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일본문화 근원은 부여·가야·백제인들이다

우전작설차 2019. 4. 1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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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02

일본문화 근원은 부여·가야·백제인들이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2-23 14:51:03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미국의 사학자로서 동양미술을 전공한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박사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면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임을 알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1959년부터 1978년까지
국내 거주하면서 심도 있는 연구를 했다.
 
그는 한국(韓國)이 일본(日本)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한국임을 말하고 한일의 문화비교에 있어서도
 ‘한국은 맏형이고, 일본은 어린 동생이었다’는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또한 서울의 한 출판사가 한일양국(韓日兩國)에 있는
미술품(美術品) 중 비슷한 것을 골라 컬러사진으로 인쇄한 일어판한일문화교류(韓日文化交流) 2000년」에 대해 
책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잘못된 표현(表現)이라고 지적하였다. 
 


문화교류(文化交流)란 양국문화가 비슷해야 사상이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존 카터 코벨는 고대 한일 간의 문화교류는 생각할 수 없고,
 한국이 일방적으로 준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3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원주민들은 원시시대의 삶을 살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문명화된 잠업(蠶業)과 문자, 금속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민족에게
일본은 넓은 땅덩어리를 제공할 수 있었을 뿐이며
교류(交流)할 문화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면서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는
오늘날 동아시아(東亞細亞)에 남아있는 고대의 가장 큰 불상이
법륭사(法隆寺) 금당(金堂)의 아름다운 삼존불(三尊佛)을 만든 한국인 후예들은
그 대가로 23조에 달하는 엄청난 땅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6번 실패 후 높이 53피트 높이의 교토 동대사(東大寺) 불상(佛像)을 만든 한국인 후손도
그 성공에 대한보답으로 벼슬을 받았다.
그런데 일본 불교의 전파와 불교예술의 전통은 한국에 있음에도
종주국은 중국에 있을 뿐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선전한다.
 
이를 영화를 본 한국의 학생은 감탄하는 것을 보고
불교예술의 전통도 모르고 한일역사인식에 ‘한일문화 운운하나
 1984년 현재 한국인들은 뭘 제대로 아는 것 같지 않다’고 하면서 한탄하고 있었다.
사실 필자가 봐도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책은 앞 페이지에
한국의 똑같은 미륵보살상은 뒷장으로 밀어 놓았다.
 ‘그 의미는 독자들이 알 것이다’고 하며
다시 앞에서 말한 한일문화권에서“한국은 맏형이고, 일본은 어린 동생이었다”는 것을 재강조하고 있다.

 오늘은 한일문화의 뿌리와 일본역사의 주인공이 우리 유민(流民)임을 밝히고자 한다.
 
일본의 왕들은 다름 아닌 한국인들이다
 
1983년 서울에 온 나카소네(中曾根) 전총리는
 “6~7세기 한국이 일본에 가져다준 기술과 문화에 일본이 빚지고 있음”을 언급했다.
그는 고대 우리나라가 일본에 베푼 사실을 제대로 안 총리였다.
그런데 진작 우리 거의 모든 국민들은 이를 잘 모르고들 있다.
 
문명(文明)은 물이 높은데서 얕은 대로 흘러가는 것과 같이
 언제나 미개(未開)한 족(族)을 향해 흘러가는 법이다.
고대 우리선조들은 미개한 왜인(倭人)들을 깨우쳐 주려고 왜국(倭國)에 가서 스승이 되고
 원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귀족계층으로 살았다.    

 일본이 귀족계급 성씨(姓氏)를 조사한 책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3분의 1이상이 도래인(渡來人)들로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에서 온 한국인들이었다.
 한국인들이 왜국(倭國)에서 쉽사리 지배층에 진입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要因)이 있었다.
 
그것은 서기 369년 이래 7세기 말까지
왜(倭)와 일본(日本)을 지배한 임금들은 순수한 한국인(韓國人) 혈통이었다.

이들은 원주민(原住民)과 결혼하지 않았다.
사실상 원주민의 상위계층은 1세기경부터 3세기까지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이 왜(倭)를 침입하고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된 정권을 만들기 전, 일본에 가서 정착한 한국인 들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의리(義理)를 배신하고
그토록 존중하던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음은 은혜(恩惠)를 모르는 일본인으로 바꿔져 있다.
 이는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전후 일본에서는 상가야 역사를 연구하는 붐이 일어나고
일본역사를 바로세우고 져 양심적인 학자들의 나오고, 태평양전쟁 때와는 달라지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일본(日本)의 신사(神社)는 거의 전부가 한국인조상(韓國人祖上)이나
유공자(有功者)들을 모신사당(祠堂)이다.
이러한 사당(祠堂)들은 일본전역(日本全域)에 6천개가 넘는다.  
 
일본은 완전히 우리가 가서 건설한 나라다.

특히 일본인(日本人)들은 자신들의 조상(祖上)이 모시고 있다는
미에겡(三重縣) 이세시(伊勢市)에 있는 이세궁(伊勢宮)에 모시고 있는 신위(神位)가
모두 우리의 조상(祖上)인 것은 이를 입증(立證)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부인(否認)함으로써
 일본왕실(日本王室)의 뿌리를 감추고 진실을 숨기고 있으나
 일본(日本)의 사학자(史學者) 기다 사다기지(喜田貞吉)박사는
 1916년 일본왕실의 조상(祖上)이 부여(夫餘)와 백제계(百濟系)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 군국주의(軍國主義) 대세를 깨트리지 못했다고
 교토대학(京都大學)의 우에다 마사기(上田正昭)교수는 말하고 있는데
일왕의 혈통은 한국인이었음을 다 안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과 일본국왕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자,
 자유로워진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의 농경,
 그 외 모든 산업·종교학문·예술·국가의 구성·사회 발전 등
 모든 분야에 걸친 대변화를 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간 것과 관련시키는 연구가 활발하게 되었다.
 
1948년 도쿄대학(東京大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일본국가의 정복왕조에서 부여, 고구려계인 도래인(渡來人), 진왕(辰王) 등이 일본을 정복하고
일본왕실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마민족국가설을 널리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견해는 기다 사다기지 설(喜田貞吉說)의 현대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전기(前期) 고분문화시대 일본인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기마민족적 대륙북방계 문화를 받아 들여 그 농경민족적 문화를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직접 일본에 침입해서 왜인을 정복, 지배한 어떤 유력한 기마민족이 있어
그들의 대륙 북방계 문화복합체를 가지고 와서 일본에 보급시켰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말하는 기마민족이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부여, 고구려족 계통
즉, 우리 삼국을 거쳐 일본으로 가서 정복(征服)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여(夫餘)는 예맥조선족(濊貊朝鮮族)으로서 중국의 지배권에 들지 않고 독립해 있으면서
 흥망을 되풀이하다가 고구려에 합쳐져 주로 고구려와 백제의 시원(始原)이 되고,
 일부는 가야(伽倻)를 거쳐 왜국(倭國)으로 가서 일본국(日本國) 조상(祖上)이 되었다.
 
헌데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자신의 학설이 기다 사다기지(喜田貞吉)의 재판이라 하면서도
이들이 가야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일본에 도래한 것처럼 하고 있는데
 이 당시 일본은 대륙 양자강 이남의 시대였음을 숨기고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에는
외래의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그 곳에 원주(原住)하던 국신(國神)을 정복, 지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일본의 국왕가(國王家)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망명가 및 이주 한인들이 후손이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일본의 신진 사학자 가시마 노브루(鹿島 昇)는
 일본의 왕실계보(王室系譜)는
한국의 백제(百濟)와 가락국(駕洛國) 두 왕통(王統)을 합하여 이룬 것이고,
 일본왕 덴지덴노(天智天皇)는 백제 의자(義慈王)의 아들 부여풍(夫餘豊)이라고 주장한다.

 

사사 굑구메이(佐佐克明)는 신라인 김다수(金多遂)가 일본왕 천무(天武)라 하고,
다니가와 겐이치(谷川健一)는 일본왕가(日本王家)의 1대 진무(神武 363~394)부터
 14대 츄우아이(仲哀 356~362)까지는 모두 가공(架空)의 인물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15대 오진(應神)이 실존한 최초의 일본 왕(王)이며
오진(應神)의 혈통(血統)은 한국태생(韓國胎生)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일본왕가(日本王家)가 조선혈통임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화일왕(昭和日王)이 태자시절 태자(太子)의 스승이었던 동양사학의 최고권위자인
 사사가와 림푸(笹川臨風) 박사도
단군 73대손 오진(應神)이 일본의 제1대 왕이라 하였다.
 이는 최태영 선생이 메이지대학(明治大學)학생시절 교수겸임 시 말한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서 건너간 망명자가 세운나라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기마민족(騎馬民族) 국가(國家)의 일본통일국가와 대륙기마민족(大陸騎馬民族에서
조선에서 건너간 집단이민(集團移民),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의 현상이던 도래인(渡來人) 및
귀화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야마토 조정(大和朝廷) 국가가 왕실(王室),
즉 ‘천황씨(天皇氏)를 중핵(中核)으로 한, 여러 호족(豪族)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연합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인은 여러 사정으로 일본에 건너와서 이미 정착한사람도 많았지만
5세기 초 이후에는 집단이민(集團移民) 형식으로 계속 건너와서
귀화한 사람이 주체가 된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일본에 정착한 그들은 기술과 지식으로 고대 일본문화와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그들은 많은 경우 본국의 통솔자들과 함께 특이한 집단으로 거주하였는데
그들보다 먼저 일본에 건너와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에서 이미 상당한 지위를 얻은 자들을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하며...그들은 5~7세기에 걸쳐서 계속 건너왔다.
 
그 전체적인 숫자를 살펴보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지배층을 형성한 성씨(姓氏)
즉, 중앙정부에 인정한 정치적 자격을 갖춘 가문(家門)의 일람표이다.
 
좌우수도와 오사카(大阪), 나라(奈羅)의 기나이(畿內) 지방(地方)만을 기록했지만
 전체1059의 성씨(姓氏) 가운데 조선에서 건너온 것이 324개로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많은 숫자의 존재는 야마토(大和) 국가자체의 상태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마민족국가(騎馬民族國家)에서는
 이러한 대규모의 집단이민(集團移民)이 일반적인 현상이어서
정책적으로 외부세력에 대한 의존도(依存度)가 높았으며
정치적, 문화적으로 외국인(外國人)을 가능한 이용한다는 것을 그 방침으로 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다.
 
오진왕(應神王) 때에는
 진씨(秦氏)의 조상 궁월군(弓月君)이 대집단을 거느리고 도일하여
양잠(養蠶)과 견직업(絹織業)에 종사하게 되었다
. 같은 시기 아직기(阿直岐;阿知吉師)와 왕인박사(王仁博士;和邇吉師)가
천자문과 논어로 한문과 유학(儒學)을 전했다.
 
6세기 초 게이타이(繼體507~527)왕 때에는 오경(五經)박사,
김메이(欽明536~571)왕 때에는 의(醫)·역(易)·역(歷)박사가 초빙(招聘)되어
일왕(日王) 주변(周邊)을 한국인 지식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일본을 개화시킨 것은 중국이 아닌 우리이다.
 
이때 앞선 유교에 의한 정치사상, 국사의 기록·양잠·직조·토목·농업·토기제작 등
 모든 기술이 크게 진보해서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의 대규모 고분 조성을 가능케 한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 말하는데

당시 왜(倭)나 일본은 일본열도가 아닌
 양자강 이남의 대륙(大陸)과 타이완(臺灣)임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일본은 이 시대를 숨기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이 시대도 지금의 일본열도(日本列島)라고 하며
 592년 숭준(崇峻)왕이 암살로 수이코(推古 592~628:女帝)이 옹립으로
 쇼도쿠 다이시(聖德太子)가 593년 섭정을 하며
 진무기원(神武紀元)을 창작(創作)해 1000년이나 늘려,
서기전 660년 진무(神武)왕이 즉위한 해로 정한다
. (以上은 Jon Carter Covell 箸,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127面~1304面,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참으로 일본이 우리역사를 역사왜곡하고 조작이 대담한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결어(結語)에 대신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예(例)를 든다면 쇼도쿠 다이시(聖德太子)는
6세기 우리의 앞선 문화를 섭취하고 많은 성과를 거둔 인물로 부각(浮刻)사키고 있다.
 
그 중에 일본이 내세우는 법륭사(法隆寺)를 건립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법륭사의 건립연대는 명치(明治)이래 재건설(再建說-기다 사다기지 설(喜田貞吉, 이시다(石田茂作)과 비재건설을 말하는 세키노 다다수(關野貞)의 양설(兩說)의 논쟁이 계속되었다.
 
재건논자(再建論者)는 일본서기의 670년 천지천황 9조(條)에
 법륭사염상(炎上)기사를 논거로 하고,
비재건논자는 건축 양식상으로 창건 당초의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며
현 법륭사는 720년에 재건된 것으로 본다고 하나 이도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以上은  津田秀夫,‘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28面~31面,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서두(序頭)에, 존 카터 코벨(Covell)박사가 말한
법륭사(法隆寺) 금당(金堂)의 아름다운 삼존불(三尊佛)을 만든 한국인 후예들에게
그 대가로 23조에 달하는 엄청난 땅을 주었다는 것은
 일본이 대륙에서 일본열도로 온 후에 최근에 건축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작가(作家)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85년 방한하여
 “일본이 미개(未開)했던 야요이문화(飛鳥文化) 후기(後期)에 한인(韓人)에 의하여
쌀농사문화(農事文化)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大陸文化)가
 북규수(北九州)에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고 하였다.
 
백제패망 후 도래(渡來)한 한인20만 명이
일본율령국가(律令國家)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祖上)은 한국인이다.” 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옛날 백제유민이 많이 도일(渡日)하여 일본국가와 문화건설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한인의 이주(移住)와 문화전달의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서기’는 백제패망 후 왜(倭=日本)로 간 백제인이 쓴
일본왕실의 ‘권력사’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기다 사다기지(喜田貞吉)와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는
대정(大正)시대 민주화바람을 타고 연구와 연구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저서가 나왔다.
 [발해사고(渤海史考)]등을 쓴 쓰다(津田)는
 “일본서기는 일본황실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야마토 관인(官人)에 의해 작위(作爲)된 것”이라고 비판하여 오랫동안 주목을 받았다.
 
쓰다(津田)의 저서들은
 일본의 근대적 입헌군주제가 되게 하려는 염원이 있다하더라도
 국가정책의 기본정책과는 도저히 양립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1935년 전후 극단적 언론탄압시대에 그의 연구도 군국주의의 박해를 피하지 못했다.
그는 1942년 왕실존엄모독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저작(著作)이 판매금지 되었다.
 
그 때 일본 교육계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의문점(疑問點)을 묻는 학생들을 때리고
 감점(減點)하며 벌을 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에서 벗어나면
 학위도 받지 못하는 일이 있는 현실은 당시 일본과 다른 것이 없는 것 같다.
 
2001년 아키히도(明仁)일왕이 왕실의 외가가 백제 인이라는 것을 자인한 것을 계기로,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일一郞)가 쓴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천황이 출간되었다.
 이 저서는 한국인이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역사학자들의 할 수고를 덜어주었다.
 
이것은 일본의 고대사와 고전 책은 우리가 대륙시절부터 일본민족의 발상지이며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고
일본왕가도 한국에서 건너간 망명자의 자손이라는 것을 바로 밝혀주고 있다
.(以上은 Jon Carter Covell 箸,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188面~204面,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