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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기술

세상은 마음의 거울이다

 

 

세상은 마음의 거울이다

 


수산 스님 6.15경기본부 홍보위원

  기사입력 2014/08/31 [04:54]

[신문고뉴스] 우리에게 늘 궁금한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옛 분들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는 없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듯이,

구약성서 욥기에서도 ‘인생은 땅위에서 고역이요, 그의 인생에는 품꾼의 나날 같지 않은가’라는 말씀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인생을 긍정보다는 부정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노력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 자체는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 자체가 원래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선악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비평가이자 역사가인 토마스 칼라일은 “인생이란 단지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며,

그 두 가지를 지양하고 종합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커다란 슬픔도 커다란 기쁨을 불러올 것이며, 또 깊은 슬픔은 깊은 기쁨으로 통하고 있다.

자기의 할 일을 발견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신념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사람의 가치는 물론 진리를 척도로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보다도 그 진리는 찾기 위해서

맛본 고난에 의해서 개량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불교의 『대승기신론』이란 경전에서

 “세상의 온갖 경계가 다 중생의 무명[無明; 근본번뇌]에서 나오는

망령된 마음에 의하여 존속한다.

그러므로 온갖 현상은 거울 속의 영상을 실체라고 인식할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사실은 허망하다.

  

망령된 마음이 생기면 차별적인 현상이 생기고

그런 마음이 없어지면 차별적인 현상도 없어지는 까닭이다.”라고

하듯이,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즐거운 인생,

괴로움 인생의 차별 현상이 생기는 것이지 인생 자체는 괴롭거나 즐거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즐거움이건 괴로움이건 그것은 실체가 없는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맑고 깨끗한 유리를 통해서 바깥을 볼 때 우리는 원래의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있지만,

색깔이나 더러움이 묻은 유리를 통해서 보는 대상은 그만큼 왜곡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 왜곡을 일으키는 색깔이나 더러움이 바로 우리의 경험과 주관 그리고 집착과 욕심 등이라는 것으로,

그래서 우리는 흔히 아는 만큼 본다고 하지 않던가.

행복과 불행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 갖아야 할 문제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보다도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생활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절에 가면 흔히 사르는 향과 초를 무슨 이유로 켜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향과 초는 자신을 태워서 주변을 향기롭게 하고 밝게 비추며 결국은 사라지게 된다.

즉, 자신을 불태워 남에게 이익을 주게 하는 의미가 바로 향과 초를 사르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종교인의 마음자세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내가 아프고 힘들어도 이웃을 위해 모르는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끔찍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4개월도 넘었건만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왜 그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야 했는지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지 밝혀 달라는 희생자 유가족과 많은 국민들의 요구를

치졸한 유언비어로 희석시키며 외면하는 현실을 보며

이 안타까움을 어찌 풀길이 없어 가슴 아프다.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분도 계신데 어느 분은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라 하시니

보는 국민들은 헷갈리기만 하다.


고통 속에 죽어가는 자식들 앞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욕지거리가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의원들이 웃음 지으며 내뱉었던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육두문자보다 비난받아야 하다니,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했던 “임금님은 부처로 보입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그들은 알까?

아는 만큼 보고, 세상은 마음의 거울인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이 내뱉은 말조차 기억을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위정자는 필요 없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우리들은 조삼모사(朝三暮四)로 농락당함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를 그저 선거결과로 치러야 할 업보로만 치부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아프다.

  

거짓을 말하지 않음으로 만족하지 말고 진실 된 말을 해야 하듯이,

더 이상 행동하지 않는 양심으로 침묵하지 말고 무언가 우리의 가슴을 열어 보이자.

 

운명이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픔과 불행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더 이상 침묵하지 말자. 큰 소리로 외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