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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잃어버린 세계 제일의 거석 문화유산
[대구 완전 학습] 전 세계 고인돌 6만여 기 중 3000여 기가 대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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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의 고인돌 유적 중에서 가장 학생들에게 보일 만한 곳은 수성구 상동 정화우방팔레스 아파트 뒤편의 "상동 청동기 마을" 유적이다. 이곳은 고인돌과 청동기 집터 유적이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 집터와 고인돌 하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땅을 파고 그 위에 유리를 덮어놓아 현장답사에 아주 적합하다. 청동기 시대의 석검 모형과 움집 모형도 설치되어 있다. | |
ⓒ 정만진 |
대구는 1906년과 1907년 두 해에 걸쳐 '대구읍성'도 잃어버렸다.
본명과 대구읍성 상실보다 더 아까운 유산
대구읍성이 없어진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대구의 지석묘(고인돌)는 일제가 1927년 발굴, 조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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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있는 고인돌 유적 중에서 사장 시원스러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제일교회 뒤편의 고인돌 유적이다. 대구시 기념물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 |
ⓒ 정만진 |
문화재청과 서울대 박물관이 1999년에 공동 발간한
세계 고인돌의 82.5%가 우리나라에 있었다
4만5910기의 고인돌 중 2만9510기는 남한에 있고, 2만여 기는 북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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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있는 고인돌 유적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곳은 지하철 칠성시장역 북쪽 출구에 있는 칠성바위 유적이다. 아들이 일곱 명 있는 집에서 그 아들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각 바위에 아들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겨넣었는데, 험상궂은 세 바위에 이름이 각각 새겨진 세 아들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가 되고, 곱상한 세 바위에 이름이 각각 새겨진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해 높은 관리가 되었는데, 평범한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한 아들은 그냥 평범한 백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진을 보면 바위 가운데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네모난 표식이 있다. 이 바위에는 이의갑(李義甲) 세 글자가 새겨져 있어 "甲"을 통해 그가 장남임을 짐작할 수 있다. | |
ⓒ 정만진 |
따라서 이제는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라고 말하면 '거짓'이 된다.
대구에는 굉장히 많은 지석묘가 있었다. (중략)
누가 고인돌을 대거 파괴했는가
<대구 시사>도 '대구 분지를 흐르는 신천의 유역에 분포한 지석묘군은 일찍부터 알려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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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151-1번지에 있는 대구시 기념물 13호 고인돌은 사찰과 교도소를 좌우로 거느리고 있다. 고인돌은 화장사 안에도 있고, 사찰 담장에 박혀 있기도 하고, 교도소 철망 아래에 산재해 있기도 하다. 사진에 보이는 푸른 철망이 교도소의 것이고, 와가가 화장사 절집의 일부이다. 화장사 안에 있는 고인돌은 사찰 담장에 가린 탓에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 |
ⓒ 정만진 |
식민지 시대, 이 땅을 강제 점거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 대구시사>는 '(전국 고인돌 중) 첫 지석묘 발굴 조사가 (대구 이천동 고인돌을 대상으로)
최초의 고인돌 발굴도 대구에서 있었다
그런데 <대구시사>는 '일본인들의 행위 후에도 시가지의 확장으로 상석의 대부분이 제거되었다'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과 화순 일대보다도 더 많은 무려 30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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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못 유원지 옆의 상동 501번지에 있는 "상동 고인돌"은 대구시 기념물 1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지만 비교적 어수선하게 관리되고 있다. 고인돌 뒤로 넓은 주차장이 보이지만 사유지인 탓에 진입로가 막혀 있어 차량이 들어갈 수 없다. | |
ⓒ 정만진 |
대구 시내에서 접근하기 쉽고, 잘 가꾸어져 있고,
시외로 나가면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385-5번지 가창제일교회 뒤에 있는 고인돌 유적이 아주 볼 만하다.
가장 훌륭한 고인돌 답사지는 '상동 청동기 마을'
그외 달서구 진천동 유적지(사적 411호),
그 중에서는 고인돌에 새겨진 선사시대 그림들을 탁본할 수 있도록 모형 입석을 세워둔 진천동 유적, 돌마다
고인돌 유적 답사는 보람있는 일
그래도 고인돌과 같은 과거의 역사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일은 보람있는 인간 활동이다.
그런 뜻에서, 대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고인돌 유적지들의 주소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해 본다.
수성구 상동 171번지(청수로4길 64) 정화빌라 입구 앞, 상동 청동기 마을
수성구 상동 507번지(상동 507) 수성못 유원지 남쪽, 상동 고인돌 유적
수성구 신매동 601번지(신매로 21) 보성아파트 108동 앞, 시지 고인돌 유적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385-5번지(가창로 774) 가창제일교회 뒤, 냉천 고인돌 유적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517-1번지(비슬로522길 41) 일대, 천내리 고인돌 유적
북구 칠성동2가 302-239번지(칠성남로30길 20) 지하철 대구역 1번 출구, 칠성바위
달서구 진천동 470-27번지(진천로3길 85), 진천동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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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아래 청동기 시대 무덤 유적을 덮어놓은 유리 강판 위로 현대의 고층아파트가 비쳐 있는 기이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수성구 상동 정화우방팔레스 뒤편 "청동기 마을"은 학생들이 많이 답사하러 오는 곳이다. |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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