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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음악.연주곡

탱고 음악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뒷골목 음악을 세계의 클래식으로 승화시킨

 

 

 

피아졸라의 반도네온(Bandoneon) 연주를 중심으로 하는 관현악.

 

 

Astor Piazzolla - La Cumparsita

 

 

다음의 것은 제리 무라드가 이끄는 유명한 하모니카 트리오 "하모니켓츠" 의 연주 .

 

 

Harmonicats - La Cumparsita

 

 

 

끝으로 프랑스 태생의 아코디언 명인 마르셀 아졸라의 아코디언을 중심으로하는 연주.

 

 


Marcel Azzola & Yvette Horner

 

 

피아졸라는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라났고 파리에서 내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내가 무대에 오를 때, 사람들은 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을 연주하리라는 걸." 우리가 '탱고'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이름.

가장 유명한 작곡자이며 탁월한 반도네온 주자,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olla).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는 만날 때마다 멱살잡이를 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 바닷가의 도시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기에서 처음 '반도네온'을 손에 잡았고,

카를로스 가르델의 꼬마 통역 겸 반주자가 되어 그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가르델이 카리브 해 순회에 그를 데려가려던 걸 아버지가 막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반도네온 연주자로 크게 주목받지만,

새로운 탱고 음악을 만들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히 거부당했다.

축구팀 보카 주니어스의 팬클럽을 위한 카니발에 자신의 편곡을 선보였다가

 "여기가 콜론 극장이냐"며 끌려 내려오기도 했다.

 

낙담한 그는 탱고를 떠나 클래식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나디아 블랑제의 가르침을 받다,

자신의 진짜 음악은 클럽에서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던 그 '탱고'임을 깨닫는다.

 

 

아스트로 피아졸라

출처 : 구글 이미지

 

 

이렇게 탄생시킨 새로운 탱고(Nuevo Tango)는 이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은 여전히 반발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게 마련이다. 탱고를 빼놓고." 그는 맞섰다.

 

 내 음악이 탱고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극장식 식당 겸 갤러리가 있다(Piazolla Tango).

그가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던 콜론 극장에도 그 숨결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홈베이스였다 사라진 클럽 '676' 근처를 배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피아졸라는 부유하는 존재였고,

하나의 장소로 그를 기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의 고향, 마르 델 플라타로 날아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거기에 아스토르 피아졸라 국제공항이 있다.

 

 

Piazzolla Tango Center of Art and Spectacle

Piazzolla Tango Dinner Show

출처 : piazzolla tango

 

 

'남반구의 파리'는 일 년에 몇 달씩 실제로 '북반구의 파리'를 대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 연주자들의 겨울 휴양지 역할을 해왔고,

덕분에 이 도시엔 고급스러운 공연 예술이 넘쳐흘렀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콜론 극장이다.

 

피아졸라는 일이 없는 낮 시간에 콜론 극장에서 연주되는 바르토크나 스트라빈스키에 매료되었고, 이는 탱고 음악을 변모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어 변신한 탱고는 콜론 극장의 당당한 주역이 되었다.

 

 

2007, 이 극장에 백발과 주름을 훈장처럼 단 연주자와 가수들이 모여들었다.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Café de los Maestros)]로 기록된 역사적인 공연을 위해서였다. [브로크백 마운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영화음악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

1940~50년대 황금기의 탱고를 재현하기 위해 그 시절의 스타들을 불러모았고,

 호라시오 살간, 레오폴도 페데리코 등의 마에스트로들이 열정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세계 3대 극장으로 손꼽히는 남미 최고의 공연장인 콜론극장

출처 : 구글 이미지

 

페론과 에비타의 시절은 탱고의 시대였다.

 

그러나 1955년 군사 쿠데타와 더불어 탱고의 황금기는 처절하게 끝난다.

 

30년간 이어진 군사 독재는 3명 이상의 모임조차 금지시켰고,

페론의 민족주의가 육성시킨 탱고는 더욱 엄격히 탄압되었다.

 

 1983년 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탱고 르네상스'가 피어났다.

 

그러나 그 싹은 이미 자라나고 있었는데,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된 동네 산 텔모(San Telmo)에서였다.

 

이 동네는 그 어두운 시절에도 독특한 보헤미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문을 연 현대 미술관(Buenos Aires Museum of Modern Art)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탱고 뮤지션들과 댄서들도 거점을 마련했다.

 

1969년 탱고 가수 에드문도 리베로는 식민지 시절의 식료품점을 개조한 뮤직홀

 '엘 비에요 알마센(El Viejo Almacén)'을 열어 이 지역 탱고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지금 산 텔모는 보카, 플로리다 스트리트와 더불어 길거리 탱고 댄서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1921311부에노스아이레스주() 마르델플라타에서

 이발사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5년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다 준 반도네온을 연주하면서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각종 라디오 연주회에 출연해 반도네온으로 고전음악을 연주하였고,

 1933년에는 헝가리피아니스트 월다(Bela Wilda)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같은 해 우연히 탱고가수이자 작곡가인 가르델(Carlos Gardel)의 눈에 띄어 그가 만든 영화에 신문팔이 역으로 출연해 직접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1937년 전운이 감돌던 미국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뒤, 반도네온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유명한 음악가들에게 두루 가르침을 받았다.

에드문도 리베로가 문을 연 '엘 비에요 알마센'은 탱고 르네상스의 산실이었다.

출처 : 아메리카 월드 투어


 

1955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밴드를 결성하고 작곡과 연주에 힘쓰던 중

전통적인 탱고음악에 식상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1958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1960년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5중주단(Quinteto Nuevo Tango)을 결성하였다.

 

이 때부터 피아졸라는 자신의 탱고를 새로운 탱고,

즉 누에보 탱고로 부르며 기존의 탱고와는 다른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1974년 유럽으로 건너가 10년간 파리·암스테르담·빈은 물론, 뉴욕·도쿄 등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신의 음악을 널리 알렸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탱고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때로

피아졸라의 새로운 탱고 역시 클래식 음악계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1992크로노스 4중주단이 발표한 피아졸라의 작품집

다섯 개의 탱고 센세이션 Five Tango Sensation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피아졸라를 '탱고의 황제'로 끌어올렸다.

 

 

탱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의 거장으로, 일명 '탱고의 전설'

통한다. 1990파리에서뇌출혈로 쓰러진 뒤, 19927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