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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동굴 많은 한반도서 빙하기 견딘 인류, ‘동아시아 문명’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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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많은 한반도서 빙하기 견딘 인류, ‘동아시아 문명’ 창조하다


 2019년 05월 15일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  최후 빙기 때 동아시아 해안선과 구석기인의 이동 방향.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졌고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다.

고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유일한 동해안이었으며,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이동해 오다가

바다에 막혀 정착한 종착지였다. 신용하 교수 제공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① 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해 가장 먼저 뜨는 동아시아로 
인류 선구자들 대장정끝 정착 

옛 한반도 한강·대동강 일대 
사람들 모여드는 곳으로 부상 

농업 발달·인구밀집·지적집단 
세 조건 갖춘 한반도 문명 발생
 

우리는 학교에서 인류 최초의 독립 문명으로서

 ① 수메르 문명(약 5500년 전)

② 이집트 문명(약 5100년 전)

③ 인더스 문명(약 4200년 전)

④ 고중국(황하) 문명(3600년 전)의 4대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초기에 독립 문명으로서 이 4대 문명이 주변으로 파급돼

그 후 인류 고대 위성(衛星) 문명들을 형성·발전시켜서

인류가 문명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낡고 너무 부족한 학설이다.

유라시아 대륙 가장 동쪽에,

고중국 문명 형성의 기원이 된 것으로,

‘고조선 문명’(약 5000년 전)이라는 거대 문명이 하나 더 있었다.


 이것은 태양이 가장 먼저 솟는 땅을 찾아 동방 끝으로 이동해 왔다가 정착한

고(古) 한반도 출신 신석기 말기

·고대 초기인들이 신석기 시대

① 한강 문화 ② 대동강 문화 ③ 요하(遼河) 문화를 하나의 인과적 체계로 묶어서

 규모가 큰 찬란한 문명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사를 바꿔 써야 할 새로운 문명이다.

이것이 ‘고조선 문명’이다.


토인비도 6개의 유산된 초기 문명이 더 있었다고 유보해 뒀었다.

이번 문화일보 연재에서는 이 새 인류 문명을 탐구해 나가기로 한다.  

고인류학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 종(種)은 약 5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진화하면서

먼저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약 250만 년 전에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손 쓴 사람(homo habilis)’이 됐으며,

약 170만 년 전에 꼿꼿하게 걷게 된 ‘곧선 사람(homo erectus, 原人)’이 됐고,

약 20만 년 전에 돌을 깨 불을 사용하는 ‘슬기 사람(homo sapiens)’이 됐으며,

약 10만 년 전에는 지혜가 더욱 발전한

 ‘슬기슬기 사람(homo sapiens sapiens, 新人)’도 출현하게 됐다.

이 ‘슬기슬기 사람’의 두뇌 용량이나 사고 능력은

현대인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돼 있다.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건너와서 각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곧선 사람’ 단계부터다.

그러나 활발한 이동은 ‘슬기 사람’과 ‘슬기슬기 사람’ 단계라고 설명되고 있다.

진화고고학에서는 ‘곧선 사람’부터 이들을 모두 합쳐서 ‘구석기인’이라고 호칭한다.


이 시기는 지구 전체가 더워서 시베리아에서도 아열대 식물 열매가 열리고 매머드와 공룡이 살았다.

 어디에서나 식료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구석기인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인간 무리(bands)를 이뤄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방향으로 분산 이동했다.

구석기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맹수들과 함께 매일 찾아오는 밤의 어둠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용기 있고 호기심 많은 구석기인 무리는 태양이 맨 먼저 솟아올라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밝은(光明) 아침이 먼저 찾아오는 해 뜨는 동방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 형세를 이루게 됐다.


고한반도와 연해주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이고

 그 동쪽은 깊은 태평양 바다(동해와 오호츠크해)다.

그러므로 이곳은 해(태양) 뜨는 동쪽을 향해

 수만, 수십만 년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해 온 구석기인 무리의 인류사적 대장정이 누적된

 ‘종착역’(terminal) 같은 지역이었다.



▲  빙기 때 해안선과 슬기 사람의 주 이동 경로(20만∼5만 년 전).


▲  인류 최초 4대 독립 문명에 고조선 문명(그림의 A 부분)을 첨가했다.

B는 수메르 문명 지역.




유라시아 대륙 동단 고한반도와 연해주 지역에 구석기인이 처음 도착한 것은

 100만∼70만 년 전 무렵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평안남도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유적(약 100만∼70만 년 전)과

절골 유적(약 93만 년 전),

충북 단양군 도담리 금굴 유적(약 70만 년 전)이 이미 발굴돼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한반도·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발굴 보고된 주요 구석기 유적이 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약 5만3000년 전 구석기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쳐왔다.

지구 기후의 급격한 변화로 혹한의 ‘최후 빙기’가 닥쳐온 것이다.


태양광선의 95% 이상이 먼지에 가려져 5% 이하만 지구 표면에 닿았다.

이 시기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위 40도 이북 지역은

긴 겨울에는 모두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돼 생물이 생존할 수 없었다.


예컨대 우랄 지역의 1월 평균 온도는 영하 30도였다.

수마트라 섬 적도의 평균 온도는 8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유라시아 대륙 구석기인들은 북위 40도 이남의 생존 가능한,

따뜻한 지역의 동굴을 찾아 이동한 소수 구석기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멸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최후 빙기에 북위 40도 이북 지역에서는 인류가 상주(常住)하지 못했다.

물론 여름에는 사냥감을 뒤쫓아 북위 40도 이북에서 사냥하면서 계절적 일시 거주는 했다.


그러나 북위 40도 이북에 집단 상주지를 형성하고 문명을 만들지는 못했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선은 한반도 신의주와 중국 베이징(北京)을 지나간다.


그러므로 고한반도의 압록강 최하류와

고중국의 베이징 이북은 최후 빙기 약 4만 년 넘게 인류가 상주할 수 없는 얼어붙은 동토였다.


그러므로 한국민족이 시베리아 고(古)아시아족에서 기원했다거나,

 톈산산맥 또는 바이칼 호수에서 기원해 내려왔다는 학설은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절의 낡은 학설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 이남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혹한을 피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산지가 비교적 많은 고한반도였다.


한반도의 자연 동굴 총수의 90% 이상이 석회암 동굴이다.


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카르스트(Karst) 지형 석회암 지대는

 한반도 중부 차령산맥·소백산맥 일대에 가장 잘 발달해 있다.

이 지역이 고한반도 ‘제1동굴지대’다.


그다음이 멸악산맥 일대의 ‘제2동굴지대’다.

중국에서는 남방 양쯔강 유역과 광시(廣西)성·구이저우(貴州)성·윈난(雲南)성 지역에

 가야 석회암 동굴 지대가 나온다.

고한반도는 최후 빙기 겨울철 동토에 연접한 북방한계선의 매우 추운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최대 석회암 동굴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기존 고한반도의 구석기인과 유라시아 대륙 동남부 해안을 따라

남방에서 꾸준히 이동해 올라온 구석기 신인(슬기슬기 사람)이 합쳐져서,

이 기간에도 종착지 고한반도는 세계 인구밀집 지역의 하나가 됐다.  

또한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져 고중국 관내와 이어졌고,

 대만과 중국 본토와도 이어졌으며,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기 때문에,

고한반도는 전체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 유일한 동해안이었다.


 최후 빙기에도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꾸준하게 이동해 들어오다가

 바다에 막혀 더 동쪽으로 갈 수 없어서 정착하는 종착지가 고한반도였다.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인류는 최후 빙기의 대재난 시대를 견뎌내고 새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지구 주변의 먼지가 걷혀 태양광선이 모두 땅에 닿으면서 기후가 대체로 오늘날처럼 온난해졌다.


지구 기후가 온난화되자 유라시아 대륙의 동토에 인접해 있던 구석기인들은

모두 동굴에서 나와 부근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새로운 용구로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만들어 사냥·어로·식료 채집을 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구석기인이 신석기인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된 것은

신석기인들의 농업경작(agriculture) 시작이었다.


 종래 사냥과 채집으로 한 가족을 부양하는 데 수천 에이커의 토지가 필요했던 데 비해,

농경을 시작하면서 약 25에이커의 토지로 충분해졌다.


그러나 농업경작이 어느 곳에서나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옥한 토지, 온난한 기후, 풍부한 물과 함께 야생종(野生種)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고 육성하려는

 의지를 가진 현명한 인간 집단이 필요했다.


농업경작은 신석기인을 특정 지역에 장기간 정착시켰다.

인간의 유랑 시대를 정착 시대로 바꾼 것이다.


농경 마을과 읍락이 형성되고 이것은 대대로 전승됐다.

 신석기인의 토지에 결부된 농업경작의 장기 정착은

 인류 사이 수천 개의 상호 소통되지 않는 언어족을 만들어 냈다.  

사회학적으로 신석기 농업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혁명적 사회변동을 가져왔다.

 식량 생산 공급의 잉여 증가는 인구 증가를 결과했다.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분배 과정에서 갈등과 투쟁을 자주 발생시켰다.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위임받은 우두머리와 그 집단이 출현했다.

 가족들이 집합해 씨족이 형성되고, 씨족들이 통합해 부족이 형성됐다.


부족들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면,

패배한 부족의 포로는 노예가 되고

 승리한 부족장과 그의 무장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세습 귀족이 돼, 신분과 계급이 발생했다.

부족장들은 다른 부족들을 통합해

대부족장 또는 군장(chief)이 되고

준(準)국가인 군장사회(chiefdom)를 형성했다.

강력한 군장은 다른 군장을 통합해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또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농업에 통합돼 있던 수공업을 분리시켰고,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교환을 중심으로 한 상업이 분화됐다.

수공업의 발전으로 강한 생산용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연동과 주석의 합금인 청동기를 발명·제조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철기 제조가 시작됐다.


이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바로 신석기 농업혁명,

청동기와 철기 제조, 고대 국가의 형성,

신앙의 통일, 언어의 통일과 문자 발명, 초기 과학과 문화예술의 성립 발전 등이었다.

따라서 인류 최초의 문명은 말기 신석기인이 거주한 모든 지역에서 균등하게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일찍 농업경작이 성립 발전하고,

인구가 밀집되고, 지적 성능을 활용한 과학적 수공업 기술이 성립되고,

고대 국가가 형성된 특정 지역에서 형성되고 탄생했다.


이 최초의 특정 지역 구심점이 유라시아 대륙의 두 곳에 뚜렷이 출현했다.

그 하나가 동방 고한반도의 한강과 대동강 유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고조선 문명’이다.

다른 하나가 서방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초승달 지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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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2500년前 한강유역서… 인류 최초 ‘쌀·콩·깨 재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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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한강 유역 출토 신석기 벼·탄화미.
▲  <그림 2> 한강문화의 신석기시대 재배 농경의 발상지역.
▲  <그림 3> 옥천 남곡리 1호 농경기념 선돌(왼쪽)과 수북리 선돌.
▲  <그림 4> 단립벼의 재배 기원지와 보급 경로도.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② 농업혁명과 기마문화의 형성

古한반도 중부는 인구밀집지역 
사냥·채집만으로는 ‘식량 부족’ 

남한강·금강유역 경작에 적합 
‘밥+콩장+깨양념’ 食문화 형성 
밀 재배한 서양은 빵문화 생겨 

벼, 기원전 28세기경에 中으로 
기원전 7 ~ 5세기엔 日에 전파 

부여, 동방 첫 ‘말 가축화’ 성공 
전체 고조선 문명에 목축 전파 
앞선 기마문화 덕에 영토 넓혀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지구 기후가 오늘날처럼 온난화되자,
고(古) 한반도 구석기인들은 동굴에서 나와 인접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고한반도 중부 초기 신석기인 인구밀집 지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료 부족’이었다.
 사냥·어로·채집만으로는 과잉인구의 부양이 불가능했다.
 식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선 야생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채용해 식료 생산을 위한 ‘농업경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고한반도 중부 제1동굴지역의 동굴 밖 최근접한 남한강과 금강 상류 유역은
①석회암 동굴 최근접 하천 유역에 비옥한 충적층 평야가 있었고
 ②세계적으로 식물 종류가 매우 많아 온대작물 농업경작의 발생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에서 식료 부족 문제의 대책으로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의 저지대에서는
실제로 신석기 시대의 시작과 동시에 1만2000년 전쯤부터 오곡, 특히 단립벼의 재배가 시작됐다.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사이의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볍씨 18톨이
충북대 박물관(관장 이융조)에 의해 발굴됐는데,
농과학자들의 조사 결과 초기 재배벼임이 확인됐다.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소로리 볍씨가 포함된 토탄층 윗부분을 탄소측정한 결과
 1만2500년 전으로 측정됐다.

이 소로리 단립벼 볍씨와 토탄층을 분리해 볍씨 8톨을
미국 애리조나대 고고연구소에서 탄소측정한 결과
토탄의 연대가 1만2552±90년 전,
고대벼가 1만2500±15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이 사실은 한반도의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유역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단립벼’의 경작이 시도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후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강·금강 유역을 비롯해
고한반도의 크고 작은 강변에서는 강 하류에까지 곡물 출토 시계열이 성립되고
 5000년 전쯤까지 재배 공간이 대폭 넓어지면서
단립벼·콩·팥·밀·보리·조·기장·수수·깨 등 곡물이 출토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 고한반도 ‘단립벼’ 경작의 발생 기원 지역을 지도에서 그려 보면 <그림 2>와 같다.

 이 지역에서 동시기에 오곡이 농기구들과 동반 출토되므로,
이 지역이 동방 신석기 농업혁명의 기원지로 판단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고한반도 출토 신석기 시대 토기 몇 점에 박힌 식물들의 압흔을 탄소측정했더니,
신석기 시대 ‘조기’ ‘전기’부터 조·기장·콩·들깨를 재배해 식용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콩’ ‘콩과 작물’이 신석기 초기부터 재배됐다는 사실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오산리 출토 신석기 초기 토기에 박힌 ‘콩’과
 압흔 토기에 부착된 탄화물을 연대측정한 결과
절대연대 7175∼7160년 전과
절대연대 7000∼694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즉 고한반도에서는 콩과 팥이
기원전 53세기(7175∼7160년 전)경에 이미 재배됐음이 확인된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중국에는 ‘콩’이 기원전 7세기 고조선 후국 산융에서 도입됐다.
서양에는 ‘콩’이 18세기 초엽 동방에서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출토 곡물들로 종합해 보면,
고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한강 문화에서는 약 1만2000년 전부터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돼
 약 5000년 전까지
단립벼·조·기장·콩·팥·수수·밀·보리·깨(들깨와 참깨) 등의
농업경작이 크게 발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고한반도 신석기 농업혁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은
 ‘단립벼’와 ‘콩·팥’과 ‘깨’의 경작이다.  

당시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은 첫 ‘농업경작’의 큰 성공을 스스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 상류에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농경 성공) 기념 선돌’이 2개나 남아 있다.

 충북 옥천군 남곡리 개미재에 밭고랑을 새긴 1개의 선돌(남곡리 1호 선돌)과,
수북리 동정마을에 있는 다른 1개의 선돌(수북리 선돌)이 그것이다.(<그림 3> 참조)

문자가 없던 시대이므로,
농업혁명(농업경작)의 위대한 업적을 ‘논밭고랑’ 그림으로 표시한 기념비 선돌이었다.
대전 괴정동 출토 ‘방패형 농경문 청동기’(약 2600년 전)에 새겨진 밭 가는 농부 그림을 보면,
 이 선돌의 줄그림이 논밭고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한반도의 중부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농업경작)은
모든 한반도 강변과 해안에 주민 이동과 함께 전파됐다.

 농업경작은 태양의 ‘햇빛’과 ‘따뜻한 온도’의 은혜에 직결돼 있으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태양(해) 숭배’ 사상을 더욱 갖게 됐다.

그들은 ‘태양’(해)이 제공하는 ‘밝음’(광명·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게 됐다.
그들은 또한 족장과 자기들을 ‘태양’의 후손,
즉 하늘(天)의 후손으로 생각해 ‘천손의식’을 갖게 됐다.

또한 그들은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후에 그들과 그 후예들은 자신들을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으로 자처했고,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차음해 ‘발인(發人)’이라고 표기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최초의 신석기 농업혁명은 두 곳이 구심지가 돼 일어났다.

그 하나가 약 1만2000년 전부터
고한반도 중부 남한강과 금강 상류 지역에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인 ‘밝족’이
단립벼(쌀)·콩·수수·조·기장·깨 등의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한 농업혁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약 1만1500년 전에 비옥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수메르족이 밀·보리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에 전파한 농업혁명이다.

실증적으로 발굴 보고서들을 읽어 보면,
단립벼 재배는 고한반도에서 기원해 기원전 28세기경에
중국 산둥반도와 중국 동해안 일대로 전파됐다.

남쪽 일본 열도로는 기원전 7∼5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 규슈 지방 등으로 전파됐다(<그림 4> 참조).

중국 학자들도 농업경작을 고조선(이때는 동이(東夷)족으로 표현)에서 도입했음을 기록들에 남겼다.

중국에 농경을 처음 가르쳐 준 것은
동이족인 신농(神農)족이며(‘사기(史記)’ ‘부사년(傅斯年)’),
 역시 동이족인 백익(伯益)이 쌀 농경과 목축을 가져와 가르쳐 줬다(‘사기’).
 동이족인 근모(根牟)족은 밀·보리 재배를 가르쳐 줬다(중국학자 장푸샹(張富祥)).
가장 질긴 고급 명주와 그 직조 방법도 동이족이 전수해 줬다고 기록돼 있다(‘상서정의(尙書正義)’). 


인류 최초 5대 독립 문명은 모두 독특한 농경문화를 문명의 기초로 해 시작됐다.

고조선 문명은 ‘단립벼(및 밀·보리)+콩+깨’ 재배의 농경문화 유형과,
이에 의거한 ‘쌀밥(및 밀·보리 식료)+콩장(간장+된장)+깨 양념(향료)’의
독특한 식문화 유형을 형성했다.

이와 달리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밀’(및 맥류) 재배와 ‘빵’ 식문화를 형성해
 이집트문명과 그리스·로마를 거쳐서 서양에 전파됐다.

인도 문명은 ‘장립벼’ 재배와 장립벼 쌀밥 식문화,
중국 문명은 ‘잡곡’ 재배와 만두·국수 식문화,
아널드 토인비가 뒤에 독립 문명으로 추가한 마야·아즈텍 문명은 ‘옥수수’ 재배,
잉카 문명은 ‘감자’ 재배와 그에 따른 식문화 유형들을 각각 형성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이와 유사한 식문화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는 단립벼 ‘쌀’로 ‘밥’뿐 아니라
무려 200여 종의 떡(이종미 교수)과
과자 등 온갖 파생 음식을 만들었고,
설탕(조청·엿)과 각종 술도 쌀로 빚어냈다.

 염분을 소금 가루로 직접 섭취하지 않고
 매우 독특하고 현명하게 콩 식물단백질과 융합시켜 섭취하는 콩장(간장·된장) 식문화도 창조했다.
깨(참깨·들깨)는 지금도 주로 한국인이 애호하는 독특한 향료·양념이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이와 유사한 식문화는
사실은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가 전파된 것이다.

고조선 문명의 농경과 관련된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인류 문명사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기마문화를 형성·발전시킨 것이다.

 고대의 순화된 말(馬)은 크게 나누면
 고조선 문명의 ‘동북아시아종 말’(속칭 ‘몽고말’, 키 약 130㎝)과
수메르 문명의 ‘서남아시아종 말’(속칭 아랍말, 키 약 150㎝)의 두 종류다.

동북아시아종 말은 키가 작지만 추위에 매우 강하고 장거리 선수다.
서남아시아종 말은 크지만
추위와 병에 약한 단거리 선수인데, 장거리를 달리면 쓰러져 죽는다.  

동북아시아종 말은 고조선 후국 부여가 최초로 가축화해 ‘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여는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선진적으로 진행된 농목(農牧) 국가였으며,
 심지어 관직 명칭까지 마가(馬加·加는 장관 또는 지방 제후 호칭),
우(牛)가, 구(狗)가 등 가축 이름을 사용했다.

현재 한국 민속놀이의 하나로,
가축들 이름(모=말, 윷=소, 걸=양, 개=개, 도=돼지)에서 딴 윷놀이도 부여의 민속이다.

18세기 증기기관 발명에 의한 기계동력 사용 이전까지,
인류 문명 교통·운수의 주동력은 ‘말’의 동력, 즉 마력(馬力)이었다.

‘마력’을 가진 자는 심지어 세계 정복에 나설 수도 있었다.
 이 인류 최초의 자연 동력 ‘마력’의 발견·발명자가 동방에서는 고조선 문명(몽고말)이었고,
서방에서는 수메르 문명(아랍말)이었다. 

부여에서 가축화된 ‘말’은
 전체 고조선 문명권에 전파돼 목축을 선도했다.
특히 실위족(원몽골족) 등 유목민족들은
 ‘말’을 도입해 양·염소 등 가축몰이에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부여와 실위는 기마민족 국가의 면모를 갖췄다.
고조선의 첫 도읍지 강동 아사달 지역 읍지인
 ‘강동군읍지(江東郡邑誌)’에는
군 주위의 대박산(大朴山)과 묘운대(墓雲臺) 위에
각각 ‘철마(鐵馬)’가 세워져 있어,
 아래를 압도하듯 내려다봤다고 기록돼 있다.

또 강동현 만달산(蔓達山) 산정에도
수철마(水鐵馬)가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와 만주의 수많은 고을 가운데
산마루에 마상(馬像)이 3개나 세워져 있던 곳은 강동 아사달이 유일하다.
 이것은 이미 고조선 시대에 ‘말’의 비중이 매우 높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 전설 가운데, 단군이 기마연습을 많이 해
푸른 산이 흙이 파여 붉은 산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산(馬山)이 실재하고 있다.

고고 유물로는 약 4025년 전의 것으로 연대측정된 랴오둥반도 남단
대취자(大嘴子) 1기 유적에서 기마병 무기인 청동꺾창 1개,
석제꺾창 1개가 고조선 번개무늬 채색 도기 등과 함께 출토됐다.

이후의 고조선 기마문화의 직접적 증거로
 예컨대, 선양시 정가와자 6512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 마구들처럼
다수 유적의 마구(馬具) 증거유물들이 넘치고 있다. 

고조선 문명의 선진적 기마문화는 고조선 문명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조선의 기병부대는 발전된 기사법(騎射法)의 전술과 질풍노도 같은 신속성으로
 국방에 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영역을 급속히 확대시켰다.

또한 기마문화가 확대된 고조선 고대연방국가의 교통과 통신에도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고조선 문명은 일찍이 기마문화를 발전시킨 결과,
북부 연해주와 흑룡강까지 고조선 영역을 확보했다.

또한 고조선 기마문화는 고조선 서변 후국들이 고중국을 제압하면서
 난하, 조백하를 건너 영정하(永定河)에 도달하고,
지금의 산시성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한 동력이 됐다.

‘만리장성’은 고조선의 막강한 기병부대들이 넘어올 수 없도록
고중국 측이 쌓은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이었다.

중국에는 처음 고조선 이주민 백익(伯益)족이 고조선 ‘말(馬)’을 전수했으나
, 기마(騎馬)는 할 줄 모르고 주로 수레를 끄는 데 사용했다.

 중국에서 처음 기마제도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307년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스스로 동호의 기마복을(胡服騎射) 입어 모범을 보이면서
고조선 후국 동호로부터 처음 기마제도를 도입해
소규모 기병대를 창설한 것이 효시라고 중국 고문헌들에 기록돼 있다.

일본에는 기원후 4∼5세기경 한반도 가라국에서 말과 기마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일본 도쿄(東京)대 에가미(江上波夫) 교수가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을 주장한 바,
이 경우의 ‘기마민족’은 고조선 문명의 부여족과 그 후예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서울대 명예교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62601032712000001


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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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③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문화

한반도 서북 평남 성천군서 
BC31세기 첫 청동조각 발견 
용곡리지역 비파형 청동창끝 
고조선 성립 BC26세기 추정 

특유의 청동거울 ‘다뉴조문경’ 
세계유일 조립식 ‘비파형동검’ 
아름다운 기하학도안 ‘팔주령’ 
한반도·요동·요서 고루 분포 

광석 녹여 합금하는 청동기술 
문명 고도화의 중요한 지표 
中, 빨라야 BC20~BC16세기 
日은 BC4세기 들어서야 개막
 

인류는 신석기 시대 후기·말기에 자연동·자연금·운철(隕鐵: 운석 속의 타고 남은 철) 등
자연 광석을 채집·단조해서 금속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 광석들을 녹여 ‘합금’을 만들면 더 견고한 도구를 제작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합금’은 고도의 과학기술의 응용을 알려주기 때문에, 문명 형성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인류가 최초의 합금을 제조한 부문은
동(순동·자연동(自然銅))과
주석과 아연 등을 녹여 합금해서 제조한 ‘청동기’의 생산이었다.
 청동기의 생산과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인류가 과학적 문명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고조선문명권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고한반도 중부지방 ‘한강문화’였지만,
 최초의 청동 유물이 나온 것은 BC 31세기경
 청동합금 조각이 출토된 ‘대동강문화’였다.

대동강 중상류인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 무덤에서
 5069년 전(1995년 기준 BC 3074년)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靑銅) 조각들이
팽이형 토기, 돌도끼, 돌도끼 조각과 함께 출토됐다.

이것은 청동 무기나 도구를 제조하기 직전의 준비된 중간재 청동 조각이지만,
이미 자연동(銅)과 석(錫)과 연(鉛)의 세 광석을 합금시켜 제조한 합금 조각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BC 31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이어서 고조선(단군조선) 성립기인 기원전 26세기의 것으로 측정된 비파형 청동 창끝이
강동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 나왔다.
기원전 26세기(4593±167년 bp)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 단추와 청동 창끝도 발굴됐다.

또한 상원 장리에서 BC 3000년기 전반기의 큰 규모 고인돌(오덕형) 무덤의 무덤 칸에서
청동 교예 장식품 1개, 청동 방울종 2개, 청동 끌 1개를 비롯한 청동 제품들이 나왔다.
 BC 26세기의 유적·유물로 측정됐다.

 이 가운데서 청동 2인 교예 장식품은 서로 어깨를 끼고 발목을 합친 2인의 교예사가
 각각 1개씩의 둥근 고리(環)를 들고
 또 다른 2개의 둥근 고리 위에 올라서 재주를 부리는 형상을 제작한 것이다.

옷의 몸통과 팔 소매, 바지에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쳐 있고,
얼굴에는 입·코·눈·귀가 잘 묘사돼 있는,
작지만 매우 숙련된 기술의 우수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3> 참조). 

또한 청동 방울종은 원추형의 종처럼 아가리가 넓고 꼭대기가 좁은 형태로,
울림통·고리·추로 이뤄진 작은 방울종이다.
 역시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친 것으로서
숙련된 기술로 어려운 구조를 만든, 매우 뛰어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4> 참조).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동아시아 최초다.

BC 31세기의 청동 합금 조각이 아직 청동기는 아니라고 불안해하는 경우에는
 BC 26세기의 비파형 청동 창끝 2점, 청동단추, 청동 교예장식품,
 청동 방울종 2점, 청동 끌,
 BC 25세기∼BC 24세기의 금동귀고리 3점 등 청동기 유물이 발굴돼
시계열이 완벽하게 형성됐으므로 이때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음은 명백한 것이다.

고조선은 BC 31세기∼BC 26세기에 초기 청동기 시대로 진입했다.  

요하 서편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에서도 BC 30세기경의
 순동(純銅)귀고리 1점과 거푸집이 발굴됐다.

이를 두고 중국 고고학자 일부는 홍산문화를 금석병용기로 설정하고 있으나,
이것은 자연동이지 아직 주석 및 아연과의 ‘합금(合金)’이 아니므로 청동기라고 볼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BC 26세기에 처음으로
청동기 시대가 성립돼 주위로 전파된 것이다.
 서방 수메르 문명에서는 BC 33세기∼BC 30세기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해
이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고 보고 있다.

고조선문명 청동기 문화의 특징적 유물 중 하나는
 청동거울인 다뉴조문경(多粗紋鏡)과
다뉴세문경(多細紋鏡)이다.

보통 뒷면 무늬그림의 줄의 섬세한 정도에 따라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으로 구분한다.
고조선식 청동거울은 모두가 둥근 태양 모양에,
뒷면에 붙은 꼭지가 2∼3개의 ‘다뉴’(多, 여러 꼭지)이고
중심부의 약간 위에 꼭지를 붙여 제조돼 있다.

 무늬는
 ①햇빛(태양광선) 무늬와
 ②번개 무늬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그 훨씬 후의 고중국식 청동거울은
 둥글거나 사각형 모양에 뒷면에 붙인 꼭지가 중심부에 한 개뿐인 단뉴(單, 한 개 꼭지)로 제조돼 있으며, 무늬는 각종 동식물 등 구상물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고조선문명의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의 완전하게 둥근 형태는 해(태양)를 상징한다고 본다.
고조선 사람들은 천손의식을 갖고 하늘과 해(태양)를 숭배했으므로,
 청동거울을 항상 해와 같이 둥근 모양으로 만들고,
뒷면의 무늬는 햇빛(태양광선)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했다.

고조선문명에서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의 뒷면에 동심원을 1∼3개
그리고 햇빛을 삼각형 또는 별무늬 모양으로 나눠 그린 것도
사실은 모두 햇빛(태양광선)의 기하학적 무늬다.

종래 이것을 별무늬 또는 삼각무늬, 톱니무늬로 이름 붙여 설명해 온 것은 해(태양) 숭배 사상과의
관련을 간과한 정확하지 않은 설명이라고 본다.(<그림 2-1> 참조) 

이 고조선 다뉴조문경의 지역적 발굴 분포를 큰 강을 경계로 가정해 지도에 옮겨보면 <그림 3>과 같다. <그림 3>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 다뉴조문경은 한반도 전역과 만주의 요동·요서 및 연해주지역에도 분포돼 있다.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문화 유물들 가운데 독특한 청동기로 ‘비파형동검’이 있다.
이 청동단검은 그 모양새가 고대 악기 비파(琵琶)와 비슷한 곡선으로 도안돼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고조선문명의 비파형동검은 고중국의 직선으로 도안된 동검이나
또는 북방 오르도스식 구부러진 도안의 동검과는 확연히 모양새가 달라서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고조선 비파형동검의 큰 특징으로는
 첫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중간 부분의 양날에 돌기를 만들고,
그 돌기를 중심으로 검 끝과 검 아랫부분을 부드러운 곡선 모양새로 만들어서
 마치 고대 악기 비파 모양처럼 도안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청동검 양식에서 비파형 도안은
오직 고조선 청동단검과 비파형 청동 창끝만 가진 매우 독특한 도안이다.

둘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검몸과 검자루를 별도로 주조해 조립하는 세계 유일의 ‘조립식’ 청동단검이다. 두 개 부품을 별도로 주조해 조립하는 것이므로
청동기 주조 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제작할 수 있는 동검이다.

셋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검몸의 한가운데
‘등대’가 검의 거의 끝에서부터 검자루 이음매까지 세로로 곧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동검을 견고하게 하면서 조립을 정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그림 2-3> 참조)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단검은
 ①한반도 ②요동 ③요서 지역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의 형태와 구조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고조선문명의 세형동검은 철기 시대의 동검이다.
고조선에서 BC 12세기경에 철기 시대가 시작돼 철제무기,
 특히 철 장검과 철 단검이 점차 비파형 청동단검을 대체하기 시작하자,
 이와 관련해 비파형 청동단검에도 아름다운 곡선의 실용적 직선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서
세형동검이 출현·발전했다.
세형동검도 조립식 동검이다.(<그림 2-4> 참조)

비파형 청동단검과 병행해 성립한 청동무기로 ‘비파형 청동 창끝’이 있다.
비파형 청동 창끝은 손잡이에 긴 나무막대를 끼워 긴 창으로 사용한 것인데,
 나무막대는 삭아 없어지고 청동 창끝(銅矛)만 출토된다.

 가장 오래된 출토 비파형 창끝은 덕천 남양유적 집자리에서 나온 BC 26세기의 비파형 창끝이다.

모든 금속문명권에서 청동 창끝을 사용했으나 이러한 비파형 청동 창끝은 고조선문명에만 있었고,
이웃 고중국 계열에는 없었던, 고조선의 독특한 청동무기다.

고조선문명에서 청동도끼도 많이 출토되는데,
부드러운 곡선을 넣어 도안한 ‘부채꼴’(扇形) 청동도끼다.
 이것은 이웃 고중국의 직선도안 ‘책꼴’(冊形) 청동도끼와 쉽게 구별된다. 

고조선문명에서는 각종 의례·의식에서 의기(儀器)를 청동기로 제조해 사용했다.
고조선에서는 특히 제천의식을 담당하기 위해 국읍(國邑)에는 천군(天君)이라는 담당자를 두고
그의 제천 제사 지역을 소도(蘇塗)라고 해 신성시했다.
 소도는 단군신앙을 담당한 성스러운 곳이었으므로,
 여기서 고조선 시대에 사용한 제의용 청동기들은 단군신(檀君神)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된다. 

여기서 사용한 청동의기들은 방울종과 방패형 의기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청동방울종은 동령(銅鈴: 작은 청동 방울종)과
 동탁(銅鐸: 큰 청동 방울종)이 발굴되고 있다.

동령 가운데 팔주령(八珠鈴)은(<그림 2-2>)
8각형 구도의 중앙 몸체의 중심에 1개 태양(해)과
태양광선(햇빛살)을 도안하고
8각의 끝에는 동그란 종방울을 달아
 두 개 타래머리무늬(雙頭渦紋)를 조각한 청동기다.

팔주령은 단군신앙의 소도의 제의기이므로,
중앙의 태양은 단군, 그 둘레의 원(圓)은
 단군의 밝달조선의 상징이고,
8각 끝의 8방의 작은 종방울들은 단군의 8방의 후국을 상징하는 8개의 작은 태양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는 당시 세계 최고 기술과
아름다운 기하학적 도안의 예술품으로도 세계 정상의 것이었다. 

고중국의 청동기는
고조선 후국 고죽국 지역 당산(唐山)에서 출토된 BC 20세기의 홍동(紅銅) 조각 2점과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BC 18세기의 작은 청동 추가 있다.

상(商) 시대의 하남성 이리두문화 유적에서 나온 삼족기 청동 술잔, 향로, 청동 칼,
 추, 끌은 BC 16세기∼BC 13세기의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일찍 잡아도 중국에서는
 BC 20세기∼BC 16세기 초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고조선 아사달지역의 BC 31세기∼BC 26세기보다 약 1000년 뒤의 일이다.
일본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야요이 시대(BC 4세기 중엽∼AD 3세기 후반)이므로
 다시 이보다 훨씬 후의 일이다.

고조선문명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나왔다는 사실이 한자(漢字) 만들기에도 반영돼 있다.

 ‘鐵’(철)의 옛 글자(상·서주 시대)는 ‘철’(철, 쇠, 금속)이었다.
 ‘철’(철)은 ‘동이의 금속’이라는 뜻이다.

즉 고대 중국 지식인들은 동·금·철 등 금속이 동이(고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임을
당시에는 잘 알고 있었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1928년
상(商)의 청동기(BC 16세기∼BC 13세기)를 발견하고 경탄해
이때부터 ‘황하(고중국)문명’의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고조선이 그보다 1000년이나 앞서 찬란한 청동기를 만들고,
상나라 사람 자체도 고조선의 청동기술을 갖고 간 고조선 이주민이었는데,
 우리가 ‘고조선문명’론을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문화일보 6월 5일자 29면 2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