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욕
사람들은 가끔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나는 것을 동경한다.
그 날개는 돈 명예 권세 영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들은 추락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날개를 퍼덕거린다.
창공을 오랫동안 날기 위해서는
지상에서의 수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역동적인 날갯짓이 필요하다.
날지 못하는 자에게는 추락도 없다.
창공을 날아올라 정상에 서본 사람만이 추락을 경험한다.
낮은 곳에 사는 자들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추락하는 것은 반드시 날개가 있다.
때로는 한 시절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멋진 날개 때문에 추락을 경험하기도 한다.
날개는 정상에 오르는 도구이지만, 때로는 파멸을 가져오는 흉기도 된다.
서양 속담에 “독수리는 파리를 잡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면서 땅 위를 두루 살펴 목표물을 정확하게 추적한다.
높은 곳에서 넓게 볼 수 있기에 목표물을 놓침 없이 정확하게 포착한다.
폭풍이 닥칠 때 다른 새들은 바위틈에나 나무 밑에 숨는다.
그러나 독수리는 다르다.
폭풍에 맞서서 정면으로 날개 각을 세우고 기다리다가,
폭풍의 양력을 이용하여 하늘 높이 올라 폭풍을 내려다본다.
폭풍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독수리가 강력한 날개를 소유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강하게 키우려고,
둥지에 일부러 딱딱한 돌과 가시를 깔아 놓아 거친 훈련을 시킨다.
일정한 기간 동안 자란 뒤에는 푹신한 것들을 빼내 버린다.
가시만 남아 있는 둥지에서 새끼들이 아파서 밖으로 나가 버둥대다 아래로 떨어지게 되면
어미 독수리는 날개를 받쳐 준다.
이런 과정이 수 차례 반복되는 동안 새끼는 하늘을 지배하는 튼튼한 날개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렇게 강하게 자라고 지혜로운 독수리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물에 빠져 죽는단 말인가?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있는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에서는 가끔 어이없는 장면이 목격된다.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에는 독수리가 많이 날아 다닌다고 한다.
그 이유는 폭포와 함께 떨어지는 물고기들을 잡아먹기 위한 것이다.
독수리들은 하늘을 날다가 폭포 사이를 날쌔게 파고들어 떨어지는 물고기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먹이를 취하는 독수리들은 문제가 없지만,
물에 빠져 죽는 독수리는 폭포 위쪽에 있는 상류로부터 오게 된다.
이 상류 쪽은 야생동물들이 많은데, 때때로 죽은 동물들의 시체가 물에 떠다니게 된다.
독수리가 죽은 동물을 보게 되면 그 위에 내려 앉는다.
그리고 날개를 접고 여유 있게 먹기 시작한다.
독수리가 식사를 하는 여유 있는 모습이 평화롭기까지 하다.
여유 있게 식사를 즐기는 동안 죽은 동물들의 뼈가 드러나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드러난 갈비뼈 사이에 독수리의 발이 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수리들은 그리 문제 삼지 않는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살점을 모두 먹어 치운 후 강력한 날개를 펴서 창공으로 날아오르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체는 흘러 폭포에 가까워지게 된다.
물살이 빨라지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정신을 차린 독수리는 날아오르기 위해 힘껏 흔들어 보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들의 발이 사체의 갈비뼈와 함께 엉켜 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눈앞에 보이는 먹이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자신의 발이 사체의 뼈 사이에 빠지는 것을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맥없이 천 길 낭떠러지 폭포에 추락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쾌락의 고기에 취해 자신이 점점 죽음의 폭포로 향하고 있음을 망각한 독수리의 비극적인 최후다.
이 내용을 보면서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쾌락이 중독이 되어 영혼이 죽는 줄도 모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니라는 안일한 생각,
나는 마음만 바로 하면 벗어날 수 있다는 교만,
바로 이것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사슬이 되고 만 것이다.
비전을 위해 항상 도전하고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에 스스로 위로하고 지내고 있지는 않는지,
또 좀 더 편안한 것만을 찾아 헤매며 조금만 힘든 일이 내 앞에 펼쳐진다고 생각되면
그저 이만하면 됐다고 안주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때로 힘들 수 있다.
하늘을 나는 새는 뼛속이 비어 있다.
몸이 가벼워야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가 날 수 있는 이유는 처절하게 뼛속까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얼마나 비워내고 있을까?
얼마나 더 비워야 할까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내 자신을 비워 내고 있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힘들다.
떨어지는 폭포 사이로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는 것이 힘겨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 떠다니는 사체 위에 평화롭게 앉아 배부르게 먹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수리는 하늘을 날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어찌 독수리의 경우에만 해당될까.
달콤한 죄의 유혹에 너무 깊이 빠져 지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죄악에 박힌 발톱이 빠지질 않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인생을 찾지도 못한 채 스러져 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죄악은 얼음덩어리에 박힌 고기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지만 그 결과는 어김없이 파멸로 이어진다.
세상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추락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하는가.
찬란한 수식어와 함께 신문과 방송에 수없이 오르내리던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추락하는 장면을 수없이 본다.
정상에서 추락하지 않으려면
처음 비상(飛上)할 때보다 훨씬 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살지 않으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날개가 곧 추락의 원인이 된다.
비상의 날개가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삶이 힘겹다고 징징대지 마라.
세상이 냉혹하다고 울지도 마라.
지나가 버린 삶을 한탄한들 무슨 소용인가.
왕년의 영화는 안개처럼 헛된 것,
어차피 인생의 짐은 무겁고, 그것의 속도는 화살처럼 빠르다.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무르는 숙영지(宿營地)일 뿐, 영원한 본향(本鄕)은 아니다.
세상의 달콤한 것들은 찰나(刹那)의 미각(味覺)에 불과하다.
눈부시게 빛나던 날개도 추락(墜落)의 원인이 될 뿐이다.
우리는 행복을 꿈꾸지만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비결을 모르기 때문인데, 욕심을 버리면 간단히 해결된다.
성경에도 일찍이 인간의 욕심에 대한 경고를 싣고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장15절)”
인간의 절제 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죄가 시작 되었고,
인간 타락의 역사를 집약하여 말해주고 있다.
소설가 안톤 체홉(Anton Pavlovich Chekhov ; 1860~1904)은
“행복을 바라거든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일에 욕심을 부리지 말라”라는 말로 욕심을 경계했다.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어떤 인생도 만족스러울 수 없고 행복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 1813~1855)는
“지나친 욕심은 인간을 어두운 사망으로 몰고 간다.“고 하였다.
만족을 모르는 욕심이 실패와 파멸을 불러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Tolstoy: 1828-1910)작품 중에 ‘사람은 얼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바흠’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부가 등장합니다.
주인공 ‘바흠’은 가난한 농부다.
땅을 조금씩 넓히며 근근이 살아온 그에게 지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녘까지 걸어서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온 만큼의 땅을 주겠네”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하지만,
다시 없을 기회라는 생각에 그의 발걸음은 빨라 집니다.
쉬지도 않고 땡볕에 헐떡이며 최대한 멀리 넓게 욕심을 채운 농부는
해가 질 무렵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간신히 도착합니다.
하루 동안 걸어온 땅이 내 것이 되려는 순간,
주인공 ‘바흠’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결국엔 쓰러지고 말았다.
‘바흠’의 머슴이 달려가서 부축했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그 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머슴은 괭이를 들고
‘바흠’의 무덤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3아르신(1아르신은 약70cm)길이의 무덤을 팠습니다.
그것이 ‘바흠’이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전부였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풍자한 글이다.
욕심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치관의 잣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욕심이 지나치면 결국 소중한 목숨까지 잃고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누어야 할 대상을 모으고 움켜쥐는 훈련만을 받아서,
주먹을 쥐고 손을 펼 줄은 모른다.
백사장의 모래도 한 움큼을 힘 있게 쥐면 빠져 나가지만 손바닥을 펴면 그대로 남습니다.
이익도, 권력도, 좋은 음식도 그리고 행복도
움켜진 손을 활짝 펼 때 더 많이 찾아온다는 진리도 깨달아야 할 때라고 본다.
또한 없는 것을 욕심내기 보다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지혜가 결국 우리를 행복의 무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은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욕심은 사람을 유혹한다.
도박에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갈 데가 없어
카지노 주변을 배회하는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들이 있으며
심한 경우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욕심은 사람을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욕심을 절제하고 스스로 다스려 욕심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욕심은 사람을 죄에 빠뜨리게 한다.
욕심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에서 나아가 양심을 마비시키고 죄에 빠지게 한다.
죄를 지어도 죄인인줄 모르게 한다.
욕심이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이 같은 무감각증은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뇌물 비리와 생명 정신 풍조, 도덕 불감증 등 각종 죄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와 같이 지나친 욕심은 사람을 죄에 빠뜨리고,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어 결국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이처럼 욕심이 지나치면 개인의 행복을 빼앗고 사회의 안정까지 해치게 되는 욕심,
절제하지 못한 욕심의 결말을 살펴봄으로써 언제나 그것을 경계하는 지혜를 갖추도록 하자.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는 ‘어진 사람이라도 재물이 많아지면 지조가 손상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재물이 많아지면 허물을 더하게 된다.
(賢人多才則損其志 愚人多才則損其過)”라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높은 위치에 있고 지식이 많은 사람과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불어 살라고 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물질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데 필요한 것들을 많이 채워 주고 도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내 행복의 전부도 아니며 또 나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재물에 욕심을 내다보면 자연스럽게 남을 잊어버릴 수 있으며,
자신이 그 물질의 포로가 되며 오히려 행복은커녕 죽음의 위험도 오를 수 있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이
또 하나의 독수리 발톱이 되어 이웃도 잃고 좋은 인간성마저 잃으며
결국 영원한 생명마저 잃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가진 재물로 인해서 내가 가진 다른 좋은 것들로 인해서
나도 이웃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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