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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한강 유역 출토 신석기 벼·탄화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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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한강문화의 신석기시대 재배 농경의 발상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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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옥천 남곡리 1호 농경기념 선돌(왼쪽)과 수북리 선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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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단립벼의 재배 기원지와 보급 경로도. |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② 농업혁명과 기마문화의 형성
古한반도 중부는 인구밀집지역
사냥·채집만으로는 ‘식량 부족’
남한강·금강유역 경작에 적합
‘밥+콩장+깨양념’ 食문화 형성
밀 재배한 서양은 빵문화 생겨
벼, 기원전 28세기경에 中으로
기원전 7 ~ 5세기엔 日에 전파
부여, 동방 첫 ‘말 가축화’ 성공
전체 고조선 문명에 목축 전파
앞선 기마문화 덕에 영토 넓혀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지구 기후가 오늘날처럼 온난화되자,
고(古) 한반도 구석기인들은 동굴에서 나와 인접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고한반도 중부 초기 신석기인 인구밀집 지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료 부족’이었다.
사냥·어로·채집만으로는 과잉인구의 부양이 불가능했다.
식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선 야생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채용해 식료 생산을 위한 ‘농업경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고한반도 중부 제1동굴지역의 동굴 밖 최근접한 남한강과 금강 상류 유역은
①석회암 동굴 최근접 하천 유역에 비옥한 충적층 평야가 있었고
②세계적으로 식물 종류가 매우 많아 온대작물 농업경작의 발생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에서 식료 부족 문제의 대책으로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의 저지대에서는
실제로 신석기 시대의 시작과 동시에 1만2000년 전쯤부터 오곡, 특히 단립벼의 재배가 시작됐다.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사이의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볍씨 18톨이
충북대 박물관(관장 이융조)에 의해 발굴됐는데,
농과학자들의 조사 결과 초기 재배벼임이 확인됐다.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소로리 볍씨가 포함된 토탄층 윗부분을 탄소측정한 결과
1만2500년 전으로 측정됐다.
이 소로리 단립벼 볍씨와 토탄층을 분리해 볍씨 8톨을
미국 애리조나대 고고연구소에서 탄소측정한 결과
토탄의 연대가 1만2552±90년 전,
고대벼가 1만2500±15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이 사실은 한반도의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유역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단립벼’의 경작이 시도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후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강·금강 유역을 비롯해
고한반도의 크고 작은 강변에서는 강 하류에까지 곡물 출토 시계열이 성립되고
5000년 전쯤까지 재배 공간이 대폭 넓어지면서
단립벼·콩·팥·밀·보리·조·기장·수수·깨 등 곡물이 출토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 고한반도 ‘단립벼’ 경작의 발생 기원 지역을 지도에서 그려 보면 <그림 2>와 같다.
이 지역에서 동시기에 오곡이 농기구들과 동반 출토되므로,
이 지역이 동방 신석기 농업혁명의 기원지로 판단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고한반도 출토 신석기 시대 토기 몇 점에 박힌 식물들의 압흔을 탄소측정했더니,
신석기 시대 ‘조기’ ‘전기’부터 조·기장·콩·들깨를 재배해 식용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콩’ ‘콩과 작물’이 신석기 초기부터 재배됐다는 사실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오산리 출토 신석기 초기 토기에 박힌 ‘콩’과
압흔 토기에 부착된 탄화물을 연대측정한 결과
절대연대 7175∼7160년 전과
절대연대 7000∼694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즉 고한반도에서는 콩과 팥이
기원전 53세기(7175∼7160년 전)경에 이미 재배됐음이 확인된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중국에는 ‘콩’이 기원전 7세기 고조선 후국 산융에서 도입됐다.
서양에는 ‘콩’이 18세기 초엽 동방에서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출토 곡물들로 종합해 보면,
고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한강 문화에서는 약 1만2000년 전부터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돼
약 5000년 전까지
단립벼·조·기장·콩·팥·수수·밀·보리·깨(들깨와 참깨) 등의
농업경작이 크게 발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고한반도 신석기 농업혁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은
‘단립벼’와 ‘콩·팥’과 ‘깨’의 경작이다.
당시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은 첫 ‘농업경작’의 큰 성공을 스스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 상류에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농경 성공) 기념 선돌’이 2개나 남아 있다.
충북 옥천군 남곡리 개미재에 밭고랑을 새긴 1개의 선돌(남곡리 1호 선돌)과,
수북리 동정마을에 있는 다른 1개의 선돌(수북리 선돌)이 그것이다.(<그림 3> 참조)
문자가 없던 시대이므로,
농업혁명(농업경작)의 위대한 업적을 ‘논밭고랑’ 그림으로 표시한 기념비 선돌이었다.
대전 괴정동 출토 ‘방패형 농경문 청동기’(약 2600년 전)에 새겨진 밭 가는 농부 그림을 보면,
이 선돌의 줄그림이 논밭고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한반도의 중부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농업경작)은
모든 한반도 강변과 해안에 주민 이동과 함께 전파됐다.
농업경작은 태양의 ‘햇빛’과 ‘따뜻한 온도’의 은혜에 직결돼 있으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태양(해) 숭배’ 사상을 더욱 갖게 됐다.
그들은 ‘태양’(해)이 제공하는 ‘밝음’(광명·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게 됐다.
그들은 또한 족장과 자기들을 ‘태양’의 후손,
즉 하늘(天)의 후손으로 생각해 ‘천손의식’을 갖게 됐다.
또한 그들은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후에 그들과 그 후예들은 자신들을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으로 자처했고,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차음해 ‘발인(發人)’이라고 표기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최초의 신석기 농업혁명은 두 곳이 구심지가 돼 일어났다.
그 하나가 약 1만2000년 전부터
고한반도 중부 남한강과 금강 상류 지역에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인 ‘밝족’이
단립벼(쌀)·콩·수수·조·기장·깨 등의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한 농업혁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약 1만1500년 전에 비옥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수메르족이 밀·보리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에 전파한 농업혁명이다.
실증적으로 발굴 보고서들을 읽어 보면,
단립벼 재배는 고한반도에서 기원해 기원전 28세기경에
중국 산둥반도와 중국 동해안 일대로 전파됐다.
남쪽 일본 열도로는 기원전 7∼5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 규슈 지방 등으로 전파됐다(<그림 4> 참조).
중국 학자들도 농업경작을 고조선(이때는 동이(東夷)족으로 표현)에서 도입했음을 기록들에 남겼다.
중국에 농경을 처음 가르쳐 준 것은
동이족인 신농(神農)족이며(‘사기(史記)’ ‘부사년(傅斯年)’),
역시 동이족인 백익(伯益)이 쌀 농경과 목축을 가져와 가르쳐 줬다(‘사기’).
동이족인 근모(根牟)족은 밀·보리 재배를 가르쳐 줬다(중국학자 장푸샹(張富祥)).
가장 질긴 고급 명주와 그 직조 방법도 동이족이 전수해 줬다고 기록돼 있다(‘상서정의(尙書正義)’).
인류 최초 5대 독립 문명은 모두 독특한 농경문화를 문명의 기초로 해 시작됐다.
고조선 문명은 ‘단립벼(및 밀·보리)+콩+깨’ 재배의 농경문화 유형과,
이에 의거한 ‘쌀밥(및 밀·보리 식료)+콩장(간장+된장)+깨 양념(향료)’의
독특한 식문화 유형을 형성했다.
이와 달리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밀’(및 맥류) 재배와 ‘빵’ 식문화를 형성해
이집트문명과 그리스·로마를 거쳐서 서양에 전파됐다.
인도 문명은 ‘장립벼’ 재배와 장립벼 쌀밥 식문화,
중국 문명은 ‘잡곡’ 재배와 만두·국수 식문화,
아널드 토인비가 뒤에 독립 문명으로 추가한 마야·아즈텍 문명은 ‘옥수수’ 재배,
잉카 문명은 ‘감자’ 재배와 그에 따른 식문화 유형들을 각각 형성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이와 유사한 식문화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는 단립벼 ‘쌀’로 ‘밥’뿐 아니라 무려 200여 종의 떡(이종미 교수)과
과자 등 온갖 파생 음식을 만들었고,
설탕(조청·엿)과 각종 술도 쌀로 빚어냈다.
염분을 소금 가루로 직접 섭취하지 않고
매우 독특하고 현명하게 콩 식물단백질과 융합시켜 섭취하는 콩장(간장·된장) 식문화도 창조했다.
깨(참깨·들깨)는 지금도 주로 한국인이 애호하는 독특한 향료·양념이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이와 유사한 식문화는
사실은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가 전파된 것이다.
고조선 문명의 농경과 관련된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인류 문명사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기마문화를 형성·발전시킨 것이다.
고대의 순화된 말(馬)은 크게 나누면
고조선 문명의 ‘동북아시아종 말’(속칭 ‘몽고말’, 키 약 130㎝)과
수메르 문명의 ‘서남아시아종 말’(속칭 아랍말, 키 약 150㎝)의 두 종류다.
동북아시아종 말은 키가 작지만 추위에 매우 강하고 장거리 선수다.
서남아시아종 말은 크지만
추위와 병에 약한 단거리 선수인데, 장거리를 달리면 쓰러져 죽는다.
동북아시아종 말은 고조선 후국 부여가 최초로 가축화해 ‘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여는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선진적으로 진행된 농목(農牧) 국가였으며,
심지어 관직 명칭까지 마가(馬加·加는 장관 또는 지방 제후 호칭),
우(牛)가, 구(狗)가 등 가축 이름을 사용했다.
현재 한국 민속놀이의 하나로,
가축들 이름(모=말, 윷=소, 걸=양, 개=개, 도=돼지)에서 딴 윷놀이도 부여의 민속이다.
18세기 증기기관 발명에 의한 기계동력 사용 이전까지,
인류 문명 교통·운수의 주동력은 ‘말’의 동력, 즉 마력(馬力)이었다.
‘마력’을 가진 자는 심지어 세계 정복에 나설 수도 있었다.
이 인류 최초의 자연 동력 ‘마력’의 발견·발명자가 동방에서는 고조선 문명(몽고말)이었고,
서방에서는 수메르 문명(아랍말)이었다.
부여에서 가축화된 ‘말’은
전체 고조선 문명권에 전파돼 목축을 선도했다.
특히 실위족(원몽골족) 등 유목민족들은
‘말’을 도입해 양·염소 등 가축몰이에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부여와 실위는 기마민족 국가의 면모를 갖췄다.
고조선의 첫 도읍지 강동 아사달 지역 읍지인
‘강동군읍지(江東郡邑誌)’에는
군 주위의 대박산(大朴山)과 묘운대(墓雲臺) 위에
각각 ‘철마(鐵馬)’가 세워져 있어,
아래를 압도하듯 내려다봤다고 기록돼 있다.
또 강동현 만달산(蔓達山) 산정에도
수철마(水鐵馬)가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와 만주의 수많은 고을 가운데
산마루에 마상(馬像)이 3개나 세워져 있던 곳은 강동 아사달이 유일하다.
이것은 이미 고조선 시대에 ‘말’의 비중이 매우 높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 전설 가운데, 단군이 기마연습을 많이 해
푸른 산이 흙이 파여 붉은 산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산(馬山)이 실재하고 있다.
고고 유물로는 약 4025년 전의 것으로 연대측정된 랴오둥반도 남단
대취자(大嘴子) 1기 유적에서 기마병 무기인 청동꺾창 1개,
석제꺾창 1개가 고조선 번개무늬 채색 도기 등과 함께 출토됐다.
이후의 고조선 기마문화의 직접적 증거로
예컨대, 선양시 정가와자 6512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 마구들처럼
다수 유적의 마구(馬具) 증거유물들이 넘치고 있다.
고조선 문명의 선진적 기마문화는 고조선 문명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조선의 기병부대는 발전된 기사법(騎射法)의 전술과 질풍노도 같은 신속성으로
국방에 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영역을 급속히 확대시켰다.
또한 기마문화가 확대된 고조선 고대연방국가의 교통과 통신에도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고조선 문명은 일찍이 기마문화를 발전시킨 결과,
북부 연해주와 흑룡강까지 고조선 영역을 확보했다.
또한 고조선 기마문화는 고조선 서변 후국들이 고중국을 제압하면서
난하, 조백하를 건너 영정하(永定河)에 도달하고,
지금의 산시성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한 동력이 됐다.
‘만리장성’은 고조선의 막강한 기병부대들이 넘어올 수 없도록
고중국 측이 쌓은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이었다.
중국에는 처음 고조선 이주민 백익(伯益)족이 고조선 ‘말(馬)’을 전수했으나
, 기마(騎馬)는 할 줄 모르고 주로 수레를 끄는 데 사용했다.
중국에서 처음 기마제도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307년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스스로 동호의 기마복을(胡服騎射) 입어 모범을 보이면서
고조선 후국 동호로부터 처음 기마제도를 도입해
소규모 기병대를 창설한 것이 효시라고 중국 고문헌들에 기록돼 있다.
일본에는 기원후 4∼5세기경 한반도 가라국에서 말과 기마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일본 도쿄(東京)대 에가미(江上波夫) 교수가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을 주장한 바,
이 경우의 ‘기마민족’은 고조선 문명의 부여족과 그 후예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