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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좋은글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소설가 정만진 [노래의 고향 27] 성주 안산영당
 
2013.02.24 18:14 입력
 
 
정만진 소설가 daeguedu@daum.net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ㅣ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흔히 <다정가>라고 부르는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노래다.

지금 ‘시조’라 하지 않고 ‘노래’라 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이 서로 다른 눈으로 시조를 보기 때문이다.

현대시조는 곡조가 없는 ‘문학’이지만

고려와 조선 시대의 고시조는 곡조와 가사를 두루 지닌 ‘노래’였다.

 

<다정가>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지닌 수준에 힘입어 ‘국민 시조’의 반열에 올랐다.

 

이화, 월백, 은한, 삼경, 일지춘심, 자규, 다정, 병, 잠 못 들어 하노라……

시어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다우니 더 이상 내용까지 따져서 왈가왈부할 여지도 없다.

 

이조년은 이장경의 5남이다.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이 그의 네 형이다.

재미있는 작명법이다.

 

그런데 형제의 이름만 재미있는 데 그치지 않고 이씨 집안 전체가 살아가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다.

조년을 포함하여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의 이름이 나라 안에 펄펄 날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자 태실

 

 

이장경의 묘소는 본래 지금의 세종대왕자태실 자리인 태봉에 있었다.

그러나 왕궁에서 ‘전국 최고의 태실 명당’으로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사 왼쪽의 태봉을 지목하면서

이장경의 무덤은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로 옮겨졌다.

 

장경의 다섯 형제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과거에 합격하고,

그 자손들도 대를 이어 고관대작을 지낸 것을 보면 과연 태봉 자리가 명당이기는 명당인가 보다. 

 

 

작품성 자체로도 우리나라 시조를 대표하는 <다정가>

 

<다정가>를 노래할 때 이조년은 성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 고향 성주로 와서 산 세월이 무려 13년이나 되었다.

 

이조년은 자신의 집에다 백화헌(百花軒)이란 현판을 붙였는데 백 가지 꽃이 만발한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만큼 그는 꽃을 재배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살았다.

그러나 이 무렵 남긴 한시 ‘백화헌시’를 보면

그가 꼭 온갖 꽃을 심고 키우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백화헌시’를 한글로 번역한 내용만 대략 읽어보자.

 

이 꽃 저 꽃 주섬주섬 심을 것 있나
백화헌에 백화를 피워야 맛인가
눈 속에는 매화꽃 서리 치면 국화꽃
울긋불긋 여느 꽃 부질없느니

 

울긋불긋 철 따라 빛깔이 변하는 여느 꽃들은 다 부질없다.

권력의 향배를 따라가며 잽

싸게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하는 기회주의자들이 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이조년은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다정가>도 성주에서 썼으니 어쩌면 백화헌시와 대동소이한 착상에서 작품이 태동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정’이 단순한 다정다감 차원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걱정하는 뜻깊은 심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배나무꽃에는 달빛이 은은하고

은하수는 밤 12시 전후를 흐르는데,

한 가닥 나뭇가지에서 배어나오는 봄의 기운을 소쩍새가 어찌 알고 울겠냐마는,

다정다감한 것도 병인 듯하여 나도 이 밤을 잠 못 들고 있노라

 

 

성주에 머물면서 <다정가>를 지은 이조년

 

<다정가>를 처음 노래할 때 왜 이조년은 성주에 살았을까.

그는 사실 고향 성주에 귀양 와 있었다.

원의 실질적 지배를 받던 당시,

중앙 관리들은 자신과 친한 왕족을 권좌에 앉히기 위해 파벌을 이루어 원에 줄을 대며 싸워댔다.

이조년은 중립을 지켰지만, 결국 권력을 잡은 쪽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간신들이 원에 호소하여 임금을 바꾸려 획책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조년은 단신으로 원나라 조정을 찾아가 황제를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그 후 1331년과 1339년에도 이조년은 비슷한 사건을 풀기 위해 원나라를 찾아갔다.

1339년에는 그의 나이가 무려 71세였으니,

그러한 고령에 멀리 중국까지 찾아다니며 자신의 임금을 구출한 충정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다정가>를 신위(申緯)는 ‘자규제(子規啼)’란 제목으로 한역했다.

 

梨花月白三更天
啼血聲聲怨杜鵑
儘覺多情原是病
不關人事不成眠

 

 

신위는 <다정가>를 왜 한문으로 번역하였을까.

아마도 <다정가>가 너무나 아름다운 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작가 이조년에 대한 이황의 평가가 한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황은 말했다.

 

‘이조년은 고려 500년 제1의 인물이다.’

 

그랬으니,  이황보다 250년가량 후세 인물인 신위가 <다정가>를 한문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시 자체의 품격도 작용을 했겠지만

작가인 이조년에 대한 흠모의 마음도 크게 작용했을 법한 일이다.

 

이조년은, <다정가>가 단숨에 보여주듯이 뛰어난 문장력을 지녔고,

유능한 행정가로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나라의 위기를 개인적 능력으로 해결해내는 역량을 발휘했다.

 

그만 하면 이황의 인물평이 지나친 극찬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사실에 어긋나는 발언으로 간단히 치부할 일도 아닐 법하다.

 

 

▲안산영당의 이조년 초상

 

 

이황 찬사 “이조년은 고려 500년 최고의 인물”

 

이조년은 73세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국정 살피기에 소홀한 왕을 여러 번 충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낙향한 것이었다.

그는 75세에 타계했고,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41번지 안산영당에서 모셔져 배향되고 있다.

 

 

▲안산영당

 

안산영당은 본디 숙종 10년(1680)에 ‘안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었다.

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피하기 위해 안산영당으로 개칭했다.

이름에 영당(影堂) 두 글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 짐작되듯이,

이곳은 이조년 외에도

그의 아버지 장경 등 여러 선현(先賢)들의 초상화를 모셔두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217호다. 

 

이조년은 선비의 대쪽 같은 충성심과 절개를 노래했다.

‘눈 속에는 매화꽃 서리 치면 국화꽃, 울긋불긋 여느 꽃 부질없느니.’

그러나 이조년의 영정을 고이 모시고 있는 안산영정은 찾기가 쉽지 않다.

 

성주읍에서 출발하여 벽진면 소재지 중심부에서 우회전하면 금세 ‘벽진 이씨 발상지’인 경수당이 나온다.

 경수당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벽진중학교 앞을 지나고,

다시 도상욱이 지은 정자 기국정(杞菊亭)을 지난다.

길은 계속 외길이다.

 

작은 호수 하나를 지나면 오르막이 이어진다.

초전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숨이 가팔라질 때쯤이면

 ‘上占福’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을 길가 비석에 새겨서 내놓은 마을이 산비탈에 호젓이 앉아 있다.

오르막길의 마지막 동네다.

 

이윽고 초전면 경계를 말해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금세 고개 정상부 오른쪽에

 ‘← 안산영당 1.5km, ↑ 백세각 3km, 완정고택 4.7km'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도무지 길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왼쪽 임도를 따라 들어간다.

 

안산영당은 대낮에도 은하수가 하늘 가득 깔려 있는 듯 느껴지는 고즈넉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다.

주위에는 한 채의 인가도 없다.

<다정가>에서 자정의 밤하늘에 은하수가 아찔하다고 노래했던 이조년,

‘별의 고장’ 성주의 조용한 산중에서 오늘도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뒤척이고 있을 듯하다.

 

  

▲안산영당이 있는 이씨 재실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