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역사

이거보면 박정희 찢어죽이고 싶어진다 -

 

이거보면 박정희 찢어죽이고 싶어진다 - 펌글

 

 

 

 

 

 

 

 

 

자!

 

 

 

 

 

 

이제부터 박정희의 실체

 

개 봉 박 두!

 

 

 

고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대표

 

<한겨례 인터뷰>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가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며 심경을 밝히고 있다. 한겨례 류우종 기자

 

 

 

 

 

-박정희와 장준하, 두 인물을 평가한다면?

 

 

“박정희의 실체를 보라.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이름을 두번이나 바꿨다. 첫번째 창씨개명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일본군 장교가 되겠다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 이름을 따라 또 이름을 바꿨다.



 박정희가 했다는 근대화사업도, 장면 정권 때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은 부친이 세웠던 계획이었다.

 국토건설요원으로 일할 대졸 공무원 2000명을 뽑아 임명장을 주려던 때 5·16이 터졌다.

 이들은 교육받은 엘리트였고, 근대화사업의 동력이 됐다.”

 

 

 

 

 

 

-----------------------------------------


"박정희, 남의 장작으로 밥 해놓고 생색"

 

 


[오마이뉴스 박수원 기자]

 

 

 

박정희는 밥을 많이 지어 놓은 모범적인 대통령이라고 이야기 된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박정희는 미래의 남의 장작까지 미리 사용해서 밥을 해놓고 생색낸 대통령이라고

평가 받아 마땅하다.

 

 

"참여정부 정책실장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가 내놓은 박정희 정권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다.

 

 

연 평균 지가 상승률과 생산소득 대비 불로소득의 비율을 근거로 역대 정권에 대한 부동산 성적표를

제시했다.


(표 참조)


역대 정권의 부동산 성적표




ⓒ 오마이뉴스 한은희



이 자료에 따르면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 부동산 가격의 가장 큰 특징은 박정희, 노태우 3인의 군사정권에서는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 두드러졌던 반면

문민 정부인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는 부동산 가격이 크게 안정된 점이다.

 

 

이정우 교수는 "박정희 집권기간인 16년 동안 전국의 지가(땅값) 총액이 3조 4000억원에서 329조로 무려 100배 상승했고, 연평균 지가상승률은 33%에 이른다"면서 "만약 지금 박정희 정권 때처럼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 당시 생산소득보다 불로소득이 2.5배에 이른 점을 들어 '배보다 배꼽이 큰

' 거품 경제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정우 교수는 박정희가 국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 밥을 많이 지은 모범적 대통령이 아니라, 미래의 장작까지 미리 사용해 밥을 해놓고 생색낸 대통령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강남개발이전

 

 

한국인들은 국민 전체의 81%가

 

 

자기집에 살! 았! 다!

 



 

 

 

 

 

1955년, 한 중학교 학생들의 소풍 장면.

 

 

 


 이 당시 우리 국민의 81 퍼센트가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55 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국민의 주택 보유 비율은 55 퍼센트로 떨어졌다.

 

 

 


 산업화를 시작하기 전에도 자기 집이 있던 사람들이 고향도 잃고, 집도 잃어버린,

 이 기막힌 일이 2010년, 우리 앞에 펼쳐진 것 아닌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지금의 개발 경제와 토건 경제를 끌고온 것인가?

 

 

 

 


ⓒ뉴시스


'아파트 전세'의 종말, 우리는 왜 그 고생을 했나"

 

 


[우석훈 칼럼] 55년 전 인구통계, 그리고 지금


기사입력 2010-07-20 오전 8:27:27

 

 

 

 

 우리나라는 5년마다 한 번씩 인구 총조사를 하고, 가장 최근의 자료는 2005년까지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고민을 하면서 1955년, 즉 6.25가 끝나고 '재건 데이트', 남녀가 그냥 시내를 걸어다니는

 방식으로 데이트를 하고 중매결혼이 일반화되었던 시절, 그 시절의 주거 점유형태를 살펴보았다.

 

 

 





 이 그림은, 좀 충격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1955년, 우리나라 국민의 81 퍼센트가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것이 원래의 우리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 전쟁까지 거친 다음, 우리가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라고 늘 하급으로 평가하던

 1955년에도 한국인들은 다섯 명 중에 네 명은 자기 집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주거의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직 어떤 OECD 국가들도 달성하지 못했던 높은 수준의 안정성을  

 우리가 이미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고,

 전후 재건 기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면 더욱 더 놀라운 수치인 셈이다.

 

 


 2010년, 당시의 인구 총조사로부터 55년이 흘렀다.

 

 

 

 그 동안에 새마을 운동도 있었고, 산업화를 통한 북한과의 경제 전쟁을 명분으로 진행되었던

 유신 경제와  군사 독재도 거쳤다.

 

 


 전쟁 직후에도 80퍼센트 이상의 국민이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55퍼센트의 국민만이 자기 집에서 살고 있다.

 

 

 


 의식주라는 경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다들 인정하는 주거 복지

 그리고 주거 안정성이라는 면에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는가?

 

 

 

 OECD 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 최저의 레저 및 문화 향수 조건, 과로, 비정규직,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지금과 같은 방식의 고강도 노동을 55년 동안이나 참아낸 것인가?

 그런 경제 주체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고향을 잃었다.

 

 


 서울도 개발, 경기도도 개발, 그리고 나머지 지역도 개발,
 이렇게 더 풍요로운 경제적 미래를 위해 열심히 토건주의로 매진하고 있지만,

 산업화를 시작하기 전에도

 자기 집이 있던 사람들이 고향도 잃고, 집도 잃어버린, 이 기막힌 일이 2010년,

 우리 앞에 펼쳐진 것 아닌가..?

 

 

 

 그야말로 존재론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지금의 개발 경제와 토건 경제를 끌고온 것인가?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
Copyright ⓒ PRESSian Corp.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이 내집이 없다.
주택보급률이 100 % 를 넘는데도...

 


2009년

작년 전국 주택보급률 101.2%

 


입력시간 :2010.04.18

 

 

[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작년 전국 주택보급률이 소폭이나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작년 전국 주택보급률은 101.2%(새 주택보급률 기준)를 기록했다.

가구수는 1686만가구이고, 주택수는 1707만채다. 2008년 추계치는 100.7%였다.

 


[내집마련노트]주택보급률 피부에 와닿지 않아

 

 

 최근의 자료를 보면 전국의 주택보급률은 108%인데 비해 자가소유율은 60%이다.

 

 

1990년에는 전국 주택보급률이 72.1% 였고 자가소유율은 50.6%였다.

 

 

자가소유율의 경우는 70년 68.2% 이후 계속 떨어져 90년에 50.6%까지 떨어지다 2000년 54.2%로

높아졌다.

 

 

주택보급률은 지속적으로 올라갔지만 자가소유율은 반대로 떨어져 30%~40%이상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2011년

 

입력: 2011-07-24 17:21 / 수정: 2011-07-25 01:52

[통계로 읽는 경제]

 


주택보급률 100% 넘는데… 10가구 중 4가구는 무주택..?

 

 빈집·미분양도 주택수에 포함…'주거의 질' 반영 못하는 한계도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0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주택보급률은 101.9%로

5년 전인 2005년보다 3.6%포인트 상승했다.

 

 

주택보급률은 전국 주택 수를 가구 수로 나눈 것으로 이 수치가 100%를 넘었다는 것은

주택 수가 가구 수보다 많다는 의미다.

 

 

조사시점인 지난해 11월1일 현재 전국 주택 수는 1767만2000호로 가구 수 1733만9000가구보다 33만3000호 많았다.


주택보급률만 보면 주택 공급이 충분해 모든 국민이 집을 갖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기 집을 갖고 있는 가구가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자가보유율은 지난해 61.3%로 주택보급률에 크게 못 미쳤다.

 

 

자가보유율은 자가 거주 가구 및 전 · 월세 가구 중 다른 곳에 집을 갖고 있는 가구를 합쳐

전체 가구 수로 나눠 계산한다.

 

 

절대적인 주택 수는 부족하지 않지만 10가구 중 4가구는 여전히 집을 갖지 못한 것이다.

자가보유율의 2005년 대비 상승폭도 1%포인트에 그쳐 주택보급률 상승폭 3.6%포인트보다 낮았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기사프린트 창닫기

-----------------------------------------------------------------------------





왜일까?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으면 자기집에



살지 않는 국민이 단 한사람도 없어야
다.

 

 

그런데 국민의 절반이 자기집이 없다.


왜일까..?


그 이유는  바로 '부동산 폭등'


이 뿐만이 아니다.


부동산 폭등이 불러온 부동산 투기가

들어낸 또하나의 위기.


바로 대한민국의 시한폭탄인

1천조가 넘는 부동산 담보대출 가계부채.

 

 

 

 

 

 

 

 

부동산 침체 핵심은 ‘집값 내림세’

 

경향신문, 입력 : 2010-07-20

 

 


이미 지난해 전국 주택보급률은 101.2%(새 주택보급률 기준)를 기록했다.

그나마 그동안 적용하지 않았던 다가구주택과 1인가구를 반영해 수치는 예전보다 낮아졌지만

여전히 보급률은 100%를 웃돈다.

 

 


 그러나 자가주택 보유율은 54.2%에 불과하다. 2가구 중 1가구는 전세나 월세를 살고 있는 셈이다.

 

 

가계부채 900조 돌파

 

 

특히 개인빚은 9백조원을 돌파했습니다.

가계 부채는 부동산 담보 대출 의존도가 높아서,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면 가계에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에서는 가계 부채가 우리 경제의 시한폭탄이다, 이런말도 하고 있습니다.

 

 

 

(2011한국경제과제)

 


 

⑥가계빚 900조 '시한폭탄' 터질라



[뉴스토마토 명정선기자]

 

 


"올해 한국경제 큰 숙제는 가계빚"(박현주 미래에셋자산운용 회장)
"가계빚은 한국경제의 만성적 고질병이다"(이성태 한국은행 전 총재)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짐이 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김석동 금융위원장


공포의 가계부채, 마침내 '1천조 돌파'


 

박근혜 "저금리가 주범", 김중수 "당장 내일 위기는 아니다"

 


2011-06-15 15:04:29

 


 

한국경제의 최대뇌관인 가계부채가 마침내 1천조원을 공식 돌파했다.

 


한국은행이 15일 발표한 `2011년 1분기중 자금순환동향(잠정)'에 따르면, 3월말 현재 개인 금융부채는

석달전보다 11조7천억원 늘어난 949조원으로 집계됐다.

 


여기에다가 사실상 개인으로 분류되는 소규모 개인기업(영세사업자)의 부채까지 포함할 경우 개인 금융부채는

 1천6조6천억원으로 집계되면서 사상최초로 1천조원대를 돌파했다.

 


여기에다가 통계에는 잡히지 않고 있는 대부업이나 사채 대출 등까지 합할 경우 가계부채는 1천조원을

크게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가계부채 1천조-하우스푸어 157만, 탈출구는?


(100분 토론)
2011-06-23 17:30:59 [뉴스엔 이민지 기자]

 

 

가계부채가 1,000조를 넘어섰다.
6월23일 밤12시10분 방송되는 MBC '100분 토론'에서는 금융당국, 경제 전문가들과 함께 가계부채의 심각성과 해법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한다. 한국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떠오른 가계부채의 근본 원인도 본석해본다



무디스, '한국 1천조 가계부채' 거듭 경고


WSJ "한국 가계부채, 미국 서브프라임보다 심각", 경고음 계속


2011-05-30 14:19:29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1천조원에 도달한 한국의 가계부채에 대해 거듭 강력 경고했다.

 


무디스의 최영일 부대표 겸 수석애널리스트는 30일 '한국 은행시스템' 보고서를 통해 "한국 은행권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신용문제는 이미 높은 수준에서 증가세를 보이는 가계부채"라며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韓불평등개선은 착시…부채 양극화 심화

전통시장 장보기(자료사진)

 

 

 

 

 



> 뉴스 > 오피니언 > 기고&칼럼

 

개발에 미치고 투기에 목맨 우리 시대의 자화상

[허민호의 평범한 발작]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2009년 12월 21일 (월) 14:56:16허민호/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mediaus@mediaus.co.kr

개발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드는 생성의 과정이지만, 필연적으로 폭력적 파괴를 수반한다. 과거에는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이 자연을 훼손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의 주체였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들과 조용히 공모하여 스스로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스스로 나서 자연을 훼손시키고 서로의 삶을 파탄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풍경이 왜 그리고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두 편의 글을 통해 간략한 윤곽을 그려보도록 하겠다.

 

 

 

 

 

 

▲ <부동산 계급사회> 손낙구/후마니타스

 

 

 

 

 

개발이나 부동산 투기와 관련하여, 저자가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정부나 기업이 만들어 온 통계는 대부분 부동산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건설회사가 집을 많이 지어야 주택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쓸 만한 통계”나 “주택 공급을 확대함으로써 주택 사정이 좋아졌다는

통계는 많아도

지하실, 판잣집, 움막, 동굴과 같이 처참한 곳에서 몇 명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가장 흥미로운 통계 중 하나는 부동산값 폭등기를 정부의 개발정책과

관련하여 4단계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1차 폭등기는 1965~69년으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맞물려 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을 계기로 이 시기의 부동산 투기는 정점에 달한다.

 

 

 2차 폭등기는 1975~79년 사이이다.

 

 

이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한 박정희 정권의 대규모 개발 정책과 각종 특혜를 받으며 땅 개발과 주택 공급에 나선 민간 건설회사의 급성장, 중동 건술 붐에서 벌어들인 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부동산값 폭등을 야기한 것이다.

 

 

 

3차 폭등기는 1988~89년 사이로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위한 대규모 개발 사업, 서해안 개발, 3저 호황으로 발생한 여유 자금의 투기 자금화 등이 겹치면서 발생했다.

 

 

 

끝으로 4차 폭등기는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지금까지이다.

 

 

 

4차 폭등기는 아파트값 폭등, 강남 투기 열풍의 강북·수도권으로의 확산,

지역 도시 개발 정책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

 

 

 

 

손낙구는 이러한 4차례의 부동산값 폭등의 주체를 부동산 5적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부동산 5적은 건설재벌, 부동산 관벌, 정치인, 보수언론, 일부 학자 등을 가리키며,

그는 이들의 투기 동맹이 부동산값 폭등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토건 국가 관료와 건설 재벌,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은 언론과 학자들이

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부와 재벌 그리고 그들과 공모한 일부 특권 계층 이외에) 개발과 부동산 투기 주체로 일반 시민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2'가 이어집니다.

ⓒ 미디어스(http://www.mediau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아파트 공화국’의 미스테리

 

한겨레21
|입력2005.12.27 09:22

[한겨레][강준만의 세상읽기]

 



외국인 학자의 연구주제까지 된 아파트를 향한 한국인들의 열광


"당신은 몇평에 사나" 처절한 구별짓기의 현장, 보이지 않는 카스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고현정, 김남주, 김지호, 김현주, 김희애, 송혜교, 신애라, 이영애, 채시라, 최지우, 한가인(가나다 순) 등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이 빼어난 미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다 아파트 광고 모델이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꿈이다.

 

 

아파트라고 해서 다 같은 아파트가 아니기 때문에 아파트를 향한 꿈은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계속 나래를 펴고, 그 꿈을 인도하기 위해 한국의 미녀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압구정동, 여기가 슬럼가냐?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왜 한국 부동산은 폭등하고 집값은 올라야

 

만 했을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강남부동산

 

 

 

강남 현상은 곧 전국으로 확대,

 

 

 

 

오늘날의 강남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당시 강남은 인구가 3만명도 채 안되는, 배밭이 듬성듬성 흩어진 농촌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 이남으로 눈을 돌렸다.

 

 


69년 강남과 강북 도심을 잇는 최초의 다리인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75년 강남구가 생기고 이듬해 압구정동, 도곡동, 반포동 등이 ‘아파트 지구’로 지정됐다.

 

 

 

교육환경이 좋지 않아 이사를 꺼린다는 분석이 나오자, 정부는 강북의 전통적 명문고들을 대거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경기고와 서울고가 먼저 총대를 멨고 휘문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이 뒤를 따랐다. 8학군의 시작이었다.

 

 

 

 

강남 개발 초기, 강남 신드롬의 중심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있었다.

78년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이던 한국도시개발은 사원용으로 지은 아파트 900여가구 중 600여가구를

고위공직자 등에게 특혜 분양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지만, 엄청난 프리미엄 액수가 공개되면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로 만드는 구실도 했다.

 

 

 

신흥 부유층은 물론 전문직 종사자와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사람들까지 줄줄이 압구정동으로 몰려갔다.

중산층도 뒤질세라 앞다퉈 강남으로 향했고, 투기 행렬 속에 ‘부동산 졸부’니 ‘복부인’이니 하는 말들이

회자됐다.

 

 

돈이 옮겨가자 환락의 중심지도 이동했다.

 80년대 나온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나 ‘신사동 그 사람’은 이런 세태 변화를 드러내는 가요다.

 

 

 

 

 

[100년을 엿보다] 강남 아파트

 

 

76년 아파트 지구로 개발 ‘부의 상징’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빽빽이 들어찬 서울 강남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강남은 이제 단순한 지역의 이름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누군가가 “저, 강남에 살아요”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재산은 물론 학력과 외모, 스타일, 문화적 취향까지 함께 떠올린다. 진입장벽이 높은, 완전히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다.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도덕성을 위협하는 부동산 투기가 시작된 강남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온 국민들이 땅과 아파트에 목을 매게 만든 부동산 투기 바람의 뿌리는?

부동산 문제에 관해서는 ‘대통령도 불패’라며 정부가 강력한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강남불패신화’로 대변되는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는 정부의 의지를 비웃듯

계속되고 있다.

 

 

‘강남공화국’, ‘강남특별시’라는 별칭이 말해주 듯 대한민국 권력과 경제의 특권층을 상징하는 지역이 된 강남.

 

 

지난 70년대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가 시작된 곳이 바로 강남이다.

 

 

 

 

1970년比 땅값 200배…'강남 불패’의 뿌리는

 

개발독재·권력의 상징…'복부인 활개' 투기의 성지로

 


경부고속도로 주변부터 땅값 폭등이 시작됐다.

실례로 말죽거리(현재 양재동)는 당시 3.3㎡(평)당 땅값이 100~200원이었으나 1년도 안 돼 2000~3000원으로 껑충 뛰었다.

 

 

 

 

강남지역으로 사람들의 이주를 촉진하기 위한 드라이브도 걸렸다.

정부는 당초 도심을 관통할 지하철 2호선 노선을 당시로는 서울인구의 20%도 못 미치는 강남 순환선으로

변경했다.

 

 

 

 

아울러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반대가 끊이지 않았지만 강북 도심에 있던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등

이른바 전통 명문 9개교를 1976년부터 순차적으로 강남구와 서초구로 이전했다.

이른 바 현재의 8학군이 형성된 것이다.

 

 

 

당시 시는 강남지역 구획정리지구에 있는 체비지를 학교용지로 헐값에 불하해 줄 구실과 은행 융자를

알선해 줄 수도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여기에 강북억제, 강남개발도 본격화 한다.

강북지역은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지정돼 유흥업소들이 발 빠르게 강남으로 옮겨 갔고 회사들도 앞 다퉈

이전하게 된다.

 

 

노동연구원과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1970년~1980년 실질임금은 2배 올랐으나 전국 지가는 15배가 올랐고 특히 강남지가는 200배가 뛰는경이적인 폭등을 기록했다.

 

 

 

 

부동산 투기가 곧 돈이 된다는 사실을 체감한 대다수 국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투기 현장으로 뛰어들면서 부동산 중산층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투기가 심해짐에 따라 심지어 1년에 서너 번씩 이사를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는 세태가 연출된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 후 정부가 급히 돈을 풀어 부양에 나선 끝에 경기는 회복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실물경제로 돈이 흘러가지 않고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쏠림이 심화되고 있다.

 

 

 

다시 고개를 드는 집값을 누르기 위해 정부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의 수도권 전역 확대와 시중 유동성을

거둬들이는 출구전략 실행을 조만간 본격화할 태세다.

 

 

개발지상주의 시대에서 비롯된 강남 발 투기열풍,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미국과 일본이

 부동산 버블로 큰 고초를 당하고 있고 한국에도 끊임없는 경고가 제시되지만

 불길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은 2009년 현재도 진행형이다.

 



1,
‘말죽거리 신화’라고 하는

강남지역 땅값 폭등과




2,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린

복덕방과 복부인,



3,
강남지역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한

흥청망청 새로운 밤문화,




4,

8학군의 등장과 아파트 가격상승 및

사교육 열풍





5.
주택보급률 100% 이상, 그러나

전국민의 절반이 내집이 없는 주택난




6.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을 망국으로 이끄는

시한폭탄,  900조 가 넘는 부동산 담보대출

가계부채의 진앙지인 강남,


 

 

 

이 부동산 폭등 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대한민국을 서울과 지방으로

서울을 다시 강북과 강남으로


대한민국을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분열시키고 양분 시키는

이 강남 부동산은 누구에 의해 시작

되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부동산 투기 바람은 강남 개발로부터 시작

 

 

강남 개발주체인 박정희 정권이 부동산투기의 원조이며 첫 수혜자
강남개발 신화는 바로 부와 권력의 유착을 통해 상류층의 특별구역이 건설되는 과정

 

 

강남 개발 당시 서울시는 막대한 공사자금을 토지구획정리로 확보한 체비지 매각에 의존해야 했고

이 땅을 팔기위해 정부는 다양한 유인책을 내놓게 된다.

 

 

73년에는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해 강남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면세 혜택을 부여했고

일부 도시계획전문가들의 반대에도 지하철 2호선이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순환선으로 결정됐다.

 

 

이 무렵에 경기고 등 이른바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이전해 8학군을 형성했다.

강북지역이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룸살롱, 고급 요정 등 유흥업소들도 발빠르게 강남으로 옮겨왔다.

 

 

 

이 모든 강남 개발의 총 지휘자는 당시 정권이었다.
독재는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고 유신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축은 건설개발이었다

 

 

> 뉴스 > 경제·IT

“박정희 정권이 세계최고 땅값에 50%기여”

 

 

이정우 경북대 교수 “박정희가 토지정의 무너뜨렸다…

불소소득이 근로소득 대비 2.5배”

 

[0호] 2012년 10월 06일 (토) 조수경 기자 jsk@mediatoday.co.kr

서울 강남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덕에 아마 세계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지만

강남은 이미 그 전부터 세계 최고의 땅값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강남이 지금과 같은 빌딩숲으로 바뀌고 '헉' 소리

나올 만큼 비싼 땅값의 대명사로 떠오른 게 만든 이는 누구일까.

 

 


강남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땅값이 지금과 같은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치솟게 만든

일등공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최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캠프에 합류한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5일 토지+자유연구소 공개 강연에서 "우리나라 땅값이 세계 최고인데 역대 대통령을 상대로 땅값 상승 기여도를 계산해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 50.5%로 딱 절반이었다"며 "박정희 정부가 토지 정의를 무너뜨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가 역대 정권의 초기 전국 지가총액과 말기 전국 지가총액을 바탕으로

연평균 지가 상승률을 산출한 결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33.1%로 가장 높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21.6%, 노태우 전 대통령이 17.7%, 전두환 전 대통령이 14.9% 순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치솟은 땅값으로 토지를 소유했던 극소수 부자들이 얻은

이익도 어마어마했다.

 

 

박 전 대통령 시절 생산소득 대비 불로소득의 비율은 무려 248.8%다.

 땀 흘려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은 100이라고 봤을 때 땅값 상승으로 얻은 소득이

이보다 2.5배 가량 많았다는 의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96.3%, 전두환 전 대통령이 67.9%, 이승만 전 대통령이 43.2%임을 감안할 때 매우 압도적인 수치인 셈이다.

 

 

 

이 교수는 "당시 대한민국은 불로소득의 천국이고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었느냐"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굉장히 큰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 역대 정권하의 지가 상승(단위: 조, % /자료출처=이정우 교수)

 

 

 

역대 정권의 지가 상승 기여도를 따져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50.5%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4.7%, 노태우 전 대통령이 8.8%, 전두환 전 대통령이 7.5%,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 김대중 전 대통령이 -0.1%, 김영삼 전 대통령이 -0.7% 순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땅값 상승에 65%,

즉 3분의 2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부동산 광풍의 '원흉'으로 지목됐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여도는 2.3%로 매우 낮았다.

 

 

 

이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했다고 박수 받지만

그 뒷감당은 누가 해야 하느냐"며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무책임한

경제운용이었다.

 

 

투기 규제 정책을 엄격하게 세우면서 개발을 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인사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재무부장관이자 부총리를 지낸 남덕우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토지정책을 수립하지 않고 개발정책을 추진한 결과 부동산 투기와 땅값 상승이 언제나 정부를 괴롭혔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토지의 사유권은 인정하되 이용권을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토지정책을 확립했어야

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 교수는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의 요직에 있었던 송정목씨가

<서울 도시계획이야기>란 책에서 '박정희 정권에서 강남 지역의 투기를 조장했고

 

 

이를 통해 1년에 3배 이상의 돈을 불리는 등 막대한 이익을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가져갔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역대 정권 하의 물가 상승(%, 자료출처=이정우 교수)

 

 

 

역대 정권의 물가상승 기여도 측면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높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44.5%, 이승만 전 대통령이 24.2%로 무려 3분의 2를 차지했다.

 

 

이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임기했기 때문에 높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것 같아서 임기의 차이를 고려해서 균등 물가상승 기여도를 계산해봤더니

 33.3%였다"며

 

 

 "이와 비교해도 10%가 더 높기 때문에 물가상승에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평균 9.1%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내려진 '독재는

잘못했지만 경제성장은 했다'라는 평가를 이 교수가 통계적 수치로 반박한 셈이다.

 

 

 

 

최근 대선 화두로 경제민주화가 떠올랐지만 토지 문제는 별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참여정부 정책실장 출신인 이 교수는 "토지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토지 정의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며 "이 고통을 누가 벗어나게 할 것인지,

경제 민주화의 중요한 주제임에도 일시적으로 잊혀진 주제"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강연 말미 토지 정의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역사적 인물로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와 조선시대의 조광조를 들며 토지 정의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에둘러 지적했다.

 

 

호민관이었던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형제는 토지 소유의 제한과 재분배,

자작농의 창설을 꾀하려다 귀족들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곡물법과 토지법 등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조선 시대의 개혁가 조광조 역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유자광 등 훈구파들에게 집중된

토지 소유에 문제제기하다 개혁정책에 반발한 훈구파의 모략으로 결국 죽임을 당했다.

박정희와 박태준. 자료사진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

 

 

 

강남스타일..
강남 개발의 역사

 

[서울의 재발견] 서울에 남아 있는 6.25 전쟁과 냉전의 흔적

 

노컷뉴스|입력2013.06.24 06:03|수정2013.06.24 09:33

 

 

[CBS 이진성 프로듀서]

 


'강남공화국'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 대한민국.

그러나 1963년 서울에 편입될 때까지 강남은 그저 고요한 농촌 마을이었다.

아니, 1970년대 중반까지도 강남은 허허벌판이었고,

역삼동과 대치동, 말죽거리 모두 개구리가 울던 논밭이었다.

 

 


그러던 땅이 불과 30년 만에 대한민국을 '강남공화국'으로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강남불패의 신화는 깨지지 않고 있으며, 강남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틀어 노래한 '강남스타일'은 세계를 장악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 강남에 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강남 개발은 이런 안보 위기감 속에 충분한 기반과 토대 없이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강남을 개발할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속도전을 내야 하니, 이때 정부가 사용한 방식이 '개발 이익을

활용한 땅 장사'였다.

 

 

 

정부가 땅주인에게 땅 일부를 받아서 개발한 뒤, 주변 땅 가격 폭등을 야기시켜 땅 주인에게 이득을

챙겨주고, 정부도 개발하고 남은 땅 그러나 가격이 덩달아 폭등한 그 땅을 팔아서

개발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땅 장사로 활용된 이 땅을 '체비지'라고 하는데, 70년대에는 서울시 간부들이 체비지를 잘 팔면

유능하다고 인정받았다. 한마디로 공무원들이 땅장사를 하러 다닌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강남 개발도 이런 식으로 진행했다.

 

 


손 안대고 코 풀기의 전형으로서 강남개발의 다른 이름인 '영동

(당시 강 이남에 있던 대표적 개발 지역이 영등포였기에 '영등포 동쪽'의 강 이남을 또 개발한다는 의미로

 지금의 강남에 '영동'이라는 단어를 썼음)

구획정리사업'은 이렇게 매각대금을 재원으로 하는 특별회계사업이었다.

 

 


이런 방식은 정부로 하여금 공공투자를 하지 않고도 도시기반시설을 만들 수 있게 해주지만,

체비지가 팔리지 않는다면 사업 자체가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되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체비지를 팔아 개발비용을 마련해야 했던 정부로선 땅값 상승을 원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시가 이렇게 발 벗고 땅 장사를 하는 상황에서 부동산 투기는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상 조장의 대상이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지적하듯, 대한민국 투기의 출발, 그리고 그 후 투기가 정부에 의해 잡히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역시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원래 개통일은 1971년 6월 30일이었지만, 1971년 4월 대선 일정에 맞추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는

1년을 앞당겨 개통됐다.

무리한 조기 완공 과정에서 77명이 목숨을 잃었고, 개통 직후 바로 시작된 도로 보수공사 비용은

 도로 건설 비용을 넘어섰다.

 

 


이러한 강남 개발과 맞물리는 것이 말죽거리 신화다.

양재역 부근의 말죽거리는 평당 30원쯤 하던 땅값이 1년 만에 3000원이 됐고

지금은 수천만원에 이른다.

 

 

 

복부인들이 가장 먼저 몰린 곳이 말죽거리였고. 그때 한건 했던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 상류층의 다수를

이룬다. 이런 말죽거리 투기 광풍이 당시 한건 한 사람한테는 말죽거리 신화가 되고,

못한 사람들한테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되는 것이다.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특강>. 한겨레출판. 2009. 참조).

 

강북 도심에 난립해있던 고속버스 정류장들을 하나로 모아서 1976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만든 것도

강남 이주 유도 정책 중 하나였다.



유흥업소도 강남 이전 대상이었다.

강북 도심에 유흥업소 허가를 금지하고, 경부고속도로 주변 체비지를 유흥업소들에게 팔아

고속도로 옆 신사역 주변에 앉혔다.


 


1972년부터 신사동에 집중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카바레와 유흥업소들이 80년대에는 압구정동으로

번져갔다.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층을 상징하는 '강남'이라는 단어 즉 '강남스타일'의 이미지가 "특권과 투기,

오만과 졸부"로 굳어갈 것인지, "배려와 합리, 매력과 경쟁력"으로 발전해갈지, 지금 그 분수령에 서 있다.

 

 

 

 남북 대결 경쟁과 냉전의 역사적 산물인 '강남' 그리고 '강남스타일'을 21세기 대한민국이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갈 것인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다.



서울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픈 분들은 twitter.com/js8530 으로^^
js8530@hanmail.net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저작권자 ⓒ CBS 노컷뉴스(www.nocut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수십만평 강남 땅 투기로 박정희 비자금

(서울시 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을 역임한 손정목씨

책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중에서)

 

서울 도시개발의 비화를 책으로 공개한
손정목씨는 “7년간‘이게 바로 한국 현대사다’
란 심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얘기를 썼다”고 말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어느 정도 권력가였는가를 알고 있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1974년 8월 15일에 있은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박종규가 경호실장을 그만둘 때까지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3인의 실권자가 있었다.

 

 

 

김종필,이후락 그리고 박종규였다.

 

 

 김종필은 대권을 향한 욕심이 있었고,이후락은 실권자이기 위한 노력이나 공작등이 있었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오직 대통령 한 분에 대한 충성이 있을뿐이었다.

 

 

아무튼 다른 야심이 없었던 만큼 그 권력은 더욱 큰 것으로 비쳐졌다.

박종규 앞에서는 모든 장관이 바짝 긴장을 했다. 언제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종규는 1930년생이었으니 1929년생인 윤진우(서울시 도시계획과장)보다 나이는 한 살 아래였다.

그러나 인간의 그릇에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박 실장은 실질적인 제2인자였으니 윤진우가 긴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윤진우 과장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먼저 그 집(박종규의 집) 응접실을 장식하고 있던 호랑이 표범 가죽,

박제가 된 큰 악어 등이었다. 아마 외국을 다녀온 고관들이 귀국할때 갖고와서 선물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응접실 창문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정면에 한강이 있었고 그 대안인 압구정동에 현대건설에서 시행하고 있던

매립공사 장면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고 한다.

 

 

 

박종규 실장의 질문은 간단 명료했다.

 

 

 헬리콥터로 돌아본 지역(과천-서초-강남-잠실)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장래성이 있고 투자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것이었다.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

 즉 오늘날 강남구가 된 일대의 지역이 가장 유망한 것 같다고 대답했더니 "

 그러면 그쪽 땅을 사모으지" 라고 했다.

 

 

 

그리고 약 2주일이 지난 후,윤 과장이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을 때 시장실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실에 가면 돈을 줄 테니 받아와서 우선 그 돈으로 땅을 사모으라"는 것이었다.

(중략)

 

 

"높은 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땅을 사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되팔아서 갖다 바친다.

이 사실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매우 높은 분 한둘과 김현옥 서울시장 그리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사항이다"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의 그의(윤진우) 흥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제 3.4 공화국시대의 청와대의 권한, 그것은 바로 생사여탈을 자유자재로 하는 절대권력이었다.

 윤진우는 '그 어른에게 잘 보이면 출세길이 훤하게 뚫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흥분되었다.

(중략)

 

 

 

이 일을 윤진우에게 하명한 박종규 경호실장, 김현옥 서울시장은 성격이 치밀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윤진우는 달랐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패가망신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식 장부는 만들지 않았지만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메모로 남겼다.

그 메모를 정리하면 자금의 흐름을 어느 정도까지 재현할 수 있다.

다만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것을 재현해봤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1970년 5월 20일 현재로 그가(윤진우) 청와대 정치자금분으로 매입한 토지가 23만 7,366평,

동원된 토지대금이 12억 7,088만 5,250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메모를 통하여 그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가도

충분히 추측할 수가 있다.

 

 

자금회전 등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윤진우에게는 신바람이 나는 나날이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돈을 풍족하게 쓸 수 있었다. 토지매입 자금 중 3%는 판공비로 쓰도록 지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구입하게 되면 사전에 양해된 사람 명의로등기이전도 해야하고 또 땅을 매각할 때도 소유권 이전에 따른

제반 수수료 등 경비가 들게 마련이었다.

 

 

 

뒤에서 설명하는 상공부 자금을 합하여 1970년 상반기에 그가 썼던 자금의 총액수는 20억 원을 훨씬 넘었다.

20억 원의 3%는 6천만 원이다.

 

 

1970년 하반기에 서울시가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분양했을 때의 평당 가격 평균이 14만2천 원,

40평짜리가 571만 2천 원이었다.

 

 

 

현대.대림.동아건설 등 큰 건설회사가 중앙정보나 서울시 국장들에게 연말과 추석에 돌리는 떡값이 겨우

10만 원짜리 수표 한두 장이었으니 6천만 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물론 그 중에 상당한 액수가 필요경비로 쓰였지만 떨어지는 금액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 신나는 일은 승진이었다.

 

 

경북지사로 있던 양태식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것은1970년 4월 16일이었다.

양 시장 부임 2주일 후인 5월 2일에 윤진우는 도시계획국장으로승진 발령되었다.

즉 토지매입.매각으로 고생하고 있던 중간에 과장에서 국장이 되었으니 신바람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략)

 

 

 

오해를 할까 두려워 여기서 이 사건의 본질을 밝히고 넘어가야 하겠다.

 

 

이 강남 토지투기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좀

마련해주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락 비서실장이 관여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아마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에게 맡겨둔 적금통장에서 최초의 자금이 나왔으니 이후락 실장도 관여하지 않았을까

추측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김정렴 상공부장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것은 1969년 10월 21일이었다.

 

 

김 비서실장은 취임 직후에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아마 박종규 경호실장이 매사에 치밀한 김 실장에게 이 일의 처리를 부탁했고 소심했던 김 실장이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일 처리 자체가 김 실장 몫이 되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치자금이 조성되어 그것이 대통령에게 바쳐진 마지막 단계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시대 즉 제3.4공화국 당시에도 정치자금은 여러 경로로 수합되었다.

 

 

 다만 박 대통령은 기업가로부터 직접 상납을 받지는 않았다. 돈에 대해서 결벽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3.4공화국 시대의 정치자금은 주로 공화당 재정위원장,경제기획원 장관,서울특별시장(김현옥,구자춘) 등이 마련했고 연말과 추석때 대기업에서 가져간 정치자금은 반드시 비서실장을.경호실장을 경유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

 

 

 

前도시계획국장 손정목씨 개발비화 책 펴내

 

'朴대통령 워커힐 나들이 위해서 청계고가 세워"

 

 

서울 도시계획의 산증인인 손정목(75.전 서울시립대 교수)씨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의 '증언'을 담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刊. 전 5권)를 냈다.

 


서울시의 모습이 가장 달라진 시기는 1966년 김현옥 시장부터 양택식, 구자춘 시장을 거친 1980년까지의 15년간.

저자는 1970-77년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22년간 중앙도시계획위원을 각각 지내면서

각종 도시계획에 참여, 겪거나 알게된 갖가지 '비화'를 가감없이 공개했다.

 


저자는 "서울 도시계획에 대해 최종적으로 한명이 책임져야 한다면 바로 나"라면서 "도시계획이 잘됐다 못됐다의

가치 판단을 떠나 있었던 일과 알고있었던 일을 관련자들이 살아있을 때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강남개발 = 1966년 제3한강교 건설(現 한남대교)이 강남개발의 첫 단추였다.

 

 

강남개발은 단순 인구과밀의 억제책이 아니라 전쟁이 다시 발발할 경우, 6.25 당시 서울시민이 피난가지 못했던 상황의

재연을 피하고자 시작됐다.

 


여기에 1968년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주변 영동지역에 400만평이 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적되며 허허벌판이던

강남개발이 탄력을 받는다.

 

 

  실무 책임자였던 윤진우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은 이면에서 박종규, 김종필, 김정렴 등의 배후지원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강남개발과 부동산투기를 동시에 벌이는 악역을 맡았다.

 



 고속도로 건설에서는 땅값을 안들이려 구획정리사업의 명목으로 땅을 강제로 기부받는 방식으로 빼앗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땅값으로 들어간 비용은 500만원에 불과했다.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강남 토지투기 =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는 서울시 실무과장에게 과천.서초.강남.잠실 가운데 가장 투자가치가 큰 지역을

꼽을 것을 지시했고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라는 답을 듣고 그 땅을 사모았다.

 

 

토지매입은 1970년 2월부터 시작됐다. 자금이 실무과장에게 공급돼 그가 사고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방식이었다.

이후 영동 제2지구, 남서울 개발계획 등이 잇따라 발표됐다.

 

 

이 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선에 대비해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마련해주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최근의 청계천 복원과 관련, "청계고가 건설 당시 시멘트는 많았지만 철강이 모자라 적게 쓴 탓에 수명이 다됐고 이를 해체하는 것에 겸해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은 잘하는 일로 본다"며 "복개한지 무척 오래됐는데

지금쯤 그 밑이 어떻게 됐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3-08-18)

*손정목: 1928년 경북 경주 출생,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특별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역임,

1977년부터 1994년까지 서울 시립대 교수,대학원장.

========================

 

'8학군'으로 상징되는 입시 과열 현상

 

강남 8학군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나?

 

 

강남 이주 유도 작전의 결정판은 명문학교의 강남 이전이었다.

서울의 명문 고교들은 모두 종로구와 중구에 입지해있었다.



1974년 고교 평준화가 실시된 이후에도 서울시민들은 여전히 '명문 고교에 대한 향수와 동경'를 갖고 있었던 터라, 명문 고교의 강남 이전은 폭발적 힘을 발휘했다.


1976년 경기고가 청담동으로, 1978년 휘문고가 대치동으로, 1980년 서울고는 방배동으로 이전했다. 경기여고가 개포동으로 이전한 것은 1988년이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난 명문 학교들이 옮겨가면서 강남에는 또 수많은 새 학교들이 설립돼서

명문화해갔다.



아무리 평준화됐다해도 학부모의 학력이나 경제력까지 평준화될 수는 없었다.

강남은 그렇게 교육특구가 됐고, 강남 불패의 신화는 이 배경 위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강남

한명회·박정희·이명박, 특별히 사랑했노라

오마이뉴스 | 입력2010.11.23 10:17 | 수정2010.11.23 14:47

[오마이뉴스 김준희 기자]

올해는 부동산의 강남불패 신화를 탄생시킨,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아파트가 처음 분양된 지

35년이 되는 해입니다. 1970년대에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탄생하면서

강남 특권층, 부동산투기, 8학군 및 위장전입 등 여러 사회문제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남대교는 강북과 현재의 강남구를 연결하는 첫 번째 한강다리였다.

한남대교가 완공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강남의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 일대의 땅값은 거의 천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자고나면 땅값이 쑥쑥 오르는 '말죽거리 신화'가 이때 만들어졌다.


'강남 땅 사면 부자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은 '유사시 대피'가 아닌 투기를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때부터 강남 개발이 시작된다.

당시에는 강남 지역을 '영동'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개발 초기에는 신축아파트가 들어서더라도 시민들이 강남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강남은 학교도 유흥가도 없는 시쳇말로 '깡촌'이었으니까.

그래서 정부에서는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등에 유흥시설 신규허가 및 이전을 불허하는 정책을 발표한다.

강북의 유흥업소들이 대거 강남으로 내려왔고 강남에 유흥가가 조성됐다.

 


동시에 강남의 땅을 사서 그곳에 건축물을 지으면 나중에 그 건물을 팔아도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정책도 내놓았다.

 기형적인 주택투기의 뿌리, '강남불패' 신화도 바로 이때 함께 형성된다.
그 강남불패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다. 70년대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강남과 압구정

 


 

과거 압구정이 있던 자리(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내에 있는 압구정지 표석)

ⓒ 김준희


압구정동 일대에는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배밭과 과수원이 많았다.

 

1970년대 중반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배밭을 밀어버리고 대규모의 공사를 시작했다.

봄이면 배꽃이 만발하던 곳에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강남 특권층'도 이때 함께 탄생한다.

 

 

1978년, 현대그룹 계열사인 ㈜한국도시개발은 압구정동에 사원용 아파트 900채를 지어서 그 중 600채를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특혜로 분양하는 불법을 저지른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의원도 관계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특혜로 분양을 받아서 현대아파트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국회의원, 공무원, 언론인, 기업인들이 많았다.

이런 고위층들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모이면서 '강남 특권층'을 형성한 것이다.

 


강남 8학군도 이때 만들어진다. 아무리 고급 신축아파트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학교가 없으면 학부모들은 그 지역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강북에 있는 명문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내놓는다.

 

강남에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것보다는 기존의 명문고를 옮기는 것이 강남부자들에게는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강남 특권층과 함께 만들어진 8학군

 


군사정권이라도 학생들이 멀쩡하게 다니고 있는 학교를 강제로 이전 시킨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교 측은 당연히 반대하고 나섰지만 정권의 설득과 합의 끝에 결국 1976년 경기고가 첫 번째로 강남으로 이전했다.

강북 경기고 부지는 이후에 정독도서관으로 변신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78년에는 휘문고가 경기고의 뒤를 이어서 강남으로 내려왔다.


1978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강북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할 경우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고 말한다.

철권을 휘두르던 박정희 정권의 말기였으니 학교 측도 계속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80년에는 숙명여중고와 서울고, 1984년에는 중동고가 강남으로 각각 이전한다. 이렇게 해서 강남 8학군이 조성된다.

 



백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의 모교인 배재중고교도 1984년에 중구 정동에서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변두리로 내려오게 된 당시 학생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학교 이전 문제에 있어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같은 것은 아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8학군에서 명문대학 합격자의 수가 많아지자 위장전입의 문제가 생겨났다.

 

 

위장전입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녀의 교육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위장전입이라는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으로는 워낙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위장전입에 대한 불감증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위장전입도 그렇지만 8학군 자체도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으로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자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강남으로 이사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입학 정원을 초과해서 학생들이 전입해 들어오기 때문에 한때는 서울시내 과밀고교의 절반이 강남지역에 몰려 있을 정도였다.

 

 

35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현대아파트



 

35년의 세월이 묻어나는 낡은 외관의 압구정 현대아파트.

ⓒ 김준희

이렇듯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남 보수층의 형성, 망국적인 부동산투기, '8학군병'으로 불릴 정도로

 

잘못된 교육열풍과 그에 따른 위장전입 등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바로 1970년대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다름 아닌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이 기사 주소 http://media.daum.net/v/20101123101714674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한민국 고대사가

 중요한 이때,

 

 

고대 한성백제 유적이

지천에 깔려있었던 고대한성백제의 수도였던

 강남,,,,,,

 

 

그곳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한민국 고대사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지는 이 때. 서해바다를 자신의 앞마당 처럼 여기며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대 한성백제의 실체는 그 유적과

기록의 적음으로 인하여 실체 파악에 어려움이 많다.

 

 

그리하여 오늘날 고대 한성백제 유적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

가 없다.

 

 

 그런데 이 고대 한성백제의 중심지가 바로 오늘날 강남일대 였다.

 

 

 

강남 8학군과 뭉개진 한성백제 유적

 

 

아시아의 로마제국이였던 고대 한성백제의 영역

 

 

 

‘강북의 눈물’ 위에 핀 강남 8학군


[한겨레]

70년대 개발정책으로 명문고 15곳 강제이전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등 일부 대학이 올해 수시 모집에서 우대를 해준 것으로 확인된

이른바 ‘강남 8학군’은 사실상 강북의 ‘희생’ 위에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을 의식했던 197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서울 시민들을 한강 이남으로

대피시키는 것을 국정 과제의 하나로 삼아 자연스럽게 강남 개발을 시작했다.

 


강북 억제책은 1972년 2월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이 종로구・중구・서대문 지역에 나이트클럽・술집・

다방・호텔・여관 등 각종 유흥시설의 허가와 이전을 금지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시작됐다.

 

 

서울시의 이런 조처는 강북의 기존 시가지 2826만평에 제조업체・백화점・도매시장・학원・대학의 신・

증설을 금지하는 ‘특정시설 제한구역’ 제도로 이어졌고,

서울시는 4대문 안에 이들 업소의 허가 신청을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조처에도 인구가 옮겨가지 않자 정부는 강북 명문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 카드를 빼들었다.

72년 10월 문교부 장관은 종로구 화동(지금의 정독도서관 터)에 있던 경기고를 강남구 삼성동 91 일대

(3만2253평)로 옮기는 계획을 발표했고, 동문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76년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어, 정부는 서울 강북지역 학교의 신설・확장 금지(74년), 서울 4대문 안 입시학원의 4대문 밖,

 강남 이전 유도(76년) 등의 조처를 잇달아 쏟아냈다.

70년대 이후 도심에서 이전한 학교 20곳 가운데 15곳이 강남・서초・송파・강동 등 이른바 강남권으로

옮겼다.

길윤형 기자 ⓒ 한겨레


-------------------------------

 

 

(서울=연합뉴스)김태식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경기고등학교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토성이 있었다.

야트막한 산을 두른 이 토성은 이것이 있는 장소를 따라 삼성동토성이라 일컬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성벽 은 350m 가량 남아 있었다.

애초 성벽은 그 둘레가 460m 정도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70년대 초반 이곳을 답사했던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는 이곳에서 한성백제 시대(BC 18~AD 475년) 기와

몇 조각을 줍기도 했다. 그 동쪽 2㎞ 쯤 떨어진 한강변 풍납토성처럼 성벽을 흙으로 쌓아올렸고

기와조각까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백제 유적임은 분명했고 더구나 기와건물까지 있었음에 미뤄

백제가 이곳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성동토성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종로구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던 경기고 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다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성백제를 깔아뭉갠 곳에서 과연 학생들에 게 '우리 문화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지...

어떻든 귀중한 한성백제 유적 1개는 이렇게 해 서 뚝딱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한강 북쪽과 맞닿은 뚝섬 경마장 자리에는 1916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토루(土壘)의 대부분이 남아 있었고 강동구 암사동 소산 이라는 해발 88m 야트막한

산에도 역시 토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파편조차 찾을 수 없다.

 

 

 

지구상에서영영 사라진 삼성동 토성에 비하면 풍납토성은 나은 편이다.

비록 성벽을 포함해 22만 3천평이나 되는 넓은 땅에 벌집처럼 빽빽히 들어선 아파트와 연립주택,

상가에 짓눌려 신음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숨통은 붙어있기 때문이다.

삼성동 토성처럼 아예 사라진 한성백제 유적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백제 멸망 이후 한강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이 파괴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196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기까지 무려 1천 500년 동안 진행된 파괴는

그 이후 40년 동안 있었던 파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성백제 중심지인 송파구,강동구,강남구 일대는 이미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마천루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지하에서 1천500년을 잠자던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

 

 

이렇게해서 겨우 살아남은 한성백제 유적이라고는 그나마 잘 정비된 몽촌토성과 뼈대만 남은 풍납 토성, 그 맞은편 아차산성, 석촌동고분군 정도 밖에 없다. 이 중 몽촌토성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파괴 일로에 있다.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에도 대단히 중요한 아차산성은 곳곳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초기백제 유적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석촌동. 가락동 일대 고분군.

 

1917년에 나온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석촌동 일대만 해도 돌무덤 66기, 흙무덤 23기의 총 89기 나 되는 백제 고분이 있었다. 이 중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나마 기단있는 돌무덤 4기를 가까스로 건져 지금은 이 일대 1만7천평을 사적공원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들 돌무덤은 장군총이나 태왕릉처럼 전형적인 고구려식 모양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초반에는 이들 무덤 주위에서 기와조각까지 발견돼 백제 당시에는 무덤 위에다가

사당 건물을 세워 제사를 지냈음이 이형구 선문대 교수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나머지는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남위례성터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넘어 풍납토성이 왜 꼭 보존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유적 보존가치를 꼭 희소성이라는 경제학 원리로 따 질 수만은 없겠지만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 여부를 떠나 몇 군데 남아있지 않은 귀중한 초기백제 유적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보존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2000/05/26

 

 

 

‘말죽거리 신화’라고 하는 강남지역 땅값 폭등과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린 복덕방과 복부인,

 

 

강남지역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밤문화,

 

8학군의 등장과 아파트 가격상승 및 사교육 열풍의 진앙지인 강남,

 

그리고 뭉개진 소중한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들

 

 

강남이라는 말 자체는 한강 이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인데

강남구와 송파구, 서초구 등의 지역만을 의미한 강남이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전에는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영동이라는 말이 주로 사용됨

 

 

 

 

박정희 시대

 

이때부터 강남 한성백제 유적은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 ...

 

박정희가 도시계획 모형전시관을 관람하는 모습. 1969년.

이제 강남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는데....

 

강남 신사동의 개발 모습....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기 시작함. 1968년 10월 15일

 


 

 


반포아파트 와 강남지역의 일부가 완성. 1972년 5월 25일

 

 

잠원동의 과거 모습.

 

 


그 유명한 압구정... 근데... 농부가 소로 밭갈고 있음...1978년.

 

 


88 올림픽 개최로.... 강남 경제는 더더욱 촉진되기 시작하며

요즘에도 볼수 있는 현대식 건물이 더더욱 들어섬.

 

강남구 삼성동. 1989년.

건축중인 그랜드인터컨티넨탈서울, 한국종합무역센터가 드디어 건설됨.




현재의 강남


현재의 강남은 땅값과 인구밀도, 건물 위치까지

절대적인 포화상태라고 말할수 있음.

엄청난 땅값을 자랑하는곳중 하나가 되어버림.


 


 

 

 

그러나

초기백제 유적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석촌동. 가락동 일대 고분군.

 

 

1917년에 나온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석촌동 일대만 해도 돌무덤 66기, 흙무덤 23기의 총 89기

나 되는 백제 고분이 있었다. 이 중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나마 기단있는 돌무덤 4기를 가까스로 건져

지금은 이 일대 1만7천평을 사적공원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

 

이것이 사라진 백제의 위례성일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97년 풍납토성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신호탄으로 우리 역사학계 최대 발굴로 비유할만큼 엄청난 양의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학계에서 그동안 출토된 유물을 분석한 결과 풍납토성은 백제사 500년의 미스터리는 물론

우리 고대사 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간직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마구잡이식 개발로 뼈대만 남은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수도 위례성이다.

 

그러나 이 풍납토성도 현재 개발로 인한 파괴일로에 있다.

 

 

지금 한창 발굴 중인 곳은 풍납토성에서 서북쪽 방향 미래마을 연립이 있던 구역이다.

현재 발굴 지역에서 유물이 나오고 있는 곳은 지하 1미터에서 4미터의 지층,

모습을 드러내는 유물들은 거의 원형에 가까웠다.

 

 

 

 

 

바로 이것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 돌무지 무덤이다.

형태는 고구려 무덤(장군총)과 같다.

 

 

 

일제 강점기엔 이곳에 고분 80여 기가 흩어져 있었고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을 '돌마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이 개발로 파괴되어 사리지고 3기의 고분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강남엔 이러한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정권유지를 위해

부동산을 폭등시켜 그 차액을 챙기려던 박정희는 강남개발을 밀어붙이며

남 일대에 산재해있던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을 철저히 파괴시켜 버린다.

 

 

대한민국 고대사 유적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이때에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말해 줄

중한 역사 유적은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박정희 경제기적의 허구.

 

 

 

대한민국의 경제를 전부 박정희가 이루어 낸 거다..??

제대로 된 경제학자에게 다 물어 봐라. 그 말에 동조하는가.

 

 

그것은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이 만들어 낸 허구이다.

 

 

경제학자 강기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에 따르면

 

 

1: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 김영삼정권:10, 박정희: 6점의 이었다.

 

 

박정희 경제가 꼴찌였다.

 

 

 

 

박정희시대 경제지표들

 

 

정말 대단하다! 박정희는 정말 통이 컸다 말아먹을 것 확실히 막아먹을려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않좋은 것들은 죄다 최고기록을 했다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기위해 어떻게 이지경이 되도록 만들어놨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아마도 아래의 신기록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을 해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역대최고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63 20%, 1964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1974 24.3%, 1975 25.7%,

 

 

마지막해인 77 12.1% 78 21%(78년에 고추 한근에 1만원이었고, 배추 한포기에 3천원---정말 대단하다)

 

 

 

 1979년에는 18.3%(79년에는 유류가격이 59%, 전기요금이 20-30% 인상)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도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도 찬양의 대상인가..?-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가 상승률]--연평균땅값상승률 33.1%, 역대최고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 압구정동이 25,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땅값상승에 따른 불로소득은 326조원이다(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1년 예산이 200조 전후이다

그당시 국민소득 최대 1천불로쳐서 326조돈을 현재 국민소득 17천불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나온다)

 

 

 

[노동시간, 산업재해, 소득상황]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 74.9%, 1978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즉 소득세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소득불평등도-지니계수 ]

 

 

속칭 ‘한강의 기적’ 뒤편에서 부의 불균등 분배는 박정희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심화)

1965 0.344, 1970 0.332, 1976 0.391, 1980 0.389, 1993 0.310으로 나타났다.

 

 

대개 196070년대를 ‘절대 빈곤의 평등’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설비투자비율, 소득분배율, 실업률]

 

 

기업의 설비투자비율 11.7% 역대4

노동소득분배율 43.7% 역대최하위

79년 실업률 17.9% 역대최고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 박정희 2, 노태우 3, 김대중 4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 전두환 2, 노태우 3, 박정희 4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의 연평균 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 전두환 2, 노태우 3,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이에 비해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이었다.

 

 

 

박정희정권이 들어서고 초기에 박정희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뭔가를 이루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전혀 아니다.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특히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불행중 약간이나마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

(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 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문제는 박정희 정권유지목적으로 한국민족의 대일청구권을 모조리 포기하는

폭거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러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그런데 전투수당마저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경제가 찬양받아야 할 일이라면

박정희보다 훨씬 더 짧은 기간에 훨씬 더 찬란한 경제를 이루어 낸 독일의 히틀러와, 러시아의 스탈린,

대동강 기적을 이루어 낸 북한의 김일성(지금은 쫄딱 망했지만),

 

 

30년 이상 중국의 경제를 년 약 10%의 성장을 이루어 낸 중국의 지도자들은

더욱 찬양을 받아야 하나..?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강국까지 올려 놓은 김대중과 노무현은 무슨 찬양을 해야 하나??

 

 

박정희가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두환경제도 있고, 김대중.노무현경제도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박정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 말도 웃긴다.

 

 

 100명의 학생 중 꼴지의 학생이 60-70등 하는 것이 쉽나..?

 10등의 학생이5등 하는 것이 쉽나..?

 

 

개방을 하고 국제환경 등이 맞아 떨어지면 박정희가 없어도 경제는 꽃이 핀다...

러시아, 베트남, 인도, 남미의 나라들을 한 번 보시라.

 

 

캄보디아는 년 13%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하기도 한다.

 

 

 싱가폴, 대만, 홍콩, 일본 등은 박정희가 없어도 크게 성장했다.

 우리나라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역사를 정략적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가 통뼈인가..?

 

 

박정희도 초기 5년간은 약 5.5% 정도로 이승만 후기와 비슷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 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박정희가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경제실적

 

 

 

 

이승만 12년집권 -15$적자 67 -> 82

 

박정희 18년집권 - 233$적자 82 -> 1,636

세계 4위 외채국 만듬.

 

죽기전 한국의 석유재고 7일분 남아 있었음.

죽기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섬.

 

역대 대통령중에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대통령은

김영삼 박정희 뿐

 

 

어떻게 해서 박정희의 무능력이 능력으로 미화가 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전두환 7년집권 + 8$최초흑자 1,749 -> 4,268

세계 4위 외채를 30억 달러까지 줄임.

박정희 사후 불어닥친 국가부도 위기를 일본에서 40억달러를 구걸해와서 부도를 막았음

 

 

노태우 5년집권 - 132$적자 4,268 -> 7,811

 

김영삼 5년집권 - 366$적자 7,811 -> 7,355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에 영남의 마지막(부산경남) 양심을 팔어버림.

국고에 39억달러 남기고 물러남.

 

 

 금융거래불량자(신불자)1997년말..200.

 

 

국가부도로 국가신용도 최대 10단계 하락시킴.

1997 12 3 IMF와 비밀리에 기업매각 헐값계약서 작성함.

 

 

김대중 5년집권 + 846$흑자 7,355 ->12,646

신용불량자 65만 늘어난 2002년 말..265만 기록.

 

 

독재산업화 세력이 말아먹은 국가경쟁력 41위ㅡ> 29위 역대최고 기록.

BK21사업으로 과학기술경쟁력 28위ㅡ> 12위까지 상승시킴.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 세계4위 외채국 만든 한국을

국가부도 걱정없는 1200억 달러 세계 4위 외환보유국 만듬.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이 말아먹은 10단계 추락한 국가경쟁력.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국가신용도 최대 10단계 상승시킴.

 

1999 9월부로 대한민국을 최초로 순채권국으로 만듬.

 

 

 

 

 

 

대한민국 경제사를 국민에게 안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박정희는 전두환보다 못하며 오히려 김영삼과 동급이다

 

수치 통계는 (대한민국 통계청 공식기록) 자료출처: KOSIS

 

 

 

경부고속도로의 업적 ?

 

 

일본넘들에게 협상금 받아 처먹고 18년동안 통치하면서

그정도도 안했으면 정말 버러지 중에서도 상버러지라고 밖에 말할수 없다

.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최용식씨-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 총장 이필상씨-

 

 

 

(수구)신문을 읽을 때 나는 섬뜩한 느낌이 든다.

보도와 해설을 보면 신흥종교 단체 기관지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 한성대 총장-

 

 

 

 

김재규는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과 같은 급의 인물이다.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북한 김정일체제와 같은 암흑의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역사학자 최상천-

 

 

 

 

----------------------------------------------------


[역대 정권 부동산 정책 평가]


박정희 정권시절은 ‘불로소득의 천국’

국민일보|입력2006.01.16 15:46[쿠키 경제]


○…"서민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가 살기 좋았다고? 무슨 소리!"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16일 역대 정권의 부동산 정책을 평가한 성적표를 공개했다.


현재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 전 위원장은 이날 토지정의시민연대와 헨리조지연구회가 공동주최해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열린 부동산 정책 토론회에서 발제문을 통해

박정희 이후 김대중 까지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 중 땅값이 오른 폭과 경제소득이 오른 폭을 비교했다.



 




박정희,불로소득의 천국



이정우 교수에 따르면,땅값 상승률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연평균 33.1%가 올라 단연 최고였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때도 14.9%와 17.7%로 두자릿수를 기록했지만

박 대통령 때의 땅값 상승률은 두배 이상이었다.

 

 

 

박정희 때는 땅값 총액이 국내총생산의 12배에 이르러 땅값 거품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이 교수는 이를 "불로소득이 근로 소득을 압도했다"고 표현했다.

 


부동산 투기로 얻게된 불로소득과 열심히 일해서 번 생산소득을 비교해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생산소득에 비해 불로소득이 2.5배(248.8%)에 달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100만원을 벌 때,100만원어치 땅을 갖고 있는 사람은 250만원을 벌었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박정희 정권 때는 배(생산소득)보다 배꼽(불로소득)이 두배 이상 컸던

'거대한 거품경제'였다"면서 "박 정권의 경제성장 성적은 화려하지만,그 시기 거듭된 부동산 광란은

결국 미래의 성장을 앞당겨 쓴 '외상 경제'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를 노름판에 비유했다.

 

 

노름판에 현금을 갖고 뛰어든 사람과,바둑알 같은 칩만 가지고 뛰어든 사람이 있는데,

판이 끝나고 보니 칩 가치가 두배반이나 뛰어 올라 현금을 갖고 있던 사람만 손해를 본게된 셈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때가 정치는 독재였어도 경제는 잘했다고 하지만,

 

 

결국 불로소득 계층이 서민들의 노동의 댓가를 엄청나게 가져간 셈"이라고 질타했다.

 


'서민경제성장률'로 봐야

이 교수는 " 최근 참여정부 들어 부동산 값이 폭등했다고 난리인데,

통계로 보면 2003,2004년 모두 3%대의 땅값 상승을 보이고 있다.

 

 

3%로도 이런 고통인데,33%라는 것을 상상할수 있겠는가.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민란 폭동이 일어나 정권이 지탱되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이런 일을 18년간 했는데,이런 정권이 경제성장 잘 했다고 찬양받고 있다"면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을 서민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발제문 속에서 '서민경제성장률'이란 말로 이 개념을 표현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연평균 9%라는 경제성장률은 중산층과 서민들에게는 과대평가된 것이다.

 

 

집도 땅도 없는 서민에게 해당하는 서민경제성장률이란 개념을 생각한다면,

그 값은 훨씬 낮아질 것이다"라며 "정확한 통계가 없어 잠정적으로만 산정해봐도,

부동산 투기로 인한 이익이 근로소득의 절반에 육박했다.

 

 

경제성장의 열매가 소수의 부동산 부자들에게 편중되었음을 쉽게 추측할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민들의 경제소득이 불로소득 계층에 비해 얼마나 늘었는지를 비교해보면

 "그래도 박정희 시대가 좋았다"라는 말은 허구라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부동산 투기 다시 일으켰다



 

전두환 정권 때는 부동산 소득이 67.9%로 생산소득을 밑돌았으나,노태우 정권 때 88올림픽 이후

전국에 불어닥친 부동산 광풍으로 다시 생산소득에 맞먹을 정도(96.3%)로 다시 커졌다.



이에 비하면,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에서는 재임 기간 동안 오히려 땅값이 낮아졌다.

땅을 갖고 있었던 사람은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김씨가 부동산 정책을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교수는 "노태우 정권 말기 전국적으로 휘몰아친 부동산 투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 질 정도가 돼서

토지공개념에 입각한 부동산 3법이 입법됐다"면서 "김영삼 정부 시절의 부동산 가격 안정은

이 토지공개념 3법의 음덕을 톡톡히 입었다는 점을 빼놓을수 없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권의 부동산 정책도 비판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 교수는 "김대중 정권의 부동산 가격 안정은 1998년 IMF 경제위기 때 부동산 가격이 13%나 폭락한 점과

후반기의 인위적인 부동산 경기 살리기가 상쇄돼 나타났다"면서

 

 

 "오히려 김대중 정권은 IMF극복 선언 뒤에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초조한 나머지 무리하게

부동산 규제완화를 추진해 10년간 잠자던 부동산 투기라는 사자를 깨워 우리 밖으로 끄집어 냈다"고

맹 비난했다.

 


참여정부는..?



그렇다면 자신이 참여했던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어떻게 평가할까. 이 교수는 "아직 통계가 2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아 평가를 하기에 이르다"면서도 "보유세를 높이고 과표를 현실화한 것,서민들을 위해 임대주택 100만호 공급을 추진하는 것 등은 역대 정권 중 처음으로 부동산 문제를 옳은 방향으로 접근한 것이라고 본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10.29라는 미증유의 강력한 부동산대책이 나왔지만,

부동산 투기를 잠재우지 못해 다시 8.31 대책이 나온 과정을 보면 반성할 소재가 있다"면서

"종합부동산세가 도입된지 6개월만에 다시 손봐야할 정도였다.

 

 

여당 안에서도 단기부양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부동산 정책의 생명은 신뢰다.

국민들이 '이번 대책이 얼마나 가겠냐'고 냉소하게될 때 정책의 효과가 약해진다.

일관성 있는 정책으로 신뢰를 얻어야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 상류층에게 꾸준히 일확천금을 가져다준 부동산 투기의 역사,거기에 바탕을 둔

강고한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부동산 필패의 철학으로 바뀌어야

비로소 선진국 진입도 기대할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지방 기자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 국민일보 쿠키뉴스(www.kukinews.com),

 

 

 

 

 

 

 

 

 

 

----------------------------------------------------------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까닭은?


전체적으로 조명하는 박정희시대의 경제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차라리 선조가
임진왜란극복의 국방력기반을 닦았다고 하는 것을 믿는게 낫다

 

 


박정희가 경제의 기반을 닦았다는 말은
박정희 이후에 이루어진 엄청난 경제적인 성장은 다 박정희가
밑바탕을 잘 닦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것 또한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박정희경제는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수치로 표현하면 박정희말기에 박정희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후일 전두환이 일본에 40억달러 구걸하기에 이름)



그럼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다음 바로 일본으로 간 까닭은?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다음 바로 일본을 방문했다.
한국의 국가원수가 일본을 방문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9천년 역사상 전례가 없던 충격적인 사건 이였다.
더구나 불과 한새대전 한국을 침략하여 말살하려햇던 나라였는데...





1983년 1월 한국을 공식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가 공식 만찬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건배하고 있다.

 

 

 

3선 시기까지의 경제 성장에 대해선 박정희의 능력을 인정. 물론 이 시기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계획은

2공화국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았던 것들을 그대로 써먹은 거지만.

 


문제는 유신 이후. 완벽한 무단 독재 체제를 만든 박정희는, 재벌들이 은행 외에서 진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사유재산 따윈 엿을 먹어라 하는 조치를 취해 가면서 재벌 중심의 중화학 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을 몰고 갔는데, 이게 바닥 없는 독에 물붓기였음.

 

 

 

70년대는 오일쇼크 이후 전 세계가 스태그플레이션 속에 있었는데, 중화학 공업으로 물건을 내놔도

팔 데가 없는 상황. 결국 떨이장사를 하고 빚으로 메꾸는 상황이 됨.

 

 

 

그런데 당시 한국의 신용을 믿고 큰 금액을 장기로 빌려줄 데가 많은 것도 아니고,

결국 일용직 노동자가 러시 and 캐시 돈 빌려 쓰듯이 단기 외채로 빌려옴.

하지만 이윤은 안 나고 이자는 이자를 부르고 단기외채로 단기외채를 돌려막는 상황에 이름.

 


70년대 오일달러 이야기를 하고 현대중공업 이야기를 하지만 당시 외채 상황을 보면

오일달러는 동상 입은 발에 오줌누기 정도의 효과 정도.

 



일,수,돈 빌려서 투자해 가면서 경제 성장을 외쳤지만 70년대 중반에 가면 이미 늘어가는 빚을 감당 못할

지경에 이르고, 결국 투자를 줄이자 경제성장율은 바로 반토막나면서 불황에 빠짐.

 

 

여기에 2차 오일쇼크가 70년대 후반에 겹치면서 유신 시대 경제는 파탄 직전에 이름.



그 상태에서 부마항쟁이 터지고, 박정히는 골로 가고 전두환이 정권 장악.



전두환은 국보위를 만들먼서 초법적인 조치로 권력 기반을 다지는데. 이 시기 김재익이란 경제 관료를

만나고 그에게 감화되어 김재익을 실세 경제 관료로 등용.

 


전두환은 국보위 시기 재벌 총수들에 대한 협박을 통해 중화학 공업의 합병과 인수를 통한 구조조정을

하지만 이 구조조정이 실제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는 딱 말하기는 애매함.

제대로 된 구조 조정이 아니라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로서 작용한 것도 크니.


 


전두환에 의해 등용된 김재익은 퉁화량을 줄아면서 강하게 긴축 정책을 밀고 감.

긴축정책과 함께 공정거래법을 입법하면서 '경제는 시장에 맡기되, 재벌의 독점은 막는다' 는 기조로

경제 정책을 추진. 이런 정책을 통해 박정희가 벌여놓은 물가 위기와 외채 문제의 급한 불을 끄는 데 성공.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역시나 재벌과 결탁해 재벌 중심의 대대적인 투자를 벌이게 되면서,

김재익은 자신이 전력으로 추진하던 금융실명제가 좌절된 82년을 기점으로

경제 정책의 중심에서 밀려남. 그리고 83년 아웅산 테러로 김재익은 사망.

 



전두환은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면서 돈을 끌어오니 급한 불만 꺼져 있던 외채 문제는 크게 살아나게 되고, 단기 외채를 단기 외채로 막는 악순환이 이어지며 기하급수로 늘어난 빚 덕에

 

한국은 세계4위의 채무국이 되어버림. 거기다 84년에 이르면 당장 이자조차 갚지 못할 위기에 빠짐.

 


그 상황에서 84년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은 일본에서 장기 저리로 돈을 빌려오는 데 성공하고

이 돈으로 급한 불을 끄는 데 성공. 박정희의 스승이던 일본 우익 실세한테 어찌 한 건지 뭔 수를 썼는지는 이런 저런 말이 있지만 하여간 돈을 빌려온 덕에 당장 모라토리움 상태가 될 뻔한 상태는 넘어감.

그렇다고 있는 빚이 줄어든 건 아니니 이 역시 급한 불만 피한 격.



그런데, 85년. 한국 역사상 다시 없을 희대의 로또가 터짐.

 


플라자합의.


 

플라자합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른 곳을 찾아보면 되고, 플라자합의의 내용이던 엔화 가치 상승.

달러 가치 절하. 저금리 등은 한국 경제에 엄청난 대박을 던져줌.

 

 

엔화 가치 상승은 일본이 가지고 있던 저가 시장에 한국이 들어갈 수 있게 했고,

달러 가치 절하는 외채가 달러로 계산되니 가만히 앉아서 빚이 줄어든 격인 데다 달러 가치 절하에 따른

원화 가치 상승은 수입 원자재에 대한 부담금도 크게 줄여버렸음.

거기다 저금리 덕에 단기 외채의 이자 부담도 팍 줄고 여기다 80년대의 저유가가 겹치니 로또 중의 로또.

 


플라자합의란 로또의 효과 덕에 86년은 희대의 호황이 되었지만, 이것이 한국 자체의 역량보단

외부 효과에 의한 것이란 걸 사람들은 간과했고, 이 호황의 이득을 독식한 재벌들은 호황의 이득을 통해

빚 중심의 기업 구조를 개선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땅 투기에 나섬.



거대한 호황이 왔지만 부실한 기업 구조는 그대로였으며 결국 IMF까지 이어짐.



호황의 이득이 독식되는 걸 본 사람들의 불만은 87년 6월로 이어짐.

 


뻘글이 더 뻘글이 되었는데, 3선까지의 박정희의 성과는 인정하지만 유신 시대는 신용카드로

명품 놀이한 격. 전두환은 우수한 경제 관료를 통해 박정희의 설거지에 일단 성공하나

다시 박정희가 벌인 식을 반복하다 돈 잘 벌려와서 로또 터질 때까지 시간 버는데 성공했다 정도가 요약.

 

 

 

 

 플라자합의는 말 그대로 로또. 전두환이 정권 초기 긴축정책에 귀 기울이고 중반에 일본 가서

돈 잘 빌려온 건 인정해야 할 일이지만, 결국 이자도 못 갚는 국가 부도의 위기를 초래한 것도 역시 전두환.



피닉제 피닉제 하지만 보면 한국 경제가 정말 피닉스. 완전 망할 뻔한 위기를 대체 몇 번을 넘겼는지 원.

이런 걸 보면 한국이 운 없다 운 없다 해도 실제론 꽤나 운 좋은 나라일지도 모른다 싶음.

플라자 합의는 둘째 쳐도 김재익이 전두환과 만나는 운이 없었다면 과연 80년초를 살아서 넘길 수 있었을지.

 

 

-------------------------------------------------------------------

 



1955년, 한 중학교 학생들의 소풍 장면.

 

 


 이 당시 우리 국민의 81 퍼센트가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55 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국민의 주택 보유 비율은 55 퍼센트로 떨어졌다.

 

 


산업화를 시작하기 전에도 자기 집이 있던 사람들이 고향도 잃고, 집도 잃어버린,

이 기막힌 일이 2010년, 우리 앞에 펼쳐진 것 아닌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지금의 개발 경제와 토건 경제를 끌고온 것인가..?

 

 

박정희 시대

 

 

 

이때부터 강남은 본겨적으로 파괴되기 시작 ...

박정희가 도시계획 모형전시관을 관람하는 모습. 1969년.

 

 

삼성동 토성처럼 아예 사라진 한성백제 유적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백제 멸망 이후 한강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이 파괴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196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기까지 무려 1천 500년

동안 진행된 파괴는 그 이후 40년 동안 있었던 파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성백제 중심지인 송파구,강동구,강남구 일대는 이미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마천루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지하에서 1천500년을 잠자던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

 

 

아파트 숲에 잡겨버린 서초 · 송파 · 강남 일대

 

 

 

물론 백제 멸망 이후 한강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이 파괴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196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기까지 무려 1천 500년 동안 진행된 파괴는 그 이후 40년 동안 있었던 파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성백제 중심지인 송파구,강동구,강남구 일대는 이미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마천루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지하에서 1천500년을 잠자던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