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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한민족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_-; 친일파 명단모음 .(언론쪽추가)



한민족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_-; 친일파 명단모음 .(언론쪽추가)            


냠 냠

2007.03.03. 12:54
   

부끄러운 한국인이죠..아니 한국인이라고 할수도 없는..친일파 명단입니다.;

홈페이지에서 보다가 중요인물과 친일행적을 정리좀 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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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이완용 ( 李完用, 1858∼1926 )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공로로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20년 '한일합방' 공로로 백작.
    1921년 후작,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으로,미국통에서 친러파·친일파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이후 이완용은 후작으로 승작했고(1921),

    아들 항구(恒九)도 남작을 받았으며

    손자 병길(丙吉), 병희(丙喜) 등도 모두 귀족으로서

    일본에 유학하는 등 친일파 수괴로서의 갖은 '영화'를 누리는 한편,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이 실시한 농지개혁과정에서

    그 재산은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박제순( 朴齊純, 1858∼1916 )

              '을사조약' 체결 도장을 찍은 외교책임자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충청감사로 농민군 진압.
      1905년 외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1910년 '한일합병' 후 자작,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으로 이어진 친일 가도


      그는 특히 신학문이 전래된 이후 일반청년들이 급속히 노장(老長)를 배척하고

       능멸하는 현상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진흥하고 자신의 직에 만족하고 안분하는 인간,

      나이든 사람을 공경하는 인간 등을 중요시하였다.

      유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충효를 강조하여 식민지배체제의 유지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권중현( 權重顯, 1854∼1934 )

                  친일 한 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1904년 육군부장으로 러일전쟁중인 일본군 위문
                   공로로 일본의 훈1등 팔괘장 수여 받음.
        1905년 농상공부 대신.
        1910년 자작, 중추원 고문

         

        을사오적 암살 미수사건과 여러가지사건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권중현은 그 해 12월에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고,

         1908년에는 다시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1910년 '병합' 때는 58세의 나이로 자작을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내는 등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냈다.

         

        이지용 ( 李址鎔, 1870∼1928 )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1904년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 협정·조인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1907년 중추원 고문.
          1910년 백작


        도박으로 소일한 친일 백작 ,고종의 종친으로서 입신,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본 침략에 문을 열어주다


        을사조약 체결,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일본인들과 놀아난 부인 이옥경의 친일 행각


        이지용에게는 뛰어난 미모의 아내 이옥경(李玉卿:원성은 홍씨)이 있었다

        이옥경은 특히 영리하고 예뻐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하기와라와 정을 통했다가 또 구니와케와 통하고

        뒤에는 하세가와와 정을 통하니 하기와라는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옥경이 전송을 나와 입을 마추자

        그녀의 혀끝을 깨물어 상처를 입혔다.

        이옥경은 아픈 것을 참고 돌아왔으나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그녀를 조소했다.


        또한 그녀가 여러 일본인을 바꿔가며 서로 좋아하고

        일본인 또한 그것을 질투하는 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장안에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황현, {매천야록})

         

        한편 미모와 기개가 모두 뛰어나기로 소문난 산홍이라는 진주 기생이 있었는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가서는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산홍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권력과 재물로도 한 미인의 기개를 사기는 어려웠던것이다.

         

        이근택 ( 李根澤,1865∼1919 )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변신

          1905년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조인.
          1910년 한일'합방' 공로로 훈1등 자작
          191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민비의 환심을 사 출세의 길로

        친러파 전력을 씻기 위해 더욱 열성적으로 친일 ,을사오적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나

         

        심지어 이근택의 노비도 상전의 친일행위에 분노할 정도였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한 이근택은 가족을 불러놓고 궁중에서 신조약을 조인하던 광경을 설명하였다.

         이근택은 자신이 백성을 위하여 조약서에 가(可)함이라고 썼고,

        일본의 신임을 얻어 대 훈공을 얻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권세를 더욱더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득의만만하였다.


        그러면서도 이근택은 "내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비녀(婢女) 한 명이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칼을 집어들고 뛰어나왔다.

        이근택이 한규설(韓奎卨)의 딸을 며느리를 삼았을 때,

        그 며느리가 데리고 온 속칭 교전비(轎前婢)였던 그녀는

         "이근택아! 네놈이 대신이 되어 나라가 위태한데도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겠는가.

         내 힘이 약해서 능히 너를 만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고 소리치고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한 취객이 그의 수레를 당기며 흘겨보고 말하기를

        "네가 왜놈이라 하는 이근택인가.

        오적의 괴수로 그 영화와 부귀가 이에서 그치는가" 하니 이근택이 크게

          노하여 그를 결박지어서 경찰서로 보냈다


        . 그 취객은 모진 고문으로 기절하였다가 밤이 깊어 깨어나서 말하기를

        "네놈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나 또한 명백히 욕질을 하였으니 죽어도 통쾌하다.

         저들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자" 하고 드디어 의복을 찢어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친일 행위는 1910년 8월 한일'합방'까지 이어져,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과 미국 공채 5만 원을 받았으며,

        '병합' 후에는 그 해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종4위 훈1등으로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이근택의 작위는 아들 이창훈(李昌薰)이 습작함으로써 대를 이어 일본의 '충량한 신민'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이근택의 형인 이근호(李根澔), 아우인 이근상 등도

        한일'합방'과 동시에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는 당시의 친일행각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宋秉畯, 1857∼1925)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1904년 일진회 조직.
        1907년 농상공부 대신
        1910년 자작.
        1920년 백작

        배신과 사기의 배후

        친일매국노로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은 탁월한 처세술과 풍채로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의리의 협객인 양 자부하였으나,

        출세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은혜까지 저버리는 배신과 사기의 명수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사기와 협잡, 그리고 주색잡기로 점철된 인생

         

        일진회를 거느리고 한일합방을 주장하여 그 공로로 귀족의 칭호를 가지고

        그 덕택으로 수많은 재산을 가지게 된 송병준.

        '해방'이 도리어 '행운'을 가져다 준 친일 가문

        송병준의 백작 작위는 아들 송종헌(宋種憲)이 물려받았다.

        그는 '병합' 후에 경기도 양지군 참사(1910∼1913), 중추원 참의(1921∼1933) 등을 지냈다

         

        구연수의 아들,

        그러니까 송병준에게는 손자가 되는 구용서(具鎔書)는 1918년 졸업생 105명 중

         조선인이 단 2명뿐인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상대에 입학하였다.


         해방 직전에 조선은행 오사카(大板) 지점 서구출장소 지배인을 맡고 있던 그에게

         해방은 '고통'이나 '비난'이 아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1945년 11월 10일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星野喜代治)가 면직되면서,

        일개 지점장도 못되던 구용서는 하루아침에 부총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1950년 총재로 승진한 그는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개편되면서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은행.금융계의 최고 지위에서 '해방'의 빛을 마음껏 누리던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상공부장관까지 지내기도 하였다.

         

        이용구 (李用九, 1868∼1912 )

                      친일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애국을 가장한 일진회 조직


        이용구가 죽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거의 국장이나 다름없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왕으로부터 '훈일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이 내려졌다.

        일제에 충성을 바치면 죽어서도 이렇게 성대히 장례식을 치러 준다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용구는 죽어서까지 일제에 이용당한 매국노였던 것이다.

         

               윤시병( 尹始炳,1860∼1931 )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1904년 일진회 회장.
        1904년 일훈욱일4등장(日勳旭日四等章) 수여받음
        1905년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주장하는 선언서 발표

         

        초대 만민공동회장의 빗나간 정치적 야심

        우리는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집단 하면 너무나 당연히 일진회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일진회의 초대 회장이 독립협회운동 당시

         초대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뽑혔던 윤시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것은, 다른 많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말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자신의 출세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윤갑병 ( 尹甲炳, 창씨명 平沼秀雄, 1862∼? )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1907년 일진회 북간도지부 회장.
        1921년 경상북도 참여관. 1923년 강원도 도지사.
        1938년 대동일진회 회장

         

        '창씨상담실'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한국 민중에게 일본식 이름 지어 주기에 나섰으니

        이들의 친일행각이 어떠했는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흔이 넘어 늙고 추한 그가 일제하에서 중추원 참의나마 벼슬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족을 송두리째 팔아 넘기는 데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한일 양민족의 공존공영이라는 명분은 출세욕에 사로잡힌 그의 한갖 꿈이었음이 분명하다.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이분들은 잘 아실테니 명단만...)

        •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안중근의사가 우시겠군.)
      • 한일'합방'과 더불어 수여된 남작의 작위는 그가 사망한 후 아들 장인원(張寅源)에게 습작되었다.
      •  장인원은 1870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하였고
      •  구한국시대 전의군수를 거쳐서 한일'합방' 이후에는 홍산·청양·보성군수를 역임한 바 있다.
      •  그리고 그는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내기도 하였다.
      • 이와 같이 장석주의 친일행위는 그의 아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졌고,
      • 그의 집안이 일제 시대의 전형적인 친일가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李周會, 1843∼1895 )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1894년 동학농민군 토벌대의 일본군 선봉장으로 활약
1894년 군부협판

 

성대히 치러진 명성황후 시해주범 추도 법회 ,일제의 첨병이 되어 동학농민군 진압

이미 이주회는 1892년 금오도에서 다케다를 만났을 때,

 "조선을 망친 것은 명성황후이기 때문에 조선을 구하고

조선과 일본의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명성황후를 죽여야 한다"고 내뱉었다 한다.


그 정도로 그는 명성황후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따라서 시해 사건에 구체적으로 참여한 확신범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명성황후가 '조선의 개화'에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고는 하지만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가면서까지 그런 일에 관련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다.

  이두황 (李斗璜, 1858∼1916 )

                   이토 히로부미의 보호를 받은 친일 무관

1894년 서호도순무영 우선봉으로 동학농민군 진압.
1895년 명성황후 시해 가담
1900년 전북도 장관.
1916년 서보장 훈장

영웅호걸인 양 활개치고 다니는 명성황후시해 연루자 ,이토의 보호하에 관리로 출세


이두황은 정미특사로 1097년 귀국하자마자 중추원 부참의에 올랐고 이듬해는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10년 '병합' 후에는 박중양(충남)*, 신응희(함남)*, 이규완(강원)*과 더불어

전라북도 도장관(고등관 3등)에 재임명되었다.


그후 정부로부터 고등관 2등(1911), 정5위(1913)를 거쳐 1916년 3월 죽을 때에는

고등관 1등, 종4위, 훈3등에 서보장(瑞寶章)의 훈장까지 받았다.

도장관 시절 전북주재 일본인에게 얼마나 잘하였는지 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_-)

 

우범선(禹範善, 1857∼1903 )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동자


1895년 훈련대 제2대대장.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훈련대 동원 책임
1903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일본에 망명중 암살됨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고 하네요...)

아버지의 범죄, 아들의 속죄


신념이 남달리 강한 사람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갈 때에는

그러한 신념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받을 것인가를 생각해만 한다.


 만일 그러한 신념이 역사적 상황을 잘못 판단하였을 때

그 해독은 참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또한 그것은 그 사람의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세대까지 그 후과가 남겨지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사적 과오를 속죄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명성황후 시해범 우범선의 아들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한참이던 때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국내로 돌아와

일심으로 우리나라의 농업의 발달만을 위해 한평생을 보냈다.

그가 소리없이 연구에만 몰두하게 되었던 것은 자신의 직업상의 문제만은 아니었고,

 역사적으로 부과된 자신만의 짐을 대신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범선은 명성황후사변 때에도 가장 선봉에서 활약하였고 한 일도 많았다.


 군인 가운데서는 주동자가 그였으니까"라고 하여

소신에 가득 차 명성황후시해에도 가장 앞장 섰던 인물로 우범선을 말하고 있다


 이진호 ( 李軫鎬, 창씨명 李家軫鎬, 1867∼1943 )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1910년 경상북도 지사.
1924∼29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1934년 중추원 참의.
1943년 중추원 고문,

어용단체 조직하여 민족운동 가로막아 조선인 최초의 총독부 학무국장


1941년 중추원 부의장에까지 올랐고 1943년 10월에 중추원 고문으로 재임하였으며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한 사람들의 약력을 정리한 {조선공로자명감}(1935)에서는

 이진호를 "일찍부터 동양의 사정을 우려하여

일본에 의뢰해야 함을 꿰뚫어 보아 조선의 영원한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분기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는데

 이는 그가 일제의 근대화 논리에 함몰되어 힘에 굴복함으로써

일제가 선전하는 대로 식민통치에 앞장 선 전형적인 친일파였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왕실·척족

  •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관료

     박중양 ( 朴重陽, 창씨명 朴忠重陽, 1874∼1955? )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1908년 경북 관찰사. 1910년 충청남도 장관. 1915년 중추원 참의 1921년 황해도 지사.1923년 충북 지사 .

친일 흠모론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

3.1운동을 위해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한다는 서약까지도 했다.

 이런 친일 활동의 결과, 그는 1945년 귀족원 칙임의원이 되었다.

최상급의 친일파 7명에 끼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망언


해방 이후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 피의자로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물론 다른 반민족행위자와 마찬가지로 흐지부지 처리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에게서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하여,

 한말보다 일제시대가 훨씬 좋았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유성준·유만겸·유억겸 유길준- 유씨가족친일상.

 민족과 친일적 문명화 사이의 양줄타기----유길준(兪吉濬:1856∼1914)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유억겸(兪億兼, 1896∼1947)

'합방' 이후 양성된 친일관료의 대표격----유만겸(兪萬兼, 1889∼1944)


조선총독부 도지사와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유성준(兪星濬, 1860∼1935)

  •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_-
  •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김대우(金大羽, 1900∼?)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한 충견

    3·1 운동 참여 후 친일관료로 변신


    전문학교 2학년 때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대우는

    같은 학교 학생인 주종의, 유만종, 박창배, 박동진 등과 함께 3월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주최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법에서 7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기도 했겠지만,

    스스로 일제와 타협하여 출세를 도모하고자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규슈(九州)제대 공학부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 졸업과 함께 변신하여 친일관료가 된 것이었다.


    일본의 항복선언에 하염없이 눈물 흘려(-_-좋아서가 아니고 슬퍼서)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논리, 곧대동아공영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언론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언론.교육.산업 보국의 정신에서 부일협력의 길로

               약력         

    1910 - 일본 와세다 대학 입학
    1914 - 정경학부 졸업
    1915 - 중앙학교 인수 , 경성직뉴주식회사 인수
    1920 - 동아일보 창간


    1922 - 동아일보 통한 물산장려운동
    1923 - 민립대학설립운동
    1932 -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교장취임
    1938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및 이사로 참석
    1939 - 협화회의 재경성유지간담회에 참석,발언
    1941 - 흥아 보국단의 결성에 준비위원으로 참여,임전보국단 감사
    1945 - 미군정 수석고문에 피선
    1946 -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고려대학교 설립
    1947 - 신탁통치 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
    1949 -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1955 - 야당인 민주국민당 고문으로 활약하다가 병사함

    언론.교육.산업 보국의 활발한 할동

    대의에 죽을 때, 황민의 책무는 크다 "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 )-_-

     

                    진학문 (秦學文, 1894~1974)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진학문 사진

    의한 {동아일보} 창간에 매개 역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사이토 총독을 부임시켜 종래의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시행하였다. 이 문화정치의 주요 핵심은

    친일세력 육성과 민족운동계열을 대립|분열시키는 것이었다.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으로 활약

    ->언론인에서 만주국 고위관료로 변신->해방 후 재계의 주요 인사로 활약

     그는 국제정치니 뭐니 하는 거창한 문제를 들고 나오지 않더라도

     광복 후 특히 정부 수립 이후의 한국이 고립되어 살 수 없는 한

     적어도 이웃 일본과도 어떠한 관계가 없을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부가 수립되고 국교가 정상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갑자기 일본을 알려고 한다면 시간이 늦다. 누구든간에 일본에서 일본의 정체를 끊임없이 파헤치고 있어야 하겠다.

    그래서 나라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다.

    그 임무를 감당할 사람으로 나만큼 적격자도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나의 문화사적 교유기', {세대}, 1973.5, {순성진학문추모문집}, 81면)라고

     만주행 당시와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제정신 못차림-_-)

     

        방응모 (方應謨 1890∼ ? )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 광산 기업가, 언론인, 호는 계초(啓礎)

      1923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장
      1924년 평북 삭주군 외남면의 다릿골 광업소 인수하여 금 채굴로 치부
      1932년 광산 정리후 언론, 육영, 조림 간척 사업 벌임.
      1933년 조선일보사 경영권 인수 경영권 인수후 조만식을 사장으로 자신은 영업 부장으로 활동
      1933년 7월 조선일보를 주식회사로 등기, 9대 사장으로 취임
      1933년 장학회인 [이심회] 창립
      1935년 조선일보 자매지로 [조광(朝光)] 창간
      1936년 [여성] 창간
      1940년 조선일보 강제 폐간이후 [조광]의 발행인으로 활동

           (동아일보 조선일보..-_-;)

       서춘(徐椿,창씨명 大川慈種 또는 大川豊注, 1894~1944 )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1932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필 겸 경제부장
    1937년 매일신보 주필

    2.8 독립선언 대표에서 친일파로 전락

    그가 얼마나 일본천황제와 국가주의에 오염된 철저한 골수 친일파이며

    전쟁협력자였가는 다음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반도청년 제군, 제군에게는 지금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내선일체, 이는 제군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이다.

     제국의 비상시, 이는 제군에게 대해서는 다시 없는 기회이다.

    이는 제군에게 대해 더 없는 광영이지 않으면 안된다.


    대군을 위해 죽는 일은 신하된 자의 본분임과 동시에 죽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도 더 없는 행복이다. (-_-....)

    (~반도청년이여 분기하라, {총동원} ,1권 5호, 1939년 10월)


    이것은 실로 징병제 실시와 아울러 반도 민중의 완전한 황민화를 가납하옵신 것이니

     대동아전쟁 하 총후 반도의 다시 없는 영예이요,

    비길 데 없는 만족이라 하겠다. 삼가 우러러 동방을 요배하고 황공하온 일시동인의 성지에 봉답하려면

     순국의 결의를 더욱 해야할 것이라는 것을 반도 청년은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은에 감읍 {춘추} 4권 6호, 1943년 6월)>


    이와 같이 그는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의 사수를 위한 지원병제와 징병제 실시를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실시하는 것은 더 없는 광영이며 신하된 자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며 전쟁협력에 열광적이었다.

     

    홍진기(洪璡基, 1917년 3월 17일 - 1986년 7월 13일)

    홍진기 (洪璡基, 1917년 3월 17일 - 1986년 7월 13일)

    호 유민(維民). 서울 출생.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판사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일사망일활동사항
    첫째 딸홍라희(洪羅喜)1945년 7월 15일-이건희의 아내,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첫째 아들홍석현(洪錫炫)1949년 10월 20일-전 중앙일보 회장, 전 주미 대사
    둘째 아들홍석조(洪錫肇)1953년 1월 8일-전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셋째 아들홍석준(洪錫埈)1954년 9월 17일-삼성 SDI 부사장
    넷째 아들홍석규(洪錫珪)1956년 1월 15일-(주) 보광 대표이사
    둘째 딸홍라영(洪羅玲)1960년 1월 10일-삼성문화재단 상무, 노철수(노신영의 아들)의


    직업적 친일분자

    •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 이종형(李鐘滎, 1895~1954)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일제 밀정으로 만주에서 활약

      ·광복 후 대동신문 사장으로 반민법 반대. 1950년 2대 국회의원 당선
       광복과 함께 극우반공주의자로 변신하다

    • 반민특위 방해 책동에 발벗고 나서다


    • 반민특위 사무실에 끌려와서도 .나는 애국자다  나를 친일파로 몰아 잡아넣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 내가 풀려나는 날 한민당, 빨갱이, 회색분자를 모조리 토벌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날뛰었다. 이종형은 마포형무소 독방에 수감된 뒤에도 반민법은 망민법이며 내가 무슨 죄가있느냐?

    • 내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원인은 사방에 정치적 적을 둔 까닭이라며 화를 냈다.


    •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비호 아래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함으로써

    • 친일파 처단을 위한 마지막 노력마저 무산되었다.

    •  반민특위가 해산되자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종형은 이제 자유롭게 활개칠 수 있는 세상을 맞이하게된 것이다.

    • 이 후 그는 평소부터 정치투쟁이 자신의 취미라고 강조해 온대로 정계에 뛰어들었다.


    • 1950년 5.30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 계열의 국민회 추천으로 입후보한 그는

    • 무소속의 유기수(劉奇洙)를 어렵게 누르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 과거일제의 밀정노릇을 하며 민족 광복 운동가들을 잡아들이던 자가

    • 광복된 조국의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까?



    경찰·군인

     

       김태석(金泰錫, 창씨명 金村泰錫,1883~?)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 1923년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 1938년 경상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

    · 1944년 중추원 참의


    고문왕으로 악명 높아


    친일경찰 특히 고등계 형사에게는 고문왕, 고문귀(拷問鬼),

     악의 화신,귀경부(鬼警部), 친일귀 등등의 별칭이 주어졌는데,

    그만큼 이들이동족에 대해 악랄했으며 갖은 고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거나

     불구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김태석의 죄상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앞의 기소문에 언급된 바있듯이,

     강우규 의사를 체포하여 사형받게 한 것이었다.


    피의자를 취조하는 데 있어 김태석의 고문은 유명하지만,

     특히나 밀양폭탄사건의 피의자 15명에 대한 그의 고문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이 밀양폭탄사건은 의열단이 조직된 후 처음으로 벌인 거사였는데

    , 당시의피의자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온갖 고문,악형을 받았다

    ({약산과 의열단}, 백양당, 1947)고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곽상훈 검찰관 자신과 함께 같은 형무소에서 복역을 하였던 황삼규(黃三奎) 동지가 감옥에서

     옥하여 자신에게 말하기를 내가김태석이라는 놈 때문에 폐병에 걸리고

    이렇게 폐인이 되었으니 그놈의 원수는 죽어서라도 갚아야 할 것이다.


     특히 나는 경찰서에서 고 강우규의사가 그놈한테 고문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맞았는지 혀가 세 치나 빠져나온 것을 보았으니

     이야말로 천인공노할 죄상이 아닌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곽검찰관은 이 두 가지 증언을 보더라도 피고인의 죄상은 역력하지 않은가라고 반박하니,

     당황한 빛으로 두 손을 흔들면서 재판장을 바라보며

    절대로 그런 사실이 없노라고 뻔뻔스럽게 최후까지 부인하였다


    반민자 최초로 사형 구형 받았으나 김태석은 재심청구 끝에 감형되어

     1950년 봄에 석방됨으로써 무기징역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다른 모든 민족반역자들과마찬가지로.

     

    전봉덕(田鳳德, 창씨명 田中鳳德,1910~)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1941년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3년 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
        ·1949년 헌병사령관

      광복 후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친일 본색 감추고 화려한 사회활동 


      김구 암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서인지, 전봉덕은 헌병사령관을 끝으로 군에서 물러났다.

       전봉덕은 1950년 4월 예편하여 국무총리 비서실장이되었다.

      그리고 1년 만인 1951년 4월에는 그것도 그만두고

      아예 관료사회에서 은퇴하여 변호사로 일하며 법조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일제 시기 친일경찰 경력 덕분인지,

      이후 전봉덕은 그야말로 사회의 여러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대표적인 경력만 꼽더라도 1954년 재향군인회서울지회장,

       

      1956년 서울시 교육위원회 법률고문, 1960년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1961년 고등고시 시험위원,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 위원,서울시 시정자문위원회 위원장,

      1962년 법제처 법제조사위원회 위원,대한교육연합회 법률고문, 1969년 서울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1970년 국제변호사회 상무위원, 1975년 국제관광공사 법률고문,

       1976년 대한적십사사 서울지사장, 1978년 한국법학원 원장,

       1980년 정부 헌법개정 심의위원회 부위원장, 1981년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 이 밖에 서울대등에서 법제사를 강의하기도 한 전봉덕은 법학과 법제사 분야에서 많은저작을

       

      펴냈다. 1973년 3월에는 자신이 주도하여 한국법사학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노덕술(盧德述 1899~ ? )

                      친일 고문경찰의 대명사  노덕술 사진

      • 1920 경남 순사교습소 졸업
      • 1924 동래경찰서 사법주임
      • 1932 통영경찰서 사법주임
      • 1934 평남 경찰부 보안과장
      • 1937 경기도경 경부
      • 1945 평남 보안과장, 제1경부 총감부관방장 겸임
      • 1946 수도청 수도과장
      • 1950 헌병 중령으로 이직
      • 1955 서울 15 육군범죄수산단 대장. 김창룡과 대립중 절도 사건 관계로 실형. 김창룡 암살 이후 석방.
      •  그 이후 잠적 및 사망 추정.

       

      훈7등 종7위 훈장의 극악한 친일 경력

       

      두 손을 뒤로, 두 발을 앞으로 결박하여 천장에 매달아 구타 또는 입에 물을 들이붓고,

      전신에 폭행을 가하는 등의 온갖 방법으로 혹독한 고문을 강행한 후 송국하여 벌금에 처하게 하고

      ·경찰관으로서 독립운동자를 살해하고 악질적 행위를 한 죄 등이다.

       

      노덕술이 유명하게 된 것은 그가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되고

      그의 극악한 죄상이 알려진 데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해방후에도 수도청 고문치사 사건으로 세인을 놀라게 하였고,

      그가 체포된 후 발각된 반민특위 간부 암살 음모로 더욱 악명을 떨쳤다.

       

      반민특위 공판에 출두하여 고문받았던 상황을 생생하게 밝혔던 증언자들에 의하면

       그들의 고문 방법은 머리카락을 뽑고

      물을 먹이는 데서 혀를 뽑는(강우규 열사의 경우) 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반민특위에 의해 고문왕으로 알려진 김태석(金泰錫)과 마찬가지로,

       노덕술은 서울 종로서, 서대문서에서 근무했던 김영호, 이구범(李九範)과 함께

       '악질 삼총사'로 손꼽혔던 인물이었다.

       

                최 남 선(崔南善,1890∼1957)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
      1928년 조선사편수회 위원.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39년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지조를 버리고 택한 학문연구의 길

       

       

      학술

      •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법조

      •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 유진오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한 한국현대사의 큰 별

       

      여성계

                       

       김활란(金活蘭, 창씨명 天城 活蘭 1899~1970)

      일제 침략전쟁에 조선 청년 내몬 이화여전 교장 김활란

      김활란사진

      • 1899년 인천 출생
      • 1907년 이화학당에 입학, 1918년 졸업한 후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 1922년부터 4 년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과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1931년 칼럼비아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이화학당, 이화여자 전문학교에 몸담았다.
      • 귀국하여 한때 근우회와 YWCA 등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되는 1937년부터 총독부가 주관하는 방송선전협의회, 조선부인연구회, 애국금채회 등에 참여 그 이후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 교화단 체연합회,
      • 임전보국단 등 황민화 운동과 내선 일체운동
      • 그리고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 꼽혀 왔다.


      그리고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배화학원, 국제대학, 동구학원,

      금란여중고, 영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학사협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YWCA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원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부 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 6·25 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에는 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이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았다.

      이렇듯 여성명사의 대열에서 김활란은 빼놓을 수는 인물이다.

      그러나 교육·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 말기에는 교육·종교계 인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친일 행각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야마기 카쓰란이되어 학병·징병을 권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였다

       

       

       

      황신덕(黃信德, 1889∼1983)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 추계학원, 중앙 여중,고 창립자
      •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간부
      • 1943년 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냄
      • 3.1 여성동지회 부회장
      • 조선임전 보국단 여성 평의원
      • 친일 성향 강했던 중앙여고 교장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 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

        

      박순천 (朴順天1898∼1983)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청기사.

      1940 황도학회 발기인
      1941 이후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연사
      1945 건국부녀동맹 부위원장 선출 이후 각종 여성단체활동에앞장섬1946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결성,

      부회장에 선출  대한부인회 회장으로 6년간 재직


      1950 제2대 국회의원
      1955 민주당 창당 참여,1956 민주당 최고의원
      1967 신민당 전국구 의원

      제자를 정신대로...

       

      그외에도..-_-;유명하신 분들..(정리가 힘들어서리;)

      •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서정주  미당의 친일시와 광복 이후의 활동

      음악·미술

      •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종교

      • 최 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정치

      역사

      • 이병도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사관
      • 신석호 친일사학자에서 국사학계의 거두로
      • 이선근 역대 부도덕한 정권의 밑받침이 되어 준 이론가

        홍난파(洪蘭坡,창씨명 森川

       

      潤,1898∼1941)

                       민족음악 개량 운동에서 친일음악 운동으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신친일파

         정일권   탁사(濁史)로 얼룩진 '한국의 부도옹'
              
      방응모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박마리아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친일과 권력욕의 화신
              
      박순천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청기사
              
      백두진   유신 옹호의 기수가 된 현실순응주의자
              
      백선엽   빨치산 토벌 지휘한 월남 반공 장교
              
      서정주   미당의 친일시와 광복 이후의 활동
              
      신현확    사계절을 행정관료로 꽃피운 끝없는 생명력의 화신
              
      김동원   독립 운동과는 무관했던 국회부의장

      박정희시류에 따라 변신을 거듭한 기회주의자

      그 치욕과 영광의 삶

       

      1942 만주 신경군관학교 졸업
       1944 일본 육사 졸업
       1946 조선 경비사관학교 졸업
       1961 5.16 군부 쿠데타 주도
       1963 제5대 대통령 당선이후
              79년까지 18년간 집권
       1972 유신선포
       1979 김재규 저격으로 사망


      오카모토 미노루 생도의 답사

      1942년 3월 어느 날 만주의 신경군관학교 졸업식장에서

      오카모토미노루(關本實)라는 한 졸업생이 '어전강연'이란 답사를 하고 있었다.

       

      답사의 내용은 일본 천황과 일제의 만주 괴뢰국 황제 부의(輝儀)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를 보고 육사 교장이었던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장군은

       "다가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 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생도들을 모아놓고 말할 정도였다.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는 박정희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일본식 이름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야누스적 두 평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이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했던 시기에 해당되고

      그 과정에서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대 통령으로 재임중 압축적 산업화를 통한 사회 구조의 변화는 심대했고

       독재와 민주의 갈등은 격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동시에

      혹독한 장기 독재를 꾀했다. 그렇다면 그는 경제성장의 영웅인가, 아니면 독재의 화신인가?


      개인적으로 볼 해도 그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형 박상희가 항일 운동에 투신했음에도 그는 자신의 입신을 위해 만주로 갔다.

       학병으로 끌려갔던 장준하가 일군을 탈출, 광복군에 참여했음에 비해

      그는 일제 사관학교와 만주군에서 성공하길 바랐다.


      또한 그는 자신이 남로당에 관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밀사이자 형의 친구인 황태성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쿠데타의 집념 뒤에는 동료들도 거리낌없이 배신하는 냉혹함이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애증(愛憎)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에 대한 이러한 야누스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기로부터 해방 이후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가 걸었던 궤적은

      그리 자랑스러운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적극적인 친일은 하지 않았다할지라도

      일제의 권력에 편승하여 입신하고자 했던 처신,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위해 항상 정치판을 뒤집어 엎고자 했던 집념어린 쿠데타의 꿈,

       그리고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가차없이 억눌러 버렸던 민주주의-이런 것들이

       좌절을 딛고 성공한 집념의 인간상으로, 또한 경제성장의 영웅으로 조명되는

      그에게서 뗄래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면인 것이다.  


       

             미당의 친일시와 해방 이후의 활동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서정주 사진 

              연혁

              • 1946 청문협 시분과 회장
              • 1948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 1961 시집<신라초>로 5.16문예상 수상
              • 1966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 1977 한국문인협회 회장
              • 1984 범세계한국인예술기회의 회장
                2000 사망 
                 

        미당의 친일 문학

       

      이승만의 전기를 쓰다,민중 문학을 향한 비난과 매도

       

      1981년에는 군사구테타를 일으킨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젼 지원 연설을 하였다.

       또한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초여름에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전두환의 '4.13 호언조치'를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국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에 찬물을 끼얻었으며,

      그 관제 어용 단체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어 양식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산 바 있다.


      한 인물의 업적과 명예를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념관과 홍보관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과 평가아래서 많은 국민들의 지지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문학가라 할 지라도 우리 민족의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많은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한 점에서 볼 때

      그는 오히려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어야 한다.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던 인물이기에 역사를 바로세우고

       민족정기를 올바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미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미안하다"고 밝혔다.

      러나 자신의 친일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준 팔자"라고 하며 느닷없이

      조선 민중 전체를 친일의 공범으로 밀어붙여 자신의 죄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파렴치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서정주가 국민시인으로 추앙되고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그는 생전에 용기있게 자신의 과오를 밝힘으로써 그 사랑에 보답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사죄나 반성없이 국민들이 보내준 영광만을 고스란히 안고 가려 했다.

       그가 시를 다듬는 과정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했더라면

       결코 그러한 발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그 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옛말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정부와 언론의 무분별한 행동 또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들은 서정주가 반민족적 반민주주의적 삶을 살았더라도 문학적 재능과 공로가 있으니

       마땅히 훈장을 수여하고 찬양해야 한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민족을 배신하고 일신의 영달을 추구해도

       재주만 있으면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다는 전무후무한 새로운 가치관을 보급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한번도 반민족, 반민주 행위가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혈연, 학연, 지연을 내세운 친일의 후예들은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이어

       서정주를 통해 또한번 자신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분식하려 하고 있다.

      이제 21세기는 친일파의 찬란한 영광을 기념하는 새 세기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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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구 정리하는게 힘드네요;; 홈페이지에 가시면 자세히 볼수있는듯한데 정리하다가 지쳤습니다...;;

      친일파명단 99인이라고 하네요. 일본자료라서 불쾌하시다고 말하시면 지우겠습니다.

       

      좀 충격먹었던게 이시대의 여성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지시는 분들은 전부 자신의 제자들이나

       

      학생들을 정신대로 모집하셨더군요. 근우회출신등 유명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친일행각을 하셨고 정신대로 보내셨더군요. 그런분들이 한학교의 교장등을 하시고 광복후에는

       

      유명 여성 운동가로써 아무렇지도 않게  활동하시던분들이 많아요.

       

      이거 너무 길어서 보신분들 있으시나 보르겠어요..

      제 아는 동생이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어려요..)일본에 대해 잘모르더라구요.그러면서

      일본 애니나 만화를 보고 일본에서 살고싶다. 일본사람이 되고싶다고 말하는걸 보고 충격

      먹었습니다.-_-; 저라고 뭐 특별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는 투철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충격이더군요.;


      하긴 저도 일본드라마나 애니메이션등을 자주 봤고 접해서...

      저도 모르게 한편으로 조금 일본에 대해 안일해진느낌이 들어서요..

      좀 제 안일한 마음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정리해봤습니다.

      99인만 뽑았다는데 참 많더군요..ㄱ-;

       

      일본자료로 치신다면 지울게요. 꼬릿말로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