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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러정상회담 특집1]스탈린은 왜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나.1.2.3

우전작설차 2019. 3. 20. 19:49
[북러정상회담 특집1]스탈린은 왜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나
nk투데이 문경환기자
기사입력: 2015/04/21 [10:44]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러정상회담 특집1]스탈린은 왜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나


분석/이슈/연재 2015/04/21 10:00 Posted by NK투데이



김정은 제1위원장이 5월 9일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로 밝히면서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북러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북한-러시아, 나아가 북한-소련 관계의 역사를 돌아보고

 최근 북러 관계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집중 분석해보고자 한다. 

 

 

러시아 제2극동전선군 88독립보병여단 1대대장

 

북한의 역사를 이해하자면 일제 강점기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 시기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신생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다.

 김일성 주석 역시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 

 

소련에서 김일성 주석의 존재를 처음 인지한 때는 보천보 전투가 있었던 1937년으로 보인다.


소련의 고문서에 김일성 주석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게 이 시기다.

이후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일본과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고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부대에게 소련 극동지역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당시 항일부대들은 새로운 정황에 맞춰 대부대 활동을 중단하고 소부대 활동으로 전환한 상태였다.

항일부대들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부는 계속 소부대 활동을 하고 일부는 소련 극동지역으로 들어갔다.

 소련은 남야영, 북야영 두 개 기지를 제공했는데 김일성 주석은 남야영 책임자가 되었다. 

 

1942년 소련은 극동 뱌츠코예 북야영에서 제2극동전선군 산하 88독립보병여단을 창설했다.


처음 소련은 조선인, 중국인들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들어올 것을 요구하였다가 거센 반발을 샀다.

 결국 각 민족이 독자성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제연합군을 만드는 것으로 정리됐다.


중국은 88여단을 <동북항일연군교도려>라고 불렀다.


 러시아, 중국, 조선 등 15개 민족으로 구성된 88여단 내에서

김일성 주석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1대대의 대대장 지위를 가졌다.


김일성 주석은 여단창설 전부터

만주 동남 일대에 남아있는 소부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지속적으로 만주를 다녀왔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 소련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88여단에서 함께 근무한 한 러시아인은

 “군사업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명석하고 근면했다”고 회고했으며,

소련군 지도부도 “모범적이며 뛰어난 부하 통솔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항일부대 지휘관인 저우바오중(周保中)도

 “가장 훌륭한 군사 간부이며 중국 공산당의 한인 동지 중에 가장 우수”하다고 소련에 소개했다.


후일 88여단이 편입된 제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Лебедев) 소장도

 “상당히 유능하고 박력 있는 지휘관처럼 보였으며 매우 쾌활한 성격이어서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88여단도 제25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였고

소련군도 20일 이후 전투행위를 모두 중단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한반도에서만 1963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당시 소련군 일부는 이미 서울까지 진입했으나 다시 38선 이북으로 철수하였다.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북한 주민들에게 해방군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 약탈행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스탈린 서기장은 1946년 1월 “북조선 인민들을 괴롭히는 군인들을 붙잡아

즉시 총살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실제로 여러 군인들이 총살당했다.


장교들은 계급을 박탈당하고 본국에 소환돼 군사재판을 받기도 했다.

 1946년 소련군정이 몰수해 간 흥남비료공장도 이듬해 흥남에 다시 돌려보냈다. 

 

북한 건국을 지원한 소련


소련군정은 일제 잔재 청산과 북한인 자치권 인정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모든 지역 정부기관과 사업장에 북한인으로 이뤄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일본인과 친일세력들은 대부분 쫓겨났다.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북한은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948년 9월에는 정식 정부를 출범하였다. 

 

그러나 북한 건국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그동안 행정기관, 산업시설, 교육기관 등 모든 분야를 통제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사라지면서

 전문인력에 심각한 공백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소련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파견해

 북한의 건국 사업을 도왔으며 북한 학생들의 유학도 받아들였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건국 과정에 소련이 깊이 개입했으며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은 중국 동북부와 소련 극동의 통로라는 지정학적 이익 정도만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

소련 입장에서는 동유럽에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탈린 서기장도 한반도는 주로 농업지대로 노동자 비율이 매우 낮아

 동유럽과 같은 사회주의 건설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안토노프 참모총장과 연명으로 1945년 9월 20일 소련 극동사령관 및 제25군에

<북조선에서 소련군과 현지정권기관 및 주민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7개항의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은 최고 기밀로 분류돼 1993년에야 공개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군(赤軍) 군대에 의한 북조선 점령과 관련하여 최고 총사령부는 다음의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한다.

 

1. 북한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3. 적군에 의해 점령된 조선 지역에서 반일적인 민주적 제 단체 및 정당의 조직을 방해하지 말 것이며

그 작업을 도와줄 것.

 

4. 현지 주민들에게 다음을 설명해 줄 것.

a) 적군은 일본 약탈자들을 분쇄할 목적으로 북조선에 진주한 것이며,

조선에 소비에트 제도를 도입하거나 조선영토를 획득하려는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b) 북한 시민의 사유 및 공유재산은 소련군 당국의 보호 하에 있다.

 

5. 현지 주민들로 하여금 평화적 노동을 계속하고, 산업 및 상업 기업

그리고 공영 및 기타 기업의 정상적인 작업을 보장하며,

소련군 당국의 요구와 명령을 이행하며, 공공질서의 유지에 협조하도록 호소할 것.

 

6. 북조선 주둔군에게 기율을 엄격히 지키고,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예의바르게 행동하도록 지시할 것.

종교 의식과 예배를 방해하지 말 것이며,

사원 및 기타 종교시설 들에 손을 대지 말 것.

 

7.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

 

스탈린

안토노프

1945년 9월 20일

 

당시 소련은 북한이 자체 힘으로 나라를 세우기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역할은 이 과정을 주도하기보다는 지원하는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 군비와 병력도 부족해 북한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1946년 3월 1일 3.1운동 27주년 기념행사장에서 폭탄테러를 당했다.


당시 평양에서 근무하던 노비첸코 소련군 소위가 수류탄을 잡아 몸으로 덮어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노비첸코는 외투 안에 있던 책이 충격을 막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후 노비첸코는 북-소 우호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퇴원 후 러시아로 돌아가 평범한 농민으로 살았는데

1984년 김일성 주석이 소련을 방문하면서 그를 찾아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고 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외국인 최초로 북한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아파트와 각종 선물도 받았다.

또 북한과 소련은 노비첸코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영원한 전우>를 공동제작했다.

노비첸코는 김일성 주석과 같은 해인 1994년 12월 사망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곧바로 10월 12일 소련과 국교를 맺는다.

12월에는 소련군도 철수하여 독립국가의 형식을 갖췄다. 

 

김일성 주석은 1949년 3~4월 약 1개월 동안 소련을 최초로 공식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양국은 북한 경제발전 2개년 계획 수행을 위한 소련의 경제지원을 포함해 다양한 내용들을 합의했다.


 기술 지원, 2억 루블(4천만 달러) 차관 공여,

 전문가 파견, 아오지(경흥군)-크라스키노 간 철도 부설,

북-소 간 항공노선 운행,

교수·교사 파견, 북-소 간 제반 분야 협정 체결 등이 포함되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이 신생국가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 있었지만

무상 원조를 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소련은 3년에 걸쳐 차관을 제공하고 이후 3년 간 상환하며 이자는 1%로 제시하였다.

이후에도 대북 지원 대신 북한의 사암을 반입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스탈린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이후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를 필두로 소련과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들이 스탈린을 비난하였지만 북한은 달랐다.

1985년 평양에서 출판된 철학사전에도 스탈린을 레닌의 계승자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의 탁월한 활동가로 묘사하였다.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는 게 정설이지만

실제로 소련의 지원은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엔 안보리를 보이콧하여 유엔군 창설을 방치한 것은 결정적이었으며

약속한 무기를 비롯한 군수품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미온적인 군사원조를 지적했다. 


 

 


북한 역시 소극적인 소련에게 불만을 표했다.

김일 민족보위성 문화부상은 소련고문에게

 “우리가 필요한 것은 고문들이나 그들의 조언이 아닌 실질적 지원이다”고 거칠게 표현했고

이 때문에 소련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은 1952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등용되었다. 

 

소련은 미국을 의식해 모든 군사지원을 비공개로 하였다.

예를 들어 공군병사 2만6천 명과 전투기 300여 대를 지원하였는데

공군병사들을 러시아계 중국인 소수민족으로 위장했다. 

 

당시 소련이 왜 북한을 충분히 돕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들이 있다.


스탈린은 1950년 8월 27일 고트발트(Gottwald)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유엔 안보리 보이콧 이유를 설명했다.

안보리에 중국 대표로 국민당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서한은 2005년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가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하여 공개했다. 

 

그러나 서한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면 주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유럽에서 극동으로 관심을 돌리고

군사력을 손실해 3차 세계대전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소련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서한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보낸 것임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즉, 동유럽 국가들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서한이라는 것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국의 전후복구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견해로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전쟁을 활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세기 전 국토통일원 장관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 전 장관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대일본 전쟁 참전을 요청하면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를 소련에게 주겠다는 밀약을 했다고 한다.

 소련은 장제스(蔣介石)의 아들 장징궈(蔣經國)의 서명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뚱(毛澤東)은 이 밀약을 인정할 수 없었다.


 1949년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뚱은 한 달이 넘게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격론을 벌였고 만주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에 스탈린은 중국이 소련 중심의 국제 사회주의 체제 안에 들어오지 않고

소련과 동등한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애치슨 선언을 통해 대만을 자국 도서방어선에서 제외하고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대중 화해 메시지를 던졌다.

 미국과 대결 중인 소련 입장에서 중국이 미국과 한 편이 되면 고립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하면 양국 모두 국력이 소진되고

그 사이에 소련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스탈린 시기 소련과 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소련과 중국이 본격적으로 대립한 것은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1950년대 중반부터라는 것이다.

특히 일제 패망 후 소련은 만주지역을 지배하지 않고 철수했으며

만주지역에서 진행된 국공내전에 직접 개입한 기록도 없다.  

 

또한 2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소련은 당시 국내 전후복구에 힘을 집중하려 했으며

 이 때문에 국제 문제에서 중립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 내전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분쟁에 중립을 표방하고 공산당을 소극적으로 지원하는 데 그쳐

 공산주의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중국-대만 갈등, 중국-인도 갈등에서도 중립을 표방했고

심지어 중국의 국공내전에서도 중립을 표방해 중국 공산당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소련이 한국전쟁에서 중립을 표방한 것도 이런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초기 유엔 안보리를 보이콧한 것도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겠다는 입장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런 견해에 비춰보면

소련은 국경을 마주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소련은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적극 지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소련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탈린 서기장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형식적으로 놓고 볼 때 소련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고 개입하지 않는 방침을 정했지만

 비밀리에 공군력을 비롯해 다양한 지원을 했으므로 오히려 나름대로 적극 지원했다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등장하면서

북-소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계속)

 

* 참고자료

박종수, ≪21세기의 북한과 러시아≫, 오름, 2011.

션즈화(沈志華)/최만원 역,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 선인, 2010.

소련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편/국토통일원 역,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 1945~1980: 문헌 및 자료≫, 국토통일원, 1987.

 

문경환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북러정상회담 특집2]파국과 복원을 반복한 북-소 관계
nk투데이 문경환기자
기사입력: 2015/04/23 [12: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김정은 제1위원장이 5월 9일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로 밝히면서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북러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북한-러시아, 나아가 북한-소련 관계의 역사를 돌아보고

최근 북러 관계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집중 분석해보고자 한다. 

 

 

스탈린 사후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부침을 반복했다.

 소련 지도자는 자주 교체되었는데 김일성 주석은 소련의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 그리고 러시아의 옐친을 상대하여야 했다. 

 

흐루시초프를 수정주의자, 대국주의자로 규정

 

스탈린 시기 북-러 관계와 흐루시초프(Хрущёв) 시기 북-러 관계는 천당과 지옥의 차이만큼 달랐다. 

 

1953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노선을 비판하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주도해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또 미국과의 평화공존 노선을 추진해 <수정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 중심의 국제 사회주의체제를 밀어붙였고

 이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헝가리를 침공하기도 하고

 중국과 노선 대립을 하기도 하는 등 <대국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2년 쿠바 사태로 지지세력을 잃은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결국 1964년 공산당 최고간부회의에서 불신임투표가 가결돼 당과 정부에서 모두 사임했다. 


 

 

북한 역시 흐루시초프 서기장을 수정주의자, 대국주의자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당연히 북-소 관계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여기에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을 받은 북한 내 소련파가 중국 출신 연안파와 합세하여

김일성 주석을 반대한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북한의 소련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또 소련은 자국 중심의 국제사회주의체제를 추구했고

북한에 이를 요구했으나 북한이 독자노선을 내세우며 거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1961년 북한의 7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소련은 중화학공업을 앞세운 북한의 경제노선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하지 않았다.


 또 1962년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COMECON)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들을 소련 중심 경제체제로 재편하려 하자

 북한은 자립적 민족경제를 내세우며 반대했다. 

 

1962년 10월 쿠바사태가 발발하고 소련이 미국에게 <항복>하자

북한은 더 이상 소련을 믿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북한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라는 자주국방노선을 천명하였다

 

북한과 소련은 1962년 가을부터 약 2년 동안 단 한 차례의 정부 대표단 교환방문을 하지 않았다

. 북-소 관계가 시베리아보다 더 얼어붙은 셈이다. 

 

한편 중국이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하면서 대립하자 북한은 자연스레 중국과 공조하였다.

1960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81개국 공산당·노동당 회의 때

 흐루시초프 서기장과 류사오치(劉少奇) 중국 국가 주석이 한 달 동안 격론을 벌였다.


 북한은 베트남, 알바니아, 중국과 함께 소련을 공격했다.

1961년 10월 소련 공산당 제22차 대회에서 알바니아 추방 문제로 흐루시초프 서기장과

 저우언라이(周恩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 정면으로 충돌하자

 북한은 중국에 동조하여 대회에서 철수했다. 


북-소 관계 복원, 그러나 질적인 변화

 

1964년 브레즈네프(Бре́жнев) 서기장의 등장과 함께 북-소 관계도 복원의 전기를 맞았다.

1966년 5월 북-소 정상회담이 열렸고, 1967년 3월에는 북소경제기술협력협정 시행협정이 체결되었다.

 1976년 장기무역협정 체결로 군사·경제 협력을 더욱 강화했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중국은 북한을 수정주의로,

북한은 중국을 교조주의로 비판하면서 북-중 갈등이 빚어졌다.

북-중 갈등은 상대적으로 북-소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국방력 강화로 대미 군사력 균형을 이끌었고

 이를 토대로 데탕트(긴장완화) 노선을 유지해

미국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1·2)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체결했다


.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대국주의 경향도 보였는데

사회주의 체제가 위험에 처하면 개입할 수 있다는 제한주권론을 내세워

체코를 침공했고 폴란드 사태에도 개입했다.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데탕트는 깨졌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제한주권론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독자 노선을 고집했다.

 소련은 북한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주체노선>도 인정해야 했다. 

 

북한은 1961년 등장한 비동맹운동에도 관심을 보여

 소련, 중국 외에 다양한 나라들과 외교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는 <외교에서의 자주>를 선언했는데

이는 소련, 중국 어느 나라에도 줄을 서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를 하겠다는 의미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발생하자

소련은 초반에 북한을 지지했다가 사태가 전개되면서 북한의 강경한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소련은 북한의 판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소련이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미국과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1969년 소련과 중국 사이에 국경분쟁이 발발하자

북한은 중립·자주외교 노선을 표방하며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다. 


 

 

이처럼 브레즈네프 시기 복원된 북-소 관계는 과거와 질적으로 달랐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사망하고 KGB 의장 출신 안드로포프(Андропов)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 서기장 역시 1984년 사망하면서 체르넨코(Черне́нко)가 뒤를 이었다. 

 

체르넨코 서기장은 대서방 강경노선을 추구했으며 자연스레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이 시기에 북-소 관계는 스탈린 시대를 방불케 할 만큼 최상의 관계로 격상하였다. 

 

 

1984년 5월 김일성 주석은 23년 만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3차례나 북-소 정상회담을 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협력협정, 상호군사지원협정을 체결하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기술 및 설비지원 협정 체결문제를 합의했다.


또 소련이 보유한 수출용 최신 모델인 미그-29를 제공받기로 했으며

 북한은 소련 함정과 항공기가 북한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85년에는 강성산 내각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고

원자력발전소 건설협정 및 1986~1990년 간 경제무역 협력발전 협상결과에 대한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그러나 북-소 관계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체르넨코 서기장이 1985년 3월 사망한 것이다. 

 

소련의 해체, 파국으로 치달은 북-소 관계

 

체르넨코 서기장의 뒤를 이은 고르바초프(Горбачёв)의 등장은

북한 외교사에서 고난의 시작이었다. 

 

흐루시초프 계승을 표방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 노선을 펼쳤다.

개혁개방은 사유재산 허용, 다당제와 대통령제 도입,

 서방 문화 자유화 등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노선이었다.


이에 반발한 공산당 내 보수파는 1991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급진파에 밀려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그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보리스 옐친 등 급진파에게 정국 주도권을 내줬고

그해 12월 벨라베자 조약을 통해 소련을 해체하였다. 


 

 

소련의 사회주의 포기와 함께 동구권도 도미노처럼 무너졌고

 북한은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냉전 해체와 함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로 급격히 정리되었고

 미국과 대립하고 있던 북한은 고립무원에 빠지고 말았다. 

 

1986년 10월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초청으로 김일성 주석이 소련 방문했을 때

그는 경제·군사 원조를 재확인했고 체르넨코 서기장이 약속한 무기보다 더 우수한 첨단무기를 제공하겠다,

 한국과 교역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북한에게 온갖 약속을 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1984년부터 한국과 비공식 교류를 개시하였다.

 1985년 공산당 중앙위원회도 한-소 관계를 대폭 격상시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여기에 소련의 88서울올림픽 참가로 북-소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한-소 정상회담은

 북-소 관계에 치명타를 안겼다.

북한은 한-소 수교가 <두 개의 조선>,

즉 분단을 고착시키는 분열행각이라 비난했다. 

 

1991년 북한과 소련은 통상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는데

 여기서 소련은 양국 무역을 국제가격에 따라 계산하며

 현물결재가 아닌 경화결재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소련이 북한에 판매하던 석유 가격이 두 배로 인상됐다.

 또 원자력기술고문단 철수, 미그-29 등 첨단무기 부품공급과 기술이전 중지 등

 북-소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북한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미국에 팔리고 있으며

혼자만 팔리는 것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을 팔고 있다고 비판했다.

세월이 흘러 2000년대가 되자 고르바초프도 자신의 개혁개방정책이 성급했다며 후회했다.


대다수 러시아인들도 강대국인 소련을 3류 국가로 무너뜨렸다며 고르바초프를 싫어한다.

한때 미국의 첩자라는 주장까지 나왔을 정도다.

 1996년 러시아 대선에 출마했다가 고작 1%를 득표하기도 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고 북-소 관계는 북-러시아 관계로 전환되었다.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보리스 옐친(Ельцин)이었다.

소련은 연방국가로 소속 국가별로 대통령이 따로 있었다.

 

옐친 대통령은 충동적 자유주의자, 권위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자기 비서실장 얼굴에 술잔을 뿌렸던 일이나,

 아일랜드 수상과 면담일정을 잡아놓고 술에 취해 나타나지 않았던 일 등 여러 일화를 남겼다. 

 

옐친 시기 북-러 관계는 고르바초프 시기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92년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면서

북한의 반발을 샀기에 러시아가 마음만 먹으면 북-러 관계를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미국, 한국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1993년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북핵 문제가 전면에 부상하자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대북공조체제에 동참하고 북한에 파견된 러시아 핵과학자들을 소환해버렸다.


 또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과 한-러 정상회담을 마친 후에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8~1949년 북-소 관계 관련 극비문서 사본을 전달했다.


북한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문서를 공개한 것에 반발했다.

이 문서들은 이후 한국전쟁 남침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처럼 옐친 대통령은 북한을 버리고 미국, 한국과 관계 증진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한국은 러시아에 대해 소극적이었고,

 북한은 배척하는 입장이었기에 정작 한반도를 둘러싼 북핵 외교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4자회담에도 끼어들지 못했고 북한 경수로 건설사업에도 배제되었다. 

 

그러자 러시아 내에서도 북한을 배척하고 한국에 경도된 후 얻은 게 없다며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남북 균형외교에 대한 요구가 커진 것이다.

여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등장은 북-러 관계를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 주석 시기 북한-소련(러시아) 외교 역사를 종합해보면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소련이 사회주의 원칙과 반미 입장을 보일 때 북-러 관계가 발전했으며,

반대 모습을 보일 때 북-러 관계는 후퇴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북한과 소련의 국력 차이가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는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이 대 소련 외교에만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외교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계속)

 

* 참고자료

박종수, ≪21세기의 북한과 러시아≫, 오름, 2011.

김진환, ≪동북아시아 열국지1≫, 선인, 2012.

 

 

문경환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북러정상회담 특집3]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의 끈끈한 우정
nk투데이 문경환기자
기사입력: 2015/05/01 [10:14]  최종편집: ⓒ 자주시보

 

김정은 제1위원장이 5월 9일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로 밝히면서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북러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북한-러시아, 나아가 북한-소련 관계의 역사를 돌아보고

최근 북러 관계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집중 분석해보고자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등장과 북-러 관계의 변화

 

1994년부터 북-러 관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국에 경도된 옐친 대통령의 외교노선에 대해 러시아 내부에서는

 “균형외교를 할 때에 비해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미국을 추종하다 강대국 소련이 후진국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반미 입장이 러시아에서 인기를 얻었다.


 자연스레 대표적인 반미국가인 북한에 대한 우호적 인식이 확산됐고

정치인들도 여론의 변화에 따르기 시작했다.

 특히 하원은 노골적인 친북성향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면 등장은 러시아 내 자성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1994년 9월 파노프 외무차관 방북을 계기로 북-러 관계회복에 본격 나섰다.

 10월에는 지리놉스키 자민당 당수가 방북했고 이듬해에는 러시아 의회대표단이 방북했다. 

 

1996년 프리마코프 외무장관 취임 이후 북-러 관계 회복은 더욱 속도를 냈다.

 고위급 인사들의 방북이 늘어났고, 6년 동안 중단된 <북-러 경제·과학·기술 공동위원회>도 재개됐다.

1999년에는 <북-러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대체하는 <우호·선린·협력조약>을 가조인했다.

 양국 관계는 공식적으로 복원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옐친 대통령이 전격 사임했다.

옐친 대통령의 뒤를 이어 등장한 푸틴(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대통령은

취임 첫 해에 북한을 방문했고

이 때부터 북-러 관계는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푸틴 대통령의 등장과 연이은 정상회담

 

물론 푸틴 대통령은 옐친 대통령의 후계자다.


옐친이 대통령 시기 푸틴 대통령을 총리로 지명했고

이 때문에 북한은 초반에 푸틴 대통령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2000년 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바노프 장관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이 나토의 동진정책을 반대하고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 구축을 반대하는 등 미국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북한은 푸틴 대통령에 대해 옐친 대통령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나토의 동진정책이란 미국이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에서 분리된 독립국가들을 나토에 가입시키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이는 러시아로 통하는 전략요충지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러시아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미국은 2004년 발트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나토에 가입시켰고,

이후 우크라이나를 가입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다 결국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5월 “한반도는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의 국익에 포함된다”면서

 극동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곧바로 북한에 방북을 제안했고 북한이 이를 수용하자 2개월 만인 7월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러시아를 압박하는 미국에 대항하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인 푸틴 대통령은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몰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에 휘둘리지 않는 강력한 러시아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이를 위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회복해야 했으며 반미 국가인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게 급선무였다. 

 

북한 역시 소련과 동구권 몰락 이후 미국의 경제봉쇄로 고립되었고

거듭된 자연재해로 나라 전체가 피폐해졌기에

대외 관계를 확대하고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러시아와 관계를 빠르게 개선해야 하였다. 

 

2000년 7월 소련, 러시아를 통틀어 처음으로 국가 정상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러 관계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양국은 군사협력 강화, 국제 패권 반대, 주권 존중,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 양국 우호협력 증진 등 11개 항이 담긴

 <북-러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 공동선언 내용은 ▲북-러 관계 복원과 ▲미국 중심 세계 질서 반대로 압축할 수 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국제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완전한 현대인으로 보였으며,

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주권국가의 이해와 국방문제 등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해박한 인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듬해인 2001년 여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무려 23박 24일의 일정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한 달에 가까운 외국 방문은 그만큼 북한 정치가 안정되어 있음을 과시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나온

<북-러 모스크바 선언>에는 상호존중과 호혜평등의 원칙 아래 정의로운 새세계 건설에 이바지하며,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을 유지하고, 양국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등의 8개항이 담겨 있었다.


 특히 ▲시베리아횡단철도(TSR)-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

▲한반도 통일문제를 조선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

▲주한미군 철수 등 중요하고 민감한 내용들도 포함되었다. 

 

 

이듬해인 2002년 8월에도 양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3년 북한은 6자 회담에 러시아의 참가를 요구했고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한반도 문제에서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는 6자회담은 물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 여러 자리에서 북한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심지어 러시아는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BDA)에서 동결된 북한 자금을 북한에 전달하는 은행도 제공했다.

BDA 사태는 미국이 북한 돈세탁 계좌가 있다면서 BDA 북한 계좌를 동결한 사건이다.


북-미 사이에 치열한 격돌이 펼쳐진 후 2007년에야 미국이 동결한 북한 자금을 돌려주기로 하였으나

어느 은행도 이 자금을 중계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의 금융제재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 러시아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또한 2010년 11월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것에 대응해 12월 한국군이 포격 훈련을 추진하자

 러시아는 러시아 주재 한국 대사와 미국 대사를 불러 훈련 중지를 촉구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당시 채택은 안 됐지만 러시아가 준비한 성명 초안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비난하는 문구가 없어

한국 외교 관계자들이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연평도 포격 직후에는 북한을 비난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긴장을 격화시키는 모든 행위를 반대한다는 일관된 모습을 보인 셈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의 끈끈한 우정

 

많은 이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에 대해 비슷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두 정상은 외교적, 실무적 관계를 넘어선 모습을 보였다.

북-러 관계가 급진전할 수 있는 배경일 것이다. 

 

2001년 북-러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한 풀리코프스키 대통령 전권대표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만일 나를 외교적으로 대하면 나도 외교관이 됩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내게 마음을 열고 대했기에

 나 또한 그에게 내 마음을 열어 보인 것이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도 “나는 <파트너>가 되고 싶지 않다.

친구 사이에는 <파트너> 운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옵샤니코프 러시아 대통령악단 수석지휘자는 2001년 여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을 기념해

 <우리 친선 영원하리>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2년 러시아를 방문한 후 러시아정교회 교회인 정백사원을 평양에 건립하였다.


 정백사원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인 4명을 모스크바 정교회 신학교에 파견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2005년 5월 각국 정상 가운데 유일하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했다.

김일성 주석을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2008년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Медве́де)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북-러 관계는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2011년 8월에는 울란우데 외곽의 제11공수타격여단 영내에서 북-러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6자회담 재개문제, 북한을 경유하는 한-러 가스관 연결 문제,

 북한이 구 소련에 진 채무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 북-러 관계를 종합하면

 ▲고르바초프 시기 무너진 양국 관계를 급격히 회복했으며

▲미국의 압박과 봉쇄에 대항하기 위한 공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남북한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유지했고 북한 역시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더 비중을 두었고

▲구 러시아 시기 북한의 채무 문제가 풀리지 않아 경제교류를 전성기 시기만큼 회복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북한이 김정은 제1위원장 시기로 넘어가면서 북-러 관계는 더욱 심화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계속)

 

* 참고자료

박종수, ≪21세기의 북한과 러시아≫, 오름, 2011.

풀리코프스키/성종환 옮김, ≪동방특급열차-김정일과 함께한 24일간의 러시아 여행≫, 중심, 2003.

 

문경환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