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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연합국을 지배한 유대인 자본가들은 2차 대전을 만들었다.



연합국을 지배한 유대인 자본가들은 2차 대전을 만들었다.

    

通知が

2016.03.07. 16:25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9&articleId=323514 


유태인들이 전 유럽사람들로 부터 왕따 당하는 이유는

유럽이 거개가 기독교 국가로서 유태인들을 예수를 죽인자들이라 하여 미워했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우주한 민족이라 여기고 폐쇄적 배타적 생활을 하였고,

유태인들은 돈만 알고 부자가 되어 빚쟁이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언젠가 자기들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간다는 생각으로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국민의식이 희박하고

오직 돈만 알고 살아 가기에 왕따를 당하는 것이었다.

 

세게 2차 대전중에 유태인 600만 학살 사건에 관하여 잘 못된 역가 인식이 있는 것다.

다음을 읽어 보면 이해가 달라질 것이라 본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

(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

(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Holocaust revisionism의 선구자 뽈 라시니에; 그 자신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다.

 

 

홀로코스트 (Holocaust)
 

a. 美-英의 프로파간다


- 이미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유태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

(Haaretz, Nazi Soap Stories Termed 'Invention', February 11, 2005)나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대한 얘기는 고사하더라도

 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서는 주요언론의 反독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감전사(感電死) 당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까지

가미된 기사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가스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45년 2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독일군이 “일시에 수백 명을 전기 처형할 수 있는 특수 콘베어 벨트를 가동했고

시신들은 벨트에 의해 소각로에 옮겨져 몇 초 내에 화장된 뒤 그 재는 근처 양배추 밭의 비료로 쓰였다...”고 보도했다.

 (United Press dispatch from Moscow; Washington D.C. Daily News, February 2, 1945)

 

- 당시 현직 미국 대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Robert Jackson은

 독일군이 일시에 2만 명의 유태인을 자취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새로 발명된” 기계를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lue series, Vol. 16, June 21, 1946)

 

b.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 (아우슈비츠 사망자 400만 명에 근거)


-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舊추모석판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새로 교체된 석판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Former Sorbonne literature professor Robert Faurisson:

"The alleged Hitlerite gas chambers and the alleged genocide of the Jews constitute on-e and the

same historical lie, which has made possible a gigantic financial-political swindle,

 the principal beneficiaries of which are the State of Israel and international Zionism,

and whose principal victims are the German people and the entire Palestinian people."

 

- 유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제랄드 라이트링어(Gerald Reitlinger)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의 숫자를

약 70만으로 추정했다.


좀더 근래에 들어서, 프랑스 홀로코스트 역사가 장-끌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은

아우슈비츠의 총사망자 80만 가운데 63만 명을 유태계로 추정했다.

 (G. 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1971; J. C. Pressac, Le Crematoires d'Auschwitz:

 La Machinerie du meurtre de mass, 1993)

 

-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보수성향 시사지 National Hebdo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 125만(Raul Hilberg 교수) -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호주 출신 revisionist Dr. Frederick Toben

 

c. 사망원인



-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의 운영과 관련된 수만 건의 독일 문서들을 획득했으나

이 가운데 독일 수뇌부가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유태계 역사가들은 독일이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 관련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혹은 독일이 모종의 암호 문서를 통해 대량학살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문서들 가운데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 계획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문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유태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Arthur Butz 교수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다른 수용수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일종의 강제노동인력 집결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노역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병자가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시도를 비롯한 수용소규칙 위반자들에 대한 처형사례를 제외하고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의 창궐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수용소 당국에 의해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Arno Mayer, Why Did the Heavens Not Darken?: The 'Final Solution' in History, 1989)

 

- 전쟁 중반기부터 많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를 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이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했다는 혐의에 반박하기 위해

 피고측의 증거물로 제출된 문서들에서도 드러난다.


한 예로 1942년 12월 28일 친위대 산하의 수용소 관리행정국이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 수용시설들에 하달한 공문은,

“Heinrich Himmler 친위대 총감의 지상명령”이라는 전제 하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의 절대적 감소를 위해

수감자들의 건강 및 영양상태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상부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 A red series, Vol. 4, pp. 833-834)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d. 독가스 사용설


-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하기 위한 독가스실이 가동되었다는 設은

독가스실이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유태인 前수감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이는 전쟁 중 독일이 탄환 절약을 위해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연합군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강제수용소들에서 - 딱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 수감자들이 독가스로 집단 처형되고 있다는 요지의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전단을 자주 살포했다.

또한 같은 내용은 연합군이 운영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 유럽에 방송되었다.

 


아우슈비츠의 한 작업실

 

- Marika Frank라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감되었을 때는

 하루당 최소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처형-화장되고 있었다는 1944년 7월 이었다.


1945년 2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가스실에 대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들었다고 술회했다.

 (Sylvia Rothschild, Voices from the Holocaust, 1981)

 

- 33년간 듀퐁社에서 화공학자로 근무했던 William B. Lindsey 박사는

 1985년 캐나다의 법정에서 독가스로 그 만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technically impossible") 얘기라고 증언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넥에 전시되어 있는 가스실을 현지 조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했다는 방법으로는 지클론-B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The Globe and Mail - Toronto, February 12, 1985)

 

*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주요 수용소들에는

실제로 이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이들의 목적은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죽이기 위해 수용소 운영진을 포함,

수감자들의 의복과, 침구 등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DDT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클론-B는 세계적으로 널리 쓰였던 대표적인 살균소독제였다.

 


프레드 루처

 

- Fred A. Leuchter는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한 가스실 제작 전문가로

 미주리 주(州)교도소의 가스 사형집행실을 도안하고 제작했던 보스턴 출신의 공학자이다.


 1988년 2월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넥 “가스실”에 대한 현장조사를 단행한 그는

 법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현존하는 가스실 및 관련시설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시설들에는 적절한 봉인장치와 환기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시설들이 독가스로 인명을 살상하는데 사용되었다면

 독일인을 포함, 그 시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e Leuchter Report: An Engineering Report on the Alleged Execution Gas Chambers at Auschwitz

, Birkenau and Majdanek, 1988)

 

이반 라게스

 

- 1944년 내내 매일같이 독가스로 살해된 수만 구의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아있다

. 캐나다 캘거리에서 대형화장터를 운영하는 Ivan Lagace는

 1988년 4월 독일계 홀로코스트 연구가 Ernst Zundel 소송 심리에서

 그와 같은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하루당 1만에서 최고는 2만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비상식적(preposterous)”이며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beyond the realm of reality)”이라고 증언했다.

 (Canadian Jewish News - Toronto, April 14, 1988)

 

수감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미공개 사진)

 

e. 국제적십자협회(International Red Cross) 보고서

 

“국제적십자협회 보고서가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전쟁의 말기를 향해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수용소에서 대량 발생한 사망자들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규명해주고 있다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하면;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후 독일의 수송체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수용소들은 거의 식량을 보급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사자(餓死者)의 숫자는 급증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정부는 1945년 2월 1일

 이와 같은 사실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통보해 왔습니다...


 1945년 3월, 적십자협회 회장은

 독일 친위대의 칼텐브루너 장군과 만나 문제를 논의했고

양자의 합의 하에 ICRC는 구호품을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ICRC 대리인을 수용소들에 상주시키게 되었습니다...’

 

Ernst Kaltenbrunner, 1946년 처형; 마지막 유언, "독일에게 행운을!"

 

수용소들에 대한 식량보급이 중단된 원인으로

독일 교통수송망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을 지목한 적십자는

수용소 수감자들의 안위를 위해 1944년 3월 15일,

‘연합군의 야만적인 폭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2일 ICRC는 수송체계의 붕괴로 인해

전 독일국민이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우려를

독일 외무성에 전달했다.


영양실조와 기아, 이에 더해 의약품이 극도로 희귀했던 전쟁말기,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만연했다는 사실은

해방된 수용소들에서 연합군 병사들이 발견한 많은 시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실제로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강제수용소들은 인근 도시들에서 발생한 폭격, 질병, 기아로 인한

독일인 사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발견한 시체더미에는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 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 적십자위원으로 일했던 스위스 태생의 Maurice Rossel 박사는

Serge Lanzmann과의 1993년 인터뷰에서

 아우슈비츠를 예고 없이 시찰한 그는

 그곳에서 가스실이나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으며

시체를 태우는 냄새도 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Theresienstadt 수용소에 그가 목격한 것은 좋은 옷을 입은 부유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Richard E. Harwood, Did Six Million Really Die?, 1988)

 

*1984년 소련이 최초로 공개한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토대로 작성된

 국제적십자협회의 해당년도 12월 31일자 감사보고서에는

 독일이 전쟁기간(1939-1945) 동안 운영했던 모든 강제수용소들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수

(모든 국적과 사망원인 포함)가 282,077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는 53,633 명이다.

 

 

 

 

f. 2차대전 前後 세계 유태인 인구

 

 World Almanac, 1929 - 15,630,000 (p.727)

 

 World Almanac, 1933 - 15,316,359 (p.419)

 

 World Almanac, 1936 - 15,753,633 (p.748)

 

 미국유태인위원회(AJC, Bureau of the Synagogue Council), 1939 - 15,600,000

 

 World Almanac, 1940 - 15,319,359 (p.129)

 

 World Almanac, 1941 - 15,748,091 (p.510)

 

 World Almanac, 1947 - 15,690,000 (p.748)

 

 미국 이민귀화국 (INS), 1950 - 15,713,638 (Appendix VII, 'Statistics on Religious Affiliation';

 Report to U.S. Senate Judiciary Committee, 1950)

 

Jews In Europe - 1938:
8,039,608 - 1948: 9,372,668

 

2000년, 유태계인 미국의 노먼 핑클슈타인(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史料)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실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뻔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홀로코스트 업계가 매일같이 만들어 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Anne Frank
그녀가 쓴 일기로 인해 안네 프랑크는

아마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네와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4년 9월, 1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프랑크는

 몇 주 뒤 Bergen-Belsen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남아 있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 병원에 입원 중 병상에서 아우슈비츠에 진주한 소련군을 맞았다.

그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 병원

- 아우슈비츠 수용자인 유대인을 치료해주는 의사 -

 

아우슈비츠의 간호원들

 

만약 독일의 국가정책이 유태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이야기는 독일이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쟁 전 유태인에 대한 독일정부의 주안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발발 직후에는 게토에,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미국 revisionist Michael Hoffman과 Canada의 Ernst Zundel

 

관련 링크:

 

 http://www.zundelsite.org/

             

 http://www.revisionist.com

 

 http://www.ihr.org

 

 http://www.adelaideinstitute.org/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03/0200000000AKR20151103152300009.HTML?input=1179m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유태인이 장악한 소련은

3천만에서 5천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

폴란드, 헝가리 국민들을 학살했다.

 

라트비아 1941년

"폴란드가 나치보다 유대인 많이 죽였다" 폴란드계 학자 논란

고국 폴란드서 "훈장 박탈 고려"·"기소해야" 반발 거세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폴란드계 미국인 역사학자가 "폴란드가 나치보다 유대인을 더 많이 죽였다"고 주장해

 그의 고국 폴란드가 분노로 들끓고 있다.



얀 그로스 프린스턴대 교수 (AFP=연합뉴스)

얀 그로스 프린스턴대 교수 (AFP=연합뉴스)



2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얀 그로스(68) 교수는

최근 독일 일간 디 벨트에 중동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경계심을 보이는 폴란드에 대해 이야기하며

"폴란드인의 끔찍한 얼굴은 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폴란드인은 나치에 저항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지만,

사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보다 유대인을 더 많이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이 알려지자 폴란드에서는 그로스 교수가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기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등 반발이 커지고 있다.


폴란드 대통령 훈장위원회는 1996년

그로스 교수에게 수여한 훈장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폴란드 언론은 전했다.

폴란드 외무부 대변인은 그로스 교수의 이 발언에 대해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고,

해로우며 폴란드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독일 주재 폴란드 대사도 디 벨트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폴란드 검찰 관계자는

그로스 교수의 발언이 모욕적이라고 주장하는 고소가 100건 접수됐다고 말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로스 교수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숙청과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으로 1961년 폴란드를 떠났다.

그로스 교수가 고국에서 역사 문제로 비난을 자초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1년 저서 '이웃들'에서

 1941년 독일 점령 당시 폴란드 마을 예드바브네에서 벌어진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고찰하면서,

당시 폴란드 유대인 340∼1천500명이

점령군이 아닌 비유대인(기독교도) 이웃들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에도 폴란드에서 그의 주장이 부당하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예드바브네 학살에 대한 의회의 조사를 거쳐

결국 당시 폴란드 대통령이 유대인들에게 공식으로 사과한 바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AP=연합뉴스)
아우슈비츠 수용소 (AP=연합뉴스)


mihee@yna.co.kr


독일 방송, 홀로코스트가 거짓 임을 폭로 

 

역사적 진실규명 보도로 인해 전 독일이 충격에 빠지다

 

by Slad

 

 

"하버벡 여사는 종전 후에 그녀의 고향으로부터 인종적으로 제거되었다.

이는 다른 수백만명의 독일인이 함께 겪은 일이며

유태인이 그녀의 조국, 독일을 통치하면서 부터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심리조작과 공포를 조장해서 거대한 정신적 수용소를 만든 일이다."

 
“Ms Haverbeck was ethnically cleansed from her home at the end of the war along

 with millions of other Germans and has been victimised ever since by the Jews

who run her country like a psychological gulag through mind-control and fear.”

 

 

 

  


                         유태대학살,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최대의 기만적 소동이다! ~ 홀로팍스~ 


 


출처 : endzog

 

2차대전 전후에 독일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는

역사가인 우르술라 하버벡 여사가 티비방송에서 도전적인 폭로 인터뷰를 한 내용이다.

그녀는 내놓고 현대 유럽사회주의 국가의 기본이념을 이루는 최악의 거짓을 폭로하고 부인했던 것이다.

 

그녀는 장년의 역사가로서,

현대 서방 정치정당 이념의 도덕적 근거에 의의를 제기하고,

또 학계와 연구계의 기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들이 종전 후에 유태대학살이라는 꾸며진 이야기를 어떻게 사회와 정치의 이념으로 바꾸었는 지를 지적했다.

독일 티비방송국은 영국 비비씨가 유태대학살을 보도한데 바로 이어 추종하는 방송을 돌렸던 것이다.

 

Source: endzog In one of the most amazing events to occur in occupied Germany since the second

 world war Historian Ursula Haverbeck made history in a defiant interview in which she openly

 trashed the very basis of the lie upon which all modern European social democratic states have been built.

The elderly historian, brought into question the moral integrity of all Western political parties

 and academic institutions, exposing the official account of the second world war and the Holocaust

for the lie it was on a television station which is the second largest in the world after Britain’s BBC.

 

독일 주요 티비 방송이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보도하자 사회적 대지진이 발생했다!

 

holohoax

 

방송은 메르켈 수상이 유태 마피아 소속이라고 내놓고 폭로했다!

 

수백만명의 독일인이 집의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다가,

방송에서 2차대전에 관한 진실을 보도하는 걸 보다 놀라자빠졌다.


방송은 자칫하면 아예 방송국 자체를 폐쇄당할만한 놀라운 보도를 냈는데,

독일이 유태대학살을 저질렀다는 역사적이고

또 현대 독일사회의 이념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꾸며낸 거짓이라고 폭로했던 것이다.


이런 유태학살의 거짓이념은 독일 이전 수도 본에 자리잡은 유태인 집단이 꾸며낸 짓이라 했다.

그들은 본에서 초국적의 금권력을 형성하고서

이런 끔찍한 거짓을 만들어서 독일을 공포속에 통치할 계략을 꾸민 것이다.

 

Millions of surprised Germans sat on the edges of their sofas

 and gasped as for the first time in their lives the truth about the second world war was brought into

their living rooms as the second largest broadcaster in the world took the risk of being shut down for the illegal

offense of transmitting Holocaust denial

by the criminal transnational Jewish financial occupation regime in Bonn.

 
우르술라 하버벡 여사의 역사적인 인터뷰, 영어자막

 

 Ursula Haverbeck: The Panorama Interview, with English Subtitles

 

This 49' video was published by KZ Kladderadatsch on May 14, 2015:

 

https://www.youtube.com/watch?v=WPa_QeV9KDM

 

 

일어나라, 나의 국민이여, 말을 타며 기수를 잡아라! - 우르술라 하버벡

 

편집자 논평 Publisher's comments:

 

2015년에 우르술라 하버벡 여사는 역사적인 도전적 인터뷰를 내놨다.

그것은 우리시대에 독일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정치적 이념을

그녀가 전면부인하는 유태학살의 허구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독일 방송에서!

 

역대급 사회적지진이 발생한 순간이었다!

 

In 2015, Ursula Haverbeck made history in a defiant interview in which she threw down the gauntlet to the biggest

 taboo of our times. Revisionism . . . on German TV! A seismic event.

 

Interviewer: Robert Bongen. (이하는 우르술라 하버벡 여사 인터뷰 초록, 편집자)

 

 

-이하 길어서 생략, 원문보기는

 

http://blog.daum.net/petercskim

 

    

 

 <참고 기사>

 

[펌] 한 독일인이 본 히틀러 시대

 

by 텐구아레스 posted Aug 24, 2013



제3제국에서의 삶, 그리고 당시와 현재의 정치적 상황
 
 ReinholdLeidenfront.jpg
by Dipl. Ing. REINHOLD LEIDENFROST


(This speech appeared in the weekly newspaper, Der Schlesier, July 26-August 16th, 2002.)


http://www.thenewsturmer.com/onlyGerman/Autobahn/Lifeinthe.htm

 


제가 히틀러 시대의 삶이 진정 어떠했는지를 여러분께 알려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대중매체는 의도적으로 그 시대에 대해 부정직합니다.
 
나는 아이가 일곱인 한 튜링지아 농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난 히틀러 시대의 독일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나는 공인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튜링지아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습니다.

아버지가 열차사고로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장학금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장학금과 생활비를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시에 나같이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장학금으로 서부 독일에서 공부를 마쳤는데 그래도 생활비는 내가 벌었습니다.


 학교를 나온 뒤 6년간의 사회생활을 거쳐

나는 서부 독일에 있는 한 큰 회사의 엔지니어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 내 회사를 차렸습니다.
기술 관련 회사였는데 우리가 만든 발명품들과 신기술들은

독일인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감지되고 있는 쇠락과 계속되는 실패는

 전후 정치체제와 이에 종속된 정치인들 탓입니다.

 전후의 서독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다 살아 돌아온 젊은이들 말입니다.

이들과 함께 조국의 남자와 여자들이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이는 많지만 경험이 풍부한 기업가, 중간 관리자들 또한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 분들은 매일같이 미국과 영국의 폭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킨 분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동포애를 바탕으로 독일을 재건했습니다.
 
서독연방(Federal Republic of W. Germany)은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우리에게 제시된 임시적 형태의 국가였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제도권의 정치인들은, 색깔이 무엇이든,

이 위헌적인 한시적 체제를 항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어떤 정치인도 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습니다.


독일제국과 이의 정통성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단지 기능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독일 국민이 1933년에 선출한 지도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연합국은 황당무계한 뉴렘버그 전범재판이란 것을 만들어 그들을 모조리 처형했습니다!
 
전쟁은 독일민족공동체의 정신을 죽이지 못했다
 
여기 한 예가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Ruhr의 산업지역은 완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그나마 남아있던 기계들을 다 뜯어갔습니다.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요. 아시겠지만 소련도 동부에서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노조가

영국이 1만 톤짜리 초대형 프레스 기계를 뜯어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총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 프레스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컸던 프레스로 우리에게 경제적 우위를 부여했던 기계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노조의 지도자들이 진정한 독일인이었다는 겁니다.

이 기계를 빼앗기고 안빼앗기고에 수많은 일자리와 민족 보존의 문제가 걸려있었습니다.


이 파업투쟁 대회에는 Ruhr지역의 기업계 대표들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싸워서 이 기계를 지키자는 노조 지도자들의 열띤 연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한 기업가가 발언권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전쟁 동안 우리가 그 기계를 써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는가.

그러니 그 기계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았다.

그냥 가져가라고 해라. 대신 우리가 힘과 지혜를 모아 새것을 만들자.

더 크고 나은 것으로!” 순간 대회장에 새로운 분위기가 찾아들었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한마음이 되어 “옳소, 그렇게 합시다! 옳소!”를 외쳤습니다.

그 기업가의 말이 노사를 떠나 독일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렇게 독일민족공동체 정신은 독일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에서 노동자와 사용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란 두개의 적에 맞서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역자:자본주의는 사유재산권에 기초한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에 기초한 금융자본의 지배, 억압,수탈을 의미함; 공산주의는 covert 유대인 제국주의)
 
결국 영국인들이 그 낡은 기계를 가져갔습니다.

아마 지금 영국 어디선가 녹슬고 있겠지요.

그리하여 당시 우리 젊은 기술자들은 그 기업가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가장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새 프레스 기계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 기계들은 서독에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영국, 미국 등의 전승국들을 앞지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선 그때까지 기계 가동을 기름으로 돌리는 벨트-트랜스미션에 의존하고 있었고

공장설비들도 모두 몇십년씩 낙후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우리 독일에선 이미 전기로 기계들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우리가 전후 영국을 앞지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영국 자동차 회사들이 결국 다 독일인들에게 인수된 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똑똑하고 효율적이니 자본주의 영국이 독일을 그리 미워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유대국제금융은 근면하고 용감한 독일인들을 쳐부수라고 전 세계를 2차대전에 몰아넣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에선 노동자와 사용자가 하나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원칙이 엄수되었습니다.

따라서 불순한 정치적 목표를 위해 양측을 이간질하려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들에선 정반대입니다.
 
저도 사업을 하면서 이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원칙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좋은 발명품이 있다 해도 노동자가 없으면 사장 혼자 어떻게 이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기술을 개발하고 현명한 사업적 결정들을 내려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용자 없이

노동자들이 어떻게 먹고 살겠습니까.

양자의 관계는 이렇게 명약관화한 것입니다.
 
민족의식, 사회공동체 의식이 있는 사용자와, 그에게 고용된 노동자는 엄연히 한 팀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노사가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일한 것과,

유대자본의 금본위제에서 탈피한 것이 제3제국 부흥의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랬기 때문에 독일이 베르사유 평화체제가 남긴 상처와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1차대전의 전승국들은 더 이상 독일을 약탈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있건 없건, 높건 낮건, 민족의식, 동포애, 애국심을 근간으로 국민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국가를 꾸려가야 한다는게 히틀러식 사회주의, 즉 복스게마인샤프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훌륭한 개념은 혐오의 대상이거나 누구도 거들떠 볼 생각을 안 합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겐 민족의식, 동포애와 같은 개념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서방 유대인 자본가들의 하수인입니다.


이들은 “더 많은 합병이 있어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식의 거짓말로 국민을 기만합니다


.이제 독일인들의 일자리를 없애는 일도 이 정치인들이 섬기는 자본가들이 결정합니다.

그러니 이 허구적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사의 갈등은 만성화가 되었습니다.

독일의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서방 자본가들의 축구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와 글로벌리즘의 요체이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이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소위 “바이마르 민주공화국” 시절엔 실업자가 6,7백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뒤 2년 반 만에 이들의 대부분은 일자리를 되찾았고

5년 뒤 독일에선 실업자가 사라졌습니다.

히틀러의 적들은 오늘날 그가 오직 독일의 재무장을 통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군수산업이 독일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오직 1939년에 이르러서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그 해 말입니다. 여기 수치가 있습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방위산업이 독일 GDP에서 차지했던 비중
 
1933/34 RM 1.9 billion(십억) = 4%
1934/35 RM 1.9 billion = 4%
1935/36 RM 4 billion = 7%
1936/37 RM 5.8 billion = 9%
1937/38 RM 8.2 billion = 11%
1938/39 RM 18.4 billion = 22%
 
위의 수치들은 전쟁을 일으킬 의도로 재무장을 해서

독일이 대공황에서 탈출했다는 연합국 사람들의 주장이 거짓말이거나 무지의 소산임을 입증해줍니다.

 “바이마르 민주공화국” 시절의 참담한 경제적 상황은 1차대전 패전과 함께 독일에 찾아들었습니다.

전쟁 말기 영국은 독일을 완전히 둘러싸고 해상을 봉쇄했었습니다.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말입니다.
 
H.C. Peterson 교수는 “전쟁을 위한 프로파간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918년까지 763만 명의 독일인들이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한 영양실조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약자나 여자, 아이들, 즉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Charles C. Tansill은 또 “전쟁으로 향하는 뒷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의 휴전협정 이후에도 해상봉쇄는 수개월간 계속되었다.

 연합국 정부들은 수백만의 독일인들이 굶주리고 있었음에도 그 어떤 식량도 독일에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이미 그때 그들은 독일민족을 죽여 없애기로 결정했다
 
영국 해군성 장관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총력을 다 해 독일의 여자와 아이들을 굶겨 죽이려 했다.”
 
그때 이미 영국의 비중 있는 정치인이 되어있었던 처칠은 런던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이 향후50년 내에 무역 강국으로 재부상 한다면 1차대전에서 우리는 헛 싸움을 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대한 증오심의 결정체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당시 돈 1천억 마르크 상당의 금 보유고를 승전국들에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이겼던 1871년 보불전쟁에서 우리가 프랑스에게 요구했던 것은

 원래 우리 땅이었던 알사스 로렌과 50억 프랑뿐이었습니다.
 
독일이 말도 안 되는 이 “배상금”을 낼 돈이 없자

프랑스는 Ruhr와 라인란트를 강점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석탄을 프랑스로 빼돌렸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몰상식한 액수의 배상금을 금으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의 금 보유고는 바닥이 났습니다.


 그러니 마르크화가 뒷받침도 없이 공중에 붕 떠버린 것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독일 사람들의 저축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렸습니다.

 그때 당시 빵 한 조각이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20억 마르크였습니다.


 이 인플레이션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버터 1파운드가 2조 마르크였습니다.

한마디로 지폐가 돈이 아니라 그저 종이쪽지일 뿐이었습니다.

이 인플레이션은 1924년 신 지폐의 등장과 가치 조정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도 실업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적인 생필품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식량은 더 그랬습니다.
 
독일인들에게 “바이마르 민주공화국” 하면 떠오르는 것은

실업과 굶주림, 난방도 없이 지내야 하는 겨울, 그리고 절망뿐이었습니다.


 살기가 힘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시 나라 전체에 퍼져 있었던 빈곤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이 모두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때 독일에 자그마치 32개 정당들이 난립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의 태생적 결함에도 책임이 있었던 거지요.

 결국 비상수단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등신 같은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런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해결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나는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남았나?
 
매일같이 실업자 대군이 도시를 빠져나가 시골로 향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릴 음식을 구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도시의 실업자들은 농장을 찾아다니며 먹을 것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그들은 추수된 감자밭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혹시 거둬가지 않은 감자가 한두 톨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말이죠.

일자리가 있는 노동자들도 겨울에 석탄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산림감시원에게 1마르크를 주고 “벌목허가증”이란 것을 받았습니다.

 이 허가증이 있으면 숲속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거나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땔감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이랬기에 당시 나라 여기저기서 숲들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우리나라의 숲들이 항상 현재와 같았던 게 아닙니다.

손수레를 미는 사람들의 행렬이 숲으로 향하는 광경은 겨울이 다가오면 매일같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서방의 위선적인 유대인 지식인이나 뭘 모르는 언론인, 식자들은 바이마르 시대가

 “독일 민주주의의 황금기”였다고 나불댑니다.


근데 그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황금기였다는 말입니까?

 독일을 움켜쥐고 있었던 유대인 은행가들과 그들의 정상배 하수인들을 위한 황금기였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당시 굶어죽고 얼어 죽었던 수많은 독일 사람들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자 조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민들을 못살게 구는 공산당
 
튜링지아의 농민들은 거의 다 소작농이었습니다.

재산은 없고 빛만 가득한 농가들이 많았죠.

 그럼에도 빨갱이들은 이들에게 콩알만한 땅이 있다하여 지주로 여기며 적대시했습니다.

우리 집도 이런 빨갱이들 무리에 여러 번 약탈을 당했습니다.


도둑놈 강도 주제에 이들은 아주 거만하고 무례했습니다.

 우리의 상전이라도 되는 것 마냥 식탁에 음식을 차리라고 명령하는 놈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주면 집에 불을 지를 테니 있는 거 다 줘서 빨리 내보내자고.”

 실제로 빨갱이들이 불을 질러 오갈데가 없어진 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는 매일같이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는 도저히 계속 살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얼마 뒤 히틀러가 돌격병대(S.A.)를 창설하자 빨갱이들이 농촌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러다가 1933년 1월30일 히틀러가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했습니다.

 그가 넘겨받은 소위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독일은 완전 파산상태였습니다.

 승전국들에 털릴 대로 털려 국고도 텅 비어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는 우리에게“빵과 일자리”를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현재의 “독일 땅에 세워진 제2차 민주공화국”의 거짓말하는 정치인들과는 달리 말씀입니다.

우리는 히틀러가 이 정치인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독일의 경제발전을 위해 유대인 국제자본가들에 손을 벌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손을 벌린다는 것이 이들의 이자-노예 시스템에 빠지게 되는 것이란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복스이코노미”는 자본주의 하에서 부채에 찌들게 된 현 시스템과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복스이코노미”를 실현하기 위해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인 발상들을 도입했습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방법들로 국가경제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이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물론 해외 자본가들은 이 모두에 심통이 잔뜩 나있었죠.

 불행히도 이 “복스이코노미”란 것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은 히틀러가 얼마나 독창적인 방법들로 경제를 일으켰는지 꼭 아셔야 합니다.

집권 후 히틀러 정부는 먼저 “겨울나기 기부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이 캠페인의 구호는 “그 누구도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을 것이다!”였습니다.
 
정부는 성금을 모아 도시와 산악지역의 빈민들을 구제했다
 
이 캠페인은 1등급의 사회운동이었고 또 크게 성공했습니다.

해당지역의 빈민들도 그냥 기부금과 구호품을 받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손재주를 살려 목각제품과 유리제품 등을 만들어 기부자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이것을 받은 기부자들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증표로 제품을 내보이며 자랑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부 캠페인에 참여했죠.

또 빈민들이 만든 제품이 우수해 정식으로 시장이 형성되는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집권 초 히틀러 정부는 수백만의 실업자들에게 빵과 일자리를 제공하고

동시에 독일의 도로망을 현대화하기 위해 세계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 건설에 나섰습니다.


오직 독일에서 나는 자재들만 사용해서 말입니다.

아스팔트는 기름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기름이 안 나오니 외국에서 수입해올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우리에겐 달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콘크리트 판들입니다.

다진 흙 위에 이 콘크리트 판들을 깐 겁니다.

아우토반 건설에 들어간 자재들은 모두 자급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토트 박사와 도프뮬러 박사와 같은 인재들이 큰 역할을 했죠.
 
아우토반에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게 된 독일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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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업계에서 제시한 한 대당 가격은1350-1600 제국마르크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대중보급형 자동차의 개발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는 이 일을 포르쉐 박사에게 맡겼고

여기서 탄생하게 된 게 풍댕이차 폭스바겐입니다.


 여러 가지 신기술이 들어간 차였지만 값은 세계에서 가장 저렴했죠.

 당시 이 차의 가격은 995제국마르크였습니다.

할부로 구입할 수도 있었죠.

 폭스바겐이란 이름은 히틀러가 직접 지은 것입니다.


 2차대전에서의 패전도 히틀러가 지은 이 폭스바겐이란 이름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거리에서 폭스바겐을 볼 때마다 이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유대국제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독일은 자급이 가능한 재료들로 타이어를 만들었습니다.


석탄을 중합(polymerization)시켜 인조고무를 만들었죠.

 메르세부르크에 있는 부나공장이 바로 이를 위해 세워진 공장입니다.

독일산 인조고무는 진짜 고무보다 더 강하고 질겼습니다.
 
차가 달릴려면 또 가솔린이 필요한데 달러가 없어 우리는 기름을 수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의적인 우리 독일인들이 만들어낸 게 석탄에서 추출해 만든 합성연료입니다.

역시 메르세부르크에 있는 류나공장이 이 작업을 담당했습니다

. 남아공에선 아직까지 이 기술로 연료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화학자인 피슈너 박사와 트로피시 박사의 작품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은 또 옷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면화 역시 달러를 주고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품목이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가 대체 섬유의 연구개발을 지시해서 탄생한 게 전보다 실용성이 강화된 독일산 레이온 섬유입니다.


 이 섬유를 생산했던 공장들은 아직까지 슈워르차, 튀링겐에 남아 있습니다.

독일산 양모를 섞어 만든 이 레이온은 입기에 아주 편한 옷감을 제공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강요된 2차대전에서 패한 뒤 미국은 전리품으로 이 독일산 레이온의 특허를 훔쳐갔습니다.

그 뒤로 미국은 달러를 받고 우리에게 레이온 의류를 팔았습니다.
 
독일 철강업계는 부족한 철광석을 어떻게 확보했나?
 
달러가 없어 질 좋은 스웨덴산 철광석을 사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산 철광석의 함철량은 81-85%였습니다.


 그래서 또 고안된 게 “크룹-렌 과정”이란 기술입니다.

이 기술 덕분에 독일 철강업계는 함철량이 23-26% 밖에 안되는 국산 철광석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뭐든 자급자족 형태로 문제들을 척척 해결해 나가다보니

영국과 미국의 유대인 금융가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죠.


그러니 저들이 ‘독일을 이대로 가만 놔두면 안되겠다’,

또 ‘독일도 독일이지만 다른 나라들이

독일의 본을 따른다면 어찌 되겠는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겝니다.
 
히틀러는 또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주택과 아파트들을 건축했습니다.

노동자 가족들은 정부로부터 10년 만기로 넉넉한 융자금을 받아 널찍한 아파트나 주택에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 만약 신혼부부가 애 하나를 낳으면 융자금의 25프로가 탕감되었습니다.

그러니 애를 넷 낳으면 갚을 돈이 없어지는 것이었죠.


 이에 대한 히틀러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출산을 장려하여 더 많은 인구가 경제에 유입되게 하는 것이 융자금 회수보다

 국민소득과 세수 증대에 더 큰 기여를 할 것이다.

’ 히틀러가 지은 집들은 생활의 질과 위생적인 환경을 고려해 잘 만들어진 집들이었습니다.


 출범 후 1933년 말까지 히틀러 정부는 이런 집을 202,119채 신축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4년 동안 모두 1,458,128채의 집들이 지어졌습니다.
 
또 히틀러 정부는 노동자에게 부과되는 월세가 26제국마르크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노동자 평균소득의 8분의1정도 수준이었습니다.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해선 45제국마르크라는 상한선이 설정되었죠.

그러니 지금의 월세 수준이 어떤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히틀러의 독일에서 금융위기와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모두가 히틀러의 탁월한 영도력 아래 근면하고 창의적인 우리 독일민족이 이루어낸 업적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과를 거두다보니 자연히 자신감도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유대인 자본가들로부터 자유로운, 말 그대로 자주독립 국가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히틀러 밑에서 이런 나라였다는 점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나는 농촌 출신입니다.

그러니 히틀러가 농촌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920년대의 大인플레이션으로 농가들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때 당시 독일 내부와 외부의 유대인 투기꾼들이 몰려들어 엄청난 이득을 챙겼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 독일에 가면 고작 몇 달러로 농장이나 공장 하나를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독일에 몰려왔습니다.

또 이때 당시 은행 빛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농장을 빼앗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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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농민은 독일에서 가장 저소득층이었는데 히틀러는 이들을 위해 집도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1933년 한 해에만17,611채가, 그리고 그 후 3년 동안 모두 91,000채의 농민주택이 신축되었습니다.

 이렇게 히틀러가 취한 다 방면의 조치들로 독일 농민들의 경제상황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국제무역

 
집권 후 히틀러가 금본위제를 폐지했기 때문에 독일은 물물교환 체제로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진행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영국식 금융체제로부터 자유로웠던 국가들은 이와 같은 거래방식에 기꺼이 응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물물교환 방식으로 스페인, 포르투갈과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같은

 남미 국가들에 기계를 수출했고 철광석, 커피, 열대과일 등을 교역국들로부터 수입했습니다.

 우리가 공정성을 철저히 유지했기에 이들과의 무역에선 그 어떤 잡음이나 마찰도 없었습니다.

 이들 나라들은 아직까지 독일의 좋은 친구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수출한 상품들은 달러로 환산되지 않았기에 뉴욕 월가의 투기꾼들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달러를 쓰지 않는 무역 방법은

영국과 미국의 유대금융세력에겐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로선 어떻게든 독일을 파괴해야 했습니다.
 
독일에 대한 최초의 선전포고는 히틀러가 집권하고 3주 후에 유대인세계의회에 의해 행해졌습니다


. 이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1933년 3월24일자 런던 데일리익스프레스에 의해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다음은 이 기사의 일부입니다:

“전 세계1400만 유대인은 동포를 핍박하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세계 유대인은 중세시대와 같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은행가든, 상점주든, 행상꾼이든 모든 유대인이 생업을 중단하고

히틀러의 독일에 맞선 聖戰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세계 유대인은 독일에 사는 그들의 동포들이 걱정돼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 게 아니었습니다.

 히틀러가 금 대신 오로지 독일국민의 생산성에 의해 뒷받침되는 통화체제를 도입하자

 유대인 은행가 하이에나들은 독일의 경제를 더 이상 수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세계의회의 선전포고 이틀 후 독일의 시온주의연합은

 미국의 유대인 사회 지도자들에게 이런 텔레그램을 보냈습니다.

“反독일 흑색선전을 목적으로 독일 내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을 왜곡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라.

 우리는 유대인이 그들이 거주하는 국가 외의

그 어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시도에도 반대한다.

 당신들의 반독일 프로파간다는 오직 독일 내 유대인들의 민권과 경제적 위치를 위협할 뿐이다.”
 
이런 독일 유대인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국제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들은 독일에 대한 비방, 거짓말 공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험악해져갔습니다.


소위 ‘중립국’이라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7년 10월 5일 시카고 연설에서 독일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무역봉쇄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위선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이 전쟁에 관련되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 하에서도 나는 평화노선을 견지할 것입니다.

 미국은 전쟁을 증오합니다.

미국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駐美 폴란드 대사였던 제르지 포톡키는

 駐佛 미국 대사 윌리엄 뷸릿과의 1938년 11월 21일 회견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뷸릿이 얘기하길, “독일과의 전쟁에 6년이 소요될 것이며 루즈벨트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을 참전시킬 것이다.”

또 포톡키 대사는 뷸릿이 독일에 대해 극도의 감정과 증오심을 드러냈다고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포레스탈 미국 해군성 장관은 1945년 12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조 케네디와 골프를 쳤다...

케네디의 시각은 독일이 소련과의 일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으나,

만약 1939년 여름 폴란드 문제와 관련하여 루즈벨트와 뷸릿의 재촉만 아니었다면

영국이 독일과 개전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워싱턴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간섭과 압력만 아니었다면

프랑스나 영국이 폴란드의 국경문제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다...

그에 따르면 체임벌린은 미국과 국제유대인이 영국을 독일과의 전쟁에 몰아넣었다는 심정을 피력했다고 한다.”
 
1938년 유대인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를바없는 행위를 여러 차례 되풀이 했습니다.

미국의 언론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유대인은 미국인들에게 독일 상품을 보이콧하라고 선동했습니다.


또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독일 상선들에 폭탄을 장치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운동 지도자 빌헬름 구스틀로프와 파리주재 독일 외교관 폰 라쓰가 유대인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독일에 대한 이러한 적대적 행위들은

 결국 독일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상점들에 대한 보복적 차원의 보이콧으로 이어졌습니다.


 먼저 선전포고를 한쪽도 유대인이었고

 결국 연합국들을 독일과의 전쟁으로 몰아넣은 자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유대인을 적국의 시민으로 간주하여 전시에 이들을 통제, 감시 할 수 있도록

 게토나 수용소에 구금시켰던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독일 유대인의 안위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반독일 흑색선전을 중단해달라는 여러 차례에 걸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의 유대인들은 총통과 제3제국에 대해 끊임없이 비방과 중상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있어 그들은 지극히 추잡한 묘사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독일이 1945년 5월8일 무조건 항복했을 때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독일인은 그 후로 그들의 손아귀 안에 머물러왔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후대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정치인들과 매스미디어가 이들에게 진실을 얘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40년 7월 19일 제국의회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영국과 친구가 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데 대해 나는 아직도 매우 슬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영국이 친구가 되었더라면 두 나라 국민들에겐 큰 축복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히틀러는 특별열차를 타고 자주 베를린과 뮌헨을 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열차가 보일 때마다 들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일을 멈추고 손을 흔들거나 독일식 경례를 했습니다.

 히틀러는 우리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내 아버지는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6개월에 한 번씩 재무부가 임명한 세리에게 토지세를 냈습니다.

 그 세리의 집이 우리 집에서 150미터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세금을 내러 갈 때마다 당신이 소유했던 가장 좋은 양복을 입고 가셨습니다.

그에게 조국에 세금을 내는 일은 명예롭고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이런 태도와 요즘 정치인들이 그들의 세금 문제와 관련하여 보이는 추태들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히틀러는 폭력이 아니라 민주적 선거에 의해 집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국민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바이마르 시대에 경찰들이 썼던 고무곤봉도 그가 없앴습니다.

그 혼란스러웠던 시절 사정없이 시위자들을 두들겨 팼던 그 곤봉 말입니다.


 정부는 국민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꼈고 국민은 정부를 신뢰했습니다.

 어느 쪽이 다른 한쪽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일 국민들의 총기소유도 자유로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제는 불법입니다.

 그때는 범죄율도 극히 낮았습니다.

마약 문제와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고요.
 
히틀러 시절, 노동자들은 유람선을 타고 해외여행을 즐겼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푼돈으로

 “빌헬름 구스틀로프”, “로버트 레이”, “캡 아르코나”와 같은 대형 유람선을 타고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배들은 모두 최신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유람선들의 입항을 금지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독일 노동자들이 누리게 된 혜택을 영국 노동자들이 못보게 하려 말이죠.

그래서 이 유람선들의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

그리고 스페인 연안도시들과 섬들이었습니다.
 
히틀러 시절 우리는 삶의 질이 새로운 차원에 진입했음을 확연하게 느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앞날이 캄캄했는데 히틀러가 집권하자 새 지평이 열린 겁니다.


그래서 당시 다른 나라들에서도 독일을 배우자고 난리가 났었죠.

많은 이들이 그들의 자녀를 독일에 유학 보냈고

 또 “복스이코노미”와 독일의 기술을 배우자고 많은 외국인들이 독일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유대인의 금 없이도 국민의 의지와 두뇌,

그리고 근면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과시했습니다.

 독일 모델은 지구상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획기적인 경제발전 시스템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해외의 유대인 자본가 적들은

히틀러식 체제를 자신들이 운영하는 미-영 국제금융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죠.

생각해 보세요.

 2차대전후 얼마나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유대-미국-영국 국제금융의 이자-노예 시스템에 의해 수탈을 당해 경제가 파탄났습니까?
 
"종속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킵니다.

예를 들어 2001년부터 2007년 상반기까지 해외 투자자들이 우리나라에 투자한 돈은 1896억 달러인데,

 투자 수익은 3309억 달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투자자들이 해외에 투자한 돈은 2662억 달러인데,

투자 수익은 507역 달러였지요.

 이것을 산술적으로 비교해보면 약 2800억 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간 겁니다.


바로 이 때문에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외국인 투자자들 수중으로 흘러 들어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국부가 끊임없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국내의 분배구조가 악화됩니다.


수출 중심의 대기업과 관련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을 버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더 어려워지는 거죠.

 이것이 바로 빈부 양극화의 원인이에요." - 처음 만나는 진보(2010), 198쪽
 
독일은 약탈자들이 손댈 수 없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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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렇게 자랑합니다,

 “우리에겐 금(金)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다!”

(편: 이들은 금으로 번영이 아니라 빈곤을 창조한다!)
 
이렇게 히틀러와 그의 능력 있는 동지들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존의 국제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新정치-경제 체제를 창조해낸 겁니다.


 우리가 성공을 거듭하자 세계 금값이 떨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금값 하락은 이 국제자본가들에겐 재앙을 의미했죠.

그래서 이들은 전쟁을 일으켜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구현된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박멸하려 했던 겁니다.
 
그리하여 1939년 유대국제자본 치하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보호를 빌미로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 미국도 아마 당시 국내의 강한 반전여론만 아니었다면 이때 같이 참전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독일에 강요된 2차대전에서 5천5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독일인은 1천1백만이 죽었습니다.

이 중에 수백만이 여자와 아이들이었어요.
 
연합국을 지배한 유대인 자본가들은 이 전쟁으로 독일민족의 씨를 말리려 했습니다.

경제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으려 했죠.


그 자들이 하늘에서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폭탄을 쏟아 부었습니까.

이 전쟁은 연합국 최정상에 있었던 유대인 자본가들과

 이들의 정치적 하수인들이 그들의 국민을 속여가면서까지 일으킨 엄청난 살육극이었습니다.


 그들의 세계권력과 금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요즘과 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진실은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진실을 알려는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가 왜 2차대전이 일어났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냉전” 체제로 독일민족은 잠시 동안 절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독일의 소위 “국민의 대변자”라는 의회 정치인들이

 다문화주의로 독일민족의 해체를 꾀하고 있습니다.


왜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국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3세계 이민을 받아들여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도 모르게 만드는 것입니까.

나라의 정체성이 걸린 중대한 문제인데 이에 대해 국민은 왜 한 마디도 할 수 없습니까.

제도권 미디어에선 이 문제에 대해 아예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2차대전의 진상을 은폐하는데는 온갖 수단이 동원됩니다.


히틀러와 그 살기 좋았던 제3제국에 대한 거짓말과 모략, 날조가 판을 칩니다.


 히틀러가 살인마요 범죄자였다는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광기에 찬 히틀러가 독일국민을 홀려 불쌍한 유대인을 말살하고 전 세계를 정복하려 했는데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동구의 소비에트 민주주가 힘을 합쳐 자유를 수호하고 인류를 구원했다.


” 한마디로 웃기는 얘깁니다.


참으로 수치심도 없고 뻔뻔한 자들이나 할 수 있는 거짓말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독일 정치인들이나 유대인 소유 대중매체들은

이런 거짓말로 독일의 젊은 세대를 기만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독일 애국자가 진실을 알리면 잡아서 감옥에 처넣습니다.

 독일헌법 5조에 의해 발언, 표현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독일연방공화국의 빛이 2조3천억 마르크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물적인 금액입니다.

 공식통계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실업자가 5백70만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50만 정도 더 많을 것입니다.


 정부가 이런 태산 같은 빛 더미에 앉아 있으니

 히틀러 시대의 대규모 일자리 창출 사업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지요.

 재정적으로 봤을 때 독일연방은 끝장난 상태입니다.

히틀러 치하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날 우리 독일이 경제적으로 퇴보하고, 또 문화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은

 전쟁에서 이긴 유대인들이

그들의 자본주의, 또는 허구적 민주주의 체제를 독일민족에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독일의 전통적 가치관들에는 접근도 못하게 하여

위대한 문화적 유산을 간직한 우리 민족을 파괴하는 게 저들의 목표입니다.


반역은 극형으로 다스리는 게 정상입니다.

국민의 의사와는 반대로 독일을 다문화사회로 만들려는 정치인들은 다 사형감입니다.

왜 국민에게 제3세계 이민이나 다문화사회와 같은 중대한 이슈에 찬반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입니까?
 
지금 “민주주의” 독일연방에서 제일 중요한 이슈들에 대한 국민들의 발언권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법원이나 언론은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실제 권력자들의 허수아비들일 따름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존 스윈턴이 1914년 언론인들의 한 모임에서 이렇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무슨 자유언론인가?

 우리는 자본가들의 시녀일 뿐이다!”
 
2차대전은 국가사회주의의 성공과 번영을 방치할 수 없었던 유대인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치적 허수아비들이 독일에 강요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엄청난 수적, 물자적 열세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고리대금업에 기초한 기생적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켜야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생산적 노동에 기초하는 국가사회주의는 훨씬 더 나은 체제입니다

. 그때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간 일이 있는데 그 때 만난 한 흑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히틀러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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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chosun.com/nagaduju/7104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