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경술국치 [사진 문서]자료
History is the communication 歷史.29.com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은 제2차 대전 패망 40주년 식사(式辭)에서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 된다’는 말을 했다.
바이츠제커의 말은 독일인의 반성을 촉구한 말이니 그 의미를 달리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역사의 본질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29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 99년이 되는 날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전후의 혼란, 을미년 명성황후가 왜의 흉인(凶刃)에 잔인하게 시해당했을 때 이미 망국의 맹아는 크게 자라고 있었다.
당시 열강과 손을 잡고자 했던 사람들은 ‘어느 외국도 진실로 우리 편이 되어 줄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했던 것 같다. 1870년대부터 1910년의 근세사 자료에서는 국가를 위한 원려는 없고, 망해가는 나라의 권력을 잡기 위한 치졸한 음모의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이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누구도 믿지 못할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시해당한 왕비의 ‘폐서인 조서’에 날인을 강요하는 친일 내각과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내 손가락을 잘리는 한이 있어도 날인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저들은 자기들 멋대로 ‘폐서인’ 조서를 만들어 공포하였으나 세자가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며 반발하자 폐서인을 면하고 ‘빈’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고종의 의도된 핑계에 의해 국장이 몇 번이나 연기된 끝에 ‘황후 추존’ 직후인 1897년 11월 22일 아침 홍릉에 모셔졌다.
참혹하게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시신이 땅에 묻히는 데 2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니 지하에서 어찌 편히 잠들 수 있었겠는가.
일제의 간교한 계략과 미국·일본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아래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졌을 때 민영환 선생의 자결과 신규식 선생의 자결 기도는 조선 민족의 저항정신을 보여주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해 조선 민족의 의기를 세계 만방에 알렸다.
경술국치 때는 황현 선생의 자결이 민족의 충의를 흔들어 깨웠다. 당나라 때 역사가 유지기(劉知幾)는 ‘사관에게는 재능·학문·식견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조선 성종과 연산 때 김일손의 직필이나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동호직필’ 고사와 제나라 태사 백·중·숙·계(伯仲叔季) 형제의 이야기도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고사다.
한국인 모두가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에 분노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목소리를 높이지만 대다수 젊은 지식인조차 ‘독도(獨島)’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기초 한자어조차 읽고 쓸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옛 자료를 찾아내고 해독하여 연구할 능력은 있는 것인가. 아직도 ‘경술국치’를 ‘한일합방’이라 가르치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 ‘황후’로 추존된 분을 ‘민비’라고 폄훼해 부르며, 소리 높여 민족과 애국을 외치는 이는 많지만 국치일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국가가 편하지 않은 이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치욕의 날을 맞으며 순국선열의 유지(遺志)와 국가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박광민 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한일병합 [韓日倂合]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이르는 말.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일제는 러일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에 기초해서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어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또 일제는 한국식민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郞-Taft密約]’,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한 일제는 9월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한국 안에서 배제하였다. 한국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얻은 상황에서 일제는 1905년 11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리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늑결(勒結)하였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권도 합법적으로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같은 달 27일에는 언론탄압을 목적으로 광무보안법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민의 항일활동을 한층 강화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8월 1일부터 한달동안 한국식민지화에 최대 장애요인이었던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뒤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하여 항일운동을 강력하게 진압하였다. 그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식민지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데라우치는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를 정비하였는데, 일제는 이미 1907년 10월부터 한일 경찰을 일원화하여 전국의 경찰 직무를 장악한 상태였다. 여기에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하여 종래의 사법·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탈취하였고,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하였으며,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망하였다. -----------------------------------------------------------------------------------------------------------------
경술국치 99年。美國 - 한일합방 과정 日本에 천문학적 재정지원
1910년 경술국치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고 일본에 천문학적인 재정지원을 했다는 사료가 책으로 공개됐다. 서울대 출판부는 25일 미국의 재야 사학자 캐롤 카메룬 쇼(Carole Cameron Shaw·61·여·작은 사진)의 저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큰 사진)’를 발행했다. 책은 1901년부터 미국의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정부가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도서관과 미 국회도서관 등에서 발굴한 이 사료들은 1900년대 초 한·중·일에서 근무했던 미국 공사가 루스벨트 대통령 및 국무장관과 한국 정책을 협의한 편지와 문서, 보도 문건 등이다. 특히 일본이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루스벨트 대통령 주선으로 미·영의 대기업들로부터 전비 차관을 받은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쇼씨는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앞장서 앤드류 카네기의 철강회사, 제이피 모건 등 미 대기업을 통해 일본의 전쟁비용 약 7억엔(현재 14조원 상당)을 조달했다는 사실을 ‘강철왕’ 카네기의 편지 등을 통해 확인했다. 그는 또 미국이 1905년 러·일 전쟁 처리를 위한 포츠머스 회담에서 한국과 중국을 배제하는 전략을 썼다는 것도 조약 참여자들의 개인문서를 통해 밝혀냈다. 학계에서는 쇼의 책이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과정에 미국 정부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미국측 원본자료를 이용해 밝혀낸 최초의 서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은 그 동안 미·영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용인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쇼의 연구결과로 미국이 인정한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이 부도덕하고 위법한 것이었다는 반박이 가능해졌다. ‘한국병합에 대한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팀’을 주관해온 이태진 서울대 인문대학장(국사학과)은 “국내 학자들은 그동안 미국 자료에 접근이 어려워 일본 주장에 대한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상황”이라며 “쇼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논쟁을 정당하게 풀어나가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버드대학 동아시아 학과에서 ‘한국어’ ‘근대 중국사’등을 전공한 쇼씨는 59년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2000년 주미 한국대사관의 역사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쇼씨는 “100여년 전 우리(미국)가 ‘공공의 선’이란 미명하에 작은나라(대한제국)의 국권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해보라”며 “미국인 한 사람으로서 사죄의 뜻을 표하고 싶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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