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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임진왜란과 천주교..왜倭는 누구인가?..하멜표류기


5. 임진왜란과 천주교

 

() 영화 명량은 고증을 제대로 한 영화라고 본다.


조선사회에 로마가톨릭이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때다.

왜군의 주력부대를 지휘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톨릭 신자로서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투를 벌였다.


http://ameblo.jp/constantinvs/entry-11290169770.html

스페인 출신으로 당시 왜에 와 있던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신부가 1593

조선에 들어와 1년을 머물기도 했다.


http://blog.daum.net/mylovemay/15534110

위키백과에 보면 로마 가톨릭의 독실한 신앙인인 고니시는 군기로 붉은 비단 휘장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휘하 병사들 다수가 로마 가톨릭 신도였다.


그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었고, 밤마다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27379

그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 봉기의 진원지가 된다. 한편 고니시의 영지와 인접한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에서는 열렬한 니치렌 종 신자인 가토 기요마사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를 탄압하였는데, 이를 피해 고니시의 영지로 달아난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들을 고니시가 보호해주면서,

종교로 인해 서로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왜에서의 천주교전파는 임진왜란 과정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조선후기부터는 청나라가 통로가 되어 1783(정조 7) 베이징에서 이승훈이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박해사건이 시작됐다.


1791년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가톨릭 식 제례를 지냈다는 죄명으로 윤지충 등이

처형됐다. 점차 박해는 치열해져 신부 주문모와 함께 이승훈·정약종(정약용의 형)

등이 1801(순조 1) 처형됐다.


임진왜란 때 사용 됐던 이 십자가마크가 천주교 상징 마크가 된 것이 198910

서울에서 제 44차 세계 성채대회 때의 로고로 한국 천주교회를 상징하며

20053월부터 사용하고 있다, 이번에 확정한 천주교 상징은 빨간 바탕에 흰색

십자가와 흰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 두 가지로 이는 세계 성채대회 표장이기도 하다.

 

() 임진왜란 때의 왜 선봉부대는 천주교인이었다.


기독교인이 전체인구 1%에도 못 미치는 왜에서 임진왜란 때에 많은 천주교인이

전쟁에 동원되었다면 믿겠는가?

그러나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천주교인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선봉부대로 내세웠다.


천주교 전래를 살펴보면 16세기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첫 선교사는 사비엘 선교사로 1549년 왜의 가고시마에서 전도해 16세기 왜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왜의 지도자 오다 노부나가의 기독교에 대한 관용정책 때문에

 1582년 교회가 200여개에 신도가 15만 명, 1590년에는 30만 명,

1600년에는 60만 명 정도였는데

당시 총인구가 약 25백만이었던 것을 비교할 때 엄청난 숫자이다.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왜가 당시 포르투갈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왜는 서양 국가들과 문물교류가 활발했고, 임진왜란 때 사용된 서구 총도

이때 함께 들어왔다. 왜의 역사에서 16-17세기(1549-1683)의 기독교를 가리켜

기리시단(吉利支丹:Christian)이라 불렀다.


1592년 임진년에 일어난 란에 동원된 왜군은 약 20-25만 명으로 이중에는

기독교인이 상당수 포함되었다고 한다. 조선 정복의 선두로 나선 제 1군단장

고니찌 유찌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부대는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고니찌는 어거스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 부대는 개전 20일 만에 평양성에서 진격했지만

명군의 참전으로 퇴각하여 경남 웅천에 성을 쌓고 진을 쳤다.


이때 고니찌는 왜의 예수회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요청함에 따라

그레고리 세스페데스가 파송되었고, 경남 웅천에 1년간 머무르면서 왜군 진중에서

군인들에게 성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불교도인 제 2군단장 가또(加藤淸正)가 이 사실을

도요도미에게 알림에 따라 세스페데스 신부는 왜로 귀국조치를 당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왜는 많은 조선인 포로를 잡아갔다.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포로들은 노예로 팔려가거나 왜에 정착하게 되었고

극히 일부만 조선으로 귀환했다.


왜에 천주교가 들어온 후 약 50여년 만에 천주교 신자는 60만 명으로 늘었지만

박해가 끝날 무렵인 19세기에는 2만 명으로 줄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천주교의 금지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조선침략 선봉부대를 천주교인으로 구성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적극적인 탄압이 시작됐고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260년간 계속된 기리시단의 박해가 도꾸가와의 에도 막부에서는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천주교인 영주와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대량학살로 이어진 것은

왜의 내부에서 예수회의 활동이 못 마땅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 임진왜란을 일으킨 배후에는 천주교 예수회(Jesuite)가 있었다.


한국과 로마 카톨릭의 첫 만남은 참으로 불행했다.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단의 병사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

신자들이었다. 조선 침략 군단의 이름은 그리스도단’(기리시단, 吉利支丹)이다.


그 침략 군단 앞에는 십자가 깃발을 들고 검정색 사제복에 로만 칼라를 한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로마 카톨릭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 따랐다.


예수회 사제들은 조선인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백성사를 받아주고,

이른바 성수를 뿌리면서 조선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예수회(Society of Jesus)제수이트(Jesuit), 야소회()로도 불린다.


영화 명량을 보면 십자가 로고가 계속 등장한다.


15497, 큐슈(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전도를 받고 천주교를 허용한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왜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주교가 포교에 열을 올린 것은 개신교가 새로운 나라나 대륙에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들어가서 선점하기 위한 것으로서, 왜에 조총(鳥銃)을 전수한

예수회의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Francesco Xavier, 1506-1552)

카톨릭 사제로 예수회 창립 멤버 6인 중 한 사람이다.


바빌론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해 만든 로마 카톨릭은 캘빈, 루터 등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불안했다. 그러나 군사적 지식과 정치적 식견이 뛰어난 전략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에게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 예수회(Jesuite)’를 창설했다.


예수회는 어디든 가서 곳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거짓 그리스도교를 알리며

정치인들이나 상인들과 거래했다.

한국의 서강대학교도 예수회가 설립했다.


그런 목적으로 1549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들이 탄 포르투갈의 상선이 왜에 도착하여

영주에게 화승총을 선물하였다. 그 화승총을 계속 보급하여 왜로 하여금 정복야욕을

눈뜨게 하는 첫 계획에 착수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아시아 선교의 첫발은 예수회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인 스페인 귀족 출신 프란치스코 사비에르였다.


조중화가 저술한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를 보면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라는 천주교 신부가 왜 땅에 1549년에 정식적으로 와서 포교를 시작하며

 그와 함께 온 유럽인들이 화승총을 계속 보급했다고 했다.


화승총을 조총으로 개량하고 삼단철포부대를 운영하여

왜를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 예수회를 적극 후원하였다.(31p)


이 책에는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대를 이은 히데요시가 임진대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며

대전쟁을 권유한 배후의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였다.(61P)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정유재란 때 포로로 왜에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그가 소오 요시도시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고

왜인들이 서로 수군거렸다고 했다.(61p)


고니시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다. 천주교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야 했고 많은 자본을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장수 고시니의 군대가 사용한 군기의 기록화(일본 자료)를 보면 하단에

조총을 어깨에 멘 왜병 옆으로 십자가 군기도 보인다.


예수회 신부는 틀림없이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예수회가 조선은 물론 인도까지

정복시켜줄 것이라고 회유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인도까지 정복할 수 있다고

너무나 자신만만했고 심지어 부채의 앞과 뒷면에다가 조선어를 써서

달달 외웠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예수회는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로마 카톨릭 조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실상 거짓 예수(적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

그들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무모한 전쟁이 끝난 이후

천주교인들을 일본에서 씨를 말리려고 예수회를 추방시켰다.


그러나 예수회는 수백 년이 흐른 뒤 함포를 단 미국 함선들을 끌고 와서 왜 땅에

쏘아대며 결국 일본을 개항시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예수회는 메이지 유신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급속도로 왜 열도를 차지한

후 왜를 부추겨 조선을 점령하게 하여서 천주교인들이 거기에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목을 잘라가며 개항을 거부하여

대원군 때문에 조선의 개화가 늦어져서 망했다고 대원군을 증오하게 만들어 한국의

교육체계가 예수회의 입맛에 맞게 교육하려 했고 그렇게 된 현실에 있는 것이다.


당시 조선 천주교인들의 일부는 이 땅을 천주교 국가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

군함으로 나라를 침공해주든지, 아니면 압박을 해달라는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만들기도 했다. 이런 것이 대원군의 무서운 박해를 초래한 단초를 제공했다.

 

()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철병을 명하면서 6년에 걸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왜군은 철수를 서둘러야만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충무공은 큰 장벽이었다. 충무공이 바다의 해로를

가로막고 있어서 도저히 해상 퇴각로를 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니시는 퇴로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베어

소금창고에 옮기는 작업을 계속했다.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벨 때에도 그의 진영에는 변함없이 비단 천에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어느 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양민의 목 수백 개와 함께

전령을 명 수군 장수 진린에게 보냈다.


조선인의 목인지 일본군의 목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겠소?

이 수급들을 전과 보고용으로 명 황제에게 보내시오.

 남의 나라에 와서 힘들여 싸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소?

진린 장군께서는 이제 해상 퇴각로를 열어주시오.


우리는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하지만 충무공은 더 많은 왜군의 목을 베어 진린에게 보냄으로 퇴로를 열어주지 못하도록 했다.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템플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인 과시였다.

그처럼 십자가 깃발을 군기로 달고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임진년(1592) 413일이었다.

바다를 뒤덮은 왜군(倭軍)의 배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렸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그토록 비극적인 사건이 우리나라와 천주교의 최초의 만남이 되었다.

400여 년 전 조선인들이 겪은 임진왜란은 한국판 십자군 전쟁이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 기록에는

 왜적의 배가 대마도에서 우리 바다로 오며 바다를 뒤덮듯 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1592413(선조 25) 왜군 제1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위인 소 요시토시

병선 수백 척에 병력 18700명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상륙했다

 

독실한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인 고니시(소서행장)

 십자가 깃발을 군기로 사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진중에는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司牧)하게 했다.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이자 조일전쟁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예수회 사제 세스페데스는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와서

경상도 일대의 해안지방에 약 1년간 머물면서 조선인에 대한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당시 상황에 대한 4통의 서간문을 남겼다.


왜에서는 천주교인을 기리시단(吉利支丹)이라 하는데 Christian의 포르투갈어를

왜어로 음역한 것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이 기리시단 부대가 십자가 군기를 들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제1군이었다.


조일전쟁에 출전한 기리시단은 전체 왜군의 과반수에 근접한 병력으로 추산된다.

개신교 선교사로서 조선의 해안정찰과 통상교섭을 위해 온 귀츨라프(Karl Gutzlaff)

그의 항해기에서 이렇게 썼다.


 ‘임진왜란 당시의 왜 장군들은 대개,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역시 천주교인이었다.’


블린클리(F. Blinkely)는 부산에 상륙한 25만의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

즉 기리시단이었다고 대영백과사전 일본인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천주교 군인들이 선봉이 된 임진왜란이 조선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는가를 살펴보면,

조선인이 수십 만 명에서 최고 100만 명이 죽었고(왜란 전 인구 940만 명),

농경지 60%가 파괴되었고, 10만 점의 문화재가 약탈되었고,

수많은 문화재와 민가와 관가와 궁궐이 불탔고,

10만 여명의 백성들이 왜국에 포로로 잡혀 갔다.

 

() 왜 십자군이 만들어지다.


109511월 교황 우르반 2세는 광장의 대군중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분명히 약속한다.”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신이 바라신다.’는 말에서 교황 앞에 다투어 십자군으로

원정에 나설 것을 맹세했다. 그 전쟁은 3백 년이 넘는 전쟁으로 비화 되었고,

십자군의 창칼과 화살에 의해 무고한 인명이 수천만 명이 도살되듯 죽어야 했다.


십자군은 이교도의 여자는 물론 점령국의 젊은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다니며 십자군의

성적 노리개인 종군 위안부 노릇을 하게 했는데 수만 명이 넘었다.


특히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러 가는 도중에 도처에서 유대인 주거지를 습격해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후방에서도 신부들과 수도원의 수사들이 지휘한

도처의 대학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여졌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죽여서 너의 영혼을 구하라.


그 공로로 너의 연옥에서의 기간을 줄여라.”라는 표어까지 내걸어 가며 자행되었다.

이교도인 회교도로부터 성지(聖地)를 해방시켜야 한다면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the Christ killer)을 먼저 처단해야 되지 않겠느냐?”

십자군이 제1차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예루살렘에 살던 모든

유대인들을 잡아 회당에 쓸어 넣고 불을 질러 몰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조선을 침략한 왜 십자군은 이 유럽 십자군의 악랄함을 능가했다.

왜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사에 보기 드문 야만적 죄악을 저질렀다.

진주성이 2차 전쟁에서 함락되자 왜 십자군은 성안에 남은 군··6만 명을

사창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다.


왜병들은 조선 여자를 보기만 하면 길거리든 대낮이든 사람들이 보든 말든 닥치는

대로 강간했다. ‘욕봤다는 말은 이때에 생긴 것이다.


나부끼는 십자가 깃발 아래서 귀 베기와 코 베기도 자행되었다.

조선을 침공한 왜군들은 병사 1명당 코 한 되씩의 책임량을 할당 받았다.


그리하여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코를 베었다. 조선인의 잘린 귀와 코는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졌다. 히데요시는 그것의 수량으로 부하들의 전공을 가늠했다.


-경상도 창원에 살던 손기후의 아내 정씨는 왜군들의 강간에 저항하자

왜군이 여인 정씨의 얼굴을 찌르고 사지를 베고 귀와 코를 잘라 가져갔다.


-왜군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산모 함경도 영흥 여인 김씨의 목을 베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머리가 마루에 떨어져 있다.

(출처: 동국신속삼강행실도-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임진왜란 책)


천주교인 장수 구로다는 5,500개의 코를 벤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왜인 저자 가다노 쯔기오가 쓴 이순신과 히데요시는 고니시 부대가 부산진성을

점령한 상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592413일 아침, 고니시의 제1군은 부산진성에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본군은 성벽에 사다리를 걸쳤다. 성벽에 있던 조선 병사들은 사다리를 밀어냈다.

조선 병사의 무기는 짧은 활이 주류였으나 때로는 각궁이라 불리는 큰 활을 쏘았고,

돌과 불화살이라 불리는 대나무로 만든 소이탄을 사용하면서 주위에 화염을 일으켰다.


 돌은 부녀자들이 던졌다. 이윽고 본군은 성벽을 넘었다.

성 안에서는 조선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본군들이 쏘는 조총의 탄환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조총의 위력을 모르고 있었다.

조총은 어떤 방패라도 아주 쉽게 뚫어버리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피로 물든 사상자들이 쌓이고 있었다.


조선군은 퇴각하였고 본군은 그 뒤를 좇았다.

싸움은 성 안쪽으로 옮겨갔다.

밀고 들어오는 본군들은 도망가는 조선병을 좇아 성안 구석구석까지 몰려들어 닥치는 대로 베어버렸다.


본도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성안은 피바다로 변해버렸다.

 싸움이 시작된 지 2시간 반,

 결국 성안에 있던 조선군사 1200명이 전사하였고, 민간인 2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 전사자들 가운데는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순국한 정발장군도 있었다.’


왜병들의 십자가 깃발을 처음 본 조선 병사들은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십자가 군기 펄럭이며 짓밟고 지나간 거리에는 온통 시체로 산더미를

이루었다고 한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사에는 그때의 참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한성에서는 수구문 밖에 내다 버린 시체가 산더미 같으며

명군이 조선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온 그들이 취포(醉飽)한 음식 찌꺼기

 또는 그들이 구토한 음식을 서로 다투어 주워 먹고

약한 자는 그것도 주워 먹지 못하여 호곡(號哭)하였다.’


임진왜란과 천주교가 역사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다.


이에 관련해 민경배는 그의 저서 한국기독교회사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이 십자가의 표지 아래서 이들이 남달리 인간적이요,

 덜 잔인한 살상을 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다.

우리 겨레 역사의 한에 사무쳐 뼈에 스며 있는 악랄한 왜군의 만행에 대해서

이들은 예외가 될 만한 행동 하나 남겨 놓지 못하고 있었다.’(38)


왜군들은 심지어 금줄이 달린 집에까지 들어가 산모와 갓난아기의 코까지 베었다.


징비록(懲毖錄)’은 당시의 재난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때에 적이 3()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여사(廬舍)를 모두 불태우고 백성을 살육하였으니

무릇 우리나라 사람을 보기만 하면 모조리 그 코를 베어서 공()으로 삼고 겸하여 시위하였다.

세계 전쟁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혹한 만행이었다.


1592428, 천주교 신부가 종군사제로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과

신립이 이끄는 조선 경군(중앙군) 병력이 격돌한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에서

8만 명의 조선군이 전멸했다.


예수회는 동방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선교의 목적으로 항해사들을 포섭하여

배를 타고 멀리 동양으로 가서 인도, , 왜에도 진출 기지들을 설치하고 서양의

선진 문물들을 줌으로써 무역 이득도 취하였다. 그런데 유독 조선만이 예수회는 물론

서양 사람들을 모조리 추방해버리니 예수회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접근해서 조선 정복의 야망을 부추긴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하자 예수회는 히데요시에게 접근했다.


예수회 신부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를 보면 당시 예수회는 오다

노부나가를 매우 선호했는데 노부나가가 죽자 크게 낙담했으며 히데요시는 외모도

인물됨도 하찮아서 실망했지만 그래도 예수회 신부들은 히데요시를

하나님의 칼과 채찍이라고 극찬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였던 바, 히데요시가 고니시를 제1군 선봉장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틀어 계속 임명하고 신임한 것도 바로 예수회 때문이었다.


결국 임진왜란은 예수회의 동방진출 야욕에 의해 일어난 것이고 예수회 신부들이

왜군을 따라 종군하여 조선 땅을 밟고 다니며 소위 성수를 뿌리면서 왜 십자군을

축복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에는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있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여러 번 만날 정도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프로이스는 30년 가까이 일본에

체재하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 들었던 갖가지 사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훗날 일본사(Historia de Japam)’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 책은 진주박물관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국립진주박물관)


왜판 완역 루이스 프로이스는 12권짜리 시리즈이다. 프로이스가 쓴 이 책을 보면

조선을 이교도라고 기술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성모 마리아를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느님이 쓰시는 칼

(우리 주 하느님은 이 사람 곧 관백 히데요시를 일본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검과 채찍으로 선택하셨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하느님의 聖戰으로 적었다.


또한 프로이스(Luis Frois)일본사결말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조선 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왜인) 천주교도들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천주교도 영주들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도 있습니다. ...


하느님은 진실로 선하신 분이므로 성스러운 주님의 영광을 위해,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적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승리에 관한 가장 기쁜 소식을

 이제 머지않아 접하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1598103일 나가사키에서... 성스러운 주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이처럼 임진왜란은 사실상 천주교 십자군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왜 십자군에게 정복을 당해 오늘날 조국은

필리핀처럼 아시아를 대표하는 가난한 천주교 국가로 전락해 있을 것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로마 종교가 들어간 나라들을 자세히 보면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대부분이 카톨릭 국가이다.


임진왜란의 배후에는 천주교 예수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 예수회 출신 최초의 교황이 방한(2014)했다.

그를 위해 우리 정부는 수도 서울의 중심지인 광화문 광장을 바티칸 광장으로 바꾸어

주었다.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심장이다. 교황을 초청한 대통령은 범정부적으로

그들의 종교행사를 적극 지원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全知全能(전지전능)하고 결점 없는 처럼 대우하였다.


언론은 교황의 訪韓을 바티칸의 기관지처럼 선전과 홍보에 충실했다.


교황이 집전한 시복식 미사는 생중계되었다. 천주교가 대한민국의 국교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놀라운 영적 사대주의인 過恭非禮(과공비례)의 극치였다.

 

 

6. 는 누구인가?

 

이들은 표해부족漂海部族이라고 역사서는 기록했다.

왜는 삼국시대 잠깐 존재한 적이 있지만 이것은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던 부족

연합체였다. 백제멸망 직전 백마강 전투에 왜의 군사 5만이 참전했는데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배했다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쓰여 있다.


하지만 대륙서,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억지로 어떻게든지 왜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일본에서 쓴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조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시 백제와 왜는 같은 지역에 사는 부류였기에 그렇다.

백제의 행정구역 이름 중에 하나가 담로 체제다. 이것은 담 즉 구분 된 지역의 뜻이다.

22담로 체제는 해외 전초기지의 숫자였다.


그 지역 원주민들을 전부 점령하는 것이 아니고 지역의 일부만을 식민지로 삼아

무역을 하는 방식이다. 그리스가 해외식민지를 건설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그 지역 사람들은 다 정복하는 것은 힘들고 돈도 많이 들고 설령 정복했다고 하더라도

지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맨 처음 정복군을 보내서 일부를 취한다음

그들에게 돈과 재물을 줘서 그 지역일부의 지배권을 인정받는다.


해상무역을 하는 문화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한 국가의 특징이 바로 이런 해외

군사 식민기지를 건설하여 무역로를 확보하는 특징을 보인다.


백제는 이런 과정에서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을 개척했다고 기존사학자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한계를 보인다.

지금의 필리핀이 이들 왜인들과 백제인들의 주요무대였다.


필리핀이라는 이름은 펠리페2세의 이름을 딴것이니 그것은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이름이다. 전 이름은 동양식 이름일 것이다. 동양식 이름으로 부르던 그곳이

바로 왜였으며 이것은 특정 국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의 전통의상이었던 기모노가 일본열도 일본국의 전통의상이 되었으며

일본인들의 유전자를 검색하면 절반가까이가 필리핀과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현대의학으로 밝혀졌다. 밥 위에다가 생선조각을 붙여서 고추냉이에 묻혀 먹는

세계적인 일본음식인 쓰시는 기원이 필리핀이다. 대륙 동남부의 포모사(대만)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열도에 퍼졌다고 일본식문화연구자들은 말한다.


바로 이 필리핀의 왜인들이 19세기 급속하게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일본열도에

국가를 건설하여 아직 없었던 왕을 세운 것이 메이지천황이었다.


일본열도에 왕을 세운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를 포함하여 일본제국의 근원은 지금의

대륙 동남부였고 이들이 나라를 세웠던 지역이 바로 지금의 남경인데 원래 이름은

금릉, 그 전 이름은 에도였다.


조선 순종 때까지 그들의 수도는 지금의 남경이었다. 그런데 이 천황세력도 그 즈음

일본열도의 동경에 황거를 설치하고 그곳으로 옮긴다. 바로 미국과 영국의 조정 하에

이루어졌다. 일본은 바로 미국, 영국의 꼭두각시 국가였다.


그래서 일본이 지금도 대동아전쟁을 사과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고향이었던 대륙 동남부를 공격한 게 뭐 비난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동남아시아를 침공한 것도 원래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제국주의와 싸운

해방전쟁이었다라고 주장하는 기저에는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지금

유엔이 사과하라는 것도 외면하는 이유다.


왜 이들은 침략역사, 심지어 2차 대전자체를 신세대 일본인들에게 가르치지도 않고

2차 대전이 독일만 일으킨 전쟁으로 알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시사 하는지

알아야 한다. 왜 당신들은 침략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라고 물으면 거기가 원래

우리고향이었다고 말하게 되고 그러면 거기에 왜가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고 줄줄이 역사의 진실이 밝혀져 자연스럽게 대륙조선사도 증명이 되니

아예 이들은 역사논쟁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일본열도의 일본국 자체가 역사를 왜곡하면서 여태 유지되어 온 거짓말 정권이고

국가이기 때문이다. 자칫 과거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면 이들은 뿌리 없는 표해부족이

되어 천황의 존재 자체도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아 전쟁은 결국 자신들의 고향인 풍부한 곡물이 자라고(동남아시아는 벼농사를

2모작, 3모작까지 한다) 서양인들이 금과 맞바꾸려고 하는 향료가 넘쳐나던

지역을 미국 영국 네덜란드인들에게 빼앗기고 대륙 동남부의 조선장군들을 제압하여

천황도 내세웠고 미국, 영국의 힘을 빌려 조선도 멸망시켜 이젠 아시아의 천자국이

되려 하는데 미국과 영국이 1926년 대륙에서 손을 떼라하면서 미 해병대가

대거 대륙에 진출하여 미군기지를 건설한다.


이것이 영화로 나온 것이 스티브 맥퀸의 영화와 1950년대 존 웨인의 blood alley나온다.

스토리는 바로 대륙조선인들과의 전투였다.

 

 

7. 하멜표류기의 이해

 

() 하멜표류기의 재해석


1653816일 켈파르트섬에서 표류되어 1666914일 일행 8명이 왜의

낭가사께長崎로 탈출하기까지 조선에서 체험했던 일과 풍습에 관하여

스뻬르베 호의 생존한 사관과 선원들이 본국 네덜란드에 돌아가

자신이 속한 동인도해운회사에 밀린 봉급을 받기 위해 만든

업무 보고를 기록한 일지가 하멜표류기의 원 제목이다.


당시 조선은 해상을 왜세력들에게 맡겨서 그들 관할지역내 왜구들의 침공을

막고자 했다. 조선장군들을 임명하여 해상에 성곽을 쌓고 해금령을 내려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았고 심지어 섬에 조선인이 살지 못하게

아예 공동화 시켜버렸다. 왜구들의 침략이 그만큼 심했다는 말이다.


이 왜 장군들이 해안지대를 지배하면서 점점 서세동점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란학(네덜란드-화란을 통해 들여 온 서구학문)을 수입하였으며 영국, 네덜란드

해상강국이 조선해안선을 침탈하면서 이 왜 군벌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아시아에서 탈출하여 서구열강에 기댄다.


조선의 폐쇄성은 대륙 동남부의 왜로 탈출하여 하멜이 쓴 보고서는 단 며칠 만에

작성되어 회사에 전달되었는데 조선은 그 1328일 동안 하멜의 네덜란드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들을 감시하는 데만 주력했다고 적었다.


네덜란드(화란)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이들을 취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으며

조선당국자들은 이들을 감시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한반도의 인천항, 군산항이 건설된 것은 대륙조선이 이 새로운 땅과 자원이 필요했기에

19세기 말에 몰려와서 개항되었고 춘천 옥 광산을 개발했다.


한반도는 이때 19세기 세계시장개방화 시대에 차츰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영국의 해군기지가 한반도 거문도에 건설되었고 미군도 진출하였다.


이 대륙조선인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 바로 지금의 남북한이 된 것이고

대한민국도 원래는 대륙에 있었던 정부였다. 그러다가 서구열강의 이해관계에 의해

포츠담 회담 등의 결과에 의해 코리아가 한반도에 들어서게 되고

이 후 미소양국의 삼팔선 분할 점령이 일어난 것은 이곳을 관할하던 왜 제국과

영국, 미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져 있는 왜 제국점령지였기에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켜

영구분단이 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은 대륙에 있었기에 하멜이 이 은둔의 땅을 탐사한 책이 서구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은 대외활동을 철저히 차단한다.

1666년은 17세기 서세동점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시대로 조선 대륙이 분할되는

첫 시점이 이 시기였음이 하멜표류기에서 감지된다.


조선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거대한 8개의 왕국으로 구성된 나라라고 하멜은

증언하고 있다

 

() 하멜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360년 전 한반도에 왔다는 하멜의 표류기는 잘못 번역된 것이다.

후딘크본 하멜표류기에는 그가 한반도의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 아니라 산동반도

남쪽에 있는 제주濟州라는 대륙내륙에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다가 조선관군에게

압송되어 서울에 도착하여 효종을 만난 과정, 대륙일대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내용과 후에 탈출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책이다.


조선의 자연과 동식물은 열대와 아열대에 사는 동식물이 등장한다.

자연산 야자수가 있고 강에는 악어가 있다고 하멜은 적었다.

이러한 증거는 하멜이 1328일간 조선에서 겪은 배경이 결코 한반도가 아닌

대륙임을 말한다.


나카사키 총독이 있다는 것은 당시 대륙은 이미 서구세력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일본은 대륙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산동성 일대에 왜관을 두고

대륙조선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당시 북쪽은 청나라 달단 타타르인이 있었고, 남쪽 왜인들은 왕이 없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쇼군 장군들이 다스리는 왜가 있었던 곳이다.

옛 대륙조선어는 3성이다. 한반도로 건너온 조선어에 성조를 제거하여 대륙조선어와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 현 한국어이다. 옛날 대륙 왜어에도 성조가 있었다.


왜 현제는 없어졌느냐 하면 바로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동원되어 변조시킨

한반도 조선어인 것이다. 이들은 두음법칙이라는 것을 만들어 철저히 대륙조선어와

차별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한반도조선을 창출하기 위해 두음법칙이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음운법칙을 만들어 조선을 한반도에 고착, 세뇌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멜이 탈출하여 왜의 나가사키에 도착했다고 하는 나가사키는 바로 양자강하류

지역이다. 이곳은 왜라는 지역이지 결코 왜라는 나라가 존재 했다는 말이 아니다.


왜 장군들이 관할하는 왜인들 지역이 바로 양자강 하류였으며 당시에는 왜인,

조선인이 구별 없이 이런 대륙남부에 같이 살고 있었던 것인데 조선인들은 풍토병

때문에 가급적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의 국경 개념으로 당시 역사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국가체계와 국경선은 2차 대전 이후에 정착된 개념이다.

 

() 하멜표류기에는 왜가 대륙에 있었다고 적었는데 거기서 하멜은 강 하나를

건너서 왜로 탈출했다고 썼다. 그 하멜이 탈출한 낭가사께는 흔히 왜어로

나가사키라 불리는 이 지역은 양자강 하류의 진강현 동쪽의 랑산진狼山鎭이다.


이 나가사키라는 말에서처럼 이 왜어 지명은 그 발음 그대로 지금 현재 왜어의

발음이 된다. 주목할 점은 이 랑상진을 왜인들은 낭가사께 즉 일본 왜구들의

발음에서 으로 발음하는 두음법칙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조선에 이렇게 두음법칙이란 것을 만들어서

대륙조선어를 쓰는 한국인들을 왜어식 어법으로 강요한 흔적이며 언어 강탈 사건이다.


과연 제주도에서 지금의 일본열도로 그 넓은 해역을 겨우 뗏목 같은 작은 배로

횡단이 가능한가? 하멜이 아무리 향수병이 심했어도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무모한 사람이 아닌 이등항해사였다.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그 누구도보다

잘 아는 선장이다. 그가 탈출한 왜는 양자강을 건너서 왜 무역항이 있는 곳으로

탈출한 것이다.


1925년 한참 대륙을 석권하던 시절 왜는 동시에 일본열도에 나라를 세우고 있었다.

이때 대규모로 대륙 동부지역 사람들이 유구제국을 그 훨씬 이전 시대에 제압한

것은 일본열도로 들어가기 위함이었고 일본열도 자체가 유구국의 영역에 속하는

땅이었기에 왜제국은 유구국을 합병한 것이다.


이때 당시 유구왕국은 환태평양문화권과 조선의 유교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페리제독이 왜에 개항을 요구할 때 먼저 유구국을 거쳤다고 나온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구국은 독립 국가였다고 페리제독은 증언하고 있다.

왜가 지금의 남경에서 가장먼저 한일이 유구국 침공이었다.

그 점령은 곧 일본열도로의 진군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구제도를 이용해 일본열도로 들어가게 되는 통로가 열리고 이때 일본열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토착민들을 포섭 제압하는 과정에서 일본열도의 사무라이

집단과의 전쟁을 묘사한 사건이 라스트 사무라이의 내용이다.


대륙의 근대화된 왜 제국군과 아직 활 쏘고 칼 휘두르는 전쟁문화를 가진

일본열도 토착민들을 제압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서 결코 근대화된 왜 제국군은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군대가 아니다.


이 왜 제국군들은 복건성 일대에서 발흥하여 대만에서도 호응을 하여 이것이

왜 제국의 근간이 되었고, 이때 산동성의 왜 세력은 없어지게 되었다.


산동성의 왜는 임진왜란 이후 토요토미 가문이 덕천가문에 의해 붕괴되어

왜의 중심지는 남경 덕천가문의 중심지로 옮겨지고 산동성의 왜 세력은 거의 없어지고

조선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덕천가강이 왜 이렇게 했을까?

덕천가강은 조선의 충실한 신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도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자신의 중심지였던 남경을 에도라고 발음하는 것도 현대 일본어이고

당시 강도 江都라 불린 지역이 이 남경이었다.


1912년 지금의 북경에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중화민국의 남쪽수도를 남경이라고

지칭할 때 일본열도로 아주 일본이 옮겨졌다.


에도막부의 에도는 오도吳都에서 나왔으며 고또江都와 에도吳都를 같이 썼다.

오나라수도가 에도이며 왜는 오나라를 기반으로 한 나라였고

이들이 역사상의 왜이며 왜였고 왜 지역을 침공한 동아시아 바다를 떠돌아다니던

해적들이 왜구들이었으며 이들을 제압하고 다스리라는 뜻으로 막부에게

평남대장군이라는 직함을 조선에서는 보냈던 것이며,


이 직함 하나로 강호 지역을 평정하게 되니 우리가 중국 무협지에서 강호를

평정했다고 하는 것은 이 일본장군이 그 지역 무사들을 제압하고 우두머리가 되어

조선조정에 충성한 것을 후에 무협지 작가들이 중국의 옷을 입혀서 써낸 소설이다.


강호를 떠돌았다고 하는 무협지의 이야기는 미야모토 무사시 등의

일본무사들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강호의 무사들은 왜 무사들이었고

이것을 일본열도로 옮긴 왜 세력들은 일본열도를 배경으로 새롭게 각색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들이 남색을 즐겼다는 기록이 결국 대륙에서 있었던 남색열풍에

편승한 성 풍조였고 이 왜의 성 풍조는 후에 일본열도로 옮겨져 역사가 된 것이다.


당시 대륙 동남부 사람들은 혼도시를 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왜 사무라이 머리는 대륙남부 사람들의 풍속이었다.


원래 왜구들은 머리를 산발한 해적들이었다.


그러나 대륙 왜 사람들은 조선의 풍속을 따라서 상투를 틀었고

그것을 투구를 쓰는데 편리하게 변발 비슷한 앞머리를 깎아 낸 것이다.

왜가 대륙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머리를 했던 것이다.


왜 무사의 그 상투 머리는 대륙의 풍속이었고 상투는 조선의 풍속, 그리고

앞머리를 깎아 버리는 것은 대륙조선 북쪽 올랑해의 풍속이었다.


이들이 이런 상투를 잘라버린 것은 조선을 버리고 서구열강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선언이었으며 메이지 유신 때 상투를 제거하였다.


중국에 새로운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메이지정권은 대륙의 일부지역과 대만을

남겨둔 채 일본열도에서 본격적으로 일본시대를 열게 된다.


이 영향으로 대만은 친일국가가 된다.


대만의 1.21사태는 이런 친일토착민들이 대륙의 중국정권에 대해 반기를 든 사건이며

이때 대륙국민당군대는 학살을 하여 전에 왜인이었던 사람을 제압한다.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어서 대만사람들이 비록 대륙식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전에는 왜식 이름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대만은 친일국가이다.


대만은 유구왕국의 일부였으며 장개석이 대륙에서 쫓겨 오기 전까지는 왜 땅이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국 주도 하에 국민당 정부가 대만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이등휘 총통이 퇴임 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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