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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서평] 『사기』에서 총(聰)·명(明)·강(强)을 새기다

 

 

[서평] 『사기』에서 총(聰)·명(明)·강(强)을 새기다

김갑수 | 2014-11-06 10:54:3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사기』에서 총(聰)·명(明)·강(强)을 새기다

 


“항왕이 노하여 꾸짖을 때는 천 명의 사람이 모두 꿇어 엎드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휘하의 어진 장수들을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것은 ‘필부의 용기’일 따름입니다.

 

 

항왕은 또한 사람을 인견할 때면 공손하고 인정이 넘치고 말씨도 부드럽습니다.

아픈 자가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하지만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내려야 할 때는 인수를 넘겨주기가 아까워

닳아 없어질 때까지 주무릅니다. 이는 ‘아낙네의 인정’일 뿐입니다.”

 - 이상 『사기열전』 , 서해클래식, 옌볜인민출판사 번역, p.362-363

 

이것은 한신이 유방 앞에서 항우를 평가한 말이다.

 

 

한신은 ‘필부의 용기’와 ‘아낙네의 인정’을 거론했다.

한자어로 전자를 필부지용(匹夫之勇)이라고 한다.

후자에 해당하는 한자어는 없지만 굳이 만든다면 필부지정(匹婦之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흡족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상찬해마지 않는 필부지용과 필부지정을 한신은 단번에 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자주 생기는 갈등의 항목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아무 때나 필부지용이나 필부지정을 내세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주말 내내 <사기열전>을 음미하며 지냈다.

여기서 ‘음미’라고 한 것은 말뜻 그대로 어떤 사물이나 개념의 속 내용을 새겨서

느끼거나 생각하며 읽었다는 뜻이다.

이로써 나는 사기를 세 번째 읽은 셈이다.

소년 때의 ‘사기’와 청년 때의 ‘사기’에 비해 지금의 ‘사기’는 사뭇 다르게 읽혔다. 이것만으로도 사기는 ‘영원한 고전’임이 틀림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기』는 중국의 인문학자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감내하면서

이룬 노작이다. 그리고 『사기』가 위대한 것은 <사기열전> 덕분이라고 한다.

 

 

이 인물전은 ‘공자가 그리워 한 나라 주나라’에서 시작하여 ‘힘으로 인(仁)을 가장한’ 춘추시대와 ‘칼로 천하를 다툰’ 전국시대를 거쳐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과 초·한의

쟁패전 그리고 재통일을 이룬 한 제국까지를 다룬 책이다.

 

 

 

 

<사기열전>의 최대 강점은 균형과 조화를 이룬 사서라는 점이다.

 

 

이 사서에는 객관적 주관과 주관적 객관이 동시에 성취되어 있다.

이런 강점은 편견이 거세된 다양성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30명의 세가 편에는 제후가 대부분이지만 공자 같은 서생도 있고

진승 같은 반란자도 들어 있다. 열전 편에는 관료와 학자가 많지만 일자(점장이),

화식(부자) 영형(아양꾼) 골계(개그맨?) 등이 망라되어 있어 흥미를 배가한다.

 

 

물론 이 책에서 가장 중시되는 대상은 중국 인문학의 총화인 6가의 인물들인데,

 6가란 유가, 묵가, 도가, 법가, 음양가, 명가(논리학)를 가리킨다.

 

 

책의 문맥으로 보아 사마천의 시대에는 유가와 묵가가 최고의 대접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사마천이 최고로 친 인문학은 무엇이었을까?

명기된 것은 아니지만 사마천이 내심 가장 수준이 높다고 본 것은 도가

즉 노자와 장자가 아니었나 싶다.

 

 

유가의 공자가 도가의 노자를 평가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고 하니, 나로서는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아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11쪽)

 

 

노자의 학문이 깊다고 평가하는 사마천은 도가에 대해,

“음양가의 큰 법칙 속에서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취하고,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채택하여 시간과 사물의 변화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게 한다.”

극찬해 놓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내 속의 생각을 읽고 정리해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사기』는 유명한 고사성어의 산실이기도 하다.

 

 

曲學阿世(곡학아세), 兎死狗烹(토사구팽), 囊中之錐(낭중지추), 傍若無人(방약무인),

 背水陣(배수진), 焚書坑儒(분서갱유), 四面楚歌(사면초가), 臥薪嘗膽(와신상담),

 指鹿爲馬(지록위마), 千慮一失(천려일실), 口尙乳臭(구상유취), 多多益善(다다익선) 등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고사성어만 해도 50여 개가 넘게 나온다.

 

 

<사기열전>은 높은 도덕적 가치를 실천한 인물인 백이·숙제 편을 서두에 배치했다.

그러고는 이토록 높은 도덕적 가치를 실천한 사람의 삶이 비참하게 끝났음을 환기하면서 ‘과연 천도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질문한다.

 

 

이에 대응하여 마지막에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행복한 삶을 이룬 인물전(화식열전)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정신과 물질의 균형을 맞추어 놓았다.

흔히 『사기』는 도덕적 가치만을 우선시한 책으로 인식되는데 앞으로 이런 시각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가을날 외출하여 이발도 하고 영화 몇 편을 보려 했던 나는 <사기열전>을 음미하느라 주말 시간을 다 탕진(?)해 버렸다.

그러나 다음 구절 하나를 읽은 것만으로도 이런 손실은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 있을 자리가 아닌데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탐위’라 하고,

받아야 할 명예가 아닌데도 받는 것을 탐명이라고 한다. -

 

 

다음 것은 또 어떤가?

 

- 남의 말을 듣고 반성하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의 눈으로 자기를 밝게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고 한다. -

 

 

나는 당분간 총, 명, 강 이 석자를 마음에 두고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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