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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법정스님의 쥐 이야기

   

 

 지리산에 있는 어느 궁벽한 암자에서 지낼 때였다.
여름철 안거가 끝난 뒤라 함께 지내던 도반(道伴)들은 다 하산해 버리고 나 혼자 남아

텅 빈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그 시절은 등산 꾼도 구경꾼도 없던 때라 암자는 그야말로
적적요요(寂寂寥寥)하여 무일사(無一事)였다.
사람이라고는 약초를 캐러 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이따금 지나갈 뿐이었다.
다로(茶爐)에 물은 끓어도 더불어 마실 이가 없는 그런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을 마치고 헌식(獻食)을 하기 위해 뒤꼍 헌식돌로
나갔더니 거기 꽤 큰 쥐 한 마리가 있었다.
나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헌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헌식이란 불가에서 공양할 때 배고픈 중생 몫으로 따로
떠놓았다가 베푸는 일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여름철 내내 헌식돌이 깨끗했던 연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헌식한 음식은 대개 새나 다람쥐가 와서 먹게 마련인데,
어떤 때는 전날 놓아둔 음식이 그대로 남아 지저분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헌식돌이 말끔했던 것은 날마다 이 쥐가 와서 먹어치웠기 때문인 것이다.

 

하루 한 끼 밖에 먹지 않을 때라

한낮에 공양을 끝내고 헌식을 하러 가면

으레 그 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에는 쥐꼬리만 보아도 소름이 끼치곤 했는데,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쥐를 대하니 오히려 반가웠다. 
 

더구나 나를 의지하고 사는 중생이거니 생각하면 어떤 연민의 정마저 들었다.
헌식도 전보다 좀 많이 주었다. 쥐는 무럭무럭 자라 보통 쥐의 세 곱은 되었다.
'너 오늘도 왔구나, 어서 먹어라'하고 헌식을 주면,

내 곁에 다가와 먹을 만큼 우리는 길이 들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쥐에게 한마디 일러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미쳤다.
그날도 쥐는 어김없이 헌식돌에 와 있었다.

 

쥐가 다 먹기를 기다려 말을 걸었다.
'쥐야, 네게도 영식(靈識)이 있거든 내 말을 들어라.
네가 여러 생(生)에 익힌 업보로 그같이 흉한 탈을 쓰고 있는데,
이제 청정한 수도장에서 나와 같이 지낸 인연으로

그 탈을 벗어 버리고 내생(來生)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을 하거라.

 

언제까지 그처럼 흉한 탈을 쓰고 있어서야 되겠니?
어서어서 해탈하거라.'

쥐는 그대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 다음날 헌식돌에 나가니 쥐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 했는데 그 쥐는 헌식돌 아래 죽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못 미더워하고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는 막힌 세상에서,
쥐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구나 싶으니 대견스러웠다.
하는 짓에 따라 그 거죽이 다를 뿐

착하게 살려는 생명의 근원은 조금도 다를 게 없음을 거듭 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염불을 하고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해 가을 나는 그 쥐의 명복을 빌면서
줄곧 마른 바람소리를 옆구리께로 들었다.

... 법정스님의 수필집 '서있는 사람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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