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역사와 전체상
일본에게 식민지란 일본 자본주의 모순의 분출구이자 생명선이었다.
이 결과 식민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은 군인과 경찰, 관료뿐 아니라
지주와 자본가, 말단의 서민층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배구조는 지배계층의 비호 아래 이름 모를 수많은 민간인,
즉 조선에 이식된 '풀뿌리 식민자'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 수는 식민 지배 말기 75만 명을 넘어섰다.
이 책은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역사와 전체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역사서이다.
1876년부터 1945년까지 70년 동안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다양한 군상을 통해
일본 식민 지배의 특색을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일본의 조선정책과 조선관에 조선 내 일본인이 미친 영향,
그리고 그들의 언행과 행동이 조선인에게는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살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외무성 등의 관변단체 사료, 일제시대 지방사 자료,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전기와 회고록 등 다양한 사료를 적절히 활용해
조선 내 일본인의 성・직업・지역별 통계, 각 시기별 인구 통계와 그 변화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그 구체적인 통계자료는 독자로 하여금 일본 식민정책의 특징,
그리고 시기별 역사적 사건과 인구 변화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전기와 회고록을 인용함으로써
식민시기 수많은 일본인이 이 땅 한반도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으며,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세밀하게 전달한다.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
이 책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가 조부모와 부모의 체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잘못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담보를 획득하는 것에 있다.
물론 지금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그 옛날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위험이 크다.(4쪽)
이와 같은 저자 다카사키의 문제의식은
"왜 우리가 그들―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과도 연결된다.
'가학'과 '피학'의 서로 다른 위치에 있지만,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역시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위험이 큰'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국내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최근 일제강점기의 일상생활과 근대, 근대의식에 대한 다양한 연구 성과물이 책으로 엮어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시공간 안에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도외시되어온 것이 현실이다.
이는 지금까지 식민정책사 연구의 경우 한국사 영역으로 간주되어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 내 일본인의 사회와 사회조직,
역사 인식에 대한 연구는 마치 일본사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는 국내의 연구 풍토와도 연관돼 있다.
그러나 식민정책을 연구하면서 식민지 지배자와 지배집단의 내부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다면
그 연구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조선 내 일본인에 관한 국내 연구를 촉발시키는 데 작지만 소중한 불씨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 그들은 누구인가?
―75만 일본인의 다양한 군상을 통해 본 풀뿌리 식민 지배의 실상
■ 조선 내 일본인의 성별, 직업별, 지역별 특성
개항 초기 조선 내 일본인의 인구 구성은 현저한 남녀차를 확인할 수 있다.
가족을 동반한 도항이 조약 위반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천지 조선'으로의 도항이 그들에겐 '모험'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영주를 고려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였다.
이후 여자와 아이들이 늘어났는데,
여성 중에는 유곽에서 일하는 예창기와 작부(이를 통틀어 게이샤라고도 한다)의 비율도 함께 증가했다.
개항 직후 조선으로 가장 많은 거류민을 보낸 지역은 전통적으로 조선과 관계가 밀접했던 나가사키(長崎)였다.
한국강점 이후는 지역적으로 조선과 가까운 야마구치(山口)나
후쿠오카(福岡)를 비롯한 규슈(九州)와 주고쿠(中國) 지방이 주를 이루었으며,
식민 후기로 갈수록 관리와 경찰이 늘어나면서
도쿄와 기타 대도시 출신자들, 홋카이도(北海島)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지방의 일본인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개항 초기 조선 내 일본인의 지역별 분포는 대단히 불균등해서 경기도와 경상남도가 거의 절반을 차지했는데,
이는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에 일본인이 집중했음을 나타낸다.
일제 말기에는 만주침략정책과 군수공업화정책과 연관되어 한반도 북부 지역에도 일본인이 급증하였다.
반대로 농촌 지역에서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 높지 않았다.
개항 이후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은 군인과 경찰, 관료, 상인과 기업경영인,
그리고 교사와 교수, 문학자와 같은 지식인층, 회사원과 지주, 농민, 대륙낭인,
주부와 학생, 유곽에서 일하는 예창기, 작부 등 각양각색의 직업 구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주 초기에는 상인과 조선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대륙낭인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거주자 수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가옥을 짓기 위한 목수와 페인트칠공의 숫자도 함께 증가했다.
고리대와 전당포의 경우 통계수치보다 많은 수의 일본인이 이를 운영했는데,
이는 식민시기를 통틀어 계속 유지되었다.
공무와 자유업은 모든 시기를 통해 20~40%를 차지했다.
농림과 목축업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는 어업・제염업과 더불어 절대적인 감소 경향을 보였다.
광공업은 침략전쟁의 확대로 인해 조선의 '대륙병참기지'화를 추진하던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늘어났으며,
오히려 상업과 교통업이 이상할 정도로 비대한 구조를 나타냈다.
통계 자료를 보면 기타・무직・무신고 등 정체불명의 일본인이 많았다.
이는 조선 내 일본인 사회가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조선인 위에 군림하는 사회구조였음을 잘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