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글창제의 주역 -信眉대사와 세종대왕 -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소보 김문창 형님이 수년전에 전해준 적은 분량의 자료집을 보았었다. 거기에 쓰여진 신미대사의 이력과 업적은 가히 놀랄만하고 역사속에 묻혀지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 다시 소보형님이 강상원 박사 내용을 추가하여 보내 왔으니 이를 수정하여 널리 전하고자 한다. 이는 바로 코앞이 한글날이기 때문이며 이 땅의 한류가 세계의 한류로 우뚝 서 나아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강상원 박사의 노력과 그 강의를 시간들여 보기를 권하면서 이 땅의 우리말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이다. 참고로 신미대사는 무학대사가 잠들어 있는 회암사에서도 한때 기거한 스님으로 충북 영동의 김수온 선생의 형님이 되신다. 김수온도 스님이 되고자 했으나 신미대사가 이미 스님이 되어 그 장남의 역활이 자연스레 전해지게 되니 수온 선생 역시 불교적 이치에 해박한 유학자라 할 수 있다. 충북 연동 톨게이트 나가서 우측으로 바로 만날 수 있는 김수온 선생 묘소도 (충북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 답사의 묘미를 준다 하겠다.
투장이 언듯 선듯 보였던 그의 동생 김수화의 묘소 등도 마치 왕릉같으니 청산생선국수 등 주변 먹거리도 곁들여 가 볼만한 코스라 하겠다.
한글창제의 해와 달 ---- 같은 시대의 세종대왕과 신미(信眉)대사의 꿈 -----
들어가는 말
음과 양이 서로다르지만 보완하여 우주의 이치를 이루듯, 해와 달도 밤과 낮을 비추지만 서로가 공존하는 하나이다 . 그러므로 한글창제에서 해와 달인 세종대왕과 신미대사가 힘을 합해 온 백성이 말하고, 읽고, 쓸 수 있는 한글을 만드는 꿈을 이루었다. 세계유네스코는 1997년 훈민정음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한글이 세계인에게 추앙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로 전세계에서 가장 간단한 문자인 반면, 글자 수는 적지만 24자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8,778개로 그 쓰임새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한글을 창제하신분이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라고만 알려져 있는데, 역사를 잘 살펴보면 한글창제에 신미대사라는 고승이 피나는 노력과 헌신의 산물이라는데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그는 조선시대 유일하게 범어와 티벳어에 능통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한글로 이루어진 원각선종석보(세종20년 1438년) 를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한글창제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1. 세종과 신미의 가사와 업적 가) 세종대왕에 대하여 세종대왕(1397-1450)은 조선조 4대 임금이다. 이름은 도 (祹 행복 도)이고 자는 원정(元正)이며 사호는 장헌(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태종의 셋째아들이다. 어머니 원경왕후는 민씨이고, 부인은 심온의 딸이며 소헌왕후이다. 1408년 충령군에 봉해지고 1418년 6월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그해 8월에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의 소생으로 양녕, 효령, 충령, 성령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법을 잘 아는 충녕대군이 왕에 올라야한다고 주장하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왕위에 올라 태종이 가꾸어 놓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틀을 계승하고 이를 바탕으로 집현전학자들과 같이 농업과학기술과 의약을 발전시키고 법제를 정리하고 공법을 제정하면서 갖가지 의례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억울하게 말 못하고 사는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노력한 왕이다. 세종때 편찬된 중요저서로는 △효행록(세종10년,윤리 도덕서) △농사직설(세종11년 농서) △상감행실(세종14년 윤리 의례) △팔도지리지(세종14년 지리서) △무원록주해(세종15년 중국법률서) △향약집성방(세종15년 의약서) △자치통감훈의(세종16년 역사서) △동국세년가(세종 18년 역사서) △한유문주석(세종20년 중국문화) △국어보정(세종22년 역사서) △명황계감(세종23년 정치귀감서) △사륜집주(세종24년 중국법률서) △두시제가주석(세종25년 중국시문학) △운회언역(세종26년 훈민정음언역) △5례의주(세종26년 유교윤리도덕) △7정산내외편(세종26년 천문) △치평요람(세종27년 정치귀감서) △용비어천가(세종27년 훈민정음언역) △용비어천가 주해(세종27년 훈민정음언역) △제가역상집(세종27년 역수歷數) △의방류취(세종27년 의약서) △훈민정음창제(세종28년 훈민정음) △동국정음(세종29년 훈민정음운음) △사서언해(세종30년 유교경서) △고려사 (세종30년-문종1년 역사서 등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중 특기할 것은 훈민정음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나)신미대사에 대하여 신미대사는 영산김씨로 조부 김종경(1356-14160)은 조선2대 임금 정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에 등용된 집안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영동에 내려가서 향약(鄕約)을 만들고 순속지풍(純俗之風)을 지키다 사림들에 의해서 영동군 풍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신미대사의 부친 김훈(1381-1437)은 정종원년 1399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무예에도 뛰어 났다. 태종1년에 옥구진병마사로 있다가 조모의 상을 당하였으나 영동빈소에 가지 않고 상경하여 이때 왕을 뵙지 않고 몰래 상왕인 정종이 있던 인덕궁에 출입했던 일이 문제가 되어 불충불효 죄로 전라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영동 현에 안치되고 다음해에 외방종편(유배)이 되었다. 세종 원년에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우기로 자원하여 출전였으나 상왕인 태종은 죄인을 출정시켰다며 가산을 몰수하고 관노로 명하였다가, 변방으로 쫒겨 났다. 신미대사는 김훈의 장남 김수성(1403태종3년-1480 성종11년 )으로 태어났으며 , 밑으로 수경, 수온, 수화 등의 동생이 있다. 수성은 어려서 총명하여 10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나, 17세때 부친의 귀향으로 인해 속세를 떠나고자 결심하고 보은 속리산 복천암에서 승이 되었다. 신미는 중이 되고 행오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에 정진하던 중 대장경이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많음을 발견하고 고민하던 중 범어에 일가견이 있는 험허선사의 도움으로 이를 바로잡고자 원어인 범어와 티벳어 등을 공부하는데 열을 올렸다. 신미대사는 △최초 한글로 된 원각선종석보(세종20년 1438년 천불사 발간) 완성 △능엄경 언해후(세조와 신미의 발문) △ 법망경 간행(세조7년) △원각경언해(세조10년) △파지옥진언, 문수멸죄업주 (부처복장에 다라니그림과 글씨, 1984년 제주도 고관사 발견 문화재 등록) 등다수가 있다.
2. 한글창제의 꿈
세종은 한자가 우리백성들의 말과 서로 맞지 않고 배우기 어려워 백성들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어 이나라의 모든 백성에게 고루 혜택을 주어야한다는데 문제의식을 갖고 은나라의 갑골문자 주나라때의 금문, 설총의 이두문, 중국의 홍무정운(중국글자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 등을 연구하며 우리글을 만드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때 신미대사도 불경의 오역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다. 원문인 범어와 티벳어 공부를 하면서 신자들이 어려운 한문을 언제공부해서 불법을 깨우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알기 쉽고 쓰기 쉬운 한글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 3. 최초의 한글문서 신미대사의 ‘원각선종석보’ 세종은 신미대사가 젊은 나이에 불법이나 학문이 뛰어나고 사람됨을 알아보고, 신미대사가 만든 ‘원각선종석보’가 자신이 고민하던 우리글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아들인 세자(문종),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을 소개하여 스승으로 삼고 불법을 배우고 범어를 공부하는 등 한글을 같이 연구하게 했다. 신미대사가 최초로 한글로 만든 원각선종석보는 언해본 5권으로 목판을 찍었는데, 책말미에 정통3년 천불사라고 되어 있어 명나라연호인 정통 3년은 세종20년인 1438년이다. 이는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1446년보다 8년이나 빠른 시기에 발간된 것이다. 또한 세종은 집현전 산하에 정음청(1438년)을 만들어 신미를 학사로 불러 한글로 월인천강지곡 (부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수양대군이 한글로 옮긴 것과 부처님의 일생을 시의형식을 읊은 것) 등을 출판했으며, 문종 때 소학과 상감행실도 등을 만들었다. 이 정음청은 단종1년에 폐쇄된다. 그 후 언문청이 생긴다. 또 세종은 신미대사와 함께 집현전 학사들인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최항, 김수온 등과 토론하며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를 선포하고 세종28년(1446년 10월9일 ) 공식 반포하였다. 4. 최만리 등 유교신봉자가 한글창제를 반대한 이유 세종대와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 사대부들은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 6가지의 반대를 이유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정신 속에는 강한 자의 것은 옳고 , 옛 것을 바르고, 어려운 것이 진리라는 자가당착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대왕은 그들의 어리숙함 깨치고 꾸짖었다. 아래는 최만리가 올린 언문 반대 상소와 세종대왕의 답변이다. '세종실록'(제103권, 16~21장)에 의하면 세종 26년(1444년) 갑자 2월 20일에 그 때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여 ‘언문의 만듦이 지극히 신묘하여 그 창조적 지혜가 천고에 뛰어나지마는 신들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하면서 6개항의 긴 상소를 올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 하였는데 그 상소문은 다음과 같다. 가) 우리 조선은 조종(임금의 시조)서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으로 대국(중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는데, 어찌 중국을 섬기고 중국 문물이나 사상을 우러러 사모하는(사대모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나) 예로부터 구주(중국의 모든 국토)의 안에 풍토가 비록 다르오나 사투리에 따라 따로 글자를 만드는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골•서하•여진•일본•서번의 무리가 각각 제 글자가 있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라 족히 말할 것이 없다. 다) 신라 설총의 이두가 비록 비루하고 속되나, 다 중국 통행의 글자를 빌려다가 토에 쓴 것이니 , 문자하고 근본 떨어진 것이 아니다. 언문을 사용해 출세하게 되면 어려운 한자로 된 성리학을 멀리하게 되고 그것이 학문과 문화의 수준이 떨어지게 할 것이다. 라)백성들에게 송사의 불공평함이 생기는 것은 중국에서도 흔한 일이다. 그것은 옥리의 자질문제이지 언문을 만들어야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마)언문을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이다. 훗날 고침이 없도록 성급히 추진해서는 안된다. 바)동궁께서 비록 덕성이 성취되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성학에 정진해야하는데 언문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등의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다. 세종대왕이 한글반대 상소에 대한 반박 이에 세종대왕은 너희가 이르기를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고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왕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 줄 아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상소에서 ‘신기한 재주’라 하였는데 내가 늘그막에 날마다 책으로 날을 보낼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만을 좋아할 것이겠는가? 이 일은 사냥을 나가서 매를 날리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만일 세자로 하여금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이 이일을 맡아서 해야겠는냐? 너희들은 과연 신하로서 내 뜻을 분명히 알고 있을 터인데도 상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옳은 일이라고 할수 있는냐?고 호통을 쳤다. 이어 세종은 도승지에게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문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가두라고 명했다. 이들 유교도들은 태종때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교를 혁파해야한다면서 부처사리가 모셔져 있는 현등사(한양성 내에)와 대자암을 없애고자 갖은 상소를 올리고 신미와 세종과의 만남을 반대하고 감시하였다. 5.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이라는 증거 조선 초기 속리산 복천암에 거주하던 신미대사는 세종의 부름을 받고 복천암과 한양을 오가며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먼저 △유교성향이 강했던 세종이 숭유억불정책 속에서 혜각존자(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법호를 내리고 복천암에 아미타삼존불상을 조성해주고 많은 시주를 한 점 △수양대군 세조가 복천암에 찾았던 점. 조선신록에 온양과 초정에서의 목욕을 핑계삼았지만 속리산 복천암 방문이 실제목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생긴 장재리 대궐 터, 정이품송, 그리고 은구석이다. △유학자들이 세종이 죽자마자 부녀자의 글 통시글(화장실)등의 말로 훈민정음을 비난하고 험담했던 것 △신미대사 족보에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로 언급 (수성이 집현전 학사 득총어세종-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되었다. △한글창제 후 실험적으로 지은곡과 문장이 유교가 아닌 불교내용을 담고 있는 점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이 불교내용이다. △신미대사가 범어에 능통한점. 유학자 김수온(1410-1481)이 지은 복천보장을 인용하여 신미대사는 불경에 통달하였으나 한자에 오역이 많음을 알고 범어공부에 몰두하였다고 쓰여 있다. 6. 신미대사께서 주석하셨던 복천암(福泉庵)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진정선사(의상대사의 제자)에 의해 창건되어 올해로 꼭 1294년이 된 천년고찰이다. 복천암은 태백산맥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솟아 오른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천왕봉, 비로봉, 문장대 등 9개의 봉우리와 산중에는 한국최고의 법보사찰인 법주사가 있고, 그 속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호서제일의 선원이다. 복천암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많은 역사적 사실을 안으로 품고 있다. 특히 한글창제의 주역이셨던 신미대사께서 머물며 중창했던 사찰로서 친히 <무량수>편액을 남긴 고려의 공민왕은 물론 조선시대의 세종대왕, 세조대왕, 문종, 안평대군등 왕들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한글창제를 한 세종대왕과 세조대왕의 인연은 매우 깊다. 세종대왕은 신미대사의 한글창제의 공을 기리기 위해 친히 복천암에 아미타삼존불상을 하사하고 왕가의 원찰로 삼았으며, 세조대왕은 한글창제 때 함께 4년여동안 한글을 연구했던 신미대사를 친견하기 위해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순행하여 3일간 기도법회를 복천암에서 열기도 했다. 근대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하여 수곽과 다섯 개의 석등을 불사하고 국경을 위해 기도를 드렸던 곳이다. 특히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글 창제를 위해 큰 공을 세우신 신미대사의 업적이 안과 밖으로 가려져 있는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 것 같아 신미대사께서 평생 수행하고 머문 불토의 이 자리인 복천암에서 한글이 반포된 지 꼭 568년이 지난 오늘, 신미대사의 업적을 기록하여 남기는 그 의미 또한 남다르다고 하겠다. 7. 우국이세 혜각존자(나라를 도와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달은 사람) 세종은 숭유억불정책의 유교사회에서 신미대사에게 한글창제의 공로를 인정하여 법호(시호)를 내렸는데 ‘나라를 도와 세상을 이롭게 한 사람이라’ 뜻의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 (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는데 세종 때 전달을 하지 못하고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1451년에 전달했다. 이에 대해 문종에게 신하들이 유교국가에서 중에게 법호를 내릴 수가 있느냐 ? 따져 묻자, 문종은 ‘이는 세종께서 신미대사에게 내린 것이니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하며 시호를 내려 신미대사를 대선사로 추대했다. 8. 신미대사의 훈민정음 창제 미스테리를 밝힌 강상원 박사. 동서문명의 전문가인 정음학술원 총재 강상원(姜相源) 박사 강상원 박사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우리말의 뿌리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못한 속에서 한국어는 범어 태초의 연원이며 범어가 동서문명의 연원이라는 사실을 주장해 학계의 눈길을 모은 인물이다. 또한 불경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강박사의 신미(信眉)대사의 한글 창제설에 대해 살펴보면 신미(信眉, 는 속성(俗姓)이 영산김씨(永山金氏)인데, 영산김씨 족보를 추적해보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집현전학사’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집안 내에서는 신미가 집현전 학사였다고 내려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집현전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없다. 불교 승려는 무대 뒤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하지만 유생들의 줄기찬 반대로 인해서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혜각존자’라는 단어만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신미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범어(梵語)와 티베트어로 된 불교경전에 정통했던 대학자였으므로 혜각존자라고 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인물이니까 세종 사후에도 세조(世祖)가 불교승려인 신미대사를 만나러 직접 속리산까지 찾아갔을 것이다. 한글이 창제(1443)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에 집현전 실무 담당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 반대 배경에는 훈민정음의 원리적 근거가 유교가 아닌 불교였기 때문이고, 그 불교의 한가운데에 신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한글 창제 무렵에 간행된 국가적인 번역사업이 불교경전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24권 분량의 ‘석보상절(釋譜詳節)’이 그렇고, ‘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도 그렇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찬불가(讚佛歌)에 해당된다.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쉬운 한글을 만들었으면 ‘논어(論語)’‘맹자(孟子)’와 같은 유교경전들을 번역해서 백성들이 읽게 했어야지, 왜 하필이면 불경을 번역했을까. 이유는 한글창제의 주역이 신미대사였기 때문이다. ‘월인석보’는 세종의 어지(御旨)가 108자이고, ‘훈민정음’은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미 창제설’의 결정적인 근거는 신미가 당대 최고의 범어전문가였고 , 한글이 범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글창제의 진실을 설파하는 진옹월성스님 세계적인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글창제를 위해 큰 공을 세우신 신미대사의 업적이 안과 밖으로 가려져있는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 것 같아 신미대사께서 평생수행하고 머문 불토의 이 자리인 복천암에서 한글이 반포된 지 568년, 신미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한글창제의 주역을 담당했던 혜각존자 신미대사가 500여년전에 머물렀던 자취를 살펴보고 작은 깨달음을 얻기 바랍니다.
소보 김문창. 2014.9.30.
속리산 복천암 참고자료
▲복천사지(정법안 집필, 정관효담 발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혜각존자 신미대사,(삼각산 문수원 발간,법왕궁, 활안공저) ▲천강에 뜨는 달 (정찬주 저) ▲훈민정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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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전성남초등학교 24회 원문보기▶ 글쓴이 : 안 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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