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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 사랑했어요

 

김현식 / 사랑했어요

 

김현식 [프로필]

 

 

출생 : 1958년 1월 7일 서울시 중구 인현동

사망 : 1990년 11월 1일

가족 : 누나 김혜령, 모친 윤진희, 부인 김경자, 아들 김완제

 

학력

서울 수유초등학교 졸업

서울 보성중학교졸업

서울 명지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대표곡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내사랑내곁에', '그대와 단 둘이서', '골목길', '한국사람',

'봄여름가을겨울' 등...

 

 

 

수상경력

1988년 제3회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대상

1991년 제6회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대상

 

 

 

 

김현식 - 사랑했어요

 

 

 

 

돌아서 눈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이제와 생각하면 당신은

내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인 것을

나에게 심어 주었죠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마음 다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마음이 아프다는 걸

돌아서 눈감으면 잊을까

정든님 떠나가면 어이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생전보다 더 많은 사랑과 칭송을 받고 있는 김현식은 그만의 특유한 음색으로 포크, 팝, 소울, 록, 블루스, 발라드, 펑크에 이르는

다채로운 장르의 사운드를 구사한 싱어송라이터이다.

 

 

들국화, 신촌블루스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가수 1세대로 '영혼의 소리'로 인생과 사랑을 노래한 가수이며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굴곡진 삶을 살다가 감으로써

대중과 대중음악인들 모두에게 전설적 인물로 각인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후배가수들의 공연과 음반발표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1958년 1월 7일 김현식은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분이었고 할아버지 역시 사업을 하셨던 분으로

                                                  충남 홍성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또한 충북 옥천에서는 유명한 만석꾼의 아들로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온 영문학자로,

                                            그는 부유하고 풍요로운 집안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서울에서의 바쁜 사업관계로 김현식은 어머니와 함께 옥천 외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와 여섯살 밑으로 역시 지금 캐나다에서 뮤직엔지니어링을 공부하던 동생이 있다.

 

 

 

 

               1964년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2학년 때 충북 옥천에 있는 죽향초등학교에 전학하였으며,

                                       4학년 때는 서울에 있는 삼청초등학교로 또다시 전학을 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그 학교 6학년에 재학중이었으나 당시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

                                    그러다가 정부의 학군제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이렇게 잦은 전학은 그의 어린시절에 친구를 사귈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지만,

 

 

        엄격했던 아버지 밑에서 그의 국민학교 재학 시절엔 좋은 성적을 유지했으며 1970년 전교4등으로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정릉의 큰집에서 사촌형들과 함께 살때 홍익대 내 그룹사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고 있었던 사촌형 양국정씨가

                                                   그에게 기타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빠르게 연주실력이 향상되어 가면서 당시 박인수의 <봄비>, 비틀즈의 <Oh darling>, CCR의 <PloudMary>등의

                   곡을 주로 연주하였다. 하지만, 기타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의 성적은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고,

                  또 아이스하키부에서도 활동하면서 중학교 초반에 상위권을 유지했던 그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런 와중에 간장공장을 운영하던 부친의 사업실패로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방황하던 그는

                                       중학교 3학년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973년 당시 명문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음악을 하고 싶은 마음에

                       후기로 밴드부가 유명하다는 명지고를 택해 전교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했다.

 

 

             그는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로 밴드부에 들어갔지만, 밴드부는 그의 음악적 욕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1학년이었던 김현식에게 돌아오는 것은 잔심부름이나 기합뿐이었고, 악기를 만질 기회도 없던 김현식이 한번은 트럼펫을 몰래 불다가

                                      선배에게 구타당하고 결국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졌었다.

                이후 그는 밴드부에서 탈퇴당해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내고 만다.

 

 

 

                 1975년 자퇴후 종로에 있던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던 그는 무명 통기타 가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음악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기 시작했다.

 

 

                      노래가 하고 싶었던 그는 그 무렵 음악다방에서 개최하는 가수 지망생을 위한 오디션이 있었는데

                  호세 펠리치아노의 <Once There was a Love>, 비틀즈, CCR의 노래를 부르며 그의 실력을 과시했고,

                      이후에는 업소의 오디션을 통과해 종로의 '벌판', 명동의 '쉘브로', '썸씽'등에서 노래를 불렀다.

 

 

               당대 스타 가수였던 이장희의 친동생인 이승희와 듀엣을 이뤄 당시 송창식 등 스타들이 드나들던 최고의 나이트클럽이었던

                                                       국도호텔 나이트클럽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승희와 헤어진 뒤에는 '신촌블루스'의 보컬출신인 김동환이 찾아와 듀엣을 제안했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작약도에서 한달간 지옥훈련을 감행한 후 듀엣으로 활동했다.

 

 

 

         

                1976년 여러 업소에서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던 그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개그맨 전유성 앞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전유성은 김현식의 노래를 듣자마자 감격하여 그를 격려한 뒤 당시 사업가, 음악기획자로도 한국 가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장희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이장희 역시 열아홉 소년 김현식의 목소리에 큰 감동을 받고 김현식의 음반제작을 돕기로 했다.

 

 

         1978년 그의 첫앨범의 녹음이 거의 끝나고 마스터테이프가 나올 즈음 이장희가 사업부도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앨범발매는 무산되고 말았다.

         쉬지 않고 밤무대로 내몰리던 경제적 궁핍은 아직 20대 초반의 어린 김현식을 술과 대마초에 빠져들게 했고,

                                          결국 그는 대마초사건으로 8개월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1980년 대마초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이 수록된 1집앨범을

                                              선보였지만 대중적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 앨범에서 그의 목소리는 마지막 노래인 '내사랑 내곁에'와 달리 맑은 미성을 바탕으로 소울, 록,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선보였다.

 

 

                             또한 3집에 다시 실리는 '떠나가 버렸네' 등이 실려 있지만 별다를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밤무대를 떠도는 무명의 가수로 생계를 이어간다.

 

 

 

 

1982년 방황을 하며 거리를 헤매이던 그 시기에 신촌에서 옷가게를 경영하던 김경자씨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음반실패와 외롭게 지쳐있던 삶의 끝에 만난 사랑이었기에 그는 봄을 맞아 명동의 YMCA 강당에서 지인인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동부 이촌동 공무원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고, 그해 12월에 아들 김완제를 얻게 된다. 막상 사랑 하나만 믿고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앨범 한장을 낸 무명가수가 현실을 살아가기에는 버거웠기에 부인의 솜씨를 빌어 피자가게를 내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이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최신식 서립를 갖춘 대형가게에 밀려 문을 닫게 되었고, 결국 그는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세종호텔 나이트클럽에 나가면서 밤무대 활동을 시작했으며, 후에 크라운호텔과 하얏트호텔 등에서도 활동했다.

 

 

 

 

 

1984년 당시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동아기획에서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트되어 그해 10월에 '사랑했어요'를 타이틀곡으로 한 2집 앨범을 녹음하여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서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 '당신의 모습' 등이 크게 사랑받았으며, 한곡을 제외한 모든 곡을 그가 직접 작곡했다고 한다. 노래가 발표되자 방송보다는 음악다방, 나이트클럽 등 다운타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김현식의 이름도 서서희 알려지기 시작했다.

 

블루스, 발라드, 소울, 팝, 펑키, 트로트 등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스타일의 음악이 담겨 있는 2집 앨범에서 '사랑했어요'가 대 히트하게 된다. 2집 활동때까지 그는 주로 밤무대에서 공연을 많이 했다. 전인권과 함께 한 그룸 <검은나비>의 리드보컬, 조원익이 리드하고 최구희가 기타를 치던 그룹 <동방의빛>리드보컬로 있기도 했으며, 이 그룹의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팀을 이끌어가던 <메신저스>의 보컬도 맡으면서 밤무대 최고의 가수로 부각되었다.

 

 

1985년 밴드의 필요성을 느꼈던 그는 김종진, 전태관, 고 유재하와 후에 <빛과소금>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는 박성식, 장기호 등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였으며 이들의 연주로 3집 앨범을 녹음한다. 녹음 후에 유재하는 음악적 견해를 달리하며 탈퇴하고 장기호의 소개로 박성식이 들어왔다.

 

 

 

 

 

 

1986년 지금도 회자되고 널리 불리우는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을 타이틀로 한 3집 앨범을 12월에 발표한다. 이 음반은 30만장이상이 팔려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는 '비처럼 음악처럼'은 비가 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라디오의 전파를 탔으며 '그대와 단둘이서', '쓸쓸한 오후' 등이 연이어 인기를 끌면서 그에게 여대생 팬군단을 선사했다. 이 앨범에는 유재하의 작품 '가리워진 길' 등이 수록되어 있다.

 

4월부터는 개인적인 음악활동 뿐아니라 이정선, 엄인호, 한영애, 정서용 등 실력있는 가수들과 뜻을 같이해 연대 앞에 위치한 <레드채플린>에 모여 잼 형식의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정해진 형식에 갇혀있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이 타 가수들처럼 방송에 얽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안핬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펴치면서 이른바 '얼굴없는 가수'로 유명해졌다. 이러한 형태의 가수들을 통칭하는 '언더그라운드'라는 분류가 생기고 불리운 것도 이즈음이었다. 방송을 타지 않고 음악만으로 대중과 교류를 이루는 실력파 가수들의 대명서처럼 쓰인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분은 동아기획의 가수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김현식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연출하는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해 나갔다.

 

3집 앨범 발표이후에는 라이브 극장 등에서 주로 공연을 하였으며, 이정선, 엄인호 등의 영향을 받아 그만의 블루스로 음악적 색깔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과도 음악적 견해차를 보이며 3집 발표 후 밴드는 해체되었다. 잠시 그를 행복하게 해주던 부인과 아들이 떠난 위 그의 음주량도 급격히 늘어났고 파출소를 때려부수는 등 술에 의한 피폐는 날로 커져갔다. 이미 알코올중독이 된 그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정신병동에 격리되기도 했는데, 사랑을 노래하고 이별을 서글퍼하던 그의 노래들은 대부분 병원에 갇혀 있으면서 만들어진 곡들이다.

 

 

 

 

 

1987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던 그는 11월 밴드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대마초 상용혐의로 또다시 구속되고만다. 집행유예를 받고 잠시 몸을 추스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다시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피붙이 가운데 그를 가장 많이 이해하던 누이마저 캐나다로 이민가고, 아내와도 불화 끝에 별거를 하게 된 후 그는 아침에 눈뜨면 소주병부터 찾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독선적인 성격에 반발하는 멤버들과도 이견이 생기면서 그는 더욱 힘들어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은 눈에 띄게 망가져갔다. 힘차던 그의 목소리가 탁해지면서 그의 노래에서는 삶에 대한 피곤함과 권태로움이 음악에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1988년 2월 재기를 위해 삭발을 한 채 63빌딩에서 공연한 재기 콘서트 무대에서 6000여명의 팬이 응원하는 모습에 용기를 얻고, 그해 9월 '언제나 그대 내곁에' 등이 실린 4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부활하였다. '언제나 그대 내곁에'가 큰 사랑을 받았고, 윤상의 데뷔 곡 '여름밤의 꿈', 고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3집의 '우리이제'에 이어 '한국사람'이라는 하모니카 곡이 그의 연주로 한 트랙을 차지했다. 이정선과 엄인호의 <신촌블루스>에서 절절한 필링의 블루스를 열창했던 그는 강인원, 권인하, 신형원 등과 영화 <비오는날의 수채화>의 메인 타이틀을 부르며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된다.

 

이 앨범에서 '한국사람'이라는 곡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작곡 실력 뿐 아니라 하모니카 연주실력도 뛰어났던 김현식은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인 하모니카 연주자 리 오스카(Lee Oskar)의 'My Road'라는 작품을 '한국사람'이라는 작품으로 리메이크해서 연주했다. 훗날 그의 사후에 김현식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던 리 오스카는 그에게 화답하는 뜻에서 96년도 자신의 앨범 <Those Sunnt Days>에서 '내사랑 내곁에'를 테디 앤드레아스(Teddy Andreas)의 목소리와 'My Love, Besides Me'라는 제목으로 수록하였다.

 

그의 4집 앨범은 연말이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가수에게 수여되는 제3회 일간스포치 골든 디스크상을 수상하였다. 골든디스크상 수상에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서의 수상은 최초였다. 한국적인 감성과 혼을 허스키하면서 샤우트한 음성으로 토해낸 노래가 대중에게 꾸준한 사랑을 모았으며 평론가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그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신촌블루스>멤버들과 음악적 교류를 함께 하며 라이브 무대에 같이 섰다.

 

 

 

 

 

1989년 그는 <신촌블루스>와의 인연으로 그들의 2집에 객원보컬로 참여하여 그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된 '골목길' 등을 불렀다.

 

 

1990년 3월 '넋두리'등이 실린 자전적 앨범인 5집을 발표하고, '이별의 종착역'을 녹음한 신촌블루스 3집 앨범도 동시에 발표되었다. 하지만 3집을 발표할 즈음에는 의사가 '술을 한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할 정도로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재기 콘서트 이 후 밤샘 녹음, 폭음, 줄담배 등은 그에게 치명적인 건강악화를 불러와 병원에 실려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건강이 악화된 와중에도 그는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 김명수와 함께 그의 유작앨범인 6집 녹음에 들어갔으며, '신촌블루스', '비오는날의 수채화'팀과 전국 각지를 누비며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다.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는 그는 죽기 한달 전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11월 1일 오전에 녹음을 한다며 입원해 있던 병원을 나와 집에서 마지막 녹음을 계속했다. 결국 최악의 몸 상태에서 녹음하던 6집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오후 5시 20분에 자택에서 서른셋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병원에 들어가기 직전 녹음한 그의 6집은 결국 유작앨범이 되었고, 200만장 넘게 팔린 이 앨범은 언더그라운드의 별이었던 김현식을 언더그라운드의 영원한 전설로 만들어 주었다.

 

 

 

 

 

  1991년 2월 9일에 63빌딩에서 김수철, 이정선, 전영록, 강인원, 조하문, 한영애, 김태화, 봄여름가을겨울,

최호섭, 권인하 등 30여 명의 가수들이 참가한 추모콘서트가 열렸으며,

               사후 발표된 6집앨범 타이틀곡인 '내사랑 내곁에'는 크게 히트하여 제6회 일간스포츠 골든디스카 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작곡자 오태호에게는 작곡가상의 영예를 안겨주기도 했다.

그의 사후 각종 시상식에서는 김현식의 이름이 불리워졌지만,

그를 대신해 8살된 그의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하며 많은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996년에는 병상에서 즉흥으로 녹음한 노래들 중 미발표된 노래들로 구성된 앨범 <Self Portrait>가 발표되었다.

 

 

2002년 1월 22일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김현식이 병마와 생사의 투쟁을 벌이던 당시 병상에서 통기타 하나에 의지해 절규하던 육성앨범이 공개된 것이다.

 

 

1990년 지병인 간경화로 입원했던 서울 동부 이촌동 금강병원 병실에서 만난 여자환자에게 테이프로 녹음해 넘겨주었던 미공개 곡들이

공개되면서 뒤늦게 빛을 보게 되었다.

 

 

21곡이 녹음된 이 테이프는 유일한 악기였던 기타 하나로 노래 시작과 중간,

 끝부분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박수소리, 잡음 등이 생생하고 현장감있게 담겨 있던 것이었다.

 

 

김현식의 마지막 목소리가 담긴 음반이 나온 계기는 당시 테이프를 넘겨받은 윤혜경이라는 이름의 30대 초반 여성이

병상에서 김현식으로부터 직접 이 테이프를 넘겨받아 보관해오다가 2001년 11월 모방송에서 김현식 추모뉴스를 접하고는

음반 출반을 결심하게 된다.

 

 

 

병상에서 통기타 반주로 녹음한 미발표곡들을 모은 앨범은 <The Sickbed Live>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다.

 

 

 

 

 

2006년 그의 아들 김완제도 유학을 마치고 가수로 데뷔했다.

그의 모친은 가수 데뷔를 반대했으나 음악을 좋아하고 재능을 보이는 아들의 의사를 존중해 가수 데뷔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의 데뷔는 김현식과 함께 일했던 지인들이 도왔으며 음색은 아버지의 거칠고 남성적인 음색과는 달리 여린 미성이다.

 

 

2010년 김현식 사후 20주기 추모 음반은 2번에 걸쳐 나왔다.

먼저 나온 <비처럼>에는 13명(팀)의 가수가 김현식의 노래를 리메이크해 불렀고,

두번째 발매된 <음악처럼>에는 전인권, 박상민, 임창정, 티맥스 등 15명(팀)이 참여했다.

 

 

<음악처럼>에는 고 김현식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김완제가 '내사랑 내곁에'와 '언제나 그대 내곁에'를 아버지와 함께 부르는 노래로 실렸다.

과거 나탈리 콜(Natalie Cole)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 냇 킹 콜(Nat King Cole)과 'Unforgettable'을 불렀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사랑했어요-악보

 

 
돌아서 눈감으면 잊을까
정든님 떠나가면 어이해
발길에 부딪치는 사랑의 추억
두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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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 깊은곳에 찾아와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인것을 
나에게 심어주었죠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마음 다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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