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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좋은글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2013.12.28. 07:42

 

 

많은 것들이 지나갔다.

한때 곁에 머물며 나를 움직이던 것들은 새로운 세계에 번져 망각 속으로 흩어져버리고

비에 젖을 줄 아는 꽃잎만이 계절을 받아들인다.

 

언젠가는 지쳐 그만둘 것이지만

이따금 가슴 한구석을 길게 비추던 시간들이 닫힌 듯 찾아 왔다가는

 어깨를 늘이며 돌아갈 채비를 한다

..그리하여 길 위에는 아득히 낙엽이 뒹굴고 더 먼 곳에서는

정처 없이 배회하는 내 것이었던 많은 것들이 내 호명에 뒤돌아본다.

어느덧 발자국 사이로 원경들은 아침을 위해 빛을 저장하고

영원을 꿈꾸는 달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들을 위해

새벽의 정원을 푸르게 비춘다<카프카와 마나는 잠의 노래> 序文


......................................................2004년 5월
.........................................................박주택

 


















 

 

 



."기억에 바치는 조사(弔辭)"
................

산책이랍시고 길을 걷고 있는데
나뭇잎이 툭, 떨어졌다

비가 조금씩 내렸던가, 잎들이 물에 젖어 있었다
여름의 저것들도 낙엽이라고 불러야 하나?

무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이 꿈에 나타난다
꿈에 나타나 약속 없음을 두려워한 뒤
半旗를 내리고 있는 공터에게로 간다

아직도 자신을 먼지로 가두고
手中의 손금들은 운명처럼 얽혀 있는데
이름도 없이 곁을 스쳐가 초라한 소문으로
흩어져 있는 수많은 기억들이여

발아래로는 빗방울이 차이고
아름다움의 먹이가 되었던 쓰라림이
서로의 소리 안에 울음을 감추는 저녁
자신을 들여다보던 문 하나 늘어뜨린
어깨를 세워 흐르는 불빛을 여닫는다


.#
...박주택 詩集(문학과지성 시인선ㆍ287)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중에서







 


.......epilogue -


.....1
..몽유에 잠든 날,

길이 아닌 길, 끝없이 길이 아닌 길.

문 안을 빠져나와 밖을 나서면 또 하나의 문.

몸 안의 문. 문 밖의 문.

오, 마음의 깊이로부터 어두운 사슬을 끌며 오는 분노여,

 

영혼을 밝혀 바다에 이르는 길에


나무들 그림자가 서늘할 때 침강되는 내 어두운 바다여.

시간은 잎사귀가 흔들릴 때마다

검게 흔들리고 간간이 튀어 오르는 불꽃들 사이로

 알을 까는 소리가 들렸다.

.....2
  아득하구나, 바람에 에이는 꺽인 오금은

존재의 후미에서 낮은 종소리로 울린다.

 

먼 길로 오는 땅을 일구는 줄기찬 물굽이는 어디에 있는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이 엄연한 것들이

모두 살아 한낮에 가둘 때 씌어지지 않은 문장과

그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하여

 괴로워하는 정적,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

장마는 거칠고도 반짝이는 시간 속에

아무도 막지 못하는 그을린 영혼을 세워놓고

빵을 먹으라 재촉한다.

 

쓸쓸한 적막이 우수를 묻고 휘감아 낮은 산으로 엎드린 광야여!

   ..3
..삶에 대한 사랑이 삶 위로 하나씩 손을 얹을 때에 발목에 차이는 적막함,

섬약한 기도.

무릎을 꿇은 사람들,

 아름다운 벽화.

밑도 끝도 없이 꿈들이 근원으로 흘러갈 때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자식을 위하여 가슴을 제 부리로 찢어 새끼에게 먹여준다는 새,

펠리컨.

.....4
..정신에 깃든 힘. 고뇌 끝에 반짝이는 짙푸른 풀싹들.

보이지 않게 만발한 그 어떤 힘!


.."無人島"........

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그 외로움의 성분에 곰팡이가 끼고 누룩 뜰 때쯤
어느 멀리서는 이기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횃불을 피우고
더 먼 곳에서는 유해들이 배를 깔고 탄식하는 소리로
적막하기 그지없는 밤을 채우기도 하니까


바깥에서, 높은 곳에서, 운명이 비웃으며
우리들에게 약속의 증서를 써주었던 손으로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창문으로부터는 봄에 머물렀던
나뭇가지들이 기어 올라온다,

 

 어리석게도
껍질이 벗겨지는 곳에서 강이 태어나고
기념비적인 죽음도 생겨나리라,

 

서서히 묘역에서는
사랑했지만 이별한 사람이 먹다 남은 빵이 노래에 싸여
굳어지는 것을 본다


- 同詩集에서 -

 

 

.......■ 詩集의 해설


.....- 기억과 망각의 회로,
..................................- 오형업(교수ㆍ문학평론가) -

..박주택 시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환멸과 폐허 의식이다.

 


현실에 대한 환멸은 자기 모멸로 이어져 비극적 세계인식을 강화시키고,

 시의 표면에 여러 겹으로 덧칠된 권태의 풍경을 그려놓는다.

시세계를 도저한 허무주의로 물들이고 있는 이 환멸과 폐허 의식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그것이 낳는 권태의 풍경이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되는지,

 그리고 이 이미지들이 어떻게 변모되어가는지를 묻는 것은

박주택 詩의 비밀을 감지하는 유용한 질문 방식이 될 것이다.
.....- (同詩集 본문중에서 일부,)

 


."겨울 저녁의 시"

사위가 고요한 겨울 저녁 창틈으로 스미는
빙판을 지나온 바람을 받으며, 어느 산골쯤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밤을 견딜 나무들을 떠올렸다


기억에도 집이 있으리라, 내가 나로부터 가장 멀듯이
혹은 내가 나로부터 가장 가깝듯이 그 윙윙거리는
나무들처럼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에 대한 나의 사랑도
추위에 떠는 것들이었으리라,

 

보잘것없이 깜박거리는
움푹 패인 눈으로 잿빛으로 물들인 밤에는 쓸쓸한 거리의
뒷골목에서 운명을 잡아줄 것 같은 불빛에 잠시 젖어
있기도 했을 것이라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들은
제게도 뜻이 있어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 가고
청춘의 우듬지를 흔드는 슬픈 잠 속에서는
서로에게 돌아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창문도 덜컹거리고 있으리라

.- 同詩集에서 -

.- 2006年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대상수상작」(문학사상사) -

 

 

."私有地에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발길을 옮겨
정처 없음을 핑계로 마음의 길에 꽃 지는 줄 몰랐으니
마음 밖의 풍경이 꽃처럼 아름답다


흰구름이 제 몸의 흔적을 지우며 흘러간다


이제 햇빛 아래에 서서
말이 말과 섞이고 풍경과 풍경이 섞이고
자신의 길부터 열기 시작하는 이파리들이
바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본다,

 

사평로
서초에서 양재까지 마음의 극한이 만들어낸 저 아름다운 것들
저 정처 없음의 工作, 소멸의 瞳子들
저녁이 온다면 다시 문을 닫고
그리워하는 자들의 몸의 종소리에 귀를 슬며
나무 그림자가 제 그늘을 거둬 꼿꼿하게 서 있는
저 홀로됨의 완성을 눈물 없이 지켜보리라


.- 同詩集에서-


.

 


"바람을 건너는 법"

시종 바람이 물결쳐 오고
귀가 떫은 밖이 몸 둘 바를 몰라할 때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 비 내리는 새벽에 머물자, 어둠이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날, 공허한 불빛의 시작의
노래에 헛배가 불러 어둠에 단맛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

자정 너머, 이슥한 밤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편지를 쓸 때
안에 깃들어 있던 것들이 미적미적 깨어나 새벽 비에 몸을
맡긴다,

 

사과 꽃잎이 흩날리는 마음의 방
水仙의 그림자가 곰곰이 번지고 어둠에 보태는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霧笛 소리에 귀 기울이면
길의 한가운데가 건너온다,

 

안으로 어둠이 청하는 악수에
부슬부슬 파초 잎은 푸르러 쓸쓸한 목숨에 잇대고
물의 싹트는 소리는 강둑에 서서,
단맛 든 어둠을 빨아먹으며 벼른다


새벽의 고운 비는 내리고 안이 궁금한 밖이 허리를 곧추세워
마음을 들여다보는 동안
빗소리에 귀를 가다듬으며
물관을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山竹들


.- 同詩集에서 -


 

 

..."바람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서 옷가지를 흔드나?
옷가지를 흔든 뒤 왜, 눈보라와 섞이다 공터를 빠져나가는가?


쉼 없이 불어 잠을 흔들고 주름에 가 둥글게
시간을 말아올렸으니 우리 안에 누군가가 서성거리고
우리 또한 누군가의 가슴 속을 서성거리다


서로의 길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 저토록 바람은
언 땅 위를 몰려다니기도 한다


나무들이 체온을 빼앗겨버린 거리
나무들의 환청(幻聽), 나무들의 비명(碑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들이 발자국을 내며
사라져가고 제 몸을 바로 세우는 벽들도 곧 닥칠
어둠에 서로의 몸을 좁힐 때
이 바람 속,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는 눈보라는
도시의 불빛을 휘돌아 우리들 나라에도 흩날린다


그리고 봄이 오고 또다시 겨울이 와서
문득 발자국을 멈춘 그 자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솟아나고 불빛이 떨어뜨린 회억(回憶)이
눈동자를 향해 몰려오면
또 누군가는 귀를 막으며 바람을 맞고 서 있으리라
.- 同詩集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