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공노할 일제, 위대한 광개토태왕비 훼손·조작
19세기 후반, 역사 왜곡하려 비문 전면 불태우고 석회 발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03-27 12:07:22
![]()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압록강 중류 북안의 구도(舊都), 환도성지(丸都城址)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 비에 대해 일본은 한반도 진출을 나타내는 역사왜곡의 좋은 사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왜가 신라 백제를 정복하고 고구려와 대립하며 싸웠다”고 조작했다. 즉 고대 조선 출병과 조선남부의 경영설을 세웠다. 신묘년(辛卯年), 서기 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가서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북방의 고구려와도 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다 허구 임에도 일본의 역사왜곡은 조선침략을 위해 거침없이 행해졌다. 광개토태왕 비문과 ‘일본서기’의 신라정벌 등과 결부시켜서 도출된 것이라는 일본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 없는 조작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 우리의 연구는 어떠한가. 광개토태왕 비의 해석은 일본의 정설과는 현저하게 다르고 그 시각도 판이하게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광개토태왕 비의 연구가 어느 정도 인가 살펴 볼 필요를 느낀다. 이 비가 언제 발견 되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과 중국 일본 학자에 알려 졌는가 라는 매우 초보적인 것까지도 의론(議論)이 여러 가지로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진실을 전해주고 있는가. 판단이 용이하지 않다. 태왕비는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에 휘말려 있다. 일본이 역사왜곡자료로 첫 손꼽히는 이 비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연구되고 있으며 그 자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비의 탁본이 만들어진 연대나 촬영한 연대와 확실한 비문의 탁본, 사진을 기준으로 해서 각 자료에 만들어진 시기의 전후관계를 명확한 위치를 점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각 연구자의 의론을 자료적으로 검토 할 필요가 있다. 이번 회는 이에 관해 비가 발견된 후의 상황과 조작에 대하여 살펴보고 져 한다. 비문발견 후 상황과 탁본에 대한 그 의문점과 진상 비문발견 후의 상황을 보면, 1880년 발견하고 그 2년 후 1882년 9월~12월간에 비면을 덮고 있었던 이끼와 덩굴을 불살라서 비문의 판독이 가능하게 된 점, 그러나 거친 불로 태워서 비표면의 각처가 벗겨져서 귀중한 비문이 다수 잃었던 점 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탁본을 뜨기가 어려웠다. 이끼 등이 불살라진 다음 비면이 노출됐고 그 당시 현지에는 요절(凹凸)과 같이 매우 심히 울뚝 불뚝한 비면에 견딜 수 있는 대형의 종이와 양질의 먹, 솜씨가 좋은 탁본(拓本)을 뜰 탁공(拓工)이 없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엄지와 식지와 장가락으로 글자의 획 주위를 돌려가며 글자의 획과 자형(字形)을 그려내는 탁본)이 만들어진 점으로 보아 제대로 된 탁본을 뜰 수 없었다. 본격적인 탁본을 뜰 수 있었던 것은 발견 5년 후 1887년이 돼서다. 그런데 1899년인지 그 전년(前年) 가을경 비 전면에 회를 바르고 그 석회면 위에 원 비문과 다른 많은 비문이 일본의 의도적으로 글자를 새겨져 있는 사실도 분명하게 됐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어떻게 연구 됐는가를 주목해온 이진희 선생(명치대학 강사)은 연구과정에서 일어난 의문점을 하나하나 풀어나갔고 결국 “학문적 해결이 끝나 아무 문제도 없다”는 기존 결과를 깨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호태왕비 수수께끼 ‘好太王碑の謎’의 저자이기도 한 이 선생은 연구과정은 감추어진 비문의 연구에서 놀라운 의문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호태왕 비가 교통이 불편한 산속 깊은데 있었기 때문에 학자가 직접 가서 연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주로 쌍구가흑본에 의해서 연구해 왔다는 것이다. 거기서 현존하고 있는 비문의 탁본이나 사진을 비교검토해 보면 고고학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여러 의문이 나와서 어느 각도에서 연구해 봐도 벽에 부딪쳤다고 이진희 선생은 말하고 있다. 고고학이나 금석학(金石學)의 상식에서는 예전부터 명확히 판독 된 비문이 풍화작용이나 탁출회수(拓出回數)의 증가에 따라서 점차 불명확 하게 되는 것인데 호태왕비는 일본 육군참모첩자들에 의해서 조작됐기 때문에 그 전반대여서 어려운 점이다. 조작한 비문(碑文)에 의의제기(疑義提起) 당시 제국박물관(帝國博物館)의 감독관이었던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는 1898년에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라는 군인이 1884년(실제는 그 전년인 1883년)에 가져온 탁본을 연구해 ‘고려고비고(高麗古碑考)’를 썼다.(考古學會誌) 第2編 第1~3號). 그리고 얼마 없어 이를 정정(訂正)하는 논문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를 썼다 (考古學會誌) 第2編 第5號). 그는 새로 쓴 이유로서 전 수호(數號)에 쓴 게재한 고려고비고는 사가와(酒匂景信)의 원납본(原납本)인, 현재 제국박물관에 진열한 것에 의해서만 고증하게 돼서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가와(酒匂景信)의 납본에는 반드시 자획(字劃) 및 위치가 다소 잘못돼 있다고 보았는데, 당시 일본에는 그자 외에 비교할 납본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고마쓰 미야 덴가(小松宮殿下)의 소장(所藏)한 별본(別本)을 볼 수 있어서 구 납본이 신 납본과 다른 것이 있음을 알고 이를 지적했다. 계속해서 청일전쟁 때 만들어진 ‘고마쓰 미야(小松 宮)’ 소장(所藏)의 탁본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신 납본은 달아 없어진 것이 많아서 “석면의 요철이 심하기 때문에 자형이 선명하지 않은 곳이 많아 매우 읽기 어려운 곳이 있어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비문조작(碑文造作) 그런데 그 9년 후의 1907년 4월 프랑스의 동양사학자 샤반느가 현지에서 입수한 탁본(拓本) ([通報]Ⅱ~Ⅸ, 1908年)은, 진흑(眞黑)의 자획이 명확한 문자가 탁출(拓出)돼 있다. 또 그로부터 6년 후 1913년에 세끼노 데이(關野 貞),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조사 시 촬영한 사진에는 비면(碑面)에 종선(縱線)이 그어져 있어서 그 간의 비문이 정연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朝鮮古蹟圖譜) 第)1卷 1915年과 1935年 寫眞 參照) 한국역사조작의 원흉(元兇)인 이마니시 류는 그 때의 조사에 따라서 이 20척(尺) 8촌(寸) 5분(分)의 높이가 있는 방주형(方柱形)의 거석(巨石)의 사면(四面)에 비명(碑銘)을 새겨 각행(各行) 41자(字) 결로 해서 선을 그었다. 각행 41자 결로해서 제1면에 11행(行), 제2면에 10행, 제3면은 14행, 제4면은 9행으로 괘선(罫線)으 그어서 각행을 구획(區劃)해 상하의 양단(兩端)에 횡선(橫線)을 그었다고 쓰고 있다. ([廣開土境好太王陵碑に就て] [(朝鮮古史の硏究)]. 한편 1935년 집안을 실지 조사한 이케우치 히로시는 “사면의 상부와 하부에는 횡선이 있어서 명문의 천지(天地)를 그리고 …명문의 각행을 그리기위해서는 약 5촌(寸)의 간격을 둔 종선이 여러 계선(界線)을 연거푸 그어져 있다”고 했다.([廣開土王碑發見の由來と碑石の現狀], [史學雜誌)第49編 第1號). 그런데 고마쓰 미야(小松宮) 탁본(拓本)에 보아지는 바의 비면(碑面)은 요절이 매우 불선명한 비문이 많았는데 후에 탁본에는 전보다 더 선명하게 예외 없이 글자가 명확한 비문이 탁출돼 있다. 즉, 1913년과 1935년 촬영한 사진이 말해주듯 광개토태왕의 비문은 더 선명해지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고고학이나 금석학(金石學)의 상식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조작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광개토태왕 비문에 관해서는 4~5세기의 역사를 조립하는 위에서 근본자료로서 지금까지 많은 논문이 쓰여 지고 있는데 그것은 있지도 않은 허구의 ‘조선출병’을 일본은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적 상식이 되게 했다. 그런데 일본은 잘못된 기본 자료에 대한 비판이나 시정은 하지 않고 은폐하고 조작하고 왜곡된 역사를 번듯하게 만들어 열등의식을 불식하고 우리 역사를 폄하하며 배제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8세기 이후 더욱 노골화 됐다. 거기서 호태왕의 비는 역사왜곡에 가믐에 단비를 만난 것으로 변조조작 왜곡에 전력을 경주(傾注)한 것이다. 따라서 그 조작은 시기가 내려가면 갈수록 전에 없었던 종선(縱線)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비를 조작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시기가 지남에 따라서 비문이 현저히 달라지는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도 그 원인을 찾고 그들의 조작을 밝히기 위해서는 촬영연도와 탁출년(拓出年)을 확실한 것을 기준으로 해서 자료의 편년(編年)을 바로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편년작업이라 하지만 자료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갖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때문에 일본이 조작한 종선(縱線)을 그은 것을 밝힐 수도 어렵다. 그래서 일본은 역사왜곡이 더 과감하게 감행해 갔다. 비문조작은 비 전면에 회를 바르고 멋대로 했다 이 광개토태왕비에 대하여 한국인으로 가장 앞장선 사람이 이진희 선생인데 그는 그의 저서 ‘好太王碑の謎’에서 그 사실들을 많이 밝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가와의 원납본 외에 교토 대학의 히비노 다케오(日比野丈夫) 교수는 나이토 고난의 구장(舊藏)의 탁본(拓本)과 사진 등을 보고 있는데 그 내력을 전해주고 있다. 나이토(內藤湖南)는 1906년 5월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간도문제의 역사적 조사를 의뢰받아 그해 여름 서울과 심양(瀋陽)에 가서 문헌조사(文獻調査)를 했다. 나이토 사진은 1909년((明治42年) 10월부(付)의 교토 우편국 소인(消印)이 있는 봉투에 탁본과 같이 들어 있어서 , 통감부 간도임시파출소(統監府 間道臨時派出所)의 시노다 지사쿠(蓧田治策)으로부터 보내진 것이 확인됐다. 1907년 8월, 통감부의 지령으로서 젊은 군인 등이 간도에 들이닥쳐 간도의 남반분(南半分)을 실질상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일본외무성은 현지지세의 급변을 봐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우선 ‘간도를 식민지화’하는 가치가 있는가, 아닌가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임무를 나이토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三田村泰助 [內藤湖南] 中公新書 參照). 나이토는 그 이듬해인 1908년 여름 간도 각지의 실지조사를 해서 그때 용정(龍井)마을의 통감부임시파출소 소장 사이토(齊藤季治郞) 육군대좌 시노다 지사쿠 (蓧田治策)와, 남야준성(楠野俊成) 두 사무관과 만나고 있다. 시노다 지사쿠(蓧田治策)가 이틈 해 광개태왕능비(陵碑)의 탁본과 사진을 나이토에게 보낸 것은 이 때 나이토로부터 자료수집의 의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이토 사진에서 보는 비 조작과 은폐 나이토 사진을 보면 사면에 비문이 있는 곳에는 석회가 두텁게 바르고 문제의 종선이 지워져 있다. 그래서 그 위에 석회를 바른 그들은 제멋대로 비를 변조한 새 비문을 새겨 놓은 것이다. 즉 글자를 변조 한 것이다. 여기서 석회를 두텁게 바른 것에 대하여 1913년 비를 자세하게 조사한 이마니슈 류는 이미 비4면 전면에 석회를 바르고 자형만을 나타나게 하여 자외(字外)의 면에는 소 요절을 메워서 평평하게 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는 이마니슈 류가 그의 논문에 이 회를 두텁게 바른 것은 탁공이 한 것이라고 쓰고 있으나 전면에 석회를 덥고 있는 사실에 관해서 간파(看破)하고 있는 것이다. ([廣開土境好太王陵碑に就て] [(朝鮮古史の硏究) (參照)]. 한편 이마니슈 류가 조사 5년 후 1918년에 비를 조사한 도쿄제대(東京帝大)교수인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는 탁본을 선명히 하기위해서 의미가 의문시 되는 문자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고 궤변을 토하고 있다. [(歷史地理)] 第32卷第5號)]. 일본은 회를 바를 필요도 없는 비에 회를 바르고 또 평평하게 한 것은 그들의 의도대로 역사왜곡의 목적이 있기에서다. 이는 어떤 변명으로도 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은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박선희, 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黃聖圭,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詳說日本史,‘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사회과학원 조선고고학 총서 52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
조선도 망각한 고구려 ‘집안’, 우뚝 선 광개토태왕비
집안=황성, 장군총=황제묘 기술…17세기 조·청, 무인지대 만들어 역사가 못들어가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04-17 10:32:01
![]()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은 자기들 역사의 빈약하고 열등함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 한국사를 훼손해 그 자리에 일본 역사를 끼어 놓는 수법을 택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파렴치한 짓을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하고 왜곡하는 그들은 일본국 성립이 자생적으로 생성되고 일본국과 일본왕가도 자생왕조라고 말하고 있으나 일본왕조 발생은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건너갔다. 즉 한국유민이 세운 나라가 일본이다. 분명한 것은 단군 이래 한국이 일본왕조의 발상지이고 실크로드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상가야 왕조사’라고 지칭하며 한국고대사와 일본역사의 접점을 찾는 중요자료로 ‘환단고기’가 덧붙여져 일본서는 이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은 자기들의 역사를 말할 때 ‘고사기’, ‘일본서기’를 내세우나 이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손본 것이 본(本)이 됐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이 일본의 호족이 돼 이 호족들 역사가 합해져 ‘고사기’ ‘일본서기’가 됐다. 일본은 역사에 관한 한 처음부터 그 출발이 그 인물 연대 등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지금 일본왕가의 계보(系譜)와 계도(系圖)도 제멋대로 위조되고 있는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 일본은 원래 외래문화민족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일본인 고유의 민족으로서 형성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거의 근대사에 속하는 시대였다. 즉 7세기에 와서 야마토(大和)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일 간의 민족은 확실히 외국인 관계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국가성립과 문화도 그들의 소위 도래인(渡來人)이라는 우리 유민에 의해서 왕조(王朝)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우리 유민에 의해 문화발전도 한 것은 제 아무리 일본이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712년에 나온 ‘고사기’는 한일공유(韓日共有)의 비사(秘史)로 암호화해서 전승돼 왔다. 너무나 기괴한 환시적(幻視的) 수법을 쓰고 있기 때문에 ‘텐무(天武 673~686년) ’이후의 황손(皇孫)에 전해지는 책이다. 그러나 인황(人皇) 1대로부터 10대까지의 황통(皇統)이 중복해서 쓰여 진 것을 아직도 일본인 자신들도 모르고 있다고 일본역사 학자들이 말하고 있을 정도다. 한편 일본왕가의 창고 같이 여기는 ‘고사기’가 한국과의 역사의 결별인양 말하는 작자도 있으나 그 ‘고사기’의 내용인즉 바로 우리의 역사기록이 대부분이다. 이 ‘고사기’는 텐무왕(673~686년)의 명령으로서 성별을 알 수 없는 히에다 노아레(稗田阿禮)가 송습(誦習)한 전승(傳承)을 안만려(安萬呂)가 712년 찬록(撰錄)한 3권을 말한다. 즉 신대(神代)로부터 스이코(推古 593~628년)까지의 황실계보와 역대천황의 설화(說話)가 기술돼있는데 5~6세기경의 제기(帝紀) 구사(舊辭)가 개작(改作)돼서 편집된 것이다. 그 문체(文体)는 한자 음훈(音訓)을 혼용해서 고어(古語) 그대로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 역시 ‘백제사서’를 참고해 우리역사를 베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고사기’ ‘일본서기’ 등 국가체제 확립에 대응하는 국가적 문화사업으로서 천황중심의 정치의식이 크게 세워지는 나라다. 광개토태왕 비 조작도 그 일환으로 된 것이다. 일본은 가야(伽倻)가 일본에 가서 일본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도 감추려 하는데 역사의 진실은 감출 수 없다. 가야는 뒤져있는 일본의 농업을 비롯해서 각기 기술을 가진 자가 일본에 가서 청동기와 철 등 대륙의 문물 문화를 일본에 전수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기술(記述)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승리는 과장하고 패배는 고쳐서 개서(改書)하고, 망명은 서술(敍述)하지 않는다’는 수법이 역사를 작성하는 기본원칙이었기에 일본역사는 이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즐기는 일본 스모(씨름)도 노미스쿠네 라는 가야인이 전해줬다. 일본에서는 이 노미스쿠네를 스모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 스모도 일본고유의 전해오는 일본의 씨름이라 하나 이 ‘스모’도 우리가 전해준 것이다. 오늘은 광개토태왕의 비문조작을 둘러싼 연관관계에서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輯安)의 역사와 일본에 의한 비문변조 왜곡상황에 대한 논점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집안은 고구려의 황성, 황성평이었다 집안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의 하나이다. 고구려는 수도를 8번이나 옮겼다. 그러나 나라를 잃으면 도성이름도 잃는 것인가! 집안은 고구려의 수도 중의 하나였으나 우리는 이마저도 모르며 다 잊고 살아 왔다. 더욱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민족이 집안을 지배하게 되자 아예 고구려와는 무관 한 것 같이 됐다. 그것은 동북지방에서 새로 등장해 이 지역을 지배한 금과 원 대에 와서도 우리와는 관계없는 양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같이 모르고 지내온 것은 우리 측의 문헌은 물론 중국 측에서도 집안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집안이 조선의 문헌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조선의 국방상, 압록강 대안(對岸)의 움직임이 주목되기 시작한 14세기 후반에 들어 와서이다. 즉 고려는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1361년 강계(江界)에 독노만호(禿魯萬戶)를 뒀으나 그 9년 후 인 1370년 북방의 여진족을 치기 위해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북원(北元)의 동녕부(東寧府)를 치고 있다. 이때 이성계 장군은 집안을 통과하고 있는데 15세기에 편집된 ‘고려사’에는 그 곳을 황성(皇城)이라고 쓰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성’은 여진(女眞)의 ‘황제성(皇帝城)’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집안을 망각하고 있었다. 광개토태왕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1445년에 편집돼 그 2년 후 주(註)를 붙여 완성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다. 여기에 보면, 집안은 속전(俗傳)으로서 ‘대금성황제(大金城皇帝)’ 라고 말하는 고성지(古城址)가 있어 그 북방 7리(里)의 곳에 비도 북방에 석릉(石陵) 2기(基)가 있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기술 내용이나 이정(里程)이 정확한 것을 봐서 이것은 실제의 견문에 따른 기술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광개토태왕릉비를 실제로 안 봤기 때문에 고성지가 금의 ‘황제성’이라하는 속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때 이미 비가 이끼와 덩굴에 덮여져 비문판독이 할 수 없는 상태가 돼 있기 때문이다. 명(明)나라 문헌에는 ‘황성’이 ‘제도(帝都)’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피해 음이 상통하는 황성(黃城)으로 맞춰 놓았다.(高麗史 辛口 5年條). 15세기 중엽 이후 여진족이 때때로 조선 북방 국경지대를 침범하게 되자 침입의 거점에 이용되는 집안 동정에 주의를 끌게 되어 그 문헌이 글로 남아 있으나 집안을 황성, 황성평으로 돼 있다. ‘용비어천가’ 보다 41년 후의 1486년에 편집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집안을 황성평으로, 장군총을 황제묘로 설명 하고 있다. 1487년에 국경지대를 시찰한 성현(成俔)의 시(詩) ‘망황성교(望皇城郊)’에는 광개토태왕비에 관한 묘사가 있으나 거기에도 ‘한불독자(恨不讀字)’로 돼 있다. 역시 이끼와 넝쿨 때문에 비문이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성현보다 50년 후의 1536년 2월, 집안 주변의 스며든 여진족에 대해서 압록강 반(畔)으로부터 퇴거하게끔 한 유고(諭告)한 심언광(沈彦光)도 시를 써서 남겼다. 그는 “황제유분 거갈비존(皇帝遺墳巨碣(碑)存)”이라고 거비(巨碑)가 있다고만 말하고 있다. 더욱이 심언광보다 60년 후의 1595년, 청의 태조 누루하치(奴兒哈赤)를 찾아가 그들과 통호(通好) 요청에 답하는 한편, 그 동정을 살피고 돌아온 신충일(申忠一)은 그 때의 견문을 기록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을 남겼다. 이 도기에는 조선 만포진(滿浦鎭)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집안을 거쳐서 누루하치의 거성(居城) 흥경노성(興京老城)에 이르기까지의 형세와 요해(要害), 주요지명의 이정 및 크고 작은 50에 이르는 여진부락이며, 그 추장의 이름 등을 옆의 지도에 자세히 기록했다. 누루하치의 본영도에서도 확인 한편 누루하치의 본영도(本營圖)에는 97항목에 걸친 견문사항이 기록하고 있다. 집안 부근에의 관찰은 매우 정확해 “황성(皇城=통구성通溝城)을 좌우로 보면서 거시항고개(巨柴項古介=고개의 뜻) 길을 건너가면 왼쪽에 비가 보이고 더 나가 오른 쪽에 황제묘(皇帝墓=장군총將軍塚)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비 가까이 있는 대왕능(大王陵)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그 때 이미 대왕능이 붕괴해서 오늘 보는 것과 같은 석괴(石塊)산이 돼 있기 때문이 아닌가 보고 있다. 장군총은 우리 대왕이 묻힌 곳으로 보고 있다. 이상과 같이 보면 조선에서는 북원(北元)이나 명(明)과의 관계, 15세기 중엽이후는 여진족의 국경 침범과 관련해 그들의 침입로에 해당하는 집안 지방의 동정이 국방상 매우 중시됐다. 때문에 자세한 조사, 관찰이 행해져서 그때마다 기록이나 변방의 지도가 작성됐다. 이러한 기록에는 예외 없이 ‘장군총’이나, 광개토태왕릉 비의 기록이 기재돼 있음에도 그것들을 다 금(金)의 ‘황성’ ‘황제묘’라고 돼 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비가 여전히 이끼와 넝쿨로 덮여 져 있어서 비문판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진 각 부족을 연합한 누루하치는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에 걸쳐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범했다. 그러나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용감한 반격을 맞아 패퇴를 거듭한다. 그 결과 청의 지배계급은 조선에의 침략을 더 할 수 없어 1637년 조선과 청국 간에 소위 봉금제(封禁制)를 하기로 결정해 시행하게 된다. 그것은 압록강 대안의 청국 측에 광대한 무인(無人)지대를 둬 사람들의 거주는 물론 간전(墾田)도 금지해 위반자는 사형을 포함한 엄벌로 처치했다. 여기서 집안 지방이 ‘봉금지대’에 들어간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그 때문에 광개토태왕비의 발견은 더욱 늦어진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간첩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에 의한 발견으로 훼손과 마멸 회를 바르고 비문조각을 새겨 놓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조선이 늦어진 비 발견과 고증이 왜 이뤄지지 않았나? 그 이유 조선은 17세기 후반 경부터 조선에서는 실학사상이 발생과 함께 조선의 역사 지리의 실증적 연구가 성해 각지의 금석자료의 수집이 행해졌다. 그러나 봉금제 때문에 금석학자(金石學者)는 집안까지는 가지 못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릉 비와 집안의 고적(古蹟)에 대한 종래의 잘못된 지식을 고칠 기회가 없었다. 18세기의 고명한 금석학자 김재노(金在魯)가 편집한 ‘금석록(金石錄)’에 광개토태왕릉 비에 관한 것이 빠져 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다산(丁茶山-1762~1836년)이 환도성(丸都城) 등의 고구려의 지명 고증 속에 집안의 고적과 결부시키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중국인 간에서 장군총을 송(宋)의 휘종(徽宗)의 묘(墓)라고 하는 말이 흘린다든가 조선지도에 통구성(通溝城)이 오국성(五國城)이 됐다고 하는 것도 집안의 유적에 관해서 바른 판단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뛰어난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전국을 구석구석을 답사해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고 그 속의 ‘변방고(邊方考)’에는 국경지대의 방위시설에 관해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대안의 만포(滿浦)나 벌등진(伐登鎭)까지 가고 있으나 집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황묘’와 ‘황성’을 말한데 끝이고 비의 존재를 말하고 있지 않다. 조선금석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이다. 그는 금석문을 문헌사료의 보족자료로 보고 몸소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의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성비와 황초영비(黃草嶺碑)의 연구는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그도 광개토태왕릉비의 존재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뿐만 아니라 이것은 도광연간(道光年間. 1821~50년)에 수록된 유희해(劉喜海)의 ‘해동(海東金石苑)’은 김정희와 그의 친구 조인영(趙寅永) 등의 힘을 빌어서 수집한 자료에 의한 것이나 그 속에 광개토태왕릉 비문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유희해의 제자이고 청말 고관으로서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반조음(潘祖蔭)도 많은 조선 금석학자와 교유(交遊)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885년에 이홍예(李鴻裔)라는 중국인 학자로부터 광개토태왕릉 비의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받을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고 조선 고문헌에 보는 바와 같이 비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나 비문이 판독을 할 수 없는 상태 때문에 집안을 금(金)의 황성 또는 황성평이라 하는 잘못된 속전(俗傳)을 고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글들은 주로 李進熙 著, ‘好太王碑の謎’ 55面~62面,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4面 以下 參照引用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
일제, 광개토태왕비 이끼 불태우고 글자 조작
1800년 발견하고도 숨겨…일 학자들 시기 등 중구난방 기술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04-24 11:44:24
![]()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일본시조연대부터 조작 역사구성 첫 단추부터 허구 어느 나라나 고고학(考古學)의 시대구분은 물건을 가공(加工)하는 이기(利器)의 발달에서 찾았다. 이 이기의 발달은 인류 생산발전의 기초가 되고 있기에서이다. 이같이 고고학에서는 문화의 발전단계를 이기의 재료에 의해서 구분함이 상식이다. 즉, 그것은 석기시대와 금속시대로 대별되고 석기시대는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쓰는 구석기시대와,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로 나누고 또 금속기(金屬器)시대는 청동기(靑銅器)시대와 철기(鐵器)시대로 나누어 말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일본열도의 성립은 언제인가? 일본은 지금부터 약 1만년 전 대륙으로부터 분리되고 일본인은 원주민과 한국 등 주위의 민족과 혼혈로 돼 있다 . 일본은 구석기시대에는 거주한 흔적이 없고 신석기시대에 와서야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의 역사를 보면 신석기시대 일본인들이 수렵(狩獵)과 어로중심(漁撈中心)의 삶을 할 때 대륙에서 건너간 우리 유민에 의해 일본에 농경(農耕)이라는 생활의 변화에 의해서 점차 현 일본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목축은 후에야 개시된다. 문화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일본에 건너간 유민이 선주(先住)민족을 정복했음에도 일본은 이도 아니라 하며 중국 한민족(漢民族)의 문화발전이 일본열도에 미쳤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조작의 효시인 신무기원(神武紀元)도 창작한다. 이는 일본 학자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의 소위 진무덴노(神武天皇)가 즉위한 해가 서기전으로 결정된 것은 세이토쿠 다이시(聖德太子)의 수사(修史)사업과 관련해서 중국 참위설(讖緯說)의 신유혁명설(辛酉革命說)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즉, 신유년(辛酉年)에는 혁명이 일어나는데 신유년(辛酉年)이 21회가 거듭 반복되면 더욱 큰 혁명이 일어난다는 사상이다. 스이코덴노(推古) 9년 신유년(辛酉年. 1601년)을 기점으로 해서 이보다도 1260년 전의 신유년(辛酉年) 서기전 660년을 진무덴노(神武天皇) 즉위의 해로 제멋대로 정한 것이다. 진무덴노(神武天皇)의 즉위는 서기전 660년이 아니다. 이는 허구이다. 일본의 1대왕은 오우진(應神. 서기363~394년)이다. 이것을 봐도 일본의 역사가 얼마나 제멋대로 고무줄 같이 1000년을 늘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1000년을 늘리고 있다고 이런 일본의 역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던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면서 이런 거짓 역사를 매 꾸기 위해 고대에 우리나라를 정벌하고 지배한 것 같이 조작하기 위한 호자료(好資料)로 광개토태왕의 비를 조작해 마치 일본이 고대에 대륙에 진출한 것처럼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한 것이다. 이번 회는 일본이 광개토태왕의 비를 1880년 발견하고도 이를 숨기며 그간 제멋대로 글자를 훼손하고 조작하는가를 거짓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좀 더 깊이 살펴보고자한다. 호태왕비 1880년 발견 이끼제거 불로 태운 후 글자 조작한 일본 광개토탱왕비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1888년 11월에 나온 무라오카 료스케(○岡良弼)의 고구려고비(高句麗古碑 如蘭史話卷八)이고, 1889년 6월에 출판된 ‘회여록(會餘祿)’ 제5집(集)에는 현지사람의 말로서 땅속에 묻혀있던 비가 300년 전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데 1888년 천진(天津)의 공인(工人) 4명이 이것을 파내어서 비면을 씻어서 겨우 비문이 읽게 되어 때때로 현지에 간 일본인 모(某)가 공인(工人)이 만든 탁본(拓本) 두 폭 중 한 폭을 얻어서 갔다고 쓰여 있다. 그 이름도 밝히지 않는다. 이 문장에서는 비가 언제 발견되고 탁본을 일본에 처음으로 누가 갖고 갔는지 시기는 언제인가를 알 수가 없다. 광개토탱왕 비에 관해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인 1891년 쓴 간 마사도모(管 政友)의 ‘고려호태왕비명고(高麗好太王碑銘考)’-(史學會雜紙 第22~25號) 등이 비의 발견을 1882년으로 잡고 있다. 1893년에 쓰여진 나가미치요(那珂通世)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사학잡지 제47~49호)와 1898년의 미야게요네기치(三宅米吉)의 ‘고려고비고(高麗古碑考)’-고고학회잡지 제2편 제1~3호) 등은 종래 일본 학계에서 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말하고 있다. 즉, 일본에서는 광개토태왕비의 발견은 1882년이라는 것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의 비문 상태에 관해서는 크나큰 의견들이 나눠지고 있다. 명치년간(明治年間)의 일본문헌에는 흙속에 묻혀 있었다든가 흘러가는 물에 씻어졌기 때문에 비면이 요철(凹凸)이 일어났다고 돼 있으나 대정기(大正期)의 문헌에는 비면에 자라난 이끼(苔)를 불살랐기 때문에 요철(凹凸)이 매우 달라졌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1935년에 집안(輯安)을 조사한 이게우치 히로시(池內宏)는 비가 발견된 것은 회인현(懷仁縣)의 설치된 1876년에 지현(知縣=知事)이었던 장월(章樾)이 배하(輩下)의 관월산(關月山)이 덩굴(蔓草)속에서 비를 발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通溝 3卷, 1938年). 이러한 일본의 문헌에서는 그 출판된 시기에 의해서 비가 발견한 해와 그 경로, 당시 비면의 상태에 관해서 기술이 현저하게 달라서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중국문헌에서의 기록은 어떠한가 중국의 연구논문은 일본보다 늦은 1895년의 왕지수(王志修)의 ‘고구려영락태왕고비가(高句麗永樂太王古碑歌)’가 최초이다. 그는 봉천부군량서(奉天府軍糧署)의 근무한 인물로서 1895년 4월에 비의 ‘초탁본(初拓本)’을 보고 비의 건립연대 고증을 시도했다. 그러나 비가 언제 발견되고 ‘초탁본(初拓本)’이 어떻게 해서 봉천에 전해졌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며 비문에 관해서 금석학적(金石學的) 검토와 석문의 작성도 하지 않고 있다. 또 왕지수(王志修)보다 5년 후의 1900년에 정문작(鄭文焯)의 ‘고려영락태왕비석문찬고(高麗國永樂太王碑釋文纂攷)’가 간행됐다. 거기에는 그가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에서 비의 ‘정탁본(精拓本)’을 산 것은 1898년으로 기록한다. 이것은 이미 왕지수(王志修)와 성욱(盛昱)이 ‘고증문(考證文)’을 쓴 것을 들은 후이다. 그 자신이 본 육심원(陸心源)과 전운룡(傳雲龍)의 발문(跋文)은 간단해서 내용도 불충분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전 비문을 살펴봄과 동시에 각 문자와 사건 지명 등에 관해서 많은 문헌을 펴서 세밀하게 고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비문은 유리창(琉璃廠)에서 산 정탁본(精拓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이 1889년 6월에 출판된 ‘회여록(會餘祿)’에 출판된 제5집의 그것을 베낀 것에 불과 했다. 또 비의 존재를 알리는 과정도 ‘회여록’에 휘말려 비가 땅속에 묻혀있는 것이 300년 전에 점차 나타났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정문작(鄭文焯)의 저서에 의해서 비 발견의 과정을 알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청말(淸末)~중화민국초의 대표적 금석학자 라진옥(羅振玉)은 1909년에 ‘용려일찰(俑廬日札)’과 ‘신주국광집(神州國光集)’을 쓰고 그 속에서 광개토왕비의 건립연대를 고증을 함과 동시에 석문(釋文)을 작성하고 있다. 그의 석문은 중국에 있어서 비문연구에 큰 영향을 줬으나 그는 엄격한 비문 비판을 하지 않고 자획(字劃)이 명확한 것이 오래다고 하는 금석학의 상식에 따랐기 때문에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더욱이 비 발견에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청말의 고명한 금석학자 양수경(楊守敬)도 1909년 ‘고려호태왕비(高麗好太王碑)’를 출판해 ‘환우정석도(寰宇貞石圖)’에 자획이 명확한 탁본을 실었다. 그 ‘고려호태왕비’에는 그가 청일전쟁(1894~95년)경의 만든 소위 탁본을 구입했으나 문자의 불명확한 곳이 많아 일본인의 석문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적혀 있다. 그 후 1902년 겨우 동북지방(만주)에서 관리를 한 조O경(曺O卿)으로부터 자획이 명확한 탁본이 보내온 것이 쓰여 있다. 그러나 비 발견의 경로와 그 연대를 알 수 있는 기술은 여기에도 없었다. 이상과 같이 보면 지금까지 중국문헌에서는 비가 언제 발견되고 발견시의 비문의 상태가 어떠하였는지! 에 대해 아무것도 적혀 있지가 않아 알 수가 없다. 개간 작업하던 농민이 발견 그 후 탁본유출과 계획된 음모 1918년 고변광(顧變光)은 ‘몽벽이석언(夢碧簃石言)’을 쓰고 그 속에서 예전부터 지금까지의 사학(査學)의 목적으로서 집안에 간적이 있는 대유침(戴裕抌)으로부터 들은 말을 옮기고 있다. 그것은 비는 1875년 개간 작업을 하고 있던 농민에 의해서 발견됐다고 쓰고 이어서 이끼가 비면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분(糞)을 바르고 비면을 태워서 비면의 이끼를 제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승간은 ‘몽벽이석언(夢碧簃石言)’보다 4년 후 출판한 ‘해동금석원보유(海東金石苑補遺-1922)속에서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 처음으로 북경의 반조음(潘祖蔭)의 손에 들어온 것은 1874년의 일이다. 청조(淸朝)의 국자감제주(國子監祭酒)의 성욱(盛昱)이 자금을 모아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의 명탁공(名拓工) 이운종(李雲從)을 파견해서 본격적 탁본을 만들게 한 것은 1889년이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이 틀림없는 것이라면 비가 발견된 것은 1874년이나 그 이전이라고 할 것이다. ‘요동문헌징략(遼東文獻徵略)’에 쓰여진 장연후(張延厚) 발어(跋語)에는 반조음(潘祖蔭)이 비문을 입수한 것은 광서초(光緖初)의 일로서 반조음(潘祖蔭)이 이대룡(李大龍)이라는 석공에 명해서 50본의 탁본을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더욱이 청말~중화민국초에 동북 각 현(縣)의 지현을 한, 담국환(談國桓) ‘요동문헌징략(遼東文獻徵略)=수찰(手札)’에는 회인현(懷仁縣)을 둘 때 그 지현(知縣)이었던 장월(章樾)의 부하 관월산(關月山)이 넝쿨에 휩싸인 비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그 후 그는 1929년이 돼서 요녕성박물관 소장(所藏)의 탁본에 발어(跋語)를 써서 거기에는 관월산(關月山)이 비를 발견한 것은 ‘광서(光緖) 8, 9년(1882, 3년)에 일이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탁본은 봉천성독학사(奉天省督學使)의 양고가 그의 부친께 부탁해서 탁출(拓出)한 것이라는 것, 그 때 비면의 요철(凹凸)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선덕지(宣德紙)로부터 단단한 조선지로 바꿈에 의해서 탁출(拓出)이 가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광개토태왕의 비 발견의 시기와 그 과정에 관해서 중국인 학자의 기술(記述)이 현저하게 달라져 있다. 그런데 농민이 이 지방에 들어가 개간 작업이 시작한 것은 회인현(懷仁縣)을 둘 때인 1876년(光緖 2년)보다 후이기 때문에 1874년 발견설과 1875년 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 장연후(張延厚)의 광서(光緖)초 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폭을 가지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반조음(潘祖蔭)이 이대룡(李大龍)을 파견해서 50본의 탁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반조음(潘祖蔭)이 이대룡(李大龍)을 시켰다는 것은 그와 매우 친한 관계에 있었던 오대징(吳大澂)이나 엽창치(葉昌熾)가 이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그들은 이대룡(李大龍)의 파견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또 오대징(吳大澂)은 성욱(盛昱)이 파견해서 취한 이운종(李雲從) 탁본에 관해서 처음으로 본 정탁본(精拓本)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은 철저한 음모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조작 왜곡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은 李進熙 著, ‘好太王碑の謎’ 63面~70面, 以下 參照引用했다.) 이 비의 발견은 1800년에 발견됐음에도 이를 숨긴 일본의 음모를 다음 칼럼에서 더 깊고 폭넓게 일본이 광개토태왕 비문을 계획적으로 조작한 사실을 밝혀 가고자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
문 닫은 조선, 기회 잡은 일제의 태왕비 난언
농민이 최초 발견, 처음 탁본 몇글자만…쌍구가흑본 허구 드러나
![]()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은 1873년부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 정한파(征韓派)가 조선출병을 주장했다. 이를 일본의 일부 사족 층(士族 層)이 불만전환 등을 하려는 의미도 있어서 라고 주장한다. 오구보(大久保利通) 등이 반대했다고 했으나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실시의 시기, 정부 내의 주도권싸움이 본질적인 대립요인이었다. 때문에 1874년에는 오구보는 대만 출병을 단행 하고 이에 반대한 기도(木戶孝允)도 1875년 운양호가 강화도에 불법침입하고서도 강경한 방침을 주장한 것이다. 또 1876년 불평등의 한일수호조규를 맺고 조선에 불평등개국을 강요 강제하고, 부산, 인천, 원산의 개항과 일본영사재판권의 승인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부속협정’, ‘무역규칙’에서 조선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화폐의 유통을 인정하게 했다. 이것은 막부(幕府) 말 일본이 구미열강으로부터 강요된 불평등조약과 같은 내용의 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구미(歐美)에 대한 ‘굴종과 타협’, 아시아에 대한 ‘강압과 간섭’이라는 근대 일본의 이중성격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이를 직시하지 못하고 당파싸움과 부정부패로 일본이 광개토태왕의 비(碑)마저 훼손조작하며 역사를 거꾸로 메우고 있는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워 배상금 지불과 공사관수비대의 주둔 등을 인정, 침략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1884년에는 ‘갑신정변’과 ‘동학란’ 등 혼란을 지속하고 있었는데도 외세의 움직임에는 관심이 없고 쇄국의 족쇄를 걸고 국제정세에는 아예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청일전쟁(1894~95년)의 승리로 청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배제하고 1902년 영일동맹(英日同盟)을 계기로 조선과 만주를 둘러싼 러일의 충돌은 급기야 러일전쟁(1904~05년)으로 발전해 영국과 열강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승리 하게한다. 당시 일본은 전비부족과 무기결핍으로 전쟁계속능력이 없었음에도 국제정세는 러시아 혁명전선의 격화, ‘피의 일요일 사건’ 등으로 전쟁계속이 곤란하였을 때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포스마스조약’을 중개하며 조선은 무원고립이 된다. 그 결과 조선에 있어서 일본이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하여 일본이 조선침략에 박차를 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에의 군사적 거점이 되게 한다. 이같이 일본은 대륙침략에의 음모를 일찍부터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를 역사적 사실에서도 찾는 결과 광개토태왕 비 조작을 거침없이 하게 되는 만행을 감행하게 된다. 오늘은 일본이 광개토태왕비의 발견과정에서 야기된 연대의 조작에서부터 가증스러운 자획조작과 탁본이 조작된 전후의 사실 관계를 밝혀 사실을 바로 하려는 것이다. 과연 광개토태왕의 비는 언제 발견했고 탁본은 언제 했나 분명한 것은 일본은 태왕의 비 발견도 속이고 탁본도 속이는 음모를 감행했다. 청말~ 중화민국 초에 동북(만주)각 현의 지현(知縣=知事)을 지낸 담국환(談國桓)의 기술(記述)과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의하면 장월(章樾)이 회인현(懷仁縣)의 설치위원이 된 것은 광서(光緖) 3년으로서 동 8년 1월까지의 지현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월과 종시 행동을 같이 해온 관월산(關月山)은 광서 8년 1월에는 회인현을 떠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장월이 지현을 근무하던 광서 8~9년에 비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관월산의 기억이 잘못인가, 들은 것이 잘못들은 것인가. 잘못된 것이었다. 실제는 1881년(광서 7년)의 여름경에 ‘황연만초중(荒煙蔓草中)’에 비를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담국환의 부(父)는 개평현(蓋平縣)이나 승덕현(承德縣)의 지현을 근무한 담광경(談廣慶)에서들은 이야기를 다음 같이 말 하고 있다.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의하면 그는 담국환의 발어(跋語)에 보는 바와 같이 승덕현(承德縣)지현이였던 광서(光緖)11년6월 황제의 부름에 도입(都入)해 그 후 바로 장월이 동현(同縣)에 부임하고 있어서 담국환이 관월산과 만난 과정과 연대에 관해서 발어의 기술은 바른 것이라 보아진다. 그런데 담국환의 기술은 회인현의 설치위원으로서 현지에 향한 장월의 부하인 관월산의 말에 따른 것이나 그가 만초(蔓草)에 뒤덮여 있는 비를 보고 있었던 점, 전비문의 탁본은 만들 수 없어 수문자(數文字)만 수탁(手拓)한 것 등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사학(査學)을 위해 현지에 간 대유침(戴裕抌)이 비면은 처음 창태(蒼苔)에 뒤엉켜져 있었다는 사실과 합치한다. 따라서 비 발견의 경로에 관해서의 담국환의 그것은 신뢰가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반조음(潘祖蔭)의 제자로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을 하고 있는 청말(淸末)부터 민국초의 비문연구의 대가 엽창치(葉昌熾)의 기술을 보면, 그는 어석(語石) 속에서 비는 1880년(광서 6년)에 벌채 개간 작업 중에 농민이 발견했다. 1885년에 이홍예(李鴻裔)가 탁본을 2부 입수해서 그 중 1부를 반조음에게 보낸 점, 그것은 30~40매가 있었기 때문에 10일 이상 걸려서도 연결이 되지 않아 만날 수 없었던 점, 그 후 이운종(李雲從)이 그곳으로 감에 따라 비로소 정탁본(精拓本)을 얻을 수 있었던 것 등을 말하고 있다. 엽창치(葉昌熾)는 김정희(金正喜) 등 조선의 금석학자(金石學者)와의 교유(交遊)를 통해서 조선의 금석학에도 밝게 또 기술의 정확함에서도 정평이 있는 학자이다. 특히 반조음의 제자이었기 때문에 비문이 북경에 알려진 경로의 기술은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중국인 학자의 기술을 비교검토 했으나 그 결과 엽창치의 기술하는 바와 같이 비는 1880년 광서 6년, 일본류로 말한다면, 메이지 13년에 개간 작업을 하고 있던 농민이 발견했다. 이 보고를 받은 지현인 장월이 그 이듬해인 1881년, 금석학에 밝은 관월산으로 하여금 조사시킨 것이 명백해 졌다. 처음 탁본은 관월산이 몇 자만 탁본한 것 현지에 도착한 관월산은 전면에 이끼와 넝쿨에 얽혀 있는 비를 실견(實見)해서 비문이 읽을 수 있는 개소(個所)를 선택해서 몇 자만 탁본에 의해서 금석애호가에게 나눠 줌과 동시에 자신이 비를 발견한 양 말을 돌린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 장월을 비의 발견자라고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은 그가 이 때 회인현의 지현이었기 때문에 그리 보고 있다. 또한 문헌에 의해서 비의 발견 연(年)을 막연(漠然)과 광서 초로 기록 한 것도 있어 그 광서초를 고변광(顧變光) 등과 같이 광서초년 또는 광서원년이라고 잘못된 기술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미생(李眉生)이 북경의 반조음에게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건 낸 것은 비가 발견 후 5년 후인 1885년의 일이었다. 북경의 금석학자가 ‘광개토태왕 비’의 존재를 아는 것은 비문이 일본에 가져간 2년 후의 일이었다. 북경에 가져간 비문은 엽창치가 쓰고 있는 바와 같이 30~40매의 종이에 사본(寫本)인 쌍구가흑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연결해서 전 비문을 읽어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거기서 성욱(盛昱) 등이 자금을 모아 1889년에 이운종에 탁본용지와 묵(墨), 식량 등을 줘서 집안(輯安)에 보내어 정탁본(精拓本)을 만들게 했다. 일본에서는 이해에 이미 비문의 해독본(解讀本) ‘회여록(會餘祿)’이 출판되는 것이었다. 쌍구가흑본은 언제 만들 졌나? 그 허구조작 밝혀짐 1885년에 처음으로 북경의 금석학자에 알게 된 비문이 4년 후에 이운종이 떠서 돌아간 ‘정탁본(精拓本)’과 어떻게 다른가를 명백히 하는 것이 광개토태왕의 비와 관계되는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께우치(池內宏) 동경제국대학 교수는 1935~36년의 저서에 근거해서 비의 본격적인 탁본이 만들어 진 것을 말한다. 1882년에서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1884년에 가지고 간 비문이 영희가 1882년에 방단산(方丹山)을 파견해서 만든 정탁본(精拓本)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학계에서 널리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가지고 간 것은 봉화현(奉化縣)의 지현인 영희가 만든 정탁본이 아니다. 광개토태왕의 비를 몇 종류를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탁본이 아니라 비문 위에 종이를 넣고 문자의 윤곽을 테두리를 두른 후 묵을 가해서 정본(拓本)같이 만든 쌍구가흑본이라는 것이다. 설령 이께우치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1882년에 정탁본이 만들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 3년 후에 북경에 가져 온 것이 쌍구가흑본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이께우치 설을 철석같이 믿으려한다. 그들의 조작이 사실이기를 바라는데서이다. 그래서 일본 참모본부 편집과장인 오하라 리겐(大原里賢)이 수집(蒐集)한 ‘영희본(榮禧本)이 있음이 니시가와 겐(西川權)의 ’일한상고사의 이면(日韓上古史裏面)(1910년)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 조작들은 다 거짓임이 명백하게 들어난다. 그들은 제국대의 교수를 동원하고 관리, 군인, 농민, 탁공(拓工) 등을 동원하여 속이고 잘못 비를 조작하는 과정의 난언(讕言. 막되먹거나 증거가 없는 말)은 가관이다. 여기서 그들의 난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봉화현의 지현인 영희가 쓴 저서가 중국에서는 간행이 되지 않음에도 일본에서는 이상한 관심을 모우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이 일어난다. 왜 이들은 이런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일본이 요란스럽게 말하는 난언이 중국에서는 단행본 책이 단 한권도 나와 있지 않다 . 이것은 일본이 말하는 광개토태왕비에 관한 난언이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간행이 되지 않음에도 일본에서는 이상한 관심을 모우며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난다. 왜 이들은 이런 관심을 갖는 것인가. 광개토태왕의 조작내용이 사실로 되기를 열망함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으로 빗나간다. 동양문고소장(東洋文庫所藏)의 사본을 보면, 영희는 1903년 12월에 ‘고고구려영락태왕묘비문고(古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攷)’를 써서 거기에는 비를 처음 발견한 것은 회인현의 순검(巡檢)으로 근무한 왕언이라고 쓰고 있다. 즉, 광개토태왕비는 1882년에 봉화현의 지현였던 영희가 입기단산(入丌丹山)을 보내서 비로소 완벽한 탁본을 할 수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영락태왕 묘비란언(高句麗永樂太王 墓碑讕言)’과 그 때 탁본에 의해서 썼다는 전 비문(全碑文-결자(缺字)는 5~6문자 뿐)을 뜬 ‘고구려영락태왕비’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환인현지(桓仁縣志)’를 보면, 회인현 통구구(通溝口)에 순검을 두게 된 것은 광서 4년으로서 그 때 순검(巡檢)으로 부임한 장익(張翼)은 광서에서 16년 까지 근무하고 있어서 비를 발견했다는 1882년 광서 8년에 왕언장은 여기 순검에 근무한 사실자체가 없다. 왕언장이 통구구에 순검이 된 것은 1899년 광서 25년으로서 그 이듬해 다른 데로 전출하고 있다. 영희가 말하는 1882년과 17년이 차가 있다. 한편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의하면 영희가 탁공을 파견했다는 광서 8년의 봉화현의 지현은 영희가 아니라 왕위징(王爲澂)이다. 영희가 부임한 것은 1900년 광서 26년이 되어서이다. 또 문헌에 의하면 그가 파견했다는 탁공(拓)工)의 이름이 방단산(方丹山), 변단산(卞丹山), 형단산(邢丹山)등 가지각색이다. 광개토태왕의 비 발견과 처음 탁본이 탁출에 관해서의 난언의 기술과 조작에 나오는 지내굉(池內宏), 세키구치 유세이 등이 말하는 탁본은 조작이고 거짓임이 판명됐다. 이상과 같이 볼 때 1882년에 완벽한 탁본을 떴다는 것은 거짓으로 동경대학교수인 이께우치의 학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가 거짓의 기사에 휘말려서 1882년 ‘탁출설(拓出說)’을 낸 것이었으나 일본은 이 거짓을 그대로 밀고 가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상은 주로 ‘李進熙’ ‘好太王碑の謎’.41面~78面 參照 引用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
일본사(日本史)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27
역사왜곡 일제, 거짓 들통나니 잠잠한 일본
광개토태왕비 조작 날조…미마나일본부 진실 밝힌 것처럼 연구 계속해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05-08 11:56:08
들어가며 - 부국강병을 앞세운 일본야욕 역사 침탈혈안
일본의 소위 명치유신(明治維新)은 봉건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에로의 출발점이 됐다.
에도막부(江戶幕府)를 넘어뜨리고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수립한 일본은 안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구미제국의 자본주의에 비해서
개국 시의 일본 산업은 매우 뒤져 있었다.
막부도괴(幕府倒壞)와 봉건제도의 폐지에 성공한 메이지정부
막부도괴(幕府倒壞)와 봉건제도의 폐지에 성공한 메이지정부
(明治政府)는 선진자본주의 제국(諸國)에 따라가는 것을
제일의 목표과제로 하였다.
당시 일본의 민간자본은 매우 약체이었기 때문에
메이지정부는 관영모범공장의 설치,
외국인 과학기술자의 도입,
유학생을 파견에 의한 기술자의 양성을 하는 한편
적극적인 근대화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은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이라 불러지고 있다.
그 재원(財源)은 1873년 7월 지조(地租)개정에 의한 농민으로부터 공조(貢租)가 중심이었다.
소위 식산흥업(殖産興業)인데 이것은 농민의 희생위에 강행한 것이라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청일, 러일전쟁 전의 이야기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엄청난 배상과 영토를 할양받았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엄청난 배상과 영토를 할양받았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국은 요동반도, 대만, 팽호제도(澎湖諸島)의 할양(割讓)과
배상금 2억량(2億兩. 당시 일본의 2년 예산에 맞먹었다)을 받았다.
여기서 그들은 전쟁이 돈을 번다는 것을 알았다.
10년 후의 러일전쟁은 그 10배가 넘는 배상금과 화태남반(樺太南半)의 할양(割讓),
10년 후의 러일전쟁은 그 10배가 넘는 배상금과 화태남반(樺太南半)의 할양(割讓),
여순(旅順), 대련(大連)의 조차권(租借權), 남만주철도이권의 양도,
연해주연안의 어업권양도는 침략에로 혈안이 된다.
여기서 메이지정부(明治政府)는 구미압박에 대항하며
여기서 메이지정부(明治政府)는 구미압박에 대항하며
그 대상(代償)을 조선 등 근접한 아세아 여러 나라를 침략했다.
일본자본주의는 군수산업(軍需産業)을 중핵(中核)으로 해서,
지금의 선진국이 다 그렇듯이, 일본도 이를 따르며 발전해 갔다.
여기서 1880년대 일본의 국책은 ‘부국강병’이라는 슬로건으로 인접국의 침략과
그 희생 위에 일본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일본은 여기에 끝이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사 침탈을 위해서도
첫 작업이 광개토태왕의 비문조작이었다.
거침없이 자행한다.
일본이 광개토태왕의 비 조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우렸는지는
일본이 광개토태왕의 비 조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우렸는지는
1880년 비 발견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자명해진다.
왜 그들은 광개토태왕의 비문조작에 집념하며 이미 보아온 바대로 조작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이 있지도 않은 일본이 고대부터 대륙을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들이 있지도 않은 일본이 고대부터 대륙을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오늘은 비문이 언제부터 읽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군부까지 동원하여 해독작업을 어떻게 하였고
조작은폐에 보여주는 그들의 작태는 어떠하였는지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탁본작성을 둘러싼 의혹 드러나다
본격적인 탁본작성을 둘러싼 의혹 드러나다
비문이 언제부터 읽게 되고 본격적인 탁본은 언제부터였나는 일본이 제멋대로 말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미 기술한바와 같이 비의 발견은 1880년이고
그 이듬해인 1881년 관월산(關月山)비를 실견(實見)한 때는 비가 이끼와 넝쿨로 덥혀있어서
전 비문의 탁본이 뜰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때 그가 뜬 몇 자의 탁본을 1885년 청말 ~ 민국 초에
그 때 그가 뜬 몇 자의 탁본을 1885년 청말 ~ 민국 초에
동북(만주) 각 현의 지현(知縣=知事)을 하고 있는 담국환(談國桓)에게 보내고 있으나
이것은 관월산(關月山)의 상역(上役)인 장월(章樾)이 회인현(懷仁縣)의 직을 그만 둔 1882년까지
전 비문이 읽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1882년부터 12월까지 회인현(懷仁縣)의 지현(知縣=知事)을 하고 있는 자는 진사예(陳士藝)이다.
그런데 1882년부터 12월까지 회인현(懷仁縣)의 지현(知縣=知事)을 하고 있는 자는 진사예(陳士藝)이다.
그는 1886년 6월에 오대징(吳大澂)에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재임 중에 비면을 덥고 있는 이끼와 넝쿨을 불태워,
전 비문을 읽을 수 있는 상태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이 때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비의 옆에 살고 있는 주민 초붕도(初鵬度)의 말로는
한편 이 때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비의 옆에 살고 있는 주민 초붕도(初鵬度)의 말로는
“지현(知縣=知事)의 명을 받들어서 장화(長花)를 불태워서 글자를 나타냈으나 일부를 훼손했다”라고 했다. 그 당시 지현(知縣=知事)은 진사예(陳士藝)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대징(吳大澂)은 제정(帝政) 러시아와
그런데 오대징(吳大澂)은 제정(帝政) 러시아와
혼춘(琿春)방면의 국경선을 획정하는 청국대표로서 부임도중,
철령(鐵嶺)에서 일박(一泊)을 할 때
그 현의 지현(知縣=知事)이었던 진사예(陳士藝)의 방문을 받아
앞의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받았다.
이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은 반조음(潘祖蔭)이 입수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이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은 반조음(潘祖蔭)이 입수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그는 1885년 이홍장(李鴻章) 전권대신과 같이 부 전권(副全權)으로서
이등박문(伊藤博文)과 ‘천진조약’ 체결에 관여하여
1886년 제정(帝政)러시아와 교섭을 진행시키는 청국대표였다.
오대징(吳大澂) 그도 광개토태왕의 비 탁본을
오대징(吳大澂) 그도 광개토태왕의 비 탁본을
솜씨 좋은 탁공(拓工)으로 하여금 탁출(拓出)을 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는데
이것은 그 때까지 현지에서 본격적인 탁본이 작성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오대징(吳大澂)은 그 후 1889년의 이운종(李雲從) 탁본을 봐서 비로소 정탁본이라고 쓰고 있어,
한편 오대징(吳大澂)은 그 후 1889년의 이운종(李雲從) 탁본을 봐서 비로소 정탁본이라고 쓰고 있어,
담광경(談廣慶)에게도 부탁해서 다른 탁본을 입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몇 가지 자료가 시사(示唆)하는 바와 같이
이상의 몇 가지 자료가 시사(示唆)하는 바와 같이
진사예(陳士藝)가 회인현(懷仁縣)의 지현(知縣=知事)을 하고 있던 1882년 9월~12월 사이에
이끼와 칙 넝쿨을 불살우고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 만들어 졌으나
정탁본(精拓本)은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1883년에 일본에 가져간 것이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인 것도
또한 1883년에 일본에 가져간 것이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인 것도
비면을 불사른 직후여서 현지에서 탁본이 작성되지 않은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은 왜 1887년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만든 것인가
일본은 왜 1887년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을 만든 것인가
여기서 언제 본격적인 탁본이 만들어 졌는가의 문제로 하는 것은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으로서는 이것을 작성하는 자가 어떻게 판독하느냐에 따라서
틀린 비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료로서 쓰기에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1882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그것은 1882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이끼와 칙 넝쿨을 불살아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 만들어 졌는가.
그것은 앞서 말한 엽창치(葉昌熾)와 담국환(談國桓)이 쓰고 있는 바와 같이
현지에는 요철(凹凸)로 매우 심한 비면으로부터 견딜 수 있는 질기고 대형의 종이와
양질의 묵(墨)과 솜씨 좋은 석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
밀정인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의 견문담(見聞談)에 따라서
밀정인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의 견문담(見聞談)에 따라서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의 ‘고려고비고(高麗古碑考)’에 ‘비면이 결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있는 부분도 요철(凹凸)이 심하면 큰 종이를 써서 한 번에 탁본을 뜨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지의 사정을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는 바로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현지의 사정을 미야게 요네기치(三宅米吉)는 바로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비의 본격적인 탁본을 작성한 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1887년의 양O(楊O) 탁본이었다.
이 양O(楊O)는 자(字)가 자이(子異)이고
이 양O(楊O)는 자(字)가 자이(子異)이고
순천부부승(順天府府丞),을 지낸 후 1885년, 광서(光緖) 11년 8월부터 13년1월 까지
순천부부승(順天府府丞) 겸 학정(學政)을 맡고
후에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중국의 금석학자나 화가에 널리 이용된 것은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중국의 금석학자나 화가에 널리 이용된 것은
1889년의 이운종(李雲從) 탁본이었다.
청말(淸末)~민국초의 대표적인 금석학자,
오대징(吳大澂)이나 오중희(吳重憙), 나진옥(羅振玉)등이 다투어 입수한 것도 이 탁본이다.
비문해독작업은 참모본부였고, 일본에 알린 것은 1884년이었다.
비문해독작업은 참모본부였고, 일본에 알린 것은 1884년이었다.
비문을 제멋대로 훼손하고 회를 바른 후 다시 글자를 조각하고
자기들 구미에 맞게 왜곡한 내용의 탁본을 일본에 알린 것은
1884년(明治 14년)으로 그 탁본을 가지고 간 자가
사가와 가게 아끼(酒匂景明) 대위라고 되어 있다.
그는 이름을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바꾸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참모본부의 첩자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이다.
그가 가지고 간 세상에 알려 진 것은 1889년(明治22년) 6월에 출판된
그가 가지고 간 세상에 알려 진 것은 1889년(明治22년) 6월에 출판된
‘회여록(會餘錄)’ 제5집(集), 아시아협회 편(編)에 게재되어서이나
그것이 출판 되자 많은 학자가 주목을 끌어
명치 20년대부터 고대 조일관계사의 연구가 갑자기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간 것은 탁본이 아니라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간 것은 탁본이 아니라 쌍구가흑본(雙鉤加黑本)이었다.
또 그의 이름도 최근 까지도 바로 전해지고 있지 않으며
쌍구가흑본을 가지고 간 연대도 1884년이 아니라 그 전년인 1883년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가와(酒匂)가 그것을 가지고 가서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회여록(會餘錄)’이 출판되었는가,
그것을 출판한 ‘아세아협회(亞細亞協會)’가 어떠한 단체인가도 불분명하며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의 비 연구를 심층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온 이진희(明治大學講師)선생은
그런데 광개토태왕의 비 연구를 심층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온 이진희(明治大學講師)선생은
일본에서 이 비문이 어떻게 연구되었는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가와(酒匂)가
그것을 가지고 가서 ‘회여록(會餘錄)’이 출판하기까지
참모본부 편찬과(編纂課)에서 비문해독작업이 행해진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때까지 해독본(解讀本)은 15종류였으나
그때까지 해독본(解讀本)은 15종류였으나
그것들은 참모본부가 남긴 것이 아니라 모든 원본으로부터 사진을 옮긴 것이다.
제일 오래 된 것은 1885년(明治17년)에 쓴 아오에 히데(靑江秀)의 그것이고,
제일 새로운 것은 1889년(明治 22년 6월)의 나가무라 주세이(中村忠誠)의 해독본이다.
해독작업의 중심인물은 일본 육군참모본부 편찬과의 과료(課僚)로 육군대학교 교수로 있는
해독작업의 중심인물은 일본 육군참모본부 편찬과의 과료(課僚)로 육군대학교 교수로 있는
요고이 다다나오(橫井忠直)로서
그 외의 저명한 한학자, 역사가(歷史家)다. 이 작업에 참가했다.
그러나 사가와(酒匂)가 가지고 간 비문이 각 면 30여 매에 쌍구(雙鉤)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사가와(酒匂)가 가지고 간 비문이 각 면 30여 매에 쌍구(雙鉤)한 것이기 때문에
해독작업에만 5년이나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이 더해 만족한 해독본이 없었다.
거기서 1888년(明治 22년 10월) 그의 출석을 요구해서 해독작업을 끝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1888년(明治 22년 10월) 그의 출석을 요구해서 해독작업을 끝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해독작업이 끝난 후 ‘회여록(會餘錄)’이 출판하기까지에 원고는 몇 번이고 신중히 고쳐 쓰여 져서
1889년 6월에야 겨우 출판되게 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재일사학자 이진희(明治大學 講師) 선생이 밝히기 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의 사실은 재일사학자 이진희(明治大學 講師) 선생이 밝히기 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에 있어서 광개토태왕릉 비문의 연구와 그 이용되는 방향에 대한 것을 논하는 경우
빠질 수 없는 사실이나 이것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구 일본 육군참모본부(舊 日本陸軍參謀本部)에 의한 은폐(隱蔽)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작된 비문만 전문지 게재 바로 쓴 연구는 무시하는 일본의 흉계
조작된 비문만 전문지 게재 바로 쓴 연구는 무시하는 일본의 흉계
일본에서 발표된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관한 최초의 문헌이라고 되어 있는 ‘회여록(會餘錄)’보다
5년 전의 1884년에 아오에 히데(靑江秀)라는 인물이 비문해독 문을 쓰고 있었다.
아오에 히데(靑江秀)가 지적했다는 것은
아오에 히데(靑江秀)가 지적했다는 것은
종래 1884년(明治 17년)에 사가와 가게 아끼(酒匂景明)라는 군인이 비문을 갖고 가서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회여록(會餘錄)’ 출판된 것을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스다니 데이지로(水谷悌二郞)의 논문(‘호태왕(好太王碑考’‘書品’ 第100號 1959年)는
그러나 미스다니 데이지로(水谷悌二郞)의 논문(‘호태왕(好太王碑考’‘書品’ 第100號 1959年)는
미스다니(水谷)씨가 소장한 탁본 등에 의해서
각 연구자의 석문(釋文)에 관해서 자료적 견지로부터 몇 개의 탁본과 석문(釋文)을 비교해서
서로 다른 비문에 관해서 한문의 지식만을 교정하는 종래의 연구와 달리 비판을 가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호태왕의 비문은 ‘해결됐다’고 하는 비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던진 노작(勞作)이었다.
이것은 이미 호태왕의 비문은 ‘해결됐다’고 하는 비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던진 노작(勞作)이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비문연구를 크게 전진시킨 논문이라고 하나 역사전문지에 발표되지 못하고,
서도(書道)의 잡지에 게제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전쟁에 패전 후에도 이런 현상은 변함이 없다.
일본이 전쟁에 패전 후에도 이런 현상은 변함이 없다.
미스다니(水谷) 논문같이 훌륭한 연구의 공표가 늦어지거나 발표를 못하게 한 것은
학문의 발전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아오에 히데(靑江秀)가 쓴 ‘동부여영락태왕비명지해(東夫餘永樂太王碑銘之解)’는 비문이
또 아오에 히데(靑江秀)가 쓴 ‘동부여영락태왕비명지해(東夫餘永樂太王碑銘之解)’는 비문이
일본에 가져온 과정을 기록하고,
간단한 서문(序文)과 해독문(解讀文) 및 이것을 고증한 ‘고구려 제19세광개토왕묘비지해
(고구려(高句麗第19世廣開土王墓碑之解)논문도 제대로 발표를 저해하고 있음을 본다.
이진희 연구가는 일본 도서관에 가서 논문을 보면
이진희 연구가는 일본 도서관에 가서 논문을 보면
비문의 행이 바꿔져 있을 정도로 정정(訂正)을 하고 있어서,
모두(冒頭)에 메이지(明治) 21년 10월 요고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저술하고
곳곳에 석문(釋文)을 비교가미(加味)했다는 첨서(添書)를 달고 있다.
또한 고증문(考證文)에는 구리다 히로시(栗田寬)와
또한 고증문(考證文)에는 구리다 히로시(栗田寬)와
나가무라 후노우사이(中村不能齊)가
이를 교열(校閱)한 부전(付箋)을 달고 있을 정도로
일본은 제대로 된 광개토태왕비문의 해석이나 논문을 규제해 왔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일본이 그들의 왜곡을 숨기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以上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63面~91面 參照, 引用).
그들이 분국이라고 미마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한국에 세웠다고 우기다가
그들이 분국이라고 미마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한국에 세웠다고 우기다가
그 허구가 들어나자 1970년대부터 잠잠 하는 것과 같이
광개토태왕비의 조작왜곡도 우리들의 심층적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그들의 음모로 된 광개토태왕비문 사실을 잠재울 수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우리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제징용 도발’ 일본, 65년 한일기본조약은 언급 안하는 이유 (0) | 2019.01.15 |
---|---|
천년을 과장한 일본인, 멋대로 적은 불신의 역사 (0) | 2019.01.14 |
세계최대무덤 주인 일본천황 닌토쿠의 비밀 1편.2편 --일본서 신이 된 한국의 고대 왕들의 정체 (0) | 2019.01.13 |
1강 한국 사람은 누구인가 1.2.3_ 『한국 사람 만들기 』 책내용의 대륙조선사 관점의 이해 (0) | 2019.01.13 |
주선양 남북총영사 공식 접촉 무산…중국 당국 ‘불허’ (0) | 2019.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