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훈족은 정말 한민족인가 ?
렙틸리언에서
이젠 한민족까지 꼬리물기를?
어디까지 가는지 우리 다같이 풀어 봅시다.
직접 쓰고 정리해서 자료 붙이려고 했는데 다 거기서 거긴거 같아서
이곳 저곳 자료들 살펴보아 적당히 무난하게 쓸만한 자료들 붙였다오.
언제나 진실은 좁은문으로 갈때만 존재 하는 것...
허허~!
-------------------------------------
훈족은 정말 한민족인가?
[네티즌 초대칼럼] 훈족에 대한 역사서의 서술과 유물비교 -이문규
유럽인들은 전 세계를 주름잡는다.
그들은 일찍이 16세기 미개척지를 개척하여 대항해 시대를 열었고,
그들이 개척한 식민지를 바탕으로 19세기 지구를 지배하였다.
오늘날 유럽하면 사람들은 잘 사는 나라,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개척 식민지배 했다는 오만함에 빠져
아시아인들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오만한 유럽인들이 아시아인들에게 크게 깨졌다면 믿겠는가?
오만한 유럽인들을 벌벌 떨게한 아시아인의 정체는?
그 아시아인들의 정체는 바로 미지의 종족 훈(Hun)족이다.
서기 375년 훈족의 서진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당하고 중세 봉건제가 시작되었다.
가히 훈족은 유럽의 중세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부색은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난 얼굴은 형태 없는 덩어리였다.”
- 그리스의 역사가 조시모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
그들의 코는 모양이 없고 평평하며, 광대뼈는 튀어나왔다.
두 개의 눈에는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 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꿰뚫어보는 이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네들 갓난아이의 얼굴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두 콧구멍은 투구의 면갑에 맞추기 위해 끈 하나로 휘감겨 있었다.
엄마는 전쟁을 위해 이런 방법으로 아들을 기형으로 만들었다.……”
-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포리나리스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머리카락은 전부 잘라 겨우 정수리에만 남아 있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째진 모양이다.”
- 사마천(흉노에 대한 묘사 중)
“그들의 가슴에는 야생동물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들은 인류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중국의 한 궁정 관리의 기록 중
이는 훈족(흉노족)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기록이다.
훈족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훈족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훈족의 침략을 받은 쪽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공평하고 객관적인 기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잔뜩 겁먹은 사람의 움츠린 시각으로 훈족에 대해 기술했다.
표현은 절제 없이 과장되어 있고
적 훈족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남기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이런 기록으로 인한 훈족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바로 1998년 월트디즈니사에서 제작된 ‘뮬란’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거기에는 주인공이자 선의 세력인 중국의 적으로 훈족이 등장하는데,
훈족이 중국을 침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상영시간 내내 훈족은 마치 저주에 찬 악마들처럼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침략과 파괴를 일삼는다.
또한 그들의 외모는 중국과 같은 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폭력적이며 색깔조차도 어둡게 묘사를 했다.
동양인인 우리가 보기에도 훈족은 혐오스러운 외모를 가진 존재로,
사악한 외모를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훈족에 대한 그러한 서양인들의 편견이야말로
정착문명의 역사가 지난 천년동안 저질러온 과거사에 대한 잘못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유럽을 진동시킨 훈족의 실체에 대해 서양의 역사가들은 많이 알고있지 않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그런데 독일 ZDF 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잃어버린 고리 찾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훈족의 서방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한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훈족의 원류가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동부유럽 트라키아 지역에서 제작된 황금보검과 같은 것이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트라키아 지역은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하여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훈족의 아틸라의 근거지이다.
우연 치고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은 훈족과 한민족이 친연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게 아닐까?
독일의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계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유물을 제시하였다.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되는 동복(청동 솥)이 가야 지방에 출토되었다.
· 훈족은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에서 말에 동복을 싣고 있는 기마인물상이 발견되었다.
· 동복의 문양을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어느 특정 지역에 주로 출토되던 물건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에 있었다고 말하는 건 속단이다.
하지만 이 유물들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그 유물들을 만든 이들이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복은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것으로
정화 의식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데 쓰던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 용기로,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 간주된다.
동복이 한반도 동남부 김해, 경주 지역에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북방계 유목문화가 상당히 흡수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특히 브론즈 냄비는
가야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브론즈 냄비는 가야국 등의 원류가
북방의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참고로 훈족은 동복을 말 엉덩이에 매달고 다녔는데,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 같은 신라 시대 점토상을 보면
기마상 주인공이 동복을 말 엉덩이에 싣고 있다.
그런데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이들 솥이 말이 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기마상 주인공의 복장과 삼각모가 전형적인 유목민의 복장이고,
안장과 등자도 훈족이 사용하던 유물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북방 유목민들은 우주개념을 이해하는데 순록과 우주수목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라 금관의 장식이 바로 이 순록과 우주수목을 형상화하였다.
이는 신라가 북방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관되는 특성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1. 훈족의 후예들에게는 몽골리안 반점이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훈족은 복합궁을 사용하였다.
이 특이한 활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다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훈족이
이 특이한 활을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3. 훈족은 편두를 갖고 있다.
편두라는 것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반듯이 눕혀 놓은 상태에서
이마를 돌 같은 것으로 눌러 이마와 뒷머리를 평평하게 하는 대신
정수리를 봉긋 솟아오르게 만든 머리 형태이다.
일종의 성형수술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뼈를 보면
이마와 뒷머리는 눌려있고
정수리는 툭 튀어 올라와 있다.
그런데 가야국이 있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에서도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과는 구별되는, 꽤 오랫동안 한민족 사이에서 내려온 풍습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 한 가지는,
훈족에게는 편두 풍습이 있었지만
흉노에게는 그 풍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민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신라 지역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가지 특성은
훈족과 가야, 신라의 친연 관계를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훈족이 한민족과 연관된다는 증거가 여럿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곽 위에 얹어놓은 목곽(木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어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장례의 절차는 우리의 장례 절차와 비슷하다.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그가 사망한 지 3일, 7일, 49일째 되는 날
고인의 말을 도살하여
일가친척과 지인들이 함께 나눠먹고,
문상객들을 잘 대접하며
남은 음식은 말의 재갈이나 안자, 무기와 함께 장작더미 위에 놓고 태웠다.
이 때 남은 재와 문상객을 대접할 때 사용한 청동솥(동복)을 깨뜨려
부장품으로 무덤 속에 묻었다.
그런데 우리의 장례절차는 사망한지 3일째 되는 날(3일장) 시신을 무덤에 매장한다.
사망한 후 5일되는 날에는 삼오제를 치르며
사망한 후 49일째 되는 날에는 49제를 치른다.
그리고 3년상이라 하여 3주년 되는 기일에 탈상한다.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은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다.
그런데 훈족의 장례의식과 우리의 장례의식이 거의 같다는 것은 무얼 말할까?
이는 훈족과 우리민족이 연관성이 있다고 해석되어도 좋지 않을까?
유럽을 호령하고 중세시대의 서막을 연 훈족...
훈족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게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훈족은 아시아에서 건너온 민족이며,
더욱이 우리민족과 연관된 풍습이 많다는 것이다.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 및 사료들을 한민족의 그것과 연결시켜볼 때
훈족의 지배집단을 한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이는 한민족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고,
중국 등으로부터 수혜만 받아왔다는
‘스몰 콤플렉스(Small Complex)’를 가지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훈족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런데 그런 훈족이 우리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은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훈족의 지도자이자 세계 3대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의 중세시대 서막을 연 아틸라는
우리가 광개토태왕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인물이 아닐까?
[ 참고 ]
이종호,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한국 7대 불가사의』
『과학으로 여는 세계 불가사의 2』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역사의 비밀』
패트릭 하워스, 『훈족의 왕 아틸라』
웨스 로버츠, 『아틸라의 리더쉽』
차용구, 『로마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 바람에 새겨진 역사』
출전: 우리역사의 비밀 www.coo2.net /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19705752
시대소리뉴스 www.sidaesori.co.kr
-------------------------------------------------------------------
추가사진
서구유럽이 동양인에게 먹혔다는 것에 대한 쪽팔림 =>흉노(한민족) "아틸라'를
추악한 서양인으로 변신시켰다고라!!! 헷!
------------------------------------------------------------------
"금관을 보고 편두를 안다."
[책세상]
마야(Los Mayas) / 송영복 경희대 스페인어학과 교수
[부산일보 2005-04-25 12:21]
마야인의 편두
'신대륙의 발견'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당연히 '유럽의 침략'이다.
콜럼버스? 그가 살아있다면 통곡할 발음이다. '꼴론'이다.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속한 마야는 단일제국이 아니었다.
멕시코 유카탄(현지발음 '유까딴') 반도에 뿌려져 있었던 도시들을 통칭한 문명의 개념이었다.
그들은 동서양과 다른 20진법의 수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기존의 서구적 인식과 달리,
마야에는 엄격한 사회 계층구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야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녔으나
아주 특이한 씨족 국가적 특징들을 유지 발전시켰다"
그게 '가족 민주주의'였다.
주목할 사실은 고도의 과학 농업 건축 예술이 있었지만
마야인들은 돌도구(石器)만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 민주주의가 이뤄졌던 비밀이겠다.
'마야는 전쟁을 위한 무력의 증대를 꾀하지 않은 문명이다.
'마야인들에게는 훈족이나 김해 예안리의 가야인들처럼 편두 전통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머리에 송판을 대고 몇년간 단단히 눌러 원하는 모양을 얻었다.
"오늘날의 원주민들은 500년간의 식민지적 침탈에 지친 모습으로 다가온다.
라틴아메리카의 처절한 현실이 마야인들의 혼이다.
" 상지사. 최학림기자
---------------------------------------------------
"5세기 로마 호령한‘훈족’은 한민족”
몽골리안 반점·편두형 골상 등 인체 특징 유사 …
마상 무예·동복 문양도 선조들과 같아
주간동아 2003년9월25일자
한민족의 북방사를 주로 다루는 ‘백산학회’ 회보(제66호, 8월30일 발매)에
유럽에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에게
같은 시기 한반도에 있었던 신라 가야 고구려의 지배계층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는
이종호씨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프랑스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과학사 쪽에 관심이 더 많은 이종호씨로부터
훈족과 신라 가야 고구려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을 들었다.(편집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한민족의 강한 군대가 마음껏 달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375∼413)은 즉위 초부터
정력적으로 정복사업을 벌여 서로는 요하,
남으로는 한강 유역에까지 세력을 미쳤으며
북으로는 개원, 동으로는 옥저와 예(濊)까지 차지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394∼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되찾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동양에서 치열한 정복사업을 펼칠 때
서양에서도 한민족의 일족인 훈족이
서양문명사를 새로 쓰게 하는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서기 375년, 기마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공격하자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고,
서고트는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당시 동양에선 광개토대왕 전성기
이로써 로마제국 안에 게르만족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이로부터 100여년 뒤인 476년,
로마제국은 게르만인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게르만족은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로 흩어져,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을 만들었다.
이는 훈족에 의해 유럽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에 따르면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인 것으로 보인다
훈족은 흉노(匈奴·북방 기마민족을 통칭한다)가 원류인데,
흉노는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3세기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 민족과 혈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심한 부침을 겪었는데
이때 흉노에 속해 있던 한민족의 원류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하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가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둘째, 훈족이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의 프레스코화(畵)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서 나온, 말을 탄 채
활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과 똑같다.
셋째, 훈족의 머리 골상이
편두(偏頭·cranial deformation·
일명 납작머리로 불리는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두개골)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에서 프랑스의 칼바도스 지방에까지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 곳곳에 있는 분묘에서
머리의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고,
머리에 고랑 같은 주름이 있으며
머리통이 긴 두개골을 발견하고 이를 ‘편두’로 명명했다
그런데 가야가 있었던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법흥왕 등 신라왕도 편두였다는 기록이 있다.
편두는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다는 주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진 풍습으로 인정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도 편두에 관한 기록은 있으며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
반면 훈족에게서는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족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를 만드는 풍습을 갖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역시 편두를 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신라 지역의
지배계층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기마민족의 상징적인 유물로
유명한 크고 작은 동복(銅·cup cauldrons)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다섯째,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다.
1924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91호인 기마인물상 토기를 보면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다.
게다가 이 무덤의 주인도 편두였다.
여섯째,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우리나라의 금관 장식 등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 형상(‘出’자형 장식)과 녹각(鹿角)형 장식이 많은데
이는 북방에 살던 사람들이 한반도에 정착했음을 나타낸다.
세계 3대 제국 건설한 아틸라왕
지금까지 훈족과 한민족을 연계시키지 못한 것은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의 원류를
흉노(몽골-투르크계)로 인식했으나,
그들의 지배집단을 동양계(몽골계)가 아닌
서양계의 투르크 민족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투르크인은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표기하며 서융(西戎)에 속한다.
투르크계는 6세기 중엽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오스만투르크 대제국을 거쳐
현재 터키공화국를 이루었다.
훈족을 투르크족으로 예단한 것은
동로마 황제들이 훈족 지도자들을
알타이어로 ‘강한 사람’을 뜻하는 ‘투르크 왕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지 20년 후,
즉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 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징기스칸,
알렉산더대왕과 함께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395∼453)가 탄생했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쿠스나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는 훈족에게 공물을 주면서 화친을 맺어 게르만족을 견제했다.
따라서 당시의 외교 관례에 따라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인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자랐다
434년 삼촌인 훈족의 왕 루가가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훈족의 왕이 되었다.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 할 공물의 납기를 번번이 지체하자
435년 아틸라는 동로마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로마는 자신들의 잘못을 재빨리 인정하고
마르구스에서 공물을 두 배로 올리기로 약속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때 블레다와 아틸라는 동로마 사절단에게 말을 탄 채 회담하자고 요구했고
동로마측은 순순히 이 제의에 응했다고 한다.
이어 서로마에게서 서고트인에 대한 경찰권을 넘겨받으면서
훈족은 사실상 서양의 패자가 되었다.
443년 블레다가 사망하자 아틸라가
훈족의 단일 지도자가 돼 훈제국을 건설했다.
이때 아틸라가 지배한 지역은 남으로는 도나우 강 남쪽의 발칸반도,
북으로는 발트 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서로는 프랑스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다.
치하의 종족 수만 45개 족에 이르렀다.
이 시기 아틸라로 하여금 국제전에 개입하게 하는 여인이 등장했다.
450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는
동생을 황제직에서 밀어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발각돼,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아틸라는 서로마 황제에게 지참금으로 로마 제국의 절반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한 뒤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켜버렸다.
서로마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메츠와 랑스, 오레앙 등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가 파죽지세로 서로마 근거지까지 접근하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이자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훈족과 적대 관계인 게르만족을 규합하여 대항했다.
451년 6월20일,
프랑스의 트루아(파리 동남쪽 약 210km) 서쪽에서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불리는
‘살롱 대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양쪽에서 각각 20여만 명이 참전했고
전사자만 15만여 명에 달한 대규모였다.
결과는 무승부였는데 서로마측으로서는
아틸라의 공격을 막아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곧바로 근거지인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또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탈리아반도로 공격해 들어간 아틸라 군은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후 파두, 베로나,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베니에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이 말이 변해 지금의 베네치아라는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나 어이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일디코 또는 힐디코로 불리는,
유명한 게르만민족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크림힐트로 나오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시체로 발견됐다.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들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그가 잠들자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학자들은 결혼식 날 과음해 질식사한 것으로 보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인해 살해됐다고 추정한다.
아틸라왕 사망 후 훈제국 곧 분열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으나
많은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곧바로 분열돼,
469년 훈제국은 동로마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에 패한 후 대다수의 훈족은
동쪽의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지만,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반도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몇몇 종족은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 정주했다.
이때 훈족의 일부가 발라니아에 잔류했다가
후일 마자르인과 합쳐져 헝가리 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에 있는 세켈리족은
자신들의 선조가 훈족이고,
자신들이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루마니아는 드라큘라 백작 이야기가 나온 곳이기도 한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는 드라큘라의 원조는 아틸라인 것으로 보인다.
드라큘라의 모델로 알려진 드라큘라 백작(1431∼1476)은 1000년 정도 후대의 사람이다.
서양인들은 아틸라에게 ‘잔인한 약탈자이자 파괴자’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이러한 비난이 따르은 것은
동양인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심장부까지 점령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호령했고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을 호령했다.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신라(진한)와 보다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한민족이다.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이 비슷한 시기에 동·서양을 호령한 것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크게 기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끝)
이종호/ 과학사 연구가, 전 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겸직교수
발행일 : 2003 년 09 월 25 일 (402 호)
쪽수 : 66 ~ 68 쪽
<iframe title='훈족 아틸라 칸의 궁전 재건을 시도하는 헝가리 기업가'
width='640px' height='360px' src='http://tv.kakao.com/embed/player/cliplink/2940181?service=flash&alert=true' allowfullscreen frameborder='0' scrolling='no' ></iframe>
동영상 출처 http://blog.daum.net/red8504/11912031
2003년 12월 31일자 헤럴드경제에서도
이종호박사의 말을 빌어 기사의 말미를 다음과 같이 장식하고 있다
훈족의 서방 이동로에서 발견한 유물과
가야·신라의 것을 비교 검토한 결과 한민족을 훈족의 원류로 추정했다.
한민족이 훈족의 주류였다는 것이다.
아틸라는 칭기즈칸, 알렉산더와 더불어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대왕이다.
훈족은 375년부터 469년까지 거의 100년간 유럽을 지배했다.
당대 최고 문명국 겸 초강대국 로마와 이란을 복속시켰다.
훈족의 영향권은 사실상 지구 전체였다.
북아프리카, 영국에서도 훈족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박사는 “훈족은 중국보다 3배 큰 제국을 건설했고
아틸라는 세계를 지배했던 한민족”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쯤은 가소로울 정도다.
우리 민족은 이미 세계를 정복했었다.
-------------------------------------------
계림로 14호분 황금보검의 비밀
▣방송 : 2010. 2. 6 (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
▣연출 : 나원식 PD
------------------------------------------------------------------------
경주 대릉원 인근 계림로 14호 고분
그곳에서 출토된 눈부신 ‘황금보검’
이국적이고 화려함으로 주목받는 이 검
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왜 이런 작은 무덤에서 발견된 것일까?
이 황금보검을 둘러싼 불가사의한 의문들을 추적해본다
1973년, 계림로 14호 고분 발굴
-보물 635호 황금보검 출토
▲황금보검 출토 당시
1973년, 경주에서는 신라시대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인 황남대총의 발굴이 시작됐다.
금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국보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당시에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된 또 다른 무덤이 있었다.
계림로 14호 고분이 바로 그 것이다.
소형 적석목곽분인 이 고분에서는 유례가 없는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그 중에서도 이 무덤 피장자의 허리춤에서 나온 ‘황금보검’은 그 특이함과 화려함으로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국적인 정취의 황금보검
보석 상감 기법, 누금세공기법, 삼태극을 연상케 하는 소용돌이 문양이 어우러진
이국적인 정취의 황금보검. 당대 최고 수준의 장인이 만들었을 황금보검은
붉은 석류석 장식이 돋보인다.
이 검에 감입된 보석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한 유례가 없는 석류석으로
그 중에서도 동유럽이 주 생산지인 희귀한 종류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 검은 동유럽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에 위치한 신라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가 어떻게 황금보검을
가지고 잠들 수 있었을까?
초원길을 따라온 신라 유물
계림로 14호 고분과 가까운 미추 왕릉지구에서 발굴된
특이한 유물에는 인면 모자이크 유리구슬
‘미소 짓는 상감옥’ 목걸이가 있다.
지름 1.8cm, 높이 1.6cm에 불과한 이 구슬 안에는
놀랍게도 사람의 형상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상감되어 있다.
이 구슬에 묘사된 사람들은 피부가 희고 콧날이 오뚝한 것으로 보아 백인종으로 보인다.
일본학자 요시미츠 츠네오는 이 구슬에 표현된 인물이
황금보검의 제작자인 흑해연안의 켈트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 유리구슬의 인물이 황금보검을 제작한 사람들일까?
제작진은 의문을 품고 불가리아로 향한다.
흑해연안, 불가리아에서 황금보검의 기원을 찾다.
▲황금보검과 비슷한 기법을 사용한 불가리아 유물
고대 트라키아 문명의 발원지 불가리아.
현지 학자들을 취재한 제작진은 훈족이 촉발한 민족이동시기(3~6세기)의 유물들이
황금보검과 비슷한 기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서양을 아울러 초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민족이동이 이뤄졌던 당시,
동로마의 장인들은 이민족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공예품을 생산한다.
석류석이 감입된 동로마 지역의 유물들. 그리고 소용돌이 문양의 전통.
이것은 황금보검의 생산지가 흑해연안 동로마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동서를 아우르는 거대한 초원문화권의 형성
관련학자들 마다 서로 다른 주장들,
하지만 고대에 중앙아시아 초원,
흑해 연안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살았던 유목민족과 분명히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동유럽과 경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로만글라스, 각배, 황금유물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된 황금보검!
이것은 지금부터 천 오백년 전,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동유럽과 신라 사이에
거대한 초원 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
kbs 역사스페셜 꼭보기 => http://enjoyjap.egloos.com/164019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itrain64&logNo=100099071736
------------------------
TV 뉴스기사들
계림로 14호분 ‘황금보검’ 발원지 추적 미디어다음
chkNewsDateSv('20100205182010','20100209072835'); 2010.02.05 (금) 오후 6:20 제작진은
보검에 사용된 장식과 기법, 문양을 근거로 황금보검의 기원을 따라간다.
보석 상감기법과 누금세공기법, 소용돌이 문양이 특징인 황금보검은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다.
특히 검에 감입된 붉은 석류석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용된 예가...
경주 고분 '황금보검'의 비밀 미디어다음
chkNewsDateSv('20100202141330','20100209072835'); 2010.02.02 (화) 오후 2:13 [뉴스와 경제]
30년 전에 출토됐던 보물 황금보검에 대한 복원작업이 최근 완료됐습니다.
주인은 신라의 귀족으로..."황금보검 속에 숨어 있는 철검의 존재를 처음으로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MBC뉴스만 검색 | 사회주제만 검색 | 비슷한 기사검색
[경북] 바래지 않는 천년의 빛, 황금보검 미디어다음
chkNewsDateSv('20100201215506','20100209072835'); 2010.02.01 (월) 오후 9:55
[앵커멘트] 1970년대 경주의 한 무덤에서 발견돼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황금보검이 있습니다.
이번에 그 무덤을 조사한 보고서가...
화려한 부장품과 특이한 매장방식이 드러나면서
황금보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YTN동영상만 검색 | 사회주제만 검색 | 비슷한 기사검색
"1500년전 서역서 온 황금보검 주인은 신라 고위층" 미디어다음
chkNewsDateSv('20100201215112','20100209072835'); 2010.02.01 (월) 오후 9:51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황금보검 자체도 특이한 유물이지만
두 남자가 나란히 안장된 형식으로 인해
'14호묘의 주인은...
황금보검은 중앙아시아 흑해 연안에서 생산돼 당시 신라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은 거의 똑같은 유물이 카자흐스탄...
한국일보만 검색 | 사회주제만 검색 | 비슷한 기사검색
"유럽대륙의 훈족은 고구려인이었다"
"전 世界의 언어는 동방문자를 주축으로 하는 고대우리말에서 비롯되었다."
다음 영문은 미국에 계신 한윤수 선생께서
지난 1997년 여름 그리고 가을에
미국에 있는 Cable TV The Learning Chanell에서 Atilla the Hun 이라는
1시간 짜리 다큐멘타리로 방영된
우리 민족과 관련된 중요한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을 수차례 본 후
정성껏 요약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영문의 번역은 당연구소 연구위원이자
저희 번역소 '번역번역'의 김정옥님께서 번역을 하였습니다.
본래 이 번역본은 수년 전 역사스페셜 게시판에 올린 것으로,
저희 연구소도 한윤수 선생님의 허락을 득하여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여러분께
공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내용은 본 연구소 박대종 소장의
"전 세계의 언어는 우리말에서 비롯되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비롯한 서양제어는
동방문자를 주축으로 하는 고대우리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역사적으로 강력히
뒷받침해주는 증거들 중 하나가 되는 것으로,
여러분들은 이러한 역사적, 실증적 사실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본 내용은 우리말이 전 세계어의 모태라는 당연구소의 주장이
틀림없음을
여러분들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영문출처(한윤수 선생님의 사이트):
http://www.geocities.com/Athens/Crete/4095/hfk.htm에서
http://www.geocities.com/koreanhistory/huns.htm으로 이동.
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훈족과 잊혀진 Korean)
(이 방송은 훈족이 현 한반도에서 그 이동을 시작함을 알리는 화살표와 함께 시작된다.)
Europeans called them "Huns". Originate ing From the main land of Korea,
they invade d the Roman empire during the 4th century.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족(Huns)"이라고 불렀다.
본국 고려(Korea; 고구려의 준말) 땅에서 일어난 그들은 4세기 기간중에 로마 제국을 쳐들어왔다.
Ancient Greeks historian recorded them Scytians,
and later European called them Mongols.
고대 그리스 역사가는 그들을 스키타이인(Scythians)이라고 기록했으며
그뒤의 유럽인들은 그들을 몽골인이라고 불렀다.]
Around early 4th century, the temperature fell lower than usual for many years in far East Asia.
It caused grains not to ripen, grazing grass land for animals was scarce.
4세기 초 무렵, 극동아시아에서는 수년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기온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로 인해 곡식은 영글지 못하고 동물들에게 풀을 뜯어먹일 수 있는 땅은 부족하였다.
or these reasons a large number of semi-nomadic tribes left from what is known today
as the Korean mainland to Eastern Manchuria.
이런 이유로 인해 상당수의 반(半)유목 종족은
오늘날 Korea라고 알려져 있는 한국본토에서 만주 동부로 떠나게 되었다.
(번역자 주: 이 부분은 영토면에서 사실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현재의 한국영토를 기준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Gathering other tribes along the way they proceeded to the Central Asiatic step.
From there,
the mass of tribes went westward.
그 길을 따라 이민족들을 규합하면서 그들은 중앙아시아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종족 대부분은 서쪽으로 향했다.
Around AD 370 these nomadic people arrived upon the Horizon of the Roman empire.
They established a kingdom along the Danube,
on the prairies that are present day Hungary.
서기 370년경 이 방랑민들은 로마제국 국경선에 도착하여 다뉴브 강
(독일 남서부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흘러 흑해로 들어감; 독일명 '도나우강')을 따라
현재는 헝가리 지역인 대초원위에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About AD 443, Attila, the son of King Ruga assassinated his brother Bleda
and united all the Hun tribes.
He lead the warriors onto ruthless and savage conquests;
destroying anything in sight,
looting and merciless killing of innocent people.
서기 443년 경, 루가왕의 아들 아틸라는 그의 형제 블레다를 암살하고 전(全) 훈족을 통일하였다.
그는 전사들을 이끌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정복을 감행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약탈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번역자 주; 완전히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니 이 점을 잘 참작하기 바람)
He conquered Germany, Eastern Europe and most of southeastern Europe.
그는 독일, 유럽 동부 및 유럽 남서부 일대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
The Huns were superior horseman
and combined with their archery skills were the bane of the Romans ......,
훈족은 기마술(말타기)에 능한 이들로 궁술 또한 겸비하였는데
그것은 로마인들을 파멸시킨 큰 원인이었다.
(번역자 주: 로마제국의 멸망사가 다시 쓰여져야 할 것 같군요.
서양인들에게 있어 불멸의 영화인 '벤허'에 나오는 멋진 로마군인들이
우리 조상인 고구려 무사들에게 무참히 멸망당했다는 이 기록이
우리가 아닌 양인들의 손에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흥분케 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They used a short, inverted bow made from few different materials glued together.
An iron arrow head was able to pierce any European armor.
그들은 서로 강하게 접착된 다른 재료들을 가지고 제작된 짧은 역궁(逆弓; 맥궁!)을 사용하였으며,
쇠로 된 화살촉은 유럽군인들의 어떤 철갑옷도 관통시킬 수 있었다.
Their horses were short in height, but had speed
and endurance, they were also agile and smart.
그들의 말은 키가 작았지만 빠른 속도와 강한 지구력이 있었으며,
그들 또한 동작이 민첩하고 영민하기 짝이 없었다.
Hun warriors, while twisting their upper body,
were able to shoot arrows behind them
while their horses were running forward (referring picture).
훈족 전사들은 말이 전방으로 달리고 있는 상태에서 말위에서 상체를 뒤로 틀면서
그들 뒤편에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그림 참조요).
(번역자 주: 위 '그림 참조요'의 그림은
현 중국 집안현 무용총 주실 서벽의 수렵도에 나오는 고구려 기마궁병의 모습과 완전일치함.
/// Orullee Han님의 주; 고구려 기마병 그림은 집안현 그림으로,
다큐에 나오는 인물들의 복장과 거의 같습니다.)
When Atilla was young, his father Ruga exchanged his son with a young
son of a prominent Roman family ,
his name was Aetius.
아틸라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 루가는 자신의 아들을 한 유명한 로마 가문의 어린 아들,
즉 그 이름이 Aetius(Orullee Han님의 주;
아틸라의 친구이기도 하며 서로 상대방의 전술을 잘알며 내기억이 정확치않으나
로마 왕실의 왕자인지도 모르겠읍니다)라고 하는 아이와 바꾸었다.
For ten years Atilla was educated in the Roman court vise versa Aetius from the Hun kingdom.
Atilla was probably the first western educated Mongol in its history.
십년간 아틸라는 로마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고 반대로 Aetius는 훈족의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틸라는 아마도 몽골족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서구 교육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번역자 주; 이 문장도 서양인의 입장과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니 각별한 주의를 요함)
Later these 2 men would confront each other in Gaul (today's France), in 451.
Atilla would go on to lose this battle and
invaded Italy in 452 with Germanic tribes.
이들 두 사람은 후에 451년에 Gaul(오늘날의 프랑스)에서 서로 맞부딪히게 되는데,
아틸라는 계속해서 이 전투에 패배하게 되며,
452년에는 게르만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번역자 주; 주인공의 이름 '아틸라'와 '이탈리아'가 매우 흡사한 것이 주목됩니다.)
His army advanced to Venice (today's) and negotiated with a Roman
representative Pope Leo for 10 hours.
그의 군대는 오늘날의 베니스로 진격하여
로마 대표 교황 Leo와 장장 10시간동안 협상을 벌였다.
All the while on horse back, Atilla received tribute from Rome,
and would thereafter retreat from Italy.
Pope Leo received the title
"The great" from the church for his successful negotiations with Atilla.
말 위에서의 장시간 협상 공로로, 아틸라는 로마로부터 공물을 받았으며
그후 이탈리아로부터 회군하게 된다.
교황 레오는 아틸라와의 이 성공적인 협상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받았다.
Atilla married to a German princess, Ideco in AD 453.
After his wedding celebration he died that
wedding night, possibly
from alcohol poisoning.
아틸라는 453년에 독일공주 Ideco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불행히도 결혼식날밤에 죽게 되는데
아마도 그의 사인은 주독(酒毒)인 듯 하다.
His people dammed the Danube river and buried him in the middle of the river.
They opened the dam for no one,
so that none could ever find his grave.
그의 백성들은 다른 이들이 묘지를 찾지못하도록 다뉴브강을 둑으로 막았으며,
시신을 강 중앙부에 매장하였다.
그들은 그 댐을 어떤 이에게도 오픈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 그 누구도 그의 무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After his death, the Hun kingdom crumbled and his people scattered from the Europe.
He would be known as "the scourge of god" by the Roman Empire because of his cruel acts.
그가 죽은 후 훈(Hun) 왕국은 멸망하였으며
그의 백성들 또한 유럽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살아생전 잔인한 행위로 인해 그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의 천벌"이라고 알려지게 된다.
The Huns left a number of legacies in Europe especially the Chateau area of France,
all children born there have a blue round mark in their hip as the Mongolians do today.
The country of Hungary got its name from the Huns,
to commemorate the Hun Kingdom.
훈족은 유럽에, 특히 프랑스 Chateau 지역에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아이들은 엉덩이 부위에
오늘날 몽골인들과 동일한 파란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다.
헝가리라는 국명은 훈 왕국을 기념하기 위해 Huns에서 비롯된 것이다.
During the world war ll allied forces refer to Germans
as Hun because of their relationship with Huns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Funeral cultures of Europe are also deeply influenced from the Hun.
세계 제 2차대전 기간중 연합군은 역사적으로 독일인들의
4세기, 5세기에 훈족과의 관련성 때문에 독일인들을 훈족으로 부른다.
유럽의 장례문화 역시 훈족으로부터 깊이 영향받은 것이다.
번역을 마치며:
저는 고구려(약칭 '고려': Korea)인의 후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고구려가 유럽대륙까지 지배했다면 영어를 비롯한 현 유럽제어들에는 반드시
우리 한국어의 흔적이 상당수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언어적으로 증명한 책을 소개하며 번역을 마칠까 합니다.
책명: <나는 언어정복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책의 내용 일부;
한자는 우리 민족이 창제하였다.
상당수 영단어는 한자의 음이 알파벳으로 표기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영어 book(책)의 어원인 bark(나무껍질)은
동방문자 '朴(나무껍질 박)'의 자음이 알파벳으로 표기된 것이다.
(중요한 점은 朴의 현대중국음 '푸'는 영어와 전혀 맞지 않은데,
이는 한자를 제작한 민족이 우리 조상들임을 강력히 증거하는 것이다.)
yearn(그리워하다)은 '戀(그리워할 연)'에서
dawn(새벽)은 '旦(새벽 단)'에서
you(너)는 '汝(너 여)'에서
young(젊은, 나이어린)은 '영계'할 때의 (나이어릴 영)에서
fee(요금)는 '費(요금 비)'에서
tox-(독)은 '毒(독)'에서
see(보다)는 '視(볼 시)'에서
canine(개의), kennle(개집)에 들어있는 어근 can(개) 및
ken(개)는 '犬(개 견)'에서.
speak(말하다)는 自白(자백), 告白(고백) 등에 쓰이는 '白(말할 백)'의 된소리 '빽'의 고음 'ㅅ백'에서.
park(공원, 머무르다)는 泊(배댈 박)에서.
want(원하다)는 '願(원할 원)'의 자음 '원'에 분사어미 t가 붙은 것이고,
thigh(넓적다리)는 '腿(넓적다리 퇴)'에서
geo-(땅, 지구, 지리)는 '地(땅 지)'에서
car(차)는 '車(수레 거)'에서
go(가다)는 '去(갈 거)'에서
cow(암소)는 '牛+古(암소 고)'에서
cell(세포, 작은 방)은 '室(실)'에서.
위의 예는 최근에 한 연구가에 의해 세계역사상 최초로 밝혀진 것으로,
영어를 비롯한 서양제어의 근원은 모두 한자이며,
그 음이 중국음(중국음은 고래로 종성 'ㄹ'이 없었을 뿐 아니라,
명나라 이후 현대중국어에는 종성 ㅂ, ㄱ 음등이 완전히 소멸됨으로써
그들은 한자의 제작민족이 아님을 자신들 스스로 드러내고 있음)이
아닌 우리음과 완전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한자의 原제작민족은 우리 민족이 확실합니다.
위의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향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미인들보다 영어를 더 정확히, 더 빨리, 더 많이 습득할 수 있으며,
이는 영어에 대한 완전정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국운이 도래했다는 하늘의 증거로 보이며,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영어의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를 완전히 굴복, 정복시키고
우리나라말을 전 세계의 표준어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처(퍼온곳) : 대종언어연구소 자료실 1페이지(제목 : 유럽대륙의 훈족은 고구려인이었다
'우리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정민박사-천문으로 본 삼국의 위치 & 살수대첩의 위치 (0) | 2019.03.02 |
---|---|
죄송합니다" 74년 전 조선인과의 약속 지킨 日 학도병 (0) | 2019.03.02 |
[스크랩] 중국 최초의 왕조 하나라 우왕의 무덤 `대우릉` - 우왕 =석가 = 디오니 소스 (0) | 2019.02.27 |
“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더 늘었다” (0) | 2019.02.25 |
[유럽] 충격!!!!! 고대 유럽 호령한 훈족 아틸라는 한민족이다!!!!!(독일방송) (0) | 2019.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