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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우리말의 멋진 표현들


우리말의 멋진 표현들


-산비탈양-


우리말의 표현엔 유독 몸을 소재로한 것이 많다.


'배터지게 먹어봐야..' '박 터지게' '목 터지게'

또한 '목 빠지게' '눈 빠지게' '쌔 빠지게' '배꼽 빠지게' '뼈골 빠지게' 등

무엇이든 몸에서 일단 빠져 나가거나 터져야 직성이 풀리는 표현은 왜 그럴까?


우리말의 표현은 너무도 직접적이고 감각적이라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가까운 감각의 실체를 찾다보니 그것이 우리의 몸이라 그런 것 같다.

몸보다 더 직접적인 대상이 어디 있겠는가.

머리위에서 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모든 부분들을 우리는 공평하게 다 인용한다.

 

머리..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뒷통수치다. 박(머리)터지게. 골 때리다.

눈 .. 눈이 높다, 낮다. 눈 밖에 나다. 눈 코 뜰새 없이. 눈에 익다.

눈에 밟힌다. 눈 빠지게. 눈 뜨고 코 베가는. 눈높이에 맞추다. 눈이 맞았다.


코 .. 큰코 다친다. 코를 납작하게. 콧방귀. 콧대가 높다.

코를 꿰다. 코앞에 닥치다. 내코가 석자. 코가 꺾이다. 코딱지만한.


귀 .. 귀가 얇다. 귀 따갑게. 귀가 뚫린다. 귀에 설다. 귀에 못이 박히다.

입 .. 입이 걸다. 입을 맞춰두다. 입이 야물다. 입안에 혀처럼. 입을 막다.

목 .. 목구멍이 포도청. 목빠지게 기다린다. 목구멍에 거미줄치랴. ~에 목매달다.

얼굴(낯)..낯 가리다. 낯 설다. 낯 익다. ..뺨 치는 미모.

어깨.. 어깨에 힘주다. 어깨넘어 배우다. 어깨(깡패).


간 .. 간이 크다, 작다. 간이 하나도 없다. 간이 떨린다. 간 빼주듯 잘한다. 간이 철렁.

손 .. 손이 크다. 손이 작다. 손이 검다. ~와 손 잡다. 빈손. 손이(잔손이)많이 간다.

손바닥 뒤집듯. 손가락만 빨고있다. 큰손.


발 .. 발이 짧다(길다). 손발이 맞다. 발목 잡히다. 헛발질 하다. 발이 빠지다. 발등에 불.

발만 동동. 발벗고 나서다. 두발 뻗고 자다. 마당발. ~의 수족. 제 발등 찍다.

다리..양다리 걸치다. 남의 다리 긁는다. 한다리 건넌다. 헛다리 짚다.


뼈.. 뼈골 빠지게. 등골 빼먹다. 골수에 사무쳐. 뼈를 깎는 아픔으로. 등골이(허리가) 휘다.

 

그 외에 '밥통' ‘등쳐 먹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 '비위(脾胃)가 약하다'

 '애(창자)끓는' 심지어 '염통에 털이 난' '뱃장이 두둑' 등 오장육부까지 동원한다.


 목이라는 특수부위 탓인지 목에 관련된 말은 대개 끔찍하다.

 ‘목빠지게’ ‘목 자른다(직장에서)’ ‘목 매단다’ 등.

또 왜 그냥 ‘몹씨 웃는다’ 하지 않고 ‘배꼽 빠지게’ 웃는다 할까.


'대단히 많이 몹씨 오랫동안 기다렸다' 보다

한마디로 '눈 빠지게 기다렸다'라 하면 금방 확실하게 느낌이 온다.

또 '혼자라서 너무 외롭고 허전하여 누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긴 표현을

한 마디로 '옆구리가 시리다'라 하면 얼마나 더 확실하게 이해되는가.


 '자신의 온갖 성의와 힘을 다해 좀 주착없을 정도로 베풀어주며 잘 대우한다'는 것을

'간 빼주고 쓸개 빼준다' 라 간단히 표현하면 끝난다.


 '큰코 다친다'라는 짧은 표현 속엔

된통 당하기 전에 이미 쓸데없이 너무 설쳤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발을 빼다' 손을 털다' '입이 근질거린다'같은 재미있는 표현은 또 어떤가.


'말을 맞추다'라 대신 어색한 표현이지만 구지 '입을 맞추다'라 한다.

 엄청나게 큰 노력을 한다는 것을 구태여 '피나는 노력'이라 표현하며

 너무 많이 먹어 과식에 숨쉬기도 힘들 정도인 상태를 '배터진다'라 간단히 말하면 만사 통해 버린다.


곧이 곧대로 My stomach is bursting out.. 이라 한다면

외국인들은 폭탄이라도 삼킨 줄 알고 경악할 것이다.

그 외 만족스러워 한껏 웃는 모습도 '입이 찢어진다' 라 하면 간단히 끝나는데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배 두드리며 산다'는

마음 턱 놓고 잘 먹고 마음 편히 잘산다는 뜻을 어쩜 그렇게 딱 맞게 표현하는지.

그 중에서도 '등 따시고 배 부르다'처럼

간단하고도 멋진 표현은 다른나라 언어에선 찾기가 쉽지 않다.


‘귀에 못이 박히다’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다음에 다른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난감하다.

응당 갚아야 할것을 미루며 '배째라' 하는 표현은 또 어떤가.

 ‘발만 동동’ 하면 어떤 상황인지 단 넉자에 감이 확 오지만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긴급한 상황인데도 대처할 수단이 없어 몹시 안타깝고 애가 탄다’라고 길게 써야한다.


그래서 신문에 보면 자주 예를 들어 ‘입주민들 발만동동’하는 식으로 찌라시 뽑는 걸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닥친다해도 실지로 땅에다 발을 그렇게 구르지는 않을 텐데 어쨋든 확실한 표현이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 라는 것도 동서고금 실제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그보다 더 딱 맞는 표현이 없어 우리는 자주 애용하고 있다.

 '어깨에 힘을 주다'

 '어깨가 올라간다'는 표현엔 열등감 가득찬 사람들의 비애가 숨어있다.

 

또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잘 쓰시던 말 중 '제 살 제 떼 먹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요즘 세태에 점점 더 부합되는 표현같다.

 '뼈 빠지게' 직장일을 해서 월급을 타 오는 것은 자신의 노력을 많이 바쳐

그 댓가로 조금 받는다는 뜻으로 공짜가 없다는 뜻이렷다.


어머니들이 또 즐겨 쓰시던 말,

그 사람 '손 끝이 맵다'라 하면 최대의 칭찬이었는데

여자는 지성이나 사고방식보다 무조건 살림을 잘 살아야 한다는 관념이 강했으니까.

여자가 너무 말을 똑똑하게 잘하면 '주둥이가 야물다'라 하여 부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입'도 '주둥이'라고 굳이 폄하했던 것.


그 외에 '골 때린다' '눈 튀어나온다' 같은 직접적인 표현도 너무 직접적으로 와 닿아

상스럽다고 하여 소위 교양인들은 피하는 말 들이다.

 너무 감각적이라 점잖치 않다고 보는 것일테다.

그러나 아무리 교양인들이라 해도 그냥 '바른 소리'라 하지 않고 굳이 '입바른 소리'라 한다.

또 '빠른 대응'을 한다 할 때 그보다는 '발빠른 대응'이라 해야 뭔가 우리 기분에 딱 맞아 떨어진다.


한번 신문 광고에 보니 미인 영어회화학원을 선전하면서 간단하게

 '귀가 뚫리고 입이 터집니다'라 하여 너무 직접적 아닌가 싶었다.

그냥 '무엇을 만드는것에 재주가 많다' 라는것을 우리는 '손재주가 있다' 라고 간단히 말한다.

허지만 영어로 hand-talented 라고는 절대로 표현하지 않는 것 보면

우리말이 얼마나 간단명료 경제적인가.


영어에 'big mouth'라는 재미있는 단어가 있긴 한데 입이 크다는 뜻이 아니고

'남의 말을 많이 하는 떠벌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한번 오프라 윈프리 쇼우에 영국 배우 휴 그랜트가 나와 같이 영화 촬영한 상대역 여배우들 중

줄리아 로버츠 얘기를 하다가, "She has a big mouth. I know, 'cause I kissed her." 라 하며 웃기었다.

마치 '그녀는 떠벌이다' 라고 말하듯 해놓고 실은 실지로 입 크기를 말하면서 익살을 떠는 것이었는데

사실 줄리아 로버츠 입은 상당히 크긴 크다.

우리와 미의 관념이 다르기 때문이겠으나 실상 우리는 그녀를 그렇게 미인으로 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영어엔 그런 멋진 육감적인 표현들이 없어 말을 하다보면 무언가 빠진듯 아쉬운 감이 있고,

이것도 그런 표현이지만 '남의 다리 긁는 듯하여' 영 개운한 맛이 없다.

우리말에 유일하게 있는 그 토씨야말로 말의 표현에 딱 들어맞는 감칠맛을 완성시켜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좋아들 하는 영어를 말할 때도 명사만 쓰고 토씨는 꼭 붙여야 해서 한국어 문장으로 말한다.


예를 들어 근래들어 우리가 많이 쓰고 있는 그 사람 '스토커'다 라고 쓰고 있지만

실상 미국에선 주로 'He stalks her' 라는 식으로 동사로 쓰지 거기다 er 을 붙여

 명사체 stalker로는 잘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토씨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 구지 명사화하여 써야 구미에 맞게된다.


그것이 우리가 영어를 그토록 많이 쓰면서도

 모두 명사화해서 영어단어만을 한국말에 끼워 말하고 있는 이유이다.

몇년 전 니콜 키드먼의 ‘스토커’란 영화가 미국에서 제작되어 잘 안쓰는 단어를 썼구나 했더니

우리나라 박찬욱 감독이 헐리우드에 가서 만든 영화라 하여 고개가 끄덕여졌다.

 

말이 난김에 더 얘기 하자면 우리가 요즘 그렇게 좋아하는

 '화이팅(fighting)!' 이란 단어도 서양인들은 이해를 못한다.

 구태여 해석하자면 그것은 마치 상대방을 응원하는 뜻으로 듣긴다니

 오히려 참 좋은 스포츠정신인 것 같아 다행스럽다.

이제 그 단어는 스포츠 뿐 아니라 가수경연대회나 모든 경쟁적인 모임에서 애창되는 구호가 되어있으니

 실상 상대방을 사랑하고 응원한다는 아름다운 우리의 상생 정신 아닌가.


또한 고속도로마다 있는 IC, 텔레비전의 PD, 촬영 현장의 NG 등

우리가 쓰고 있는 이런 영어 약자들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양인들은 의아해 한다.

이런 우리 식의 간편 편리한 영어는 그들도 수입해다가 쓰면 좋을 것 같다.


어차피 지금 세계는 로컬화(localization) 되고 있어 현재 세계통용어라는 영어도

 지역마다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200년 전 영국에서 파생돼 나온 미국영어도 이미 영국영어와 발음과 단어 등이 많이 달라져

 서로 잘 못 알아듣는 부분이 많다 한다.


우리는 이미 호주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틀림없이 21세기가 지나기 전에 동아시아 영어가 새로이 조성될 터이니

그들이 우리식 영어를 따로 배워야 할 것이다.

현재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와 있는 많은 미국 원어민교사들은 이제 더 필요없다.


무엇때문에 우리 식으로 리모콘, 에어컨, 네비 등으로 간단히 줄여말하지않고

 리뫁 콘트롤러(remote controller), 에어 컨디셔너(air conditioner) 등으로 불편하게 길게 말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적으로도 비경제적인 것 같다.


나는 서양말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섬세한 표현이 없으면서

 말을 잘들 하고 사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 예를 들어 '시큰둥-' 하다 하면 우리는 너무나 잘 이해되는 광경인데

서양말엔 도대체 그런 표현이 없다.

그 외에 '떫은'표정, '아늑한'우리집 등등. '끈적끈적'하다하면

실지로 우리 피부에 끈적거리는 감각이 느껴질 정도이다.


'따끔따끔'하다하면 정말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이고

'보송보송'하다는 것과 반대로 '축축'하다하면 실지로 몸이 젖는 기분이다.

 찌릿찌릿'하다하면 실지로 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니 이보다 더 감각적인 언어가 어디 있겠는가.

'스멀스멀'거린다하면 우리 몸안에 정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이고.

‘울컥’한다할 때 우리 한국인들이 같이 느끼는 공감도는 또 어떤가...


'도란도란'거리며 정답게 얘기하는 모습,

그러나 '두런두런'하면 또 무언가 은밀히 모의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알콩달콩' '사뿐사뿐' '달짝지근' 같은 형용사들은 또 얼마나 기막히게 섬세한가.

 ‘시원섭섭’ ‘새콤달콤’ 같은 복합형용사의 표현도 멋지다.


얼마전 한 작가의 글에 보니 ‘너부데데한 몽골인 얼굴’ 이란 표현이 있어 한참 웃었다.

그렇게 절묘한 단어를 어떻게 다른나라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마음씨 좋은 친근한 미소가 가득한 소박하고 정겨운 얼굴을 바로 눈앞에 보는 듯 하였다.


또 웃음 하나에도 ‘방글방글 웃는다’

 ‘방긋방긋 웃는다’ ‘배시시 웃는다’

 ‘희죽희죽 웃는다’

‘생글생글 웃다’

 ‘피식 웃다’

‘키득키득 웃다’

‘낄낄 웃다’와 ‘껄껄 웃다’의 차이..

‘싱글벙글 웃는다’ 라 하면

정말 그 웃는 얼굴을 앞에 보는 것 같아 우리도 따라서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우는 모습에도 다양한 표현들이 있지만

 나는 ‘(한밤 중에) 청승맞게 운다’ 던지

 ‘청승떤다’ 할 때 그 표현이 어찌나 멋진지

그 단어말고 다른 말로 대치하자면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전에는 뭐라고 되있는지 모르지만 그 단어를 설명하라 하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슬프고 격에 안맞고 좀 지나쳐서 청승맞아 거슬린다..’ 식으로 또 그 단어가 들어가야만 설명이 된다.

그러니 하물며 그 단어를 외국어로는 어찌 표현하겠는가.

우리만의 이런 오묘한 표현은 정말 압권이다.


언젠가 언론기사 제목에 <국민대, *** 학위박탈에 ‘뭉그적’> 이라 돼있어 금방 그림이 확 잡히었다.

한 올림픽 금메달 태권도 선수출신 무소속의원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이 확인되었는데도

 정작 그 학위를 준 국민대학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미루고 있다’는 얘긴데

 길게 말할 것 없이 ‘뭉그적’ 거린다 하면 대번에 우리는 잘 알아들을 수 있다.


한동안 금값이 폭락하는 것은 ‘그들’이 서민들이 보유하고있는 금을 ‘손털게’하여

결국 그들이 싹쓸이해 가려는 음모.. 운운하는 것도 ‘손턴다’는 것은

‘금을 모두 내다 팔아버려 안가지게’ 한다는 긴 표현의 압축으로 확실한 느낌을 준다.

 

'바르르' 애처롭게 떠는 모습,

그러나 '파르르'떠는 모습은 그와는 또 뉘앙스가 다르다.

드는 칼로 '스윽' 할 때 우리는 소름이 돋는다.

화가 나서 '부르르' 떠는 모습,

꽃잎이 '하르르'떨어지는 모습,

'팽팽한' 긴장, '휘리릭' 하고 지나가 버렸다 하면 정말 무언가 확 스쳐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파도가 '철썩'친다하면 바로 눈앞에 파도가 바위를 치는 모습이 연상된다.

일본어에도 우리와 같은 형용사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처럼 ㅊ ㅌ 등의 발음 같은 것이 없어서

예를 들어 파도 치는 모습의 ‘철썩철썩’을 일본어로는 ‘바짜바짜’ 친다 라고 표현하고 있어

 우리같은 그 감각적인 실감이 부족하다.


일본어엔 모음도 ‘ㅡ’ 나 ‘ㅓ’ 발음이 없어 표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까 ‘ㅊ’이나 ‘어’ 발음이 없는데다 받힘도 없으니

 ‘철썩’을 구태여 발음하라 하면 ‘짜루사꾸’처럼 이상한 소리밖에 날 수가 없다.


어떤 특별한 상황의 표현엔 ‘ㅡ’가 꼭 필요할 때가 많은데

예를 들어 ‘으스스하다’ ‘으르렁’ ‘스잔한 풍경’ ‘응큼한’ ‘을씨년스러운’ 등에서

그 ‘으’ 발음의 독특한 뉘앙스. 우리가 힘을 쓸 때도

 ‘으라찻차’ ‘으이쌰’로 기합을 넣어야 내공이 들어간다.


‘하하 호호’ 웃는 것과 ‘으흐흐흐..’ 할 때 그 ‘음흉’한 느낌의 차이..

항상 이상하게 생각돼지만 일본인들은 그 몇 개 안되는 발음으로

어떻게 그렇게 잘들 말하고 사는지 신기하다.

 

우리는 단어를 얼마든지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다.

우리속에 각인돼 내려오고 있는 삼신사상은 3 이란 숫자를 신성시하게 되어

우리는 무엇이든 세번, 또 세글자를 좋아한다.


그리하여 '역전앞' '초가집'이라며 뜻을 구태여 중복해 쓴다하는 말은 늘 하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그런 경향은 더 심해지고 있다.

'실신'한다는 것을 요즘와서 새로 생간 단어로 '떡실신'한다고 한다.

 '망신'도 '개망신' '개무시' 요즘보니 멸치상자에도 '맛멸치'라고 쓰여있다.

 ‘소문’이라 하면 될 것도 구태여 ‘입소문’이라고 만들어 쓴다.


 눈이나 코로 소문을 내는 것도 아니건만.

그 외에 젊은이들은 '된장녀' '쩍벌남' ‘뚱소녀’ ‘엄친아’ ‘못매남(못생겨도 매력있는 남자)’ '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 같은 재미있는 단어들도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러나 요즘 경제적으로 짤막하게 축소된 두 글자의 단어도 많이 나와

새롭게 국어 사전에도 올려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즐감’ ‘먹튀’ ‘멘붕’ ‘왕건’ '방콕' ‘학폭’ ‘돌씽’ '냉무(내용이 없음)

'쌩얼' '생선(생일선물)' '컴맹' ‘깜놀’ '눈팅' ..

 창조성이 뛰어난 민족이라 언어도 따라 시시로 발랄하게 창조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 대학생들이 입학 전까지 책을 읽고 글을 써 본 일이 거의 없어

 ‘자소서’하나 변변히 쓰질 못한다니 발랄한 우리 청소년들의 창조성을 얼마나 죽여 놓았으면

그럴까 싶어 한숨이 나온다.


송수권(宋秀權)시인의 수필집에 보니

강아지가 밥을 먹는 귀여운 모습을 '차롬차롬' 먹는다 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어찌나 실감나는 표현인지 강아지가 바로 내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고

 그 작은 혀로 밥을 떠 먹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허리가 '낭창낭창'한 한국 여인상 이라는 표현을 쓴다던지

 너무도 뛰어난 우리 향토 언어들을 구사하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중의 한사람이다.

 

한번은 쑤퍼에서 계산하려고 서 있으니 내 앞에 인도 전통사리를 입은 여인이

뻥튀기 두가지 종류, 보리로 만든 것과 옥수수로 만든 것을 놓고

어떤 것이 좋은지 몰라하여 내가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고 있으니까

 나를 보고 'How different?' 라 물었다.


그래서 내가 주인한테 차이를 물어보았더니 '이것은 고소하고 저것은 구수해요'라 한다.

 그것을 어떻게 영어로 번역한담, 난감하여

그냥 적당히 내 취향대로 한쪽이 더 낫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냥 sweet 라는 한가지 단어 속에 우리는 수많은 표현의 단어들이 있다.


우리말의 모음 변화에 따른 느낌의 다양한 변화를 영어로 번역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반들반들' 과 '번들번들' 의 차이,

 '졸졸' 흐르는 것과 '줄줄' 흐르는 것,

 '간질간질' 과 '근질근질'의 차이.

'콤콤한' 냄새와 '쿰쿰한' 냄새는 그 발효정도나 세균 번식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퀴퀴한' 냄새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향긋한' 냄새의 위력.


어느 한글 날 TV에 보니 한 미국여인이 나와 우리말로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것 같아 안타까워요.

 '그립다' '서운하다'같은 아름다운 말은 외국어엔 잘 없어요.' 라 한다.

 미국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아무리 찾아봐도 T셔츠엔 온통 영어 뿐, 한국말 디자인은 없더라고.


'그립다' 라는 말을 구태여 영어로 하자면 'miss' 또는 'pine' 이라고 할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대상이 없어서 아쉽다, 필요하다는 뜻이지

우리말 '그립다'의 그 애틋한 느낌과는 다르다.


 '서운하다'도 '섭섭하다'와는 정서적으로 좀 다른 뉘앙스이고 'sorry'와는 큰 차이가 있다.

 '아련히' '아스라히' 떠 오르는 추억이라 하면

우리는 금방 그리움에 젖게 되는 단어이듯이.

 '처연한 아름다움'이란 표현은 또 어떤가.

너무도 아름다워 슬프기까지한 그 뛰어난 미를 어떻게 더 잘 묘사 해낼수 있을까.


 '을씨년스럽다'할 경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추위의 느낌을

그보다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는 언어가 더 있을것 같지 않다.

우리 말은 얼에서 나와 생명의 이치에 뿌리를 두고 있어

유독 몸과의 소통에 뛰어나고 감각적인 것 같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감성적이라 자연히 그 표현하는 언어도 감각적이고 감성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명사나 동사보다는 그 풍부한 형용사에서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모든 언어의 조상격인 산스크리트어가 바로 한국어란 증거는

 타언어가 따라올 수 없는 이런 우수성에도 있을 것이다.


 '후덥지근'한 요즘 더위를 확 날려버릴 수 있는 지소미아를 파기했다던지

한미합동훈련을 중지시켰다던지 하는 시원한 소식이라도 들려 왔으면.

 나는 다양하고 실감나는 우리말이 참 좋다



한국어 형태소 분석기 개발 - 스가이 요시노리 - 한국사전학회 학술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