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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나는 누구인가 / 진제선사

 

 

나는 누구인가 / 진제선사

 

이계묵

 

2013.11.12. 19:56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이며,

부산 해운정사 조실인 진제스님은

 "부모에게서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던고" "참 나던고... 참 나던고..."라는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한글 화두를 내려주었다.

 

이 화두를 붙들고 물이 흐르듯 끊어지지 않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밀고 나간다면 3년 정도면 깨칠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은 진제스님이 깨친 첫번째 화두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이 대중 법회에서 내려주었고,

불가에서 널리 알려진 화두인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삼 서근 이니라”라는 화두도 있다는데,

마삼근(麻三斤) 보다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운 것 같다.)  


 

이 '참 나'에 모든 우주의 진리가 있다.

 '참 나'를 밝혀서 금생에 다 알고 가야 한다.

이 '참 나'를 아는 순간 진리에 도달하여 모든 의문과 갈등에서 벋어나 절대평화와 행복을 누린다.

 

 

진리를 깨치면 우주가 밝아지는 혜안을 얻게되어 억만년의 복락을 누린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도 옷을 갈아 입듯이, 이웃 집을 가듯이 가볍게 떠난다.

맑은 정신 밝은 마음으로 몸을 바꾼다.

 

다음 생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갈 수도 있다고 한다.      

 

 

도를 깨치지 못한 수행자도 화두에 몰입하면 하루가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진의(眞疑)가 발동이 걸리면 밤낮을 모르고 시간이 흐른다.

걸음을 걸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잠을 잘 때도 화두를 놓지 않고,

24시간 화두에 대한 의심을 이어갈 수 있어야 깨칠 수 있다고 한다.

 

 

도를 깨친 후 견성대오하여 선정에 들면 제자리 앉아서 3천년을 갈수 있다고 한다.

시간의 개념이 없지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인 어제 정오 무렵, 70세된 미국의 신학교수(폴 니트?) 부부가

한국 불교의 수행에 대해 알기 위해 선승과 선방을 탐방하는 TV프로를 보았다.

 

 

교수 부부가 대구 동화사 선방을 구경하고,

부산 해운정사에서 진제스님의 법문을 듣고,

선방의 참선에도 참가 하며, 템플 스테이를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지난 겨울,

불교신문에서도 소개된 것을 보고 녹화 테이프를 보여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래 "한국의 선맥"에서도 알수 있듯이

 진제스님은 1967년에 견성하였다고 하니 좀처럼 보기 드문 큰 스님이다.

 

이런 분이 해운정사에 주석한 줄 몰라 부산에 있을 때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언젠가 지방지를 통해 스님의 대담 기사를 보았고,

해운정사에 큰스님 초청 법문을 자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기억해 두었다가 찾아갈 정도의 성의는 없었다.

 

 

언제가 도대체 해운정사가 언떤 절인가 싶어 아내와 함께 절 구경한 적은 있었지만

 법문에 참가해 보지는 못하였다.

난 아직 불교 신자가 될만큼의 발심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어제, TV에서 진제스님의 법문을 들은 직후 온천 목욕을 하면서 나도 꽤 오랫동안 화두를 들어 보았다.

태어나기 이전의 나,

억만년 전의 나,

죽은 이후의 나,

억만년 이후의 나,

 

그 가운데 있는 현재의 나란 결국 같은 것이다.

내가 둘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출생 전의 나가 없었고, 죽음 이후 나가 없어지듯 결국 '현재의 나(我)란 것도 없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너와 내가 둘일 수도 없는 것이다.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의 시간은 일각이나 억만년이나 마찬가지이다.

시간과 공간은 인식체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의 시공은 없는 것이다.

 

삶이란 우주의 일부에서 와서 꿈결처럼 잠깐 세상 구경을 하고

다시 본래의 자리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구누인가"는 결국 지허스님의 화두인 ‘有也無也’와 비슷한 물음인 것 같기도 하다.   

 

(스티븐 호킹 박사에 의하면 "우주는 중력의 법칙과 양자이론에 따라 무(無)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수십억년 전 지구의 원시대기는 메탄, 암모니아, 수증기, 수소, 이산화탄소,

 질소와 같은 기체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바다속 조류의 광합성에 의해 산소 농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생명체가 탄생하고 진화하였을 것이다.

 

 

미생물에서 진화하여 어류와 같은 척추동물이 생겨나고,

척추동물이 육상으로 진출하여 포유류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 가장 진화한 고등 동물이 영장류이다.

수십만년전에 인류의 시원에 해당하는 영장류로 발전하였고

수만년전에 인류의 조상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나의 탄생과 죽음이란 가스에서 와서 다시 가스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기(氣)의 일어남이 탄생이요 기(氣)의 흩어짐이 죽음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나에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묻는다면 가스라고 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본래없는 것(空)'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것이 왜 생겼을까.

 

 

갓난아이 때는 나(我)가 없다.

 

성장하면서 자아의식이 강해지며, 각자가 나름대로의 자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자아는 꽃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 듯 자신의 색깔을 가지며 성장해 간다.

 

유아기 때 순백의 본래 자아에서

이기심과 욕망과 망상으로 덧칠 된 괴물같은 모습의 자아로 성장해 간 것이다.

진아를 찾아 간다는 건 다시 유아기 때의 순백의 자아로 되돌아 가는 것일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태어날 사람 마다 다를 이 다양한 자아중에서 나의 自我는 어떤 모습일까.

그 것이 스님이 내린 과제인 나의 진아(眞我) 찾기이다.

진아를 찾는 것이 곧 견성일 것이다.

견성하면 부처가되어 그 어려운 모든 화두나 선문답도 깨칠 수 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 我자를 써가며, 나의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누구보다 자아의식이 강하였지만 자아는 늘 현실과 충돌하였고, 상처로 남았다.

현실에 영합하기 위해 자아를 묻어버릴 생각만 하였지 나의 자아를 밝혀 볼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근기가 좋은 수행자라도  3년 이상은 전력투구 해야만 깨칠 수가 있고,

 대부분의 출가자들이 실패하고 마는 도전이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어린애 일 때는 완전한 천사였다.

이기심도 욕망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성철스님이 어린이를 좋아하고 어린이가 당신의 친구라고 한 것은

어린이의 심성이 도인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 동화에서 나오는 늑대 소년처럼, 인간이 태어나 무인도나 밀림에서 혼자 자랐다면

생리적인 욕구 이외의 이기심, 사회적 욕망이나 권력에의 의지 같은 건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으로들어가 생리적인 욕구만 다스린다면

본래의 백지 상태로 되돌아 갈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도의 경지에 올라 생사의 경계를 벗어나려면 본능적인 생존 욕구마져 극복해야 한다.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죽음이 왜 그렇게 싫고 두려울까.

맺은 인연을 영원히 단절하는 건 왜 그렇게 고통스러울까.

삶이란 일정 시간 이상은 허용 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이를 받아드리기 어려운 것은 왜일까.

 

 

인간이 미개했던 시절,

종족 보전을 위해 창조의 신이 부여한 맹목적 생존 의지를

고도로 지능이 발달하고 문명화한 오늘 날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왜일까.

수백만년 동안의 진화과정 속에서 DNA속에 뿌리 깊이 밖힌 본능을

인간이 수행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갑자기 공부를 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최고의 선지식이라는 육조 혜능선사의'육조단경'과

성철스님의 법문집 '영원한 자유',

이름난 선승들의 선시와 선문답 책을 몇권 주문하였다.

 

 

어제는 아래의 진제스님의 인터뷰기사를 읽느라 퇴근 시간도 잊어버리고 몰두 하였다.

나는 나이들수록 이쪽 동네의 세계에 이끌리는 그 무엇을 느낀다.

은퇴하면 절집에 들어가 정식으로 공부를 좀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위에서 말한 미국 신학교수는(폴니터) 마지막 날

스님의 화두에 대해 자신이 답을 해보겠다고 시험을 자청하였다.

 

스님이 허허 웃으면서 답해 해보라고 하였다. 그는 "자비"라고 답하였다.

(내가 만약 그 신학자라면 무(無)나 공(空)이라고 답하였을 것 같다.)

 

스님은 한마디로 "거리가 멉니다"라고 잘라 말하였다.

 

 

그 신학자는 카톨릭 신자였지만,

불교의 심오한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깊은 존경의 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진제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진정으로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있었다.

 

 

하지만, 화두를 깨치는 건 수수깨끼를 푸는 것이 아닐 것이다.

수행의 내공이 쌓이고 쌓여 대각에 이를 만큼 차고 넘쳐야만

어느 순간 봇물이 터지듯 화두가 박살 날 것이다.

또, 그래야만 모든 다른 화두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 폴니터 교수는 한 때 카톨릭 수도원에서 수행생활을 20년 정도 하기도 하였고,

 베네수엘라에서 봉사활동을 오랫도안 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수행과 약자를 위한 희생과 봉사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불교나 동양철학에서는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풍요는 근본적인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먼저 진리를 깨친 다음 중생을 계도하는 것이 율법이 정한 순서이다.

하지만, 그 교수는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듯하였다.


 

진제스님은 교수가 떠난 뒤, 비록 그가 카톨릭 신자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재목으로 평가하고,

 그를 가르치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불교가 서양세계에도 소개 되기를 바랐다.

 

그에게 베푼 진제스님의 법문은 영문으로 번역되어 출판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고승들은 사람을 한번 척 보기만해도 근기를 알아 보고 깨칠 그릇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 같다.

 

 

나도 한번 고승 앞에서 예비시험을 보고, 도전해 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전라도 광주의 어느 의사는 왠만한 선승 못지 않게 발심이 강하여 화두를 붙들고 길을 걷다가 받혀서

머리에 혹이 나거나 다른 사람과 부딛힌 것이 여러 수십차례였다고 한다.

 

 

그는 경지가 상당한 수준에 오른 듯,

어느 고승이 그를 만나 보고는 머릴 깍고 자기 밑에 들어 오면

 6개월 내에 견성하도록 해주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의사 노릇을 하며, 속세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은퇴하고 산으로 들어갈지 모른다.  강호가 넓으니 고수도 많은 것 같다.

 

 

 

 

 

 

 

 

 

 

 

 

 

   

               폴니트 초청으로 뉴욕에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