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륜이라는 것은
길 가기 알맞은 계절이다.
한 달만 지나면 산과 들판은 찬란한 연초록으로 변할 것이다.
"나이 드니께 봄이 좋구마. 젊은 시절에는 가을이 좋았제.
안묵어도 배가 부른 것 같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이믄 여름 내내 땀 흘린 보람도 있었고
거둬들일 적에는 곡식알 하나하나가 금싸래기만치로 천 년 만 년 살 것 겉고 …
이자는 봄이 좋구마. 물이 오르는 나무를 쳐다보고 있이믄 산다는 기이 멋인지 알 것도 같고."
밭둑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하던 어떤 촌로의 말이었다.
"봄이 좋기야 하겠으나 보릿고개를 생각하면 봄이 길다, 생각은 안 하시는지요."
소지감이 말했을 때 노인은 의미를 모를 웃음을 띠었다.
"옛날에 자식 하나를 두고 상처한 남정네가 자식 하나 딸린 과부를 만내서 살게 되었는데,
과부의 심성이 본래 고운지라 남편의 자식을 제 자식맨치로 조금도 차별이 없이 귀키 키우는 기라.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데리고 온 자식은 실하게 저절로 크는 것 겉은데
남정네 자식은 예비고 벵치레만 하고 해서 남정네는 이모저모로 살피보는데 아무리 보아도
여자가 잘못하는 일은 없어.
해서 남정네는 밤에 잠을 안 자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데 아이랑 여자가 한창 깊이 잠들었을 직에
이상한 일이 생긴기라.
여자로부터 실안개가 나더니 그기이 남정네 자식을 넘어서 제 자식 쪽으로 쏠리더라
그런 얘긴데,
그런께 그기이 천륜이라는 기지."
"네에."
"흉년 뒤의 보릿고개는 참말로 기차제. 씨종자까지 털어묵는 그 지경이믄.
허나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기이 아니라.
땅에서 실안개를 마시고 허허헛헛, 늙으믄 봄이 좋은 기라.
사방에 실안개가 서리서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찔레나무를 보아.
땅에서 생멩수를 뽑아 올리니라고, 저 빨간 줄기를 보라고."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13-4부 1권>(나남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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