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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06
고조선의 영역은 대륙인가, 반도인가, 그 어디인가?
중·일·위조한 고대, 중세사 교재 언제 바로잡을 것인가!
![]() 일제(日帝)는 한반도 내에서도 중국 요녕성 대능하 유역에서 우수한 청동기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것과 반도 내에서도 같은 계통의 비파형 동검(銅劍)등 청동유물과 토기(土器)가 나오자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설(流域說)을 내세워 마치 고조선이 한반도에서 건국된 것 같이 말하는 반도식민사관을 만들어 유포시킴으로서 식민사관자들은 이에 동조하며 고조선이 대륙에서 건국했음에도 반도에서 건국한양 일제가 조작한 허구의 사관을 추종을 하고 있다. 근래 한반도 내에서는 10만년 내지 수십 만년 전 살던 사람들의 구석기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한반도에도 주거하던 종족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국가형성(形成)은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고조선과 삼국, 왜(倭)도 대륙에서 건국이 이뤄졌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사서(史書)가 상고시대부터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자기들 멋대로 우리 역사를 조작 왜곡하였는데 이 반도사관(半島史觀)에 입각한 역사는 일제가 조작한 허구의 역사일 뿐이다. 우리 상고시대 환국이나 배달국·고조선· 고구려·백제·신라 등도 대륙에서 건국하고 후에 반도에서 밀려온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김일연(金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동북아시아의 기록임에도 반도만의 기록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 역사는 뒤엎어져 있다. 그런데도 8.15광복 후 일제의 왜곡역사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학자들의 상고사(上古史)와 고대사(古代史) 연구가 부족하고 사서(史書)를 부정하기에만 급급하고 있는 우리 사학계(史學界)의 무지가 낳은 결과이다. 지금 우리 역사교재(歷史敎材)들은 반도역사로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 역사는 대륙역사이다. 우리 민족사가 한반도 영토에 맞춘 ‘국가사관(國家史觀)’에 의한 역사로 서술(敍述)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역사는 ‘민족사관(民族史觀)’에 의한 역사로 정립(鼎立)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는 상고사와 고대사의 전반에 관해서도 문제가 있다. 환국과 신시배달국의 역사는 가르치지도 않고 있어서 이 시대의 국가영역과 백성은 모두 우리 민족의 것으로 봐야 함에도 우리 역사는 고조선의 영역도 숨기고 국가의 기원(起源)도 숨기어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 국가의 기원을 자타가 다 인정하는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도 숨기고, 우리민족의 국가기원을 고조선(檀君朝鮮)으로 하고 있는 것을 기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효시(嚆矢)로 하여 받들고 있다. 그런데 주(周)·진(秦)·한(漢)·당(唐)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한족(漢族)의 25사(史)에서는 우리 민족의 국가 기원을 구리(九黎)라는 국호시대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史記 40의 1) 삼국유사에도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만 표기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은 고조선 연구의 문제점 등을 남아 있는 사서(史書)를 통해서 고조선의 영역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조선과 삼국시대 우리 영역은 어디인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김일연(金一然)은 우리 민족의 국가 기원을 고조선으로 기록한 것을 효시(嚆矢)라고 하고 있는데, 중국사서(中國史書)도 고조선 이전에 구리(九黎)라는 국호시대(國號時代)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史記 40-1). 중국은 상고사(上古史)가 없음에서 막연히 고조선(古朝鮮) 이전에 구리(九黎)라는 나라가 있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기(史記 40의 1)과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역시 묘(苗;九黎)-조선, 삼국시대가 대륙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환국(桓國)은 물론 구리(九黎)도 삭제하고 조선(朝鮮)으로만 한 것은 의도적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삼국유사」를 편제(編制)로 한 우리나라의 대륙 역사를 숨기고 감춘 왜곡된 역사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기초로 하고 있는 현제 국가의 편제(編制)는 반도역사로 왜곡한 것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나 「중국25사(史)」 및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이 없었다면 소설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연은 연구없이 조선사를 반도 안에 가둬놓았다. 한편 「삼국사기」는 우리가 대륙의 역사임을 당당히 적어놓고 있다. 일반적으로 「삼국사기」는 서기전 57~935년까지로 인식하고 있으나 고조선과 구리시대까지도 기록하고 있다. (禮記55). 또 「삼국사기」는 우리 민족의 영역을 항성(項城);서화남(西華南)에서 서라벌(徐羅伐;慶州)까지로 기록하여 「중국25사(史)」에서 우리 민족이 서화(西華)에서 반도까지를 확인하고 있다. 또 광개토태왕비의 영역도 확인하고 있다. 신라가 서기 307년 2개의 신라(新羅)기록과 503년 마립간(麻立干)의 신라왕국, 두 기록을 두어, 서신라(西新羅), 동신라(東新羅)를 모두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신라(新羅)를 하나로 인식하고 기록한 것이 최대의 실수였다. 그러나 그 실수는 천년이 지난 지금 「중국25사(史)」 및 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과 함께 우리 민족사를 정립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제대로 했더라면 이 기록마저 없앴을 것이기에 서다. 더욱이 서신라(西新羅)인 사로신라(斯盧新羅)가 패망이후 서화(西華) 동쪽의 동이(東夷)관계 지명과 유적이 완전히 변조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배달국 제14대 자오지천황(慈烏支天皇)인 치우총(蚩尤塚)과 기자총(箕子塚) 부여융(夫餘隆), 의자왕묘 및 김유신(金庾信) 선조(先祖)인 헌원능(軒轅陵)은 이들이 대륙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분명히 김부식(金富軾) 이전에 반도에는 장보고(張保皐)의 소문도, 기록도 없었다고 하면서 「신라본기(新羅本紀)」, 장보고(張保皐)가 기록 되어 있는데 「당영호징신라국기(唐令狐新羅國記)」가 있었다고 했으니 이는 그에 의해서 기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인전의 장보고(張保皐)가 신라에 돌아온 이후 장보고(張保皐)는 청해진(靑海鎭)에 ‘정년(鄭年-張保皐 本名)은 사지연수(泗之漣水)에 살았다’고 하는데 서화(西華)의 동쪽에 사지연수(泗之漣水)가 있으니 서신라(西新羅)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다. 이미 밝힌 대로 김유신(金庾信)의 시조 헌원능(軒轅陵)이 서화(西華) 서쪽 섬서성(陝西省)에 있다. 이는 장보고(張保皐), 김유신(金庾信) 등은 반도인(半島人)이 아니고 대륙 사람임을 입증(立證)하는 것이다. 서화(西華) 동쪽에는 김유신(金庾信) 시대 지명인 항성(項城)을 중심으로 남쪽에 덕안(德安), 동성(桐城), 잠산(岑山)이 있고 북쪽에 동명(東明), 석성(石城), 석문(石門)이 있다. 그 동쪽으로 백제(百濟)와 전투를 한 전투지명이 있고 항성과 석문사이에 나침판의 생산지 자(磁)가 있다. 또한 예(濊)와 마한(馬韓)에서 사용하던 목화, 마한(馬韓)의 뒤를 이은 백제의 지명이 서화 동 쪽에 있음에도 반도에 의자왕과 김유신이 있었다고 묘까지 만들어 져 있다. 여기서 정신이 있는 자라면 사서(史書)가 옳은지, 김유신묘(金庾信墓)가 옳은 것인가는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다 알 수 있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임에도 아직도 우리는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상고사, 고대사, 삼국사도 반도 아닌 대륙사이다. 우리 역사가 반도역사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반도에 있었다는 역사는 거짓임을 알아야 한다. 최치원(崔致遠)이 신라에 돌아온 후 태산(太山;泰山)의 태수(太守)가 되었고, 또 부성군태수(富城郡太守)가 되었다. 이곳은 반도가 아니다. 그의 전기를 보면 제노(齊魯) 오월(吳越)사이의 강회지간(江淮之間)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곳은 반도가 아닌 대륙이다. 우리가 다시 확인할 것은 「삼국사」 권 46이 「남제서(南齊書)」 권 58이 말하는 서화에서 반도까지가 삼국시대의 영역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럼에도 「삼국사」를 부정하고 「삼국유사」를 부각시킴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학계가 정상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구나 일제나 독일의 나치의 선전상(宣傳相) 캡필스의 역사왜곡과 일본의 역사왜곡의 공식은 ‘진실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이를 10번, 백번을 거듭하면 거짓이 진실이 된다.’는 원칙하에 우리역사를 송두리째 왜곡하여 상고사는 아예 없애고 고조선도 절반을 자르고 왜곡을 하였다. 또한 삼국시대의 역사도 하나같이 왜곡하고 있다. 이는 일제도 우리 역사서(歷史書)를 전부 없애고 나서인데 남아 있는 삼국사에도 ‘고구려가 국사 「유기(留記)」 백권을 편찬한 것이 국초(國初)인 서기 1세기경의 일이다. 백제는 늦어도 근초고왕(近肖古王(서기 346년~376년) 때, 고흥의 「백제서기」가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신라는 거칠부(居柒夫)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고려는 「왕조실록」을 편찬하였다는 기록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바른 전통과 자립정신을 후손들에게 분명히 전하고자함이었다. 왜냐하면 “역사는 미래를 내다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서(史書)들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니 다른 사서에 의해서 이를 인용한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를 아는 일본은 우월관과 멸시관으로 우리정신세계를 훼손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현실은 어떠한가! 식민사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우리민족에게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심으려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며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역사로 왜곡한 역사를 일본에서 배운 이병도, 손진태 이기백등의 영향이 있다고들 하나, 그 제자들인 반도식민사관자는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왜곡역사가 그들 역사가 되고 있기에서다. 이들은 연구는 않고 일본학자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에서 전후 학문의 요직(要職)을 모두 잡은 그들에 의해서 우리사학계는 황패할 대로 황폐화 된 몰골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그대로 맹종하는 나머지 국내 여러 학자들의 연구한 결과 우리민족이 타민족보다 선진문화민족(先進文化民族)으로 고대부터 중원(中原)을 지배한 사실을 숨긴 채, 일제(日帝)가 왜곡한 역사를 우리역사로 알고 지금까지도 이를 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 815 광복 후에도 우리가 대륙의 중원을 정벌하고 정복하고 지배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이 강대(强大)한 고대국가로 그 영역이 너무 광역이기 때문에 부족장(部族長)이나 그 수장(首長)에게 우리의 관위(官位)나 작위(爵位)를 주어 그 부족과 제후국(諸侯國)의 풍습에 따라서 통치하는 것을 인정한 간접통치방법인 기미정책(羈縻政策)으로 제후국들을 통제했다. 이 기미정책(羈縻政策)을 교묘하게 쓴 것은 후에 당(唐)나라였다. 서역(西域)기타 복속지(服屬地)에 도호부(都護府) 800개에 가까운 기미주(羈縻州)를 두었는데 이는 고조선의 기미정책(羈縻政策)의 모방에서 성공했다. 우리문물제도가 선도적이었음은 배달국시대부터 잘 알려졌다. 그런데 일제(日帝)당시 한국침략을 침략하며 제멋대로 자기들이 필요한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는데 양심적인 일본학자는 일제(日帝)의 조선침략정책을 비판한자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인이면서 왜곡역사만을 따르는 자는 한국인이라고도 할 수 없고 학자는 더더욱 아닌 행태다. 우리역사 연구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우리역사연구의 문제점은 첫째로 유구한 1만년이상의 역사를 갖고도 사료(史料)가 없다는데 있다. 상고사(上古史)로부터 중세에 이르기 까지 사료(史料)가 전란(戰亂)과 정권(政權)이 바뀌면서 역사자료가 거의 없어져 이 자료를 어디에서 찾아내느냐가 무엇보다 문제가 되고 있다. 때문에 이삭을 줍는 심정으로 국내자료를 찾아다니고 또 외국의 역사자료를 찾는 시간이 너무 허비되는 점이다. 국내의 역사서적들도 핵심적인 서적은 다 살아져 없고, 거의가 왜곡된 것이 많고, 중국과 일본자료는 더 왜곡과 조작이 심해서 그대로 읽을 수 없는 사료가 너무나 많다. 최태영 선생은 후학을 위해 단군 고조선개국이 기록되어 있는 현존의 고서로서 김일연(金一然)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국호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평양조 「단군기(檀君記)」, 북애의 「규원사화(閨怨史話)」, 박세무의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의 저술로서는 명(明)나라 왕엄주(王弇洲-本名 王世貞)의 「속완위여편(續宛委餘編)」에 단군과 그의 치적 교(敎)가 기술되어 있다고 이시영의 「감시만어(感時漫語)」에 나와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고조선 연구에 충분치 못하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중국의 왜곡된 사서(史書)들에서 이삭을 주어오는 우리의 현실은 너무 비참하기까지 하다. 고려(高麗)에 이르러서는 몽골과 금(金)에 예속체제를 강요당한 정세에서도 김부식의 「삼국사(三國史)」가 편찬했다. 「고려왕조실록」 또한 조선조로 바뀌던 혼란기에 분실(紛失) 변작(變作)되고, 조선조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에 의존체제인데다 거란(契丹)과 왜(倭)의 장기간에 걸친 연속 침입으로 많은 사료와 문화재(文化財)가 소실 수거(收去)되었다. 또한 명(明)과 청(淸)의 예속(隸屬)이 강화된 체제하에서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기록되었다. 더구나 우리조상의 손으로 원형대로의 자주적 역사자료는 찾기 힘들게 된 데에 대해서 조선조 유생들의 비판적이고 자주적인 사관(史觀)과 중국경서(中國經書)에 대한 비판적 해설까지도 유교(儒敎)를 어지럽히는 ‘산문난적(散文亂賊)’이라고 해서 정부의 억압과 당파간의 견제(牽制)를 받아 왔다. 그런데 이들 반도사관 자들은 자신들의 무지는 탓하지 않고 여전히 변화가 없다. 20세기 초에는 일제강점기라서 일제의 의도(意圖)에 따라 역사와 강역(疆域)이 좁혀지는 날조로 역사(歷史), 지지(地誌), 사상(思想)에 관한 서적(書籍)들을 거둬들여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렇다하더라도 지금은 현실을 제대로 제 본분을 찾고 가야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은 문제이다. 글을 맺으며 일제(日帝)는 무리하게 우리상고사를 아예 없는 것으로 하고, 고조선을 전설(傳說)로 하면서 고조선(古朝鮮)까지도 대륙에서 건국하고 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대 고조선(大 古朝鮮)을 축소시켰다. 우리가 대륙의 주인으로서 고조선, 예맥,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伽倻)가 대륙에서 건국 하고 강성하여 타민족을 지배했는데 이를 제대로 밝히면 왜곡 조작이 다 드러난다. 특히 왜(倭=日本)가 양자강 이남에서 우리의 지배받은 사실을 숨긴 것을 이제는 바로 역사를 정립하고 가야 한다. 사기(史記)에서 삼국지(三國志)까지 왜(倭-衛)는 서화동쪽의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고 하였다. (史記 4, 漢書 7, 28, 三國志 30). 후한서(後漢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북사(北史), 남사(南史), 진서(晉書), [광개토태왕비]에서도 서화 동쪽에 있다고 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왜(倭)와 대만이 일본(日本)이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당서(唐書)에서의 기록은 기존 사기(史記)에서 남사(南史)까지의 왕계통의 기록은 없고 아주 동 떨어진 왕계보(王系譜)를 기록하고 있으며 대화주(大和州), 일본을 사용하고 있음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이 사기(史記)에서 남사(南史)까지의 왜(倭)지역이 옛일본이라면 현재의 일본(日本)역사기록이 될 수 없고, 현 일본(日本)지역의 역사기록이라면, 사기(史記)에서 남사(南史)까지의 역사기록하고는 무관해야 한다. 한무제(武帝)부터 당 태종까지 왜는 양자강 이남에 있다고 했다. 현재 있는 당서(唐書)는 건융(乾隆)4년 (1739년)에 교간된 것으로 일본지역의 역사로 왜곡하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왜(倭)의 지역에 주요인물이 바로 유명한 노자(老子)이다. 그 지명도 회계(會稽), 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 단주(澶州), 이주(夷州), 담이(澹耳)가 분명히 밝히고 있어 호남성 남월(南越)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데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은 무사안일(無事安逸)로 좌시(坐視)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서기전 3세기~9세기까지의 1200년간에는 흉노, 선비(鮮卑), 유연(柔然), 돌궐(突厥), 토번(吐蕃)등의 유목민족의 강대한 왕국을 건설하고 한족(漢族)을 지배한 상황과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는 유연제노오월(幽燕齊魯 吳越)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대륙을 지배한 역사를 감추고 숨긴 것은, 중국과 일본에 의해서 우리역사가 왜곡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0세기~20세기에 이르는 1000년간에는 중국이 자랑하는 요(遼-거란족), 금(金-여진족), 원(元-몽골족), 그리고 청(淸-만주족)이, 대륙을 지배하였는데 이들도 따지고 보면 우리역사에 편입되어야 할 동이(東夷)가 세운나라들이다. 중국이 대륙지배는 주(周), 진(秦), 한(漢), 당(唐), 명(明)등 이들 나라가 대륙지배는 고작 천여 년에 불과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1만년이 넘는 역사를, 반도 안에서 생성발전 한 것처럼 역사를 편성한 그 원흉은 김일연과 신채호의 책임이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이들이 반도 안에 역사를 가둠으로서 단군조선도 반도 밖이니 여진족(女眞族)으로 만들고 있는 이 현상은 반드시 바로잡고 가야 한다. 대만의 서양지(徐亮之)교수와 홍콩대학의 임혜상(林惠詳)등 중국학자들도 고대 한민족(韓民族)이 활약하던 현 중국내의 옛 지명들이 다 찾아낸 지금 역사연대를 줄이고, 좁히고, 우리민족을 모욕하고 보잘 것 없다고 한, 일제(日帝)가 침략을 위해 왜곡한 것을 다 아는 지금, 중국학자들도 상고시대 유라시아의 80%가 우리영역임을 말한 것을 왜 국내학자라는 사람들은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역사를 제대로 원상복귀 하도록 바로해가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槐一男,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上. 中, 下. 李民樹,'朝鮮傳‘.外 其他多數書冊을 參照, 本文引用 함을 밝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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