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난지 6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로 그 어느 때보다 나라 사랑의 마음과 조국 수호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데요.
하지만, 전국 고교생 50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9%(349명)가 한국전쟁을 ‘북침’으로 답했다고 하는데요. 6·25전쟁의 발발 형태를 ‘남침’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북침(北侵)과 남침(南侵)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헷갈리거나 전쟁의 발발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6·25전쟁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남침으로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간 계속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기간 양측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 넘나들고,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약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국토는 피폐해지고 전쟁 이후 더욱 극심한 문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6·25전쟁은 침략전쟁이자 이념전쟁의 성격을 내포했는데요. 북한정권이 남·북한 내부의 민족갈등 속에서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됐으며 ,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한국정부를 타도하고 통일된 공산주의국가 수립을 목표로 개시된 전쟁입니다.
6·25전쟁 중에 진행되었던 휴전회담은 전쟁이 발발된 지 3년 1개월, 회담이 개시된 지 24개월만에 유엔군의 미국 대표, 북한군, 중공군 대표가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종전이 아니라 휴전인 상태로 마무리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피해로 아직도 고통 받는 사람 많아
6·25전쟁은 우리민족이 치른 전란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이고, 엄청난 피해를 입은 전쟁입니다. 군사작전으로 인한 1차적 전쟁피해와 이념투쟁에 의한 2차적 피해가 중첩되었으며, 최신 무기가 동원됨으로써 살상력을 더하였습니다.
인명피해에 있어 한국군(경찰 포함) 63만 명, 유엔군 15만 명을 포함 총 78만 명이 전사·전상·실종 되었으며, 북한군 80만 명, 중공군 123만 명 등 약 203만 명의 손실이 발생하여 군인 피해만도 총 281만 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1952년 3월 15일까지 발생된 전재민의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섰으며, 휴전 때까지 이 숫자는 훨씬 늘어났겠지만 결과적으로 전체인구의 1/2 이상이 전화를 입었습니다.
당시 피해를 입지 않은 국민은 없었으며, 전·사상자의 혈육과 이산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6.25전쟁의 연장선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당시의 참혹했던 피해 현황
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알아봅시다!> 6.25전쟁사(3권), 2005, p.144.
출처 : 국방군사연구소, , <한국전쟁피해통계집>, 1996, p.144.
출처 : (가) 국방부, <한국전란 1년지>, 1951, p.D35 (나) 국방부, <한국전란 1년지>, 1951, p.D37 (다) 국방부, <한국전란 3년지>, 1954, p.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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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은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닌 잠시 쉬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는 6.25전쟁 같은 끔찍한 일이 발생하지 않고, 한반도에 하루 빨리 평화가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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