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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일본 극우세력과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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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우세력과 돈


한류열풍


일본 극우재단의 자금으로

학술 행사를 하는 것을 반대하는 프랑스 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를 보면서

나는 1995년에 연세대에서 벌어진 아시아연구기금 사태를 떠올렸다.


1995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연세대에서 발생했는데 결론은 1백억의 자금을 연세대는 받아서 재단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학자들, 일본 극우 재단과 싸운다
“전범 사사카와가 세운 일본재단의 후원 거부” 공동성명… 해당 교수 소송당하자 연대 움직임

연세대의 일부 학자들은 물론이고 한국 내의 지식인들은 일본 재단이 한국을 비롯한 세계 유명대학에
자금을 대줄테니 일본과의 교류와 연구를 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유명대학은 일본 재단(1995년 사사카와 재단에서 변경)이 불순한 의도와
석연치않은 연구 조건등을 이유로 모두들 거부했었다.

그러나 연세대는 일부 교수들의 반대에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낼름 자금을 받아서 사용했었다.



일본 극우 정치인 사사카와 료이치와 '일본재단'


우선 사사카와라는 인물을 먼저 살펴보자



사사카와 료이치 (1899-1995 )笹川良一 .


○ 일본 오사카 출신으로 정치를 표방하되 권력을 등에 업고 사업을 크게 한 일본 국수주의 정치가이다

○ 1931년 우익 단체 국수대중당(國粹大衆黨)의 총재가 되는데 이 단체는 일본 국수주의를 표방하며
무솔리니의 숭배자를 표방하며 당원들에게 흑색복을 착용시키는 등 한마디로 나치주의와 같은
골수 일본 극우정치 세력의 표본적인 인물이다.

○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국수 광산’, ‘일본 광업’ 등의 주식을 매점하여 엄청난 부를 모으고
‘국수의용항공대’를 창설하여 ‘1인 1기 1함 격멸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차후에
이 구호가 ‘카미가제(神風) 특공대’의 창설로 이어진다는 의견도 있었다

○1945년 12월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사사카와는
미 통합 참모본부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내린 전범 용의자 체포 명령 중에서
‘초국가주의적, 폭력적 결사 및 애국적 비밀 결사의 주요 인물’로 체포・투옥되었다.
즉 이 사람은 한마디로 일본국수주의를 위해서라면 폭력과 테러도 불사할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 1948년 석방된 사사카와는 감옥에서 <라이프>를 보고 모터 보트 경주가 엄청난 돈이 될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약,무기 거래의 자금과 예전 국수대중당의 국수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1951년 ‘모터 보트 경주법’을 국회에 제출, 그에게 돈으로 매수된 자민당 의원들의 지지로 통과시킨 뒤
‘전국 모터 보트 경주회 연합회’(약칭 ‘전모련’)를 설립해서 회장에 취임한다.


전모련은 경정 사업의 엄청난 자금을 획득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사카와가 엄청난 부를 다시금
얻게 되는 기초이자 근간이 되었고 현재 일본 재단 회장인 아들또한 전모련의 족벌체재속에 있었다.

○ 막대한 돈을 가지고 ‘전일본 애국자 단체회의’(약칭 ‘전애회의’)의 고문에 취임한다. ‘전애회의’는
‘국체호지(國體護持)’와 ‘반공 협동 전선’을 2대 강령으로 일본의 재군비,천황제 옹호 주장에
일본 교원노조 탄압 미일반보 조약 강행 개정에 항의하는 학생과 일반시민 테러등의
정치깡패적인 면모와 폭력으로 모든것을 해결할려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 표면적으로 각종 단체 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에 ‘일본 선박 진흥회’를 중심으로 ‘B&G 재단’ 등
‘사사카와 그룹’을 구축하여 도박 산업을 기반으로 조성한 방대한 자금에 의해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속시켜 나갔는데  

설립 당시 1억 3천만 엔이었던 ‘일본 선박 진흥회’의 자산액은 1980년이 되면 무려
1,244억 6천만 엔에 달했는데 한국돈으로 따지면 1조 6천억원이 넘는 자금이었다.

○위에서 보듯 그의 행적은 한마디로 일본 국수주의 사상을 깔고 여우같은 정치적 행보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고 정치권력을 가지고 막대한 부를 창출한 일본 극우중의 극우파인것이다.





그가 세운 일본 재단

원래 일본선박진흥회에서 비롯되어서 명칭을 바꾸었는데 사사카와는 이 재단을 비롯한

각종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재단의 임원진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중에는
'새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일본 교과서 왜곡의 주범 그룹들이 대거 자리를 맡고 있다.

특히 이 재단들은 하바드나 예일등 유명 대학에 연구 기금을 제공하고 일본의 위상을 높이거나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서 친일적인 인사로 만들거나 일본의 역사를 왜곡시키거나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삼을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하바드나 예일은 이 재단 자금 거부)



일본 재단의 자금으로 연구와 활동을 하는 친일파 인물과 단체



연세대 '아시아 연구기금'


1995년 연세대는 '한일협력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재단으로 자금을 받을려고 하는데 이 자금이
사사카와의 자금이라는 것을 알고

박영재 역사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엄청난 반대를 했다.그런데 이 반대는 
그 당시 송자 총장등의 친일 세력등의 말도 안되는 논리에 묻혀서

결국 연세대는 '아시아연구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이 자금을 각종 연구 기금으로 학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연구 및 학술행사를 펼쳤다.

2005년 MBC PD수첩이 아시아 연구 기금의 불순한 의도를 보도했고 1995년에 이어서 2005년에도
연세대 교수협의회에서 반대를 했지만  그 후에도 이 기금은 장소를 바꾸어 운영되었다.
(2008년까지 기금사업운영/홈페이지참조)

연세대 내 아시아연구기금사무실

자료출처:오마이뉴스


아시아연구기금임원명단(클릭시 확대)


 뉴라이트 안병직 '토요타 재단'

뉴라이트 안병직서울대교수



안병직 교수가 토요타 재단의 기금을 받아서 연구한 논문에서 주장하는 바

1.식민지하에서 조선 농촌의 값싼 노동력이 공업 노동력으로 전환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의 강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 민중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2.식민지 공업화 과정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비록 일본인 노동자들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질적 발전을 경험하였다.

안병직 교수의 이야기를 더 쓰고 싶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서울대 교수출신이라는 작자가
이따위 말을 했다는 사실과

그의 자료를 보다가 노트북 컴퓨터 자판 부셔버릴뻔해서 그냥 참는다.

안병직 교수와 그 제자인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논문들의 기초는 한마디로


일제 시대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는 친일적인 사고 방식인것이다.



 국제정책대학원 '사사카와 평화재단'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이 일본재단의 출연금으로 세운

 ‘사사카와평화재단’으로부터 연구기금을 받아
동북아시아 안전보장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었는데

국제정책대학원의 담당자가 한 말이 더욱 웃기다.

“사사카와평화재단 쪽에서 먼저 기금 지원을 제안했고,

재단의 성격과 상관없이 순수한 학술지원이라고 판단해 기금을 받기로 했다”며

 “대학원에서는 사무국 역할만 맡을 뿐 연구는 외부 연구자들이 독립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아니 그런 판단도 없으면서

무슨 국제정책을 연구하는 대학원의 관계자라고 할수있는가?



 탤런트 이서진 '일본 재단'


아래는 신문 기사의 일부이다.

14일 오후 3시부터 도쿄의 일본재단 본부에서 이서진과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공익 단체인 일본재단이 공동으로 창설한

환경기금 '렛츠 트리(Let's Tree)'의 출범에 즈음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서진을 비롯해

일본재단의 사사카와 요헤이(笹川陽平) 회장, 기

금운영위원인 컬러 핑크 재팬(Color Pink Japan)의 전영선(全映宣) 회장,

그리고 제네시스(GENESIS) 그룹의 윤홍근(尹洪根) 회장이 참석했다.

여기서 애기하는 사사카와 요헤이 회장은 바로 사사카와 료이치의 아들이다.


사사카와 요헤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받은 인물로 그의 인터뷰 기사 어디를 봐도 일본의 침략이나
수탈에 대한 사죄나 반성은 커녕 오히려 그 시대의 역사적 흐름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여러차례했고
또한 아직도 새역사를 만드는 모임 의 핵심멤버들을 일본 재단의 임원으로 임명하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가 아직도 반복되는 현실


위의 인물들이 누군인지 아는가?
바로 친일의 대표적인 이완용,이근택,박제순,권중현이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잘못은 바로 반민특위를 해산하면서 우리나라가 올바르게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서 친일파가 득세하고
이것은 민족이나 국민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살면 좋다는 사회의식을
우리 국민에게 심어준 꼴이 되어 버렸다.



과거는 묻지말고 오로지 돈과 권력만 있으면 된다는 풍조는 대통령들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이승만은 아시아 태평양 반공 연맹을 시작으로 1966년 사사카와 료이치와

세계반공 연맹을 만들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이라는 훈장을 수여한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일본 전범이라는 사실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주범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이런 작자와 함께 자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돈을 받고 훈장을 수여해주고 함께 단체를 세웠다는 것은 치욕이다.

사사카와 료이치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일본 재단을 두고

순수하게 학술적인 재단이라고 이야기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너희  딸과 누나,그리고 아버지와 형제를 팔아먹은 돈으로 부자가 된 자의 돈으로
그 연구가 그 활동이 그리 소중하고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던가?



일본인 중에서 정말 과거를 반성하고 한일 양국의 회복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과거에 대산 반성이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만든 자금들은 모두가 정상적인 사업으로 조성된 자금이었다.

그러나 사사카와 료이치의 자금은 태생부터 검은 자금이고

그는 그 자금으로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재단을 만들고 운영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아래의 신문 기사들을 읽어보기 바란다.

날짜 1907년 05월 15일
 
제목 일제육군, 친일단체 일진회에 10만원의 정치 자금을
 
내용
 
일제육군, 친일단체 일진회에 10만원의 정치 자금을 줌. 
 


독립신보 1948년 08월 26일 

일제의 앞잡이로 조선민족을 못살게 굴던 친일파들이 해방후 미군정에 잠입하여

 갖은 못된 짓을 하여 인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하고

 통일자주독립을 방해하여 3년이란 세월을 혼란으로 보냈는 바,


또 다시 대한민국정부의 고관에 취임함을 보고 인민의 원성은 고조에 달하자

국회에서 친일파 급 민족반역자처단법령을 토의중임을 안 친일파들은

 갖은 수단으로 방해공작을 하고 있다는데,

 친일파집단이라고 세간에서 말하는 모 당에 매월 20만 원 정도를 제공하던 친일재벌 金모씨는

요즈음 친일파·민족반역자숙청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됨을 보고,

 돌연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모 당에 제공하여 동 법안을 완화

또는 무능화하도록 공작하는 자금으로 제공하였다고 하여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리고 국회에서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을 강경히 주장하는 모모 의원들을

 전기 모 당의 당수가 회견을 23일에 청하여 친일파 문제를 광범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범위를 좁게 취급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다.





일제 시대에도 일본의 자금을 받아 활동했던 친일파나 해방후에도 친일행각을 벌이던 친일파나
현재에도 일본 극우 세력의 자금을 받아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내 눈에는 똑같이 보인다.

우리는 피해자이고 떳떳한 민족이다.무엇이 아쉬워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들의 자금을 받아서 그들을 위한 연구를 하고 그들의 극우주의와 역사왜곡에 도움을 주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반민특위의 사건을 읽고
“가슴 속에 불이 나고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이라고 했다.

 일본 극우 재단의 자금을 받기 원하는 자가 있다면
 사사카와 료이치의 흔적을 되돌아보고  그래도 받기를 원한다면 


 

  권력과 부를 위해서는 친일파나 검은 범죄의 돈이나 상관치 않는 당신을
  우리 시대의 지식인라 불리우는 이 사회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자료 참고 및 인용
 일본 극우세력과 연합한 연세
 전후 일본의 일제 잔재의 문제  박영재 교수
 한겨례신문/오마이뉴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가학술원



* 일본 극우세력과 돈



사사카와 재단과 돈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1899~1995)라는 1945년 일제 패망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변경으로 석방되어 도박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가 만든 재단이 사사카와 재단(현재명 일본재단:Nippon Foundation)이다.

그는 극우파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인 새역사교과서모임의 회장이기도 하다.



10여년 전 이 사사카와 재단의 자금 100억원이 국내 모 사립대학에

 ‘아시아 연구기금’이란 명목으로 지원되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50억원은 또 다른 사립대에 들어갔는데,

당시 사사카와 재단이 뿌린 자금 규모는 300억 정도로 알려졌다.


『한겨레 21』의 정위치는 바로 이런 자금을 받고

아직도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나 일본 극우파의 역사관을 전파하는 학자들을 추적해 보도하는 것이지

“이것이 진짜 고대사다” 따위의 가치전도적인 제목으로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전파하는 역사테러를 자행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 100억과 50억을 받은 두 사립대 출신들 사이에서

갑자기 일본 유학 열풍이 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자각이 뒤늦게 든다.


물론 그때는 사사카와 자금이 유입되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지만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니 이 돈의 효과는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자금이 국내 우익학자들에게만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아직도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반일하는 척’하거나 죽은 친일파를 비판하면 영웅이 되지만

일본 극우파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진짜로 비판하거나 산 친일파를 비판하면 우익은 물론

짝퉁 좌익까지 총궐기해서 “저놈 죽여라”고 합작하는 사회다.


이 구조를 모르면 계속 속는다.



[추적]‘사회공헌’ 탈 쓴 일본재단과 연세대의 수상한 커넥션

원문보기: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509011718071&code=115#csidxf7810d5c7fb608e95837c4fb7505175



대한민국은 정부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과 한일역사 공동연구위원회의 경우에서 보듯이

 대한민국 국고로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 극우파 역사관을 전파한다.


정신은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뿐인가?

‘하버드 프로젝트’니 『동북아역사지도』 따위 등등 이런 사례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일본이라면 민간이든 정부든 이런 일은 절대 벌어질 수 없다.


일본은 한때나마 제국을 운영해봤기 때문에 제국의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의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학자들이고 언론들이다.




고 최재석 고려대 명예 교수께서는

이주한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에게

 “일본 가서 공부하는 것은 좋은데,

절대 역사학 학위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정부돈이든 민간돈이든 일본 돈은 공짜가 없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김현구 씨는 EBS 교육방송에서 자신이 일본 문부성 장학금으로 유학한 경험을 자랑스레 이야기했는데,

 서희정이란 분이 그 녹취록을 올려주어 읽어보았다.


 다음은 그 일부다.


호사카 교수 “사사카와재단 외 문예춘추사도 자금 유입…위안부 역사 왜곡 연구”

[출처: 고발뉴스닷컴]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590


http://m.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4



“일본이 지금까지 65,000명의 국비 유학생을 유치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일본정부에서 매년 아시아 각 나라 중심으로 해서

정부에서 돈을 줘서 유학생을 선발합니다.


저도 그런 유학생으로 갔다 온 사람입니다만 이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장학금이에요.

 한 달에 약 우리 돈 200만원씩 주고 등록금 전액 면제입니다.

이것을 연구생 2년, 석사 2년, 박사 3년까지 줍니다.



여러분들 분발해서 일본 문무성 유학생이 되면 가서,

그 돈이면, 저는 그 돈 가지고 결혼을 해서

애들 둘하고 네 식구가 생활하면서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어요.

어떻든 이처럼 이렇게 한 사람들이 65,000명이라고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김현구 씨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일본 가라면서

일본이 “이처럼 인적 물적으로 아시아에 유학생들을 깔아놓은 겁니다”라고도 덧붙였다.



김현구 씨의 와세다대 유학시절 지도교수였던 미즈노는

 1세기부터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극우파 학자이다.

김현구 씨는 자신의 책에서 미즈노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귀국을 앞둔 어느 날 가족들을 데리고 인사차 지도교수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오랜 지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내 학문을 만들어주시고

많은 감화를 주신 분이기 때문에 내게는 부모와 다를 바 없는 분이셨다.

그분도 근 10년 가까이 지도했던 제자의 귀국에 감회가 새로웠던지 밤늦도록 여러 말씀을 해 주셨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의 인구는 1억 2천만 명쯤 되는데

일본은 땅덩어리가 작아서 잘해야 7천만 명분밖에는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5천만 명 분은 밖에서 벌어 와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순조로운 지금은 구미에서 벌어오지만

 어느 땐가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면 결국 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릴 것이고

그 경우에 제일의 타깃은 한국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김군과 내가 사제지간이 되었는데

 다 같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양국간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일본 사람들은 좀처럼 자기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역사발전에서 인간의 의지를 도외시한 면은 있지만

이 말씀은 평생을 역사연구에 바쳐오신 분으로써

 일본 역사를 자연환경과의 관계에서 거시적으로 보신 혜안이고

그분이 나에게 주신 ‘혼네’의 선물이었다

(김현구,김현구 교수의 일본이야기(창작과 비평사, 1996년, 82쪽)

고 최재석 교수께서 김현구 씨에 대해

 " 일본에 가서 취득한 학위논문에서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였다면

이는 지도교수의 영향으로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을 것(역겨의 행운)이라고 갈파한 것은

김현구 씨 자신이 미즈노에 대해서 " 내 학문을 만들어주시고 많은 감화를 주신 분이기 때문에

내게는 부모와 다를 바 없는 분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그 속내를 꿰뚫어 본 혜안임을 알 수 있다.

미즈노가 귀국하는 김현구 씨에게 일본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면

 “제일의 타깃은 한국”일 것이라고 말했을 경우

보통의 대한민국 학자라면 “일본 극우파들이 아직도 한국 침략의 꿈을 버리지 않았구나”라고 경계할 것이다.


그러나 김현구 씨는 이를 “일본 역사를 자연환경과의 관계에서 거시적으로 보신 혜안이고

그분이 나에게 주신 ‘혼네’의 선물”이라고 받아들였다. 

사가카와 재단을 비롯한 일본의 극우파들이 한국학자들에게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것은

 언젠가 “제일의 타깃”을 향해서 본격 행동을 개시할 때

한국 내 동조자를 만들기 위한 것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조선총독부 역사관과 일본극우파 역사관을 ‘진짜’ 비판한다는 ‘진짜’ 한가지 이유로

 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겪는 수난은 일종의 ‘전초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기우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불길한 기우는 현실로 나타난 경우가 많은 것이 또한 역사다.

 그나마 ‘성실한 감시자’와 ‘용감한 고발자’가 늘어나는 현실에 힘을 얻는다.

사사카와 재단이 출연한 재단 중의 하나인 도쿄재단은

 『난징대학살: 사실 VS 허구』라는 책을

미국과 유럽 주요대학의 일본학 및 동아시아학 관련 도서관과 연구자들에게 일제히 발송했다.


 이 책은 1937년 일본군이 약 20~30만명의 중국인들을 도살한

‘난징(南京)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파 학자의 책을 영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2010년 사사카와 재단은 프랑스·일본 수교 15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후원하려 했는데,

프랑스 정부가 공동후원으로 참여하기로 하자

파리 정치대학의 국제관계 연구소 카롤린느 포스텔 비네 박사가 반대성명을 주도해서 무산시켰다.

프랑스 외무부가 참여를 철회하자 사사카와 재단은 비네 박사에게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가

 프랑스 법원으로부터 기각당했다.


 비네 박사는 “일본재단에 관대한 한국은 의외다”라면서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누리는 학자들에게 주어진 책무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사회의 ‘성실한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잘못이 있을 때 ‘용감한 고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2010년 당시 사사카와 재단과 비네 박사를 주축으로 한

프랑스의 양심적인 학자들 사이의 대립을 보도한 매체가 바로 『한겨레 21』이다. 

지금 『한겨레 21』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무서운 아이들’을 대거 동원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하는 ‘성실한 감시자’와 ‘용감한 고발자’들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시도하는 것을 보면

 역사는 역시 돌고돈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 <이덕일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newhis19/posts/131724684102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