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룡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강연하였다.
신라는 鑄造(주조) 기술력이 뛰어나 진흥왕이 文仍林(문잉림)에서 鑄造(주조)하여
佛像(불상)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완성시키니 아주 좋은 모양이 모두 다 갖추어졌다.
이로서 아육왕은 근심이 없어졌다. 하여 無憂王(무우왕)이라 불렀다.
그 후 대덕 慈藏(자장)이 西學(서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중천축국)의 오대산(五臺山)에 도착하였는데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너희 나라에 있는 황룡사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가섭불”이 강연하신 곳이니라,
그 지역에 아직 까지 가섭불의 宴坐石(연좌석)이 있느니라.
고대 西天竺國(서천축국) 無憂王(무우왕:아육왕;아소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년이 지난 뒤에 너희 나라에 도착하여 불상을 주조로 완성하여 황룡사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개 부처님의 위신력과 석가모니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別記(별기)에 기록된 것은 符道(부도)와 같다)
황룡사에 佛像(불상)을 성공한 후에 東竺寺(동천사)의 三尊佛(삼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 안치하였다.
寺記(사기)에서 이르기를 진평왕 5(6)년 갑진(584년)에 대웅전을 만들었고
선덕왕때 이 절의 초대 주지는 眞骨(진골) 歡喜師(환희사)이고
제 2대 주지는 慈藏國統(자장국통)이고
그 다음은 國統惠訓(국통혜훈)이고
그 다음은 廂律師(상률사)가 주지가 되었다.
지금은 고려 고종때 몽고병이 침략하여 불에 탄 이래로 大佛像(대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다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여래상만 아직까지 남아있을 뿐이다.
[2]. [황룡사 9층탑 :삼국유사]
신라 제 27대 선덕왕 제위 5년(636년)에 慈藏法師(자장법사)가
西學(서학:서역국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중천축국)으로 유학하여
五臺山(오대산)에서 文殊菩薩(문수보살)이 감응하여 佛法(불법)을 전수 받았다.
또한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너희 신라국왕이 바로 천축국(天竺國)의 刹利種王(찰리종왕)이며,
부처님의 수기(受記)를 받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유인록(有因錄:유인씨의 기록문)에 東夷(동이)는 共工族(공공족)과는 같지 않느니라.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들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邪惡(사악)한 종교를 많이 믿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혹 天神(천신)이 재앙을 내리고 있으나 多聞比丘(다문비구)가 신라국 안에 있기 때문에
君臣(군신)이 편안하고 만 백성들이 화평한 것이다. 라고 말을 마치자
이내 몸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중략)
신라에서 황룡사 9층탑을 완성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1,日本(일본), 2, 中華(중화), 3, 吳越(오월), 4, 托羅(탁라), 5, 鷹遊(응유), 6 靺鞨(말갈),
7, 丹國(단국:거란), 8, 女狄(여적:여진), 9, 穢貊(예맥)의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신라 왕조는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죄인을 사면하고, 팔관회를 베풀면 외적이 침범하지 못하고 곧 진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기 643년 16일 자장법사는 본국으로 돌아와 탑의 건립에 대한 사항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듣고 群臣(군신) 회의를 열었다.
군신들이 말하기를 백제의 工匠(공장)이를 초청하여 건립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초청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의 工匠(공장) 이름이 阿非知(아비지)라는 사람이 왕명을 받고 신라에 와서
木石(목석)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맡고 신라는 伊干(이간) 龍春(용춘 일명 龍樹(용수)가 맡아
이 역사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거느리고 같이 일한 小匠(소장)은 200명이나 되었다.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백제의 工匠(공장) 阿非知(아비지)의 꿈에
백제 본국이 멸망하는 모양을 보고 아비지는 마음속에서 의심이 일어나 공사일을 중지하였더니
갑자기 대지가 진동치며 밤중과 같은 어둠 속에서 늙은 老僧(노승) 한사람과 젊은 장사 한사람이
金殿門(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老僧(노승)과 壯士(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백제의 아비지는 공사를 멈춘 것을 후회하고 마음을 고쳐 9층탑을 완성시켰다.
[3]. [삼국유사 탑상4, 황룡사9층탑]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643년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서기 645년 신라의 수도,
경주(서라벌) 남쪽에 높이 225척(80.16m)의 거대한 목조 탑이 창건했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에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으나
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불탄 이래 중수되지 못했다. (중략)
또한 삼국사기 및 寺中古記(사중고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553년) 황룡사를 처음 창건한 후에
선덕왕 시대인 貞觀(정관) 19년 을사(645년)에 처음 탑을 이루고
제 32대 孝昭王(효소왕)이 즉위한 7년 聖曆(성역) 무술(698년) 6월에 절에 벼락이 떨어졌다.
(寺中古記(사중고기)에서 이르기는 聖德王(성덕왕) 시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시대는 戊戌(무술)년이 없기 때문이다) 제 33대 성덕왕 경신(720년)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 무자(868년)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시대에 세 번째로 절을 다시 세웠다.
고려 光宗(광종) 즉위 5년 계축(953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顯宗(현종) 13년 신유(1021년)에 네 번째로 절을 重修(중수)하였다.
또 고려 靖宗(정종) 2년 을해(1035년)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고
또한 文宗(문종) 갑진(1064년)에 다섯 번째 重修(중수)하고
또한 憲(獻)宗(헌종) 말년 을해(1095년)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고 肅宗(숙종) 원년 병자(1096년)에 여섯 번째로 중수하고
또 高宗(고종) 16년 무술(1238년) 겨울에 몽고 병이 침입하여
西山(서산 : 선도산)에 병사 들이 불을 질러
황룡사 탑과 殿閣(전각)과 丈六尊像(장육존상)과 절집이 모두다 재앙을 입었다.
➤ 경주의 황룡사는 가짜이다
刹註記(찰주기)에서 이르기를 황룡사 9층탑의 높이는
225척(80.16m)이고 鐵盤(철반)위의 높이가 42尺(척)이고 철반 밑은 183尺(척)이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화관광부와 문화재청이 경주시와 함께
경주를 역사문화도시로 확정하여 ‘경주 황룡사지’를 복원키로 하고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약 400억 원을 들여
황룡사지내에 회랑과 금당을 복원하고 특수영상을 이용하여 황룡사 9층 목탑을 재현하겠다. 고 발표하였다.
➤ 하곡현은 중국의 산서성인가? 경남 울산군인가?
고조선 5천축국 중의 1국이었던 서천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실은 큰 배가
산서성(山西城) 河曲縣(하곡현)의 絲浦(사포)에 들어왔다.
황금이 도착한 이 하곡현은 이병도가 조작한 한반도 속의 경남 울산 지방일까요?
중국 산서성의 하곡현일까요?
[삼국유사 탑상 제 4] 溟州(古河西府也)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명주(고하서부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
즉 명주는 (고대 하서부이다) 또한 溟州(명주)는 중국의 5대산에 있다.
五臺山是白頭山大根脈 : 5대산은 백두산의 뿌리가 되는 큰 산맥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 3 지리 1의 良州(양주)]
➤ 臨關郡(임관군)은 본시 毛火郡(모화군:蚊化(문화)라고도 씀)이다.
聖德王(성덕왕)이 城(성)을 쌓아 일본 적들의 통로를 차단하던 곳이다.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慶州(경주)에 합속하였다. 이 임관군에 縣(현)이 둘이 있다.
1 東津縣(동진현)은 본시 栗浦縣(율포현)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蔚州(울주)에 합속시켰다.
2.[河曲(一作河西)縣 婆娑王時 取屈阿火村 置縣 景德王改名 今蔚州]
해설= 河曲縣(하곡현)은 河西縣(하서현)이라고도 한다)
婆娑王(파사왕)때에 屈阿火村(굴아화촌)을 쟁취하여 縣(현)을 설치하고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蔚州(울주)라 한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주(註)
河曲縣(하곡현)의 絲浦(사포:지금 蔚州(울주->울산군(蔚山郡) 谷浦(곡포)에 왔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왕에게 충성했던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梁州(양주)를 경남 양산군에 속하고
臨關郡(임관군)을 현재 경북 월성군 외동면 일대를 울산군이라 하고
河曲縣(하곡현)은 현재 경남 울산 지방이라고 임의대로 조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또한 산서성(山西城)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를 포진도(浦津渡)로 지명을 바꾸어버렸다.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의 연혁]
울산(蔚山)은 일제식민지시대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울산군의 21개면이 14개면으로 통합되고,
언양군은 폐지되어 언양군의 6개면이 5개면으로 폐합,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울산군의 상부면·내현면이 통합된 부내면이, 1916년에 울산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1년에 울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62년에 울산읍·방어진읍·대현면·하상면 전역과 청량면·범서면·농소면의 일부지역을 병합해 울산시로 승격하고,
이 지역에 울산공업단지를 건설함에 따라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울산광역시 연혁참조]
➤ 울산시 동구 동부동의 가짜 동축사
울산시 동구 동부동의 가짜로 만든 동축사는 울산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인정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동축사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동축사가 아닙니다.
동축사는 일제식민지시대의 1931년 창건(중수)하였다.
일제식민치하에서 가짜 동축사로 지정한 인후,
1975년 현대그룹 정주영회장 등이 시주하여 주지 도암(道庵)스님이
중창하였다. 이때 60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새로 지은 범종각에 두었다.
동축사 석탑은 본래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1977년 중창할 때
경내에서 약 40m 서남쪽으로 옮겼다.
기단의 한변 길이가 1.8m, 높이 3.25m이다. [동축사 연혁참조]
➤ 중국의 산서성 하곡현(河曲縣)에 동축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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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산서성 하곡현(河曲縣) ©플러스코리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