 군은 1964년 9월, 자유 월남에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 등 140명을 최초 파병(派兵)했다.

본격적인 전투병 파병은 이듬해인 65년부터다.

 1973년 3월 철군할 때까지 연인원 32만4864명의 우리 군이 월남전에 참전했다.

 건군(建軍) 이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해외 파병이었다.

이런 의미를 갖는 월남전 참전이지만 우리에게 월남전은 ‘잊혀진 전쟁’

또는 ‘잊고 싶은 전쟁’으로 의미가 퇴색해가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이 출판기념회를 겸한 월남전 참전 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주인공은 안용수 목사로 그는 현재 베트남전국군포로·납북자가족회 대표를 맡고 있다.

안 목사는 월남전 참전 후 제대 1주일여를 앞두고 사이공에서 실종됐던 안학수 하사의 동생이다.

안 하사는 1963년 9월 입대한 후 베트남전에 참전,

 통신병으로 근무하다 1966년 9월 9일 사이공에서 실종됐다.

국방부는 이듬해 3월 안 하사가 북한 방송에 출연하자 ‘탈영 월북자’로 처리했었다.

지난 2009년 7월 21일 국방부는 월북자(越北者)로 분류됐던 안 하사를 국군포로로 인정했다

43년여 만에 안 하사의 가족은 ‘월북자 가족’에서 ‘국군포로 가족’으로 바뀐 셈이다.

기자가 안 하사 가족을 만나게 된 때는 2000년 여름이다.

≪월간조선≫ 2000년 9월호에 ‘추적/북한에 있다는 파월(派越) 국군 두 사람-‘안학수 하사·박성렬 병장은

포로가 된 뒤 납북(拉北)됐다’ 제하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당시 기자는 안 하사의 동생 안용수 목사(당시 선교사), 어머니 남금순 씨,

안 하사의 친구를 만나서 ‘인간 안학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안 하사의 아버지 영술(永述)씨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창으로

 안 하사가 납북될 당시 포항 동북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주변 취재 결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안 하사가

자진 월북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됐다.

어머니 남금순씨는 안 하사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이렇게 기억했다.

“엄마, 이 편지 받고 답장하지 마세요.

곧 귀국하게 되니까 받아볼 수 없을 거예요.

귀국할 때는 군의관들 하고 비행기로 서울로 가게 되니까 서울 외갓집에서 기다려 주세요.”

안 하사는 그 편지를 보낸 후 몇 달이 지나도 귀국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안 하사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북한의 대남(對南) 선전방송을 통해서였다.

안 하사가 북한 방송에 출연한 후 안 하사의 가족은 풍비박산났다.

아버지는 교직을 떠났고, 어머니는 충격에 쓰러졌다.

형제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했다.

검사를 꿈꾸던 동생 안용수 씨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납북된 지 43년이 흐른 후에야 안 하사는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의 부모님은 ‘월북자의 가족’으로서 눈을 감았다.

‘베트남전 참전 제50주년 기념도서 자전적 에세이·실화소설’이라는 제목이 붙은 안용수 목사의 출판기념회는

 오는 25일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2충에서 저녁 6시에 열린다.

이 소설은 안 하사가 자진 월북자로 규정된 후

국군포로로 인정받기까지 43년에 걸친 동생 안 목사의 투쟁사이자

 연좌제로 신음하던 아픈 가족사이기도 하다.


 북으로 끌려갔던 안 하사는 탈북을 시도하다가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기념회 소식을 전하면서 안 목사는 조선pub으로 귀중한 자료를 보내왔다.

북한군의 월남전 참전 사진이다.

북한은 월남전에 공군과 심리전 요원 등을 파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진은 월남전 참전 용사의 딸이 지난 10월 안 목사에게 보내온 희귀 자료다.

본문이미지

월남전 당시 월맹의 지도자였던 호치민(가운데)이

북한 공군 조종사들과 찍은 기념사진(위 사진).

 월남전 당시 북한군의 참전규모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약 200명의 전투기 조종사와 100명의 심리전 요원,

그리고 땅굴 전문요원을 파견했다는 설이 있고 87명의 조종사가 참전했다는 주장도 있다.


2000년대 이전까지 북한은 월남전 참전 사실을 비밀에 부쳐왔으나

2001년 7월 전투기 조종사와 군수물자를 월맹에 지원한 사실을 밝히는 등

사실상 월남전 참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2011년 말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는 북한군이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공식 문건을 공개했다.


1966년 9월 25일부터 30일까지 반 티엔 둥 당시 월맹군 참모총장과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 최광이

공군 부대 파병을 위한 구체적인 사안을 논의한 후 마지막 날에 합의문에 서명한 문서가 공개된 것이다.


그 아래 사진은 출격하기 위해 전투기로 달려가고 있는 북한군 조종사들의 모습이다.

본문이미지

하노이 숲속에서 북한군 조종사가 미군기와의 공중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위 사진).

  아래 사진은 출격 전 북한군 조종사들이 미사일을 전투기에 적재하고 있는 모습이다. 


 2003년 발간한 <김일성 전집>에는

 "북한 조종사들이 베트남에 가서 몇 년 동안 잘 싸웠고,

 실제로 희생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발언이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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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 파병된 북한 심리전 요원들이 파월 국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살포한 전단지(위 사진).

아래 사진은 월남전 참전 중 사망한 인민군들의 묘비다.

 하노이에서 동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박장이란 곳에 인민군 전사자 위령탑과 14구의 무덤이 있었는데

 북한은 2002년 9월에 이 무덤들을 북한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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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출처로 가세요. ==>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

cate=C01&mcate=M1003&nNewsNumb=20141116051&nidx=16052&chosun






北 조종사 87명 베트남전 참전 14명 사망 미군기 26대 격추…베트남군 문서

2011-12-05 10:59:42

【서울=뉴시스】유세진 기자 =

87명의 북한 공군 조종사들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미 전투기 26대를 격추했으며

 14명의 북한 공군 조종사들이 베트남에서 목숨을 잃은 사실이

미 우드로윌슨 센터가 지난 1일 공개한 베트남군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북한과 베트남은 지난 2000년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북한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사실이라고 시인했지만

자세한 참전 내용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베트남전쟁에 대해 독자적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멀 프리브나우가

우드로윌슨 센터를 통해 공개한

 '베트남 영공의 북한 조종사들'(North Korean Pilots in the Skies over Vietnam)이란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1968년 워싱턴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를 받은 프리브나우는

 미 중앙정보국(CIA)에 근무하다 베트남어 전문가로 베트남전에 5년 간 참전하기도 했다.

그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베트남은

 1966년 9월21일 동맹국으로서 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조종사들과 전투기들을 파견하겠다는 북한의 요청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과 북한 총참모장 간에 9월23일부터 30일까지

조종사 및 전투기 파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합의에 따르면 북한군 조종사들은 베트남군의 지휘를 받게 돼 있으며

통신과 지원 등은 모두 베트남이 제공하는 것으로 돼 있다.

북한은 1966년 10월 말 10대의 미그 17 전투기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1967년 초 추가로 10대의 미그 17 전투기와

 1967년 중반 10대의 미그 21 전투기를 보내는 등 모두 30대의 전투기를 베트남에 파견했으며

이와 함께 베트남에 파견된 북한 공군 조종사도 모두 87명에 이르렀다.

북한군 조종사들은 베트남 공군에 대한 군사훈련을 담당하면서 전투에도 참가했다.

지난 2007년 8월17일 베트남의 뚜오이 뜨레지가

북한 공군 조종사 14명이 베트남전 당시 사망했다는 기사를 내보냈을 때

퇴역한 베트남의 한 고위 장성이 몇가지 오류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

 모두 87명의 북한군 조종사가 베트남에 파견돼 14명이 숨졌으며

이들은 미군 전투기 26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dbtpwls@newsis.com

北 '베트남전 참전자 대표단' 베트남 방문

2009년 10월 05일

참전자대표단 베트남 방문 보도 전례없어

(서울=연합뉴스) 임주영 기자 =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자 대표단이 베트남 방문을 위해 3일 평양을 출발했다고

북한의 대외 라디오방송인 평양방송이 보도했다.

평양방송은 3일 "웬남(베트남)을 방문하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공훈강사인 정규함 조선인민군 중장(우리의 소장급)을 단장으로 하는

웬남전쟁참가자 및 열사 가족 대표단이 3일 평양을 출발했다"고 전했다.

또 공항에는 레 반 크 주북 베트남대사와 대사관 무관 등이 나와 대표단을 전송했다고 방송은 덧붙였다.

북한은 지난 2001년 7월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을 통해

북한이 베트남전 때 전투기 조종사들과 함께 상당량의 군수물자도 북베트남군에 지원했다고 밝힘으로써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 사실을 처음 공개 시인했다.

그러나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자와 당시 전사자의 가족 대표단이 베트남을 방문한 사례는

 이제까지 보도된 적이 없어 이번에 참전자 대표단의 베트남 방문은

 북한과 베트남간 관계 및 베트남의 대남, 대북정책과 관련해 눈길을 끈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 1992년 한국과 수교할 때부터

한국이 미국을 도와 베트남전에 참전한 문제에 대해선 "과거는 과거"라며 거론하기를 피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내세워 실리를 추구하는 입장을 견지해왔는데

이번에 자신들을 도왔던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자 대표단을 받아들인 것이다.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은 지난 2000년 3월 말 베트남을 방문한 북한의 백남순 외무상이

북한군 묘지를 참배함으로써 처음 확인됐고,

이 곳에 있던 북한군의 유해는 2002년 9월 북한측에 인계돼 '인민군 영웅 열사묘'에 묻혔다.

2001년 7월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에 따르면,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 결정은 1965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4차회의와

1966년 10월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이뤄졌다.

최고인민회의 회의에선 첫 의안으로 '웬남을 지원하는 문제'를 상정하고

 "조선 인민은 웬남 인민에게 물질적 및 정신적 지원을 다할 것이며

그들이 요청한다면 지체없이 지원군도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이어 1966년 10월 열린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선 '피'로써 베트남을 지원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하고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고 방송들은 설명했다.

이로 미뤄 북한군의 베트남전 본격 참전이 10월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고,

베트남전 참전자 대표단이 이번에 베트남 방문에 나선 것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는다.

당시 북한이 북베트남군 지원을 위해 파견한 전투기 조종사는 200여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와 별도로 100여명의 심리전 요원과 땅굴 전문요원을 파견했고,

 이 가운데 조종사 12명, 땅굴요원 2명 등 모두 14명이 전쟁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http://www.ever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312

북베트남 공식문서 공개.."1967년 3개 중대급 조종사 파견" 합의


1

북한 공군 조종사들이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사실을 밝혀주는 공식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우윌슨센터는 북베트남군과 북한군 간의
 ''북한 전투기 조종사들의 베트남 공군파견''문제를 합의한 문건 2건을 지난 1일 공개했다.

이 문건들은 지난 1966년 9월 북베트남군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북한 조종사들의 파견규모와 일정, 지휘체계, 양국간 역할 분담 문제등을 담고 있다. 

1966년 9월 21일 문건에는 북한이 전투기 조종사를 북베트남에 파견할 뜻을 먼저 제안했으며
 이에 대해 북베트남 공산당의 중앙군사위원회가 토의 끝에 이를 허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회의에서 보 구 지압 장군이 결론을 내려 북한군 조종사들을 지원받되 북베트남군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이에 따라 같은 달 24~30일에 걸쳐 북한의 최광 당시 인민군 대표단 수석대표와
 반 티엔 둥 북베트남군 수석대표가 협상을 벌여 북한군 조종사 파견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 냈다.

 합의문에 따르면 1966년 10월 말
북한이 북베트남군 공군 미그17 1개 중대(전투기 10대 보유)에 조종사를 지원하며
그해 연말이나 1967년 초에 또다른 미그17 1개 중대에 조종사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어 1967년 미그21 1개 중대에 조종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양국은 북한 조종사 부대를 일단 독립중대로 편제하고
 연대 단위로까지 확대하기로 했으며
그 중간단계로 북베트남 공군연대에 배속시켜 지휘통제를 받도록 했다.
 북한군이 3개 부대로 완편될 경우 독자적인 임무와 전투지역을 부여하기로 양국은 합의했다.

북한 공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지난 2000년 양국 정부가 공식 시인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 베트남 정부의 공식전사(戰史)에 따르면
''양국 합의에 따라 1967년 북한 조종사 수명(a number of)이 베트남에 와서 훈련과 경험을 전수했으며
전투에도 참가했으며 수차례 전투에서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북베트남군 장성은 북한 공군 요원 87명이 1967~69년 베트남에 파견돼 이 가운데 14명이 사망했으며
 전투과정에서 미군 전투기 24대를 격추시켰다고 전했다.

베트남 언론은 지난 2009년 베트남에 묻혀있던 북한 조종사 14명의 유해가
지난 2002년 북한으로 송환됐다고 보도했다.



http://blog.daum.net/sygs46/7751009

월남전에 북한軍도 참전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작전지역으로 투입시에는 헬기가 분대단위로 병사들을 공수한다.
       특히 맨처음 먼저 땅을 밟게되는 경계조가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되고
                             그만큼 희생도 크게 마련이다.



            ****************************************
          월남전에 북한軍도 참전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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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들은,
1970년 5월 백마부대가 전개한 독수리 70-1호 작전 중 노획한 물품 중에서 북괴의 전단,

 

전술책자,무전기, 상황녹음테이프, 한글로 된 반전삐라,등으로

북한군이 적군 속에 있었다는 심증이 가는 증거물들이다.


 




베트콩 무리 속에 북한에서 파견된 북한군이 있다는 심증이 굳혀지고,
이들이 한국군의 무전교신을 도청하여 아군들의 전략을 혼란시키는 역할을 주도할것이라는 교육도

 오음리훈련장에서 부터 받았다.

내가 월남전에 있는동안 북한군을 실제로 목격했노라는 병사가 있다라는 소문은

 여러번  들었지만 어디에서도 공식적으로 확인된바는 없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2000년 4월에 그 해답이 풀렸다.


▣ 北, 베트남전 참전자료 공개 ▣

북한 인민무력성은 최근 베트남 전쟁 당시 군사적으로 지원한 기록 등 자료를 건물내에 전시,

 일반에 공개했다고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인용, 보도했다.

북한이 외국 군사지원과 관련된 자료를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또 이번 자료 공개로 지금까지 부인해온 베트남전 참전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 중인 1964년부터 1970년의 기간중 공군부대와 공병부대를 파견했고,
월맹군의 하노이 제공권 확보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것이다.

또 이 기간 중에 무기 10만정, 군복 100만벌을 월맹측에 무상으로 지원했다.



▣ 북한 베트남전 참전 사실 확인 ▣

그동안 추측으로만 알려졌던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 사실은 하노이에서 동북쪽으로 60km 떨어진

박장(bac giang)지방에서 북한군의 전사자 위령탑과 14구의 시신이 묻힌 묘지가
연합뉴스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종전 25년만에 처음으로 입증됐다.


연합뉴스와 함께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사실을 공식 확인한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은 "지금까지

추측으로만 알려져왔던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이 위령탑과 묘지의 발견으로 사실로 확인됐으며
더 나아가 그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1967년 미군의 하이퐁항 공습에 대항해 참전했던 북한 공군들은 리창일, 박동준등 조종사

 11명과 정비사 3명으로 이들은 직접 미군과 전투를 했다고 현지 주민들은 증언했다.

위령탑 뒤에는 두줄로 된 전사자들의 무덤 14기가 가지런히 마련돼 있으며

비문에는 앞면에  베트남어,

 뒷면에 한글로 사망자를 '렬사'로 표현한 이름과 출생지, 생년월일, 사망일이

붉은 글씨로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이 마을의 촌장 덩반저우(56)씨는

이 묘지가 북한군인들이 사망한 해인 1967년 현지 랑장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해마다 남베트남 해방일인 4월30일에는
북한대사관에서 찾아와 참배를 한다고 말했다.


 

 


               1970년 5월 북괴심리전 요원이 참전한 증거서류 노획품

위에서 본 바와같이
북한이 월남전에 참전한것은 이제 확실시 되었다.

1969년 부산 행정과 동기인 백마28연대 수색중대 김희열 병장을 만났을때,
그는 분명히 말했다.


작전을 나갔다온 부대원이 증언하기를 교전중에 베트남말 속에서
'사격하라우, 사격하라우'하는 북한군의 말을 자신의 두귀로 똑똑히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말은 어디까지나 듣기만 한것이지 실제로 북한군을 목격한 적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북한군이 뿌린 삐라는

 백마방첩대 작전실에 작전도 작성지원 파견근무를 나갔을때 여러장 내눈으로 확인했다.


거기에는 - 공산주의 성전을 위대한 어버이 수령의 영도아래 승리로 이끌자- 라는
붉은 글씨도 선명하게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투중 적의 포로를 다루는 민사작전수행 지침에는

북한군을 생포했을때의 행동지침이 시달되어 있는것을 볼때

우리 군에서도 북한군의 참전사실을 실제로 인정하고 이에 대응해 왔음이 분명했다.

전투중 북한말을 들었을때 기분이 어떻더냐는 말에 그 병사는
온몸에 솜털까지 소름이 쫙-끼치더라는 것이며
이는 베트콩 백명보다도 북한군 한명이 더 무서운 생각이 들더라는 심정을 토로했다.

공식기록에는 없더라도
북한군 지상전투병이 월남전에 참전하여 우리 군과 실제로 교전까지 했다는 말은
사실에 가깝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있다.

더구나 이번에 북한이 참전 했노라 발표한 1964~1970년 이후에도
혜산진작전(1971),박쥐작전(1971),안케패스작전(1972),동보작전(1972)등
수많은 전투에서 북한군의 직접목격 또는 음성을 들었다는 참전장병들의 증언들이
그들의 수기를 통하여 속속 인터넷등에 공개되는걸 보면
월남전쟁 시초부터 종전직전까지 북한군은 지속적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음이
분명한 사실임은 이제 숨길수 없는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전쟁의 불확실성과 비도덕성은
영원한 미스터리를 인류에게 남기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