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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임시정부·광복군과 OSS의 ‘독수리 작전’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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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광복군과 OSS의 ‘독수리 작전’ 계획



<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7)

-제1부 해방 전야(5)


2020.6.15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중국 대륙을 떠돌며 27년간 활동한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첫 발을 디딘 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할 때까지 27년간 중국 땅을 떠돌며 활동했다.

 임시정부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위상과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27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해체되지 않고
 조직을 유지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임시정부가 처음 결성되었을 때는 큰 기대 속에서 사람과 돈이 모두 풍성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내분으로 사람들이 떠나고
 자금도 고갈되어 간판만 가까스로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외교론, 준비론, 무장투쟁론 등의 노선 대립과
기호파(경기·충청·호남),
서북파(평안·함경)의 파벌 싸움,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세력 간의 이념 갈등 등으로
 사실상 제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또 다시 창조파, 개조파, 고수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 모두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고수파만 남게 되어 내분은 끝났으나 상황은 암담했다.

1925년 3월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탄핵하고
임시헌법을 개정해 집단지도체제로 바꾸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초대 국무령 이상룡에 이어,
양기탁, 안창호, 이동녕, 홍진 등이 국무령으로 선출되거나 거론되었으나
 모두 내각조차 구성하지 못하는 등 임시정부의 존립자체가 위기에 처했다.

 1928년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개편하고
이동녕 국무령과
김구 내무부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가까스로 조직을 정비, 건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김구는
한인애국단 등을 조직해 의열투쟁을 통해 활로를 열어가고자 했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는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특히 4월 29일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 후
항일전에 소극적이었던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군 100만 명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찬사와 함께
김구의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으나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임시정부는 고난의 장정길에 올라야 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이동 경로를 따라
항저우, 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안착할 때까지 8년 동안
무려 1만3천리(5,200㎞)의 거리를 이동하며 중국 대륙을 떠돌았다.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기 13년(1919〜1932),
 장정 시기 8년(1932〜1940),
충칭 시기 6년(1940〜1946) 등
도합 27년간 고난의 투쟁을 이어갔다.

임시정부 27년 동안 어느 한 순간도 편안한 날이 없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장정시기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나날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기는 사람도 있고 돈도 있어서 북적댔다.

곧 분열과 갈등으로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래도 프랑스 조계지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활동공간이 있어서
 그런대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이봉창・윤봉길의거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충칭 임시정부 또한 일제의 중국 본토 침공 이후 2차 국공합작과 함께
중국국민당의 적극적인 재정・군사적 지원
아래 광복군을 조직하고
미국 OSS(전략첩보국: 미 CIA의 전신)와 합작 훈련,
대일선전포고,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 활동,
좌우연합 정부 구성과 건국강령 발표 등
광복을 향한 부푼 꿈을 가지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주1)

그러나 장정시기에는 중국대륙을 기약도 없이 떠돌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동한 도시나 지역에서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했다.

재정적인 취약함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무위원 회의조차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약식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이런 정처없는 처지를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주2)
또는 ‘물 위에 떠다니는 정부’(주3) 등 자조적인 비유도 했지만,
이 같은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충칭시기의 빛나는 성과도 가능했다.

임시정부의 충칭 안착과 광복군 조직

충칭 임시정부가 한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광복군의 조직이라 할 수 있다.

1939년 10월
치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조성환을 주임으로 한 군사특파단을
 시안에 파견하여 초모 활동에 나서는 한편,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교포들에게 광복군 창설을 위한 재정 모금에 나섰다.

 김구는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장제스로부터
광복군 창설 계획에 대한 허락도 받았다.
 중국 영토 내에서 군대를 조직하려면 중국당국의 승인은 필수였다.

1940년 5월
장제스는 “광복군이 중국항전에 참가한다”는 전제 아래
‘한국광복군 창설 계획’을 승인했다.(주4)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이름으로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고 선언했으며,
이어서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典禮式)’을 거행하고
광복군을 조직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후 한중 대표 기념 촬영.

앞줄 왼쪽 여섯 번째부터 홍진, 지청천, 김구, 차리석,

한사람 건너 이시영, 세 사람 건너 조완구

(사진=국사편찬위원회)

 


광복군의 조직 과정은 먼저 지휘부로 총사령부를 세우고,
 병력을 모집하여 하부 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일차적으로 총사령부와 함께 단위부대로 이준식·공진원·김학규를 지대장으로 하는
3개 지대를 편제했다. 광복군은 총사령부가 성립된 다음 병력을 모집하여
 1년 후에는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주5)

총사령부는 시안을 근거로 삼아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활동에 들어갔다.
초모활동은 북쪽으로는 내몽골 바오터우(包頭)에서
 남쪽으로는 난징·상하이에 이르기까지 중국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

중국관내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무장세력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활동도 전개했다
. 시안에는 활동하고 있던 나월환을 중심으로 한 1백여명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들을 설득해 1941년 1월 1일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전지공작대는 아니키스트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출신의 나월한을 대장으로 하고
중국군에서 운영하던 한국청년훈련반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대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전지공작대원들은 중국의 지원 아래
일본군 점령지역에 침투하여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군 포로 설득 작전,
우리말 방송과 선전문 제작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이들에 대해
적극적인 설득하여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시켰다.

나월환이 이끈 이 부대가 제4지대가 아니라
 제5지대로 명명된 것은 이런 공작활동 때문이었다.
첩보활동을 하는 집단을 ‘오열’ 또는 ‘제5전선’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다.

정규군에 호응해 적의 후방에서 각종 모략·파괴·간첩 활동을 하는 비밀 집단이나
그 집단의 구성원들을 ‘오열(5열 또는 제5전선)’이라고 부르는 관습은
스페인 내전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 내전 때, 4개 부대를 이끌고
마드리드 공략 작전을 지휘한 파시스트 반란군 측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마드리드 시내에도 우리들에게 내응하는 제5부대가 위장해 잠입해 있고,
 결국 수도가 이 제5부대에 의해 점령될 것”이라고
프랑코 장군에게 보고한 데서 비밀공작부대라는 뜻의 ‘오열’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그 뒤 ‘오열’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간첩·스파이’와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다.(주6)

편성 당시 제5지대는
지대장 나월환, 부지대장 김동수, 정훈조장 이하유,
훈련조장 박기성, 공작조장 이재현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5지대는 주로 일본군 점령지역을 무대로 초모·선전·첩보·유격전을 전개하였다.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성립 1주년 기념촬영(1940.11.11.)

(사진=국사편찬위원회)

 

▲ 전지공작대 나월환 대장(사진=위키백과사전)

 


광복군의 조직 확대와 재편성

그러나 전지공작대 내부에서 광복군 합류에 거부 반응을 보이던 박동운 등에 의해
 나월환이 살해되면서 혼란을 겪어야 했다.

나월환 지대장은 1942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을 마친 후 제5지대 본부에서,
후종난 부대에서 교부받은 영화 관람권을 대원들에게 나누어주던 중 살해되었는데,
 며칠 뒤에 제5지대 본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폐쇄된 우물 속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1년 전에 행방불명된 현이평의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다.(주7)

이 사건은 광복군 합류를 반대하던 내분이 원인이었다.

임정은 전지공작대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전지공작대를 임정 산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장인 나월환을 충칭으로 초청하여 회유했다.
 하지만 전지공작대 내부에는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립한다”는 신념을 가진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반발이 심했다.

 나월환은 충칭에서 시안으로 돌아온 뒤에도
임정 측의 제안을 선뜻 공개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전지공작대 내부에서 나월환의 태도에 의심을 가진 대원의
 ‘비뚤어진 영웅심’이 살해 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유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월환 지대장의 사망으로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성장해가던 제5지대는 구심점을 잃었고,
광복군 전체가 커다란 동요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대원 중 20여 명이 체포되고,
그 가운데 8명이 사형 내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뒷수습을 위해 잠시 광복군 총사령부 편련처장(編練處長) 송호성이 후임으로
 5지대장에 임명되었으나,
4월 1일 기존 제1지대·제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주8)

제2지대장은 이범석이었는데
일본군을 탈출해 충칭으로 갔던 장준하, 김준엽, 윤경빈 등은
 여기에 편입되어 OSS훈련을 받게 된다.

전지공작대에 이어 조선의용대 일부도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전위동맹 등의 좌익진영이 창설한 중국 관내 최초의 무장조직으로
중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 내에는 공산주의자, 민족주의 좌파, 아나키스트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세력이 혼재했고,
향후 진로를 두고 내부에서 노선 갈등이 생겼다.

최창익 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좌익세력은 북상항일을 주장하며
화북지방으로 넘어가 투쟁하고
나아가 만주로 가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의용대 대장이었던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도 있고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결국 1941년 3월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중국공산당 관할구역인 화북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하
였고, 이에 중국군사위원회(국민당)는 김원봉에게
 남은 조선의용대 본대를 광복군과 통합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더욱이 중국 국민당이 자금 통로를 임시정부로 일원화함으로써
자금줄이 끊어지면서
김원봉으로서는 더 이상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42년 7월 남아있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고,
 이로써 중국 관내의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이
모두 광복군으로 집결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조선의용대 대장이었던 김원봉은
제1지대장(광복군 부사령관 겸임)과 함께
후에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았다.

2019년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돼
 마침내 민족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고 발언하자
보수라는 사람들이 난리를 친 적이 있다.

광복군 성립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을 두고
김원봉의 월북 후 활동에 연결시키며 난리를 쳤던 것이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임시정부 또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의 좌익세력이 여당이었던 한국독립당과 함께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개편되게 된다.

 

▲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1939.10.10., 광서성 계림)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학병탈출 광복군과 일본군·만주군 출신 부대편성


한편, 광복군에는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인 병사들도 다수 합류하였다.
일제는 1943년에 대학생들을 학병,
 1944년 9월에는 징병이란 이름으로 한인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했는데,
1944년부터 중국에 배속된 조선인 병사들의 탈출이 이어졌다.


1944년 7월
중국 쉬저우(徐州)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김준엽, 장준하, 윤경빈,
홍석훈, 김영록 등은 6천리 길을 걸어서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와 광복군이 되었다.

중국군과의 전투과정에서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조선인 병사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진짜 광복군’이었다.

1945년 8월경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갖춘 대략 총병력 500여명의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 선언 직후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조선인 장교와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짜 광복군’이 양산되기도 했다.


 5.16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해 18년간 한국을 강압적으로 통치한 박정희를 비롯해
 5.16군사반란의 주역이었던 이주일,
해병대 초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등도
일제의 패망 후 광복군 확군 과정에서 편입된 인물들이었다.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던 이들은 1945년 8월 17일
러허성(熱河省) 싱룽현(興隆縣)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근무하던 만주군 8단을 떠나
베이핑(北平: ‘베이징’)으로 가서 광복군에 들어갔다.

일제 패망 후 일본군·만주군 출신 장병들로 구성된
 ‘광복군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에 편제된 것이다.

평진(平津)은 북평(北平)과 천진(天津)에서 따온 단어로,
일제 패망 후
베이징과 텐진 주변의 일본군·만주군 장병들을 모아서 편성한 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에는 신현준 전 만주군 상위,
 1중대장에는 이주일 전 만주군 중위,
 2중대장에는 박정희 전 만주군 중위,
3중대장에는 윤영구 전 일본군 소위,
정훈관에는 정필선 광복군 공작원,
군의관에는 엄재완 등이 임명되었다.


약 200명의 이 평진대대원들은 귀국 날짜를 기다리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학병 출신으로서 이 광복군에 속했던 박기혁(朴基赫)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 집단을 만든 것이다. 배편을 기다리면서 규율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군사편제로 조직된 것이다.
광복군이란 말에 어울리는 이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주9)



 


 

일제의 패망 후 일본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신분을 바꾼 이주일(좌),
신현준(중), 박정희(우).
이들은 모두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등재되었다.

 이 가운데 신현준은
일제가 만주지역 조선인 빨치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별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한국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냈다.

 이주일은
 박정희와 함께 1948년 여순 사건 후 군부숙정 때
 남로당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으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박정희와 함께 5.16쿠데타주체로 가담하였다.

박정희는 일제 패망 후 광복군에 들어간 것에 대해 쑥스러워했다고 하는데,
후에 박정희가 권력을 잡고 난 뒤 누군가가 ‘비밀광복군 출신’이라고 말했다가
 금방 쑥 들어가 버렸다.

박정희로서도 자신이 해방 후 일본군에서 벗어나
귀국을 위한 방편으로
광복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낯간지럽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신현준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이 북경에 도착한 것은 1945년 9월 21일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 광복군 제3지대에 편성되어 귀국을 기다리다가
 1946년 4월 29일 북경을 떠나 천진의 당고항에 도착한 뒤 1주일간을 대기하다가
 5월 6일 미 해군 수송선에 올라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때 한국에는 콜레라가 부섭게 번지고 있어서
 귀국자들은 배에서 이틀을 더 기다린 끝에
미군 검역관이 뿌리는 DDT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전신소독을 받은 뒤에야 육지에 올랐다.(주10)

문제는 이들처럼 일제 패망 후 광복군 잠편대 등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서도
광복군 행세를 하며 서훈까지 받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광복군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년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총사령부 108명, 1지대 89명,
 2지대 185명, 3지대 119명, 기타 13명 등을 합쳐 514명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었다.

광복 이후 혼란과 전쟁, 분단 등을 겪으면서 희생된 사람들이 많아
실제 대한민국 정부에 포상 신청을 한 사람은 이보다 적은 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2005년 6월 <한겨레21>의 보도에 의하면
광복군 서훈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공적 내용이 단 한줄도 없는 ‘백지’광복군이 44명이나 되었고,
 해방 후 4일 뒤인 1945년 8월 19일에 입대한 사람도 있었다.(주11)

광복군은 일제 패망 직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병사들을 대거 받아들여 ‘잠편대’를 편성했는데
, 이는 광복군의 세력 확대를 위해서 취한 조치였다.

일제의 패망 후 일본군과 만주군출신 장병들로 만들어진 ‘주평진대대’ 같은 것을
 광복군이라고 보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중에도 일부는 광복군으로 서훈을 받아서
 ‘짝퉁 광복군’ 논란이 끊임없이 일었던 것이다.


만일 해방 후 입대한 이들까지 서훈을 받아야 한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도 서훈대상이 된다
. 서울시립대 염인호 교수에 의하면 ‘박정희처럼
해방 이후 확군된 병사수는
 베이징 1300여명, 난징 800명, 상하이 1300명이나 되었다.(주12)

대한민국의 정통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어두운 이면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가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 분단 상황에서라도
 남한의 정치주역이 되었거나
아니면 통일정부가 구성되어 임시정부가 주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다면
 아마도 광복군 출신이 국군의 중추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해방 후 귀국을 위한 방편으로 광복군에 들어갔던 일군·만군 출신들도
적극적으로 그 신분을 내세우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해방 정국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지 못했고,
특히 군사부문에서 광복군·중국군 출신은
 일본군, 만주군, 학병 출신들에 비해 현저하게 밀렸고
거의 미미한 위치밖에 점하지 못했다.

그러니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 마지막에 광복군에 편입되었던 이들도
 광복군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광복군이 아니라 만주군 출신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자신들의 군사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한국군 중추는 정일권, 백선엽, 원용덕,
김백일, 김석범, 신현준, 장은산, 김일환, 강문봉, 송석하 등 만주군 인맥이 차지했다.

특히 이른바 ‘5.16쿠데타의 핵심주역’들이 대부분 만주군 인맥이었다.


박정희, 이주일, 김동하, 박임항, 방원철, 김윤근, 윤태일, 최주종, 양국진 등이 그들이다.
만주군 출신으로 박승환, 이병주처럼
남로당이나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한국군의 중추로, 5.16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행세했다.


OSS 훈련과 한반도 침투작전(‘독수리 작전’) 준비

광복군은 조직의 확대와 함께 대원들의 훈련,
대일전 참전 등을 위한 많은 계획과 준비를 진행했다.

 광복군의 활동 가운데 주목할 것은
인도·버마 전선에 대원을 파견해
영국군과 공동 작전을 전개한 것과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합작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한 일이었다.

1943년 8월 한지성·문응국 등 광복군 9명이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는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이들은 9월부터 12월까지 영어와 방송기술,
일본어 방송·문서번역·전단작성 등에 관한 교육을 받은 후
 1944년 초 영국군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들은 영국군 장교 대우를 받으며 임팔(Impal) 전선에 투입되었다.
임팔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버마와의 접경지역으로
 아라칸 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열대밀림의 험준한 산악지대였다.

대원들은 영국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이곳에서
일본군을 향한 대적방송·적문서 번역·전단 제작과 살포·
포로 심문 등의 심리전 활동을 했다.
 대원들은 5월의 버마 수도 랭군 탈환 작전을 비롯해
 7월 일본군을 완전히 격퇴할 때까지 직접 전투에도 참가했다.(주13)

전쟁 말기부터 미국 정보당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인들을 활용하려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세웠다.

 미 전략첩보국(OSS)에서는
한국인들을 일본과의 전쟁에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세 가지 계획을 마련했다.

하나는 ‘냅코 작전(The Napko Project)’으로,
 미국본토 및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과
맥코이 수용소에 있는 한국인포로들 중에서 인원을 선발,
이들을 한반도와 일본에 투입시켜
정보수집과 게릴라활동을 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둘째는 ‘독수리 작전(The Eagle Project)’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광복군 대원들을 활용한다는 계획이었다.

 셋째는 중국 연안지역에 있는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이용하여
만주·한반도·일본 등지에 대한 첩보활동을 추진하는
‘북중국첩보작전(North China Intelligence Project)’이었다.

미국은 이 세 가지 계획 중 ‘냅코 작전’과
 ‘독수리 작전’을 실행에 옮길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진행했다.(주14)

미국 본토에서 준비했던 ‘냅코 작전’에 대해서는
앞에서 학병 출신으로 일본군을 탈출해 영국군 포로가 되었다가
미군 OSS 훈련을 받은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 등
 19명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광복군과 합작해 준비한 ‘독수리 작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OSS는
 한반도에 대한 첩보활동에 광복군을 활용하기 위해
‘독수리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45년 2월
OSS 비밀정보과장에 의해 보고되어 OSS 작전회의가 승인했다.

3월에는 전략첩보국장이 중국주둔 미군총사령부의 승인을 받았다.
4월 3일 OSS측 실무자인 싸전트(C. B. Sargent) 대위가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 등과 함께
임시정부 청사로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 지(이)청천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의 요원들이
동반한 연합군의 한반도에 대한 공격작전을 지원한다”고 함으로써
독수리 작전을 승인했다.(주15)

이 작전에서 김원봉의 제1지대는 제외되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내의 좌우의 갈등과 견제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광복군 제2지대 간부와 미국 OSS대원(1945.9.30.)

앞줄 왼쪽부터 노태준, 싸전트(Clyde B. Sargent), 이범석,

 안춘생, 노복선(사진=국사편찬위원회)

 



독수리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광복군 대원들은 OSS 특수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미군이 맡았다.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은 시안(西安) 두취(杜曲)에서
 5월부터 비밀첩보활동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첩보훈련반과 무전교신반으로 나뉘어 받았는데,
 7월 말 제1기생 50명의 훈련이 끝났다.

김준엽과 장준하는 1기 훈련생에 포함되었다.


제3지대 대원 22명은
7월 7일부터 안후이(安徽)성 푸양(負陽) 리황(立煌)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8월 1부터 새로 제2기생 50명에 대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충칭에 남아 있다가
6월 상순 두취로 온 윤재현 등 학병출신 4명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해서 두취에 온 학병은 모두 14명이 되었다.(주16)

8월 5일 김구 주석은
총사령 지청천, 선전부장 엄항섭 등 19명을 대동하고 시안으로 갔다.
OSS훈련이 끝난 1기생 대원들의 국내 진입작전을 미군측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측에서는 김구 주석을 비롯해
지청천 총사령과 이범석 제2지대장 등이 참석했고,
미국측에서는 OSS 총책임자 도노반(W. B. Donovan) 소장과
홀리웰 대령, 훈련책임자 싸전트 대위 등이 참석했다.

양측은 공동작전에 최종 합의했다.


훈련이 종료된 1기생들은 8월 20일 안에 특공대를 조직,
낙하산이나 잠수정 등을 통해 한반도에 침투시킨다는 계획이었다.(주17)

침투가 예정된 대원중에는 후에 한국 사회의 지도적 인물이 되는 김준엽,
태윤기, 장준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50명은 함경도로부터 남해에 이르기까지 4, 5명씩 지구공작대를 편성해
잠입하게 되어 있었다.

각반의 책임자는
함경도 반장 김용주, 평안도 반장 강정선, 황해도 반장 송면수,
경기도 반장 장준하, 강원도 반장 김준엽, 충청도 반장 정일명,
전라도 반장 박훈, 경상도 반장 허영일 등이었다.(주18)


각 도에 4, 5명씩 보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보수집이나 파괴 공작 등이 주된 임무였지만
 일본군과 경찰, 친일단체들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들의 국내 파견은 결국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조국해방을 위한 제단에 기꺼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각오였던 이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의 훈련과 준비에 대해 김구는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라고(주19) 설명하였다.


결국 국내진입작전은 세 단계로 계획되었다.

우선 광복군 대원들을 잠수함으로 국내에 진입시키는 것이고,
 다음은 이들로 하여금 국내에 거점을 마련하여
부여된 각종 공작과 인심(人心)을 선동하는 것이며,
셋째는 OSS측과 연락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적후방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주20)


일제의 패망 소식에 탄식한 김구

그러나 ‘독수리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실행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은

시안에서 일본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시안에서 훈련이 끝난 1기생들을 미국의 전략첩보국(OSS)과 협조해
 국내로 진입시켜 적후공작을 전개하기로 합의한 뒤
, 8월 10일 산시성(陕西省) 주석 추샤오조우(祝紹周)의 초대를 받아 저녁식사를 하던 중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었다.

김구 주석에게는 이 소식이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써 참전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기 때문이다.(주21)

춘원 이광수가 교열한 것으로 알려진
『백범일지』에는 이 장면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8월 10일-필자 주)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한 대로 축 주석 댁 만찬에 불려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던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 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후에 뛰어 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다!’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애닯고 아깝기도 하거니와,
 그 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주22)


도진순 주해의 『백범일지』에는 이 부분이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라고 되어 있으나
백범선양회 편 『백범일지』에는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애닯고 아깝기도 하거니와,
그 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라고 쉽게 덧붙여 교열했다.

상황이 급변하자 8월 10일 임정의 김구 주석은 두취로 급히 돌아와
이청천 광복군 사령관,
이범석 총참모장(2지대장)과 향후 진로를 논의했다.

여기서 OSS 훈련을 받은 제2지대 대원들을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으로 편성해

가급적 신속히 국내로 진입시키기로 했다.

 11일 오후 중국 여객기로 충칭으로 돌아간 김구 주석은 임정 국무회의를 개최,
 ‘국내정진군’ 파견안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13일 제2지대장 이범석을 ‘광복군 국내정진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범석 의 부관이었던 김준엽을 비롯해
정진군 장교들은 모두 소령으로 진급 발령을 받았다.

이와 함께 중국전구 미군사령부가 수일 내에
 ‘사절단’을 시안(西安)에서 서울로 파견할 예정이니
정진대도 그 편에 편승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진대는 7명을 선발하기로 했다.
이범석 사령관을 비롯해
이해평, 장준하, 노능서, 이계현, 장덕기, 김준엽 등이었다.

이범석 등은 동북항일연군 등 소련과 연계된 빨치산 등
 좌익세력이 국내에 들어갈 것을 예상하고
 이들보다 먼저 국내에 진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주23)

실제로 이 무렵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 동북항일연군 조선인부대원들은
조선공작단을 조직하고, 소련군과 협조하여
 해방 후 국내에서 펼친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확히 동향이나 정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해방 후
 국내에서 좌우세력의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일제의 항복 선언과 함께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이미 해방 후 정치적 주도권을 위한 경쟁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진대원은 애초 7명에서 비행기의 적재무게 제한 때문에
 최종적으로 지대장 이범석을 비롯하여
김준엽·장준하·노능서 등 4명으로 줄어들었다.

 OSS측은 책임자 버드 대령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었는데
이중에는 한국인 미공군장교 정운수가 버드 대령의 통역으로 포함되었다.

광복군 ‘정진대’가 OSS와 함께 국내로 향한 것은 8월 16일이었다.

새벽 4시 30분에 서안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비행기가 산동반도에 이르렀을 때
 미군항공모함들이 일본전투기로부터 공격을 받고
 또 여러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바람에 시안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 국내진입을 재차 시도한 것은 8월 18일이었다.


산동반도까지 갔다가 돌아온 비행기의 날개에 고장이 나서
 중경에서 대체비행기 C-47을 가져왔다.
정진대는 8월 18일 새벽 5시 50분에 서안을 출발하여 6시간의 비행 끝에
 12시경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주24)


그러나 이들을 맞이한 것은 무장한 일본군이었다.

장준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무선전신으로 착륙한다는 것을 일본군에 알린 후
 마침내 여의도 비행장에 나리니 비행장에는 상월(上月)·정원(井原) 등
군사령관과 참모장을 비롯하야
 보병과 헌병 약 1개 중대가 총 끝에 칼을 꼬자들고
무시무시한 전투태세로 물샐틈없이 포위를 하고 있습니다.”(주25)

일본군은 비행장 착륙은 허락했지만,
착륙 즉시 이들을 포위하고 어떠한 활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버드 대령이 일본군측에

“중국전구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의 지시하에
 연합군 포로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예비대표로 왔다”면서,
아베(阿部) 총독에게 이를 전달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임장이 없다는 것과

동경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버드 대령은 “일본의 항복서명이 있을 때까지 체류하다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즉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을 다시 요구했지만 이 또한 거부되었다.

 일본군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면서
, 탱크와 박격포·기관총 등을 배치하고 위협했다.

정진대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진대 일행은 일본군이 가져다 준 휘발유를 채우고
착륙한 지 28시간여만인 8월 19일 오후 4시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였고,
산둥성 유현(維縣)비행장을 거쳐 8월 28일 시안으로 귀환했다.(주26)

▲ 일제의 항복 선언 직후 국내에

 파견된 광복군 정진대원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좌로부터)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중국 산동성 유현에 불시착한 국내 정진대원들과 중국 인사들

(1945.8.19.)(사진=국사편찬위원회)



임시정부와 광복군으로서는 이때 국내에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
 그 후의 입지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진대의 국내 활동은 불가능했고,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은 물론이고
 단체로 입국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아서
개인자격으로 ‘초라한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임정 요인 1진이 입국한 1945년 11월 23일 무렵에는
이미 국내 정치의 세력 편성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여서
귀국 후 입지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환국 후 불과 한 달 만에 터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둘러싼
 ‘신탁통치 정국’으로
 김구의 임정은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잡지만,
 그때의 극단적인 행보가 분단세력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결국에는 정치적 주도권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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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임영태,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정(7)-임시정부의 이동(1)”, 통일뉴스, 2019.6.4
2)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148쪽
3)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 2-장정시기』, 독립기념관, 2008, 11쪽
4)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사 3-중경시기』, 독립기념관, 2009, 19〜20쪽
5) 한시준, 위의 책, 21〜22쪽
6) 고종석 편집위원, ‘오늘 속으로, 光復軍’, 한국일보 2001년 9월 17일, 5면
7)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월환』, 2014년 9월
8)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월환』, 2014년 9월
9) 조갑제, 『박정희1 : 군인의 길』, 조갑제 닷컴, 2007, 252〜254쪽
10) 조갑제, 위의 책, 259쪽
11) “‘짝퉁 광복군’ 수두룩하다”, 한겨레21, 2005.6.24
12) 염인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운동, 역사문제연구 1(역사문제연구소, 1996), 280쪽, 286쪽, 289〜290쪽
13) 한시준, 위의 책, 82〜86쪽 참조
14) 한시준, 위의 책, 163〜164쪽
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1』, 1992, 185~186쪽
16) 김준엽, 『장정』, 나남, 1987, 411쪽
17) 김준엽, 위의 책, 411쪽
18) 김준엽, 위의 책, 411〜412쪽
19)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399쪽
20) 한시준, 위의 책, 90쪽
21)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98〜399쪽
22) 백범선양회 엮음, 『백범일지』, 하나미디어, 1992, 238〜239쪽
23) 김준엽, 위의 책, 419〜420쪽
24) 한시준, 위의 책, 92~93쪽
25) 「投降接收豫備隊로 警戒森嚴한 汝矣島着陸」, 『조선일보』 1945. 12. 26
26) 이범석, 「광복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활동」,
『신동아』, 1969년 4월호, 201~202쪽; 한시준, 위의 책, 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