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greatchosunsa/J96s/698
전봉준의 동학혁명행로 김종윤교수실
http://cafe.naver.com/greatchosensa/692
동학혁명이 일어난 고부는 중국 운남성 문산자치구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17
http://cafe.daum.net/greatchosunsa/7Nag/4
중국(中國)에도 호남(湖南) 전주(全州)가 있다
세상에는 닮은 꼴이 참 많다.
사람과 사람의 생김새, 생활 모습,
그들이 믿고 있는 신앙부터 크게는 국가 간의 문화와 역사를 통해서 비슷한 면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인종들이 다른 기후, 지형, 문화를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
서로의 닮은 꼴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 땅을 살펴보면 지금은 비록 행정구역상 시와 도의 경계로 나눠져 있지만,
지역 간에 나타나는 비슷한 문화 유산과 전통은
그 지역들이 동일 시대 역사의 길을 걸어 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중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인 전주(全州)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이자 조선왕조의 발상지이며,
조선시기에는 3도를 통할하는 전라감영이 자리잡았던 뿌리 깊은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북위 35°53′동경 127°14′에 위치하는 전주는
노령산맥의 지류인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그리고 완산칠봉 등이 시가지의 동남서방을 둘러싸고 있어
안온한 분지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 전주(全州)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또 하나의 전주(全州)가 있다.
놀랍게도 그 전주(全州)가
바로 여기! 북위 25°29′ 동경110°37′사이 광활한 대륙, 중국 땅에 있다.
분명 우리와 똑같은 지명의 전주(全州)로
중국의 광서장족자치구 계림시의 동북 지역에 위치한 도시다.
온전할 전(全), 고을 주(州) 지명의 한자까지도 같다.
더욱 놀라운 것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의 이름은 아예 호남(湖南) 전주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우연으로 돌리기엔 뭔지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정말 전라북도 전주와 중국 전주는 관련이 있는 것일까?
만약 관련이 있다면 어떤 관계로 연결이 돼 있는 것일까?
중국 전주(全州)는 우리의 전라북도와 한자까지 동일한 全州로서
묘족(苗族), 요족(瑤族)등의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있고 있으며,
기후는 습열다우하다.
동북부는 호남(湖南)의 경계이고
남부와 동남부는 흥안현(興安縣),
서부는 자원현(資源縣)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은 영남(嶺南)으로 들어가는 요충지로,
역대 전술가들이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끊음없이 다툼을 벌이던 곳이기도 하다.
교통이 발달하고 편리하며 총면적이 4021.19평방킬로미터에 인구는 78만이다.
기온은 따뜻하고, 토지는 비옥하며
강우량이 풍부해 각종 농작물이 성장하는데 적합한 지형이다.
경제작물인 생강, 마늘, 고추는 3대 보물로 손꼽히는데 향기로운 고추는 입맛을 돋구고,
맛있을 뿐만 아니라 병을 치료하는 효험이 있어 수출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논벼는 생산량이 높으며 쌀의 질 또한 깨끗하고 우수해
중국 남방의 '식량창고'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다.
이러한 풍부한 토지와 자원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중국 전주는
강을 끼고 있는 해상교통의 요지다.
강을 끼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있는데,
이곳이 결코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전주(全州)라는 지명과
939년부터 시작된 천년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라는 사실이다.
시내 한복판에서 북쪽으로 10여분을 걸어가면 이 곳에도 전주고등학교가 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중국에서 인기를 떨치고 있는 축구와 농구를 하면서
제 키만큼이나 높은 꿈을 키워간다.
웃고 떠들며 노는 모습들이 우리의 고등학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곳에서 지리를 담당하는 황도휘(36세)교사는 학교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전주고등학교는 1919년에 설립되어서
지금까지 83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125개의 교정이 있고,
현재는 38개 반에 학생은 3,500명 정도고 교직원은 153명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가 호남 일대에서 제일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점은
작년까지 고등학교 전체 성적에서 8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항상 자랑하는 연속 8년 우승 기록입니다.
2001년 시험에서 우리 학교는 상위 커트라인 안에 256명이 들어갔고,
3개의 명문 대학에 996명이 입학하여
전체적으로 1100명이 합격하는 결과를 냈습니다.
우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학습관리체제를 계속 받아들여
현재 규모보다 한 단계 발전시킬 계획입니다"
호남지역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닌 전주고등학교에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한국의 청소년과 닮아있는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연일 수 있지만 중국 땅 전주에서 지명뿐 아니라
기후와 풍토, 높은 교육열까지 우리와 닮아 있는 천년고도 전주를 만났다.
그렇다면 전라북도 전주와 중국 전주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중국에 전주라는 도시가 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 졌을 때
흔히들 중국의 명칭이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우리가 그 중국식 지명을 차용 했다는 중화사상의 선입관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전북 전주의 경우는
지명의 연대가 중국보다 앞서 나타나며,
이것은 기존 중국식 지명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중국보다 전북 전주가 3년 먼저 나타난다는 유일한 단서 만을 가지고 취재를 시작 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12일간의 중국 취재와 5일간의 제작과정,
그리고 20여일만에 방송까지 완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처음부터 무리였다.
12일의 취재 기간 중 5일 동안 비가 내렸다.
촬영은 힘들었지만 비 덕택에 5일간은 현지 조사와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할 수 있었다.
그나마 행운이었다.
이성계낳은 전주 이씨족은 중국 호남성 전주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들
09.06.25 18:43
http://cafe.daum.net/greatchosunsa/7NXz/2
출처 :한국고대사 원문보기▶ 글쓴이 : 윤복현
사료로 보는 전주 이씨의 뿌리는 당나라를 개국한 이연의 줄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연의 조상도 따지고 보면 동방족 출신이다. 북방 유목민들인 선비족으로 구성된 당나라는 본래 단군조선의 갈래로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한 고구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선비계 당나라와 흉노계 신라의 고구려 침략을 천자국에 대한 반란행위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全州李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正德二年 十年月 成桂之自立也, 與宰相李仁人本李異族. 永樂間, 降祭海岳祝文, 稱成桂爲仁人子, 而<祖訓> 亦載仁人子成桂更名旦. 後成桂子芳遠秦辨, 太宗許令. 至是修<大明會典> 정덕2년12월에 성계가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 재상이인인은 본래 다른 민족이다. 영락제 때, 산과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축문에 이르길, 성계는 인인의 자로 불리는바, <조훈>에 인인의 아들 성계의 이름을 단으로 바꾸었다. <이하는 이성계의 출신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번역생략>
嘉靖 八年八月, 陪臣柳복上言, 國祖李旦系本國全州人. 二十八世祖瀚任新羅爲司空. 新羅亡, 六世孫競休入高麗. 十三世孫安社任元爲南京千戶所達魯花赤(다루가치). 元李兵興, 安曾孫子春與男成桂避地東遷.
가정 8월8일 신하 유~상이 올려 말하기를, 국조이단의 계보는 본국(명나라)의 전주사람이다. 28세조상 한(이한)은 신라의 사공에 임명되었다. 신라가 망하자 6세손경휴는 고려에 입조하였다. 13세손안사는 원나라의 남경천호의 다루가치(달로화적)의 소임을 맡았다. 원나라 이의 군대가 일어서자, 안사의 증손자 자춘은 아들성계와 함께 동쪽지역으로 피신하여 옮겨갔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cafe.daum.net/mookto
참고: 위 명사에 대하여 도불원인님이 원문초벌번역한 것을 토대로 삼태극님이 까페 삼태극에 맞게 다시 번역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대륙의 호남성 형문의 광서성 인접지역으로 나온다. 자료제공:도불원인
2.설명: [유래]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하여 신라 문성왕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로 전주에 살아온 호족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의 아들, 즉 시조의 22세손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종시조가 되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 경주이씨(慶州李氏)로부터의 분적설(分籍說) >
우리 나라 이씨 중에서는 역사가 제일 오래 되었다.
<경주이씨대동보> 총론편을 보면 경주이씨의 유래가 나온다. 자못 전설적이지만 신라 육 성의 시조 6명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곧 육인천강설(六人天降說)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곳은 육촌(六村)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인데 나중에 급량부(及梁部)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6촌장이 알천(閼川)의 바위 위에 모여 양산(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번갯빛 같고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 여, 찾아가 보니 검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6촌장이 그 알을 깨 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이상히 여겨 그 아이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불렀다. 이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기원전 57년(前漢 宣帝 五鳳 元)에 이를 왕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알평은 아찬(阿餐) 벼슬에 오르고 기원전 32년(新羅 儒理王 8)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알평(李謁平)이 경주이씨의 시조인데, 과거의 <경주이씨족보>에는 이알평의 먼 후손 이거명(李居明 : 蘇判公)을 중시조 1세(世)로 삼아 계대수(系代數)를 따져 왔다. 그래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 몇 대가 흘러간 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근 2백년 전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다.
(1세)알평(謁平)- (2) 유 - (3) 타 - (4)중가 - (5) 석 - (6)문상- (7)방
위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6세손 이거명까지의 계통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世)로 따져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 전주리씨와의 문제는 바로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翰)이 관계되는 것이다. 곧 진두씨의 약력은 이러하다.
"공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 장사내사상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세장보(世藏譜)>를 참고하건대 이분의 손자 한(翰)이 완산리씨의 시조가 되었다더라." 이진두의 둘째 손자 한이 우리 전주리씨의 시조 사공공이 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리씨의 시조이신 신라 司空公 이한(李翰)의 묘소. 전주시 덕진동 건지산에 있다.
역대 제왕도 묘역일대를 보호 하였다. 특히 고황제께서는 광무3년(1899)에 단(壇)을 모으고 매년 1회 제사를 봉했으며 450정보의 단역壇域)을 마련하게 하였다. 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너비 180cm, 두께30cm, 높이 202cm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된 대한조경단이라고 쓰여진 전제가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변이 7.2m의 정방형의 3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호남지』 전주 단묘에 의하면, 조경단 재건지산 세전 사공공기재차무징 고종기해설 건각입비 수봉관일이라 하였는데, 고종기해는 광무3년이므로, 이때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 지주(知州:지금의 지사(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 : 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춘(椿 : 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 : 영흥(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목조(穆祖 ? - 1274 : 원종 15)
본관은 전주. 이름은 안사(安社). 장군 양무(陽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상장군 강제(康齊)의 딸이다. 1394년(태조 3)에 태조가 4대조를 추존할 때, 덕(德)을 베풀고 의(義)로써 행하였다 하여 목조로 추존하였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경부터이다. 이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인(隣)이 이색(李穡)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인 것같이 보이므로 전주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1174년(명종 4)에 이의방이 피살되자 인은 낙향하였는데, 그의 손자 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전주의 토호였던 안사가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 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하여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으므로 1290년(충렬왕 16)에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는데, 고려 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사로 삼았다. 당시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하여 싸우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의 무리한 입도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이 신집평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이로써 안사가 머물고 있던 의주는 쌍성총관부에 예속되었고 안사와 그가 거느린 유이민 집단은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에 편입되어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산길은 이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회유, 의주에서 개원로 난징(南京)의 오동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안사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하여 원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고, 앞서 쌍성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탁청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 뒤 그는 20여 년 동안 오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그 세력 기반을 아들 행리(行里)에게 넘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 토벌에 공(功)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 : 嫡)과 왕자군(王子君 : 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李太祖)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령(咸寧) ·함창(咸昌) ·함원(咸原) ·함천(咸川) · 함릉(咸陵) ·함양(咸陽) ·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완원(完原) ·완천(完川) ·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 ·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태종 14년(1414)에 건립되었다. 조경묘는 경기전 담 밖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모셨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게 되자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 등은 경기전 이태조 영전과 조경묘 위패를 받들고 전주 동북쪽에 있는 위봉산성의 행궁에 봉안하였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혁명적 의지와 봉건적 규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현장이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 )유형문화재 2호, 16호)
왕대비 ·왕비 ·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 : 외척(外戚))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유지되어왔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三議政) 22명, 문형(文衡: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 %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琛, 세종(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 대제학등, 중략..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측에서는 대략 5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1858년(哲宗 9)에 李容肅이 편찬·간행한 全州李氏族譜로 度祖의 長子인 李子興 (桓祖 子春의 兄)을 中祖(1世)로 하고 있다. 이전에 두번에 걸친 족보편찬이 있었고 이어 容肅의 父가 修譜作業을 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容肅이 完成하였다. 출처: http://kyujanggak.snu.ac.kr/BA/SGP-038-004120.htm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애매 모호하다.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세직(世稷 :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리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이와같은 주장은 이성계가 성계조선의 개국의 국시로 삼은 사대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것으로 오히려 전주이씨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것이다 . 중국에서 왔기 때문에 중국에 있는 명나라를 어버이로 섬기는 사대주의 [위화도 반역을 하는 명분으로 4불가론을 제시 그 중, 이소역대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거역하는것->이것은 안된다]를 표방한 정권이 이씨조선정권이기 때문이다 까페 삼태극 주) 또 경주이씨에게서 왔다는 기록은 경주이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니까 혹시 갈라져 온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과 전주이씨의 이한(李翰)은 동항렬(同行列)이므로 이분이 우리의 시조라면 연대는 비슷하리라 본다.
그러나 기록이 분명치 않으니 우리의 시조 신라 사공(司空) 한(翰) 할아버님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규명될 수 있는 후일을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
출처: 전주이씨 누리집->http://www.jeonjuleessi.com/index.php?pgurl=etc/jeonjuleessi_04
제양 (일명 소전少典) 중견(둘째아들, 언(偃)"씨를 사성 받았다.)
문헌
<통지(通志)·씨족략(氏族略)·관직으로 씨를 삼다(以官爲氏)>
"이(李)씨는, 고요(皐陶)가 요(堯)의 대리(大理)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 관직에 부름받은 족을 이(理) 씨로 삼았다. 상조(商朝) 반년에 이정(理征)이 이(李)씨로 바꾸었다.
<성해(姓解)> 고요상(皐陶像) 전설 가운데 동이족 수령인 고요(皐陶)는 일찍이 요순(堯舜)의 대리직(大理職:형법을 관장하는 관리)에 임명되니, 그 식솔 제족들이 이(理) 씨가 되었는데 고자(古字)중에 "이(理)"와 "이(李)" 자는 서로 상통해서 쓰는 글자였다.
<비급신서(秘 新書)>
「성찬(姓纂)」 및 「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를 인용해 기재하기를, 전욱( 頊)은 대업(大業)을 낳고 대업은 여화(女華)를 낳고 여화는 고요(咎繇성 고 또는 허물구, 역사 또는 부역 요⇒ 皐陶)를 낳았다"
<사기·오제본기(史記·五帝本紀)> 고요(皐陶)가 대리(大理)가 되었다
<관자법법(管子法法)> <사기·위세가(史記·魏世家)>에서는 "이극(李克)" <시외전(韓詩外傳)> "이극(里克)"이라 기록
<사기정의(史記正義)>
<세기(世紀)>를 인용해 고요(皐陶)에 대해 설명하기를,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곡부(曲阜)는 언(偃) 땅인데, 고로 제순(帝舜)이 이로 인해 사성(賜姓)을 내렸으니 왈 "언(偃)"이다" (일심 주석 : 고요의 둘째 아들인 중견이 언씨를 사성받은 것임, 제왕세기)
이는 「좌전(左典)」가운데 설명한 바 있는, "천자가 태어났으므로 사성을 내렸다(天子因生而賜姓)"이다. 고요(皐陶)는 요(堯)가 염황이(炎黃夷:염제, 황제) 연맹 수령이 되었을 때에 이관(理官)으로 임명되었으니, 곧 사법(司法)을 관장한 장관(長官)이다.
<제왕세기>
가득 차 넘칠 "영( )" 씨 성(姓)을 사성 (賜姓) 받았다"
이후, 언(偃) 성(姓)은 고요(皐陶)를 조상으로 받들고 성(姓)으로 씨(氏)를 삼았다"
<신당서(新唐書)·종실세가표(宗室世家表)> (이정(利貞)의 56대 당고조 이연(李淵)의 세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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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빈 ㅋㅋㅋ..저도 전주 리씨 완산군파... 태종 때 리천우가 나오는데 제 직계입니다... 09.06.26 13:45
천기누설 참...뭐가 팩트고 뭐가 아이디어인지.... 한반도에 전주이씨는 계속미워해도 될까요.. 반도에 전주이가는 한반도원주민이고 1910년이후 세팅되엇을 확률도 이겠지요 |
이처럼 밤 낮 없이 일한 결과, 지치고 힘들었지만 중국 일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필자가 15년만에 고향 전주에 돌아와서
역사와 문화의 땅 전북을 새롭게 재정립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면에는
필자의 남다른 고향에 대한 집념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그것을 소개한다.
난, 고향 전주를 무조건 좋아하진 않는다.
어렸을 적 TV를 켜면 식모, 사기꾼은 거의 80~90% 전라도 사람 이었다.
고향사람들과의 대인관계가 문제가 되어 밤잠을 설칠 때도 많았다.
당연히 큰 인물이 나오기 힘든 곳이었다.
등을 가슴에 묻고 통곡의 세월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러한 원인을 역사의 한(恨)으로 보았다.
전라북도는 백제의 멸망, 백제의 부흥운동, 견훤의 백제 계승,
임진왜란시 웅치전투, 조선시대 정여립의 난, 동학혁명 등
시대별 로 수없는 격변의 현장에 늘 한가운데에 있었다.
또한 그에 따른 학살은 셀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방어능력이 전혀 없었으므로, 남편, 아들, 친척, 친구
이러한 요인들이 역사의 한(恨)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고향이 싫더라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15년만의 귀향을 통해
이러한 한을 풀고 전북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동안 가진 자에 의해 왜곡 되어온 역사를 복원 하는 것이었다.
방송이 직업인 나는 프로그램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 필자는 1년여에 걸친 장기 취재를 통해서
"역사스페셜-17미터 거북바위의 증언,
견훤의 전주 왕도프로젝트(KBS1, 5/4)"와
"최초보고-백제의 타임캡슐, 중국에도 전주가 있다(KBS1, 4/29)"의 두 프로그램을 제작,
금암동 거북바위가 갖고 있는 미스테리를 추적함으로써,
백제왕 견훤의 포부와 야망을 규명 하고자 했다.
또한 거북바위는 전주에서 바다로 나가는 배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신의 상징물이며,
만경강 뱃길은 궁극적으로 중국 양자강과 이어짐을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라북도와 중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지명 전주가
뱃길의 출발점이며 도착점이라는 상관 관계를 정립하여
백제사를 다시쓰는 단초를 제시 하고자 했다.
http://cafe.daum.net/greatchosunsa/7NXz/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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