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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스크랩]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으로서 쓴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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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으로서 쓴 삼국사기


성기숙      

2019.09.03. 14:01
   



중국 사대주의 사관으로 쓴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서로서 삼국시대의 정사正史를 기록한

 「삼국사기」(1145년)가 역대 최고의 사대주의 사서로 꼽힙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8대 眞德王(진덕왕)  <647~654  재위기간 7년>



若新羅以一意事中國(약신라이일의사중국) : 신라같은 나라는 한 뜻으로 중국을 섬겨

使航貢篚相望於道(사항공비상망어도) : 사신의 입조화 조공하는 길을 그치지 않았으면서도

而法興自稱年號(이법흥자칭연호) :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칭하였으니

或矣(혹의) : 이는 미혹되다


厥後勝愆襲繆(궐후승건습무) : 그뒤에도 그 허물을 이어

多歷年所(다력연소) : 되풀이하여 여러 해를 지냈고

聞太宗之誚讓(문태종지초양) : 당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猶且因循至是(유차인순지시) : 오히려 이를 고치지 아니하고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然後奉行唐號(연후봉행당호) : 당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게 되니

雖出於不得已(수출어부득이) : 이는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而抑可謂過而能改者矣(이억가위과이능개자의) : 또한 과실이 있는 것을 능히 고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김부식 (金富軾.1075-1151)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철저하게 당唐나라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삼국사기 서술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입니다.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我唐太宗(우리 당태종)”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입니다.


 

위의 글을 보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永輝)’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입니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삼국사기』의 발간 배경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김부식金富軾이 왕의 명을 받아 편찬한 책으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입니다.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30년 전, 북방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금金을 건국하였습니다(1115년).


금나라는 김함보의 후손 아골타에 의해 건국이 되는데  금사金史』에는 신라 김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이 아골타의 후손이 청을 건국한 누루하치입니다.



         


















건국 초기에 후금後金이란 국명을 쓴 이유입니다. 후에 국명을 ‘청淸’으로 개명합니다. 금나라는 처음에는 고려에 ‘형제국의 관계를 맺고 화친하자’고 하더니 힘이 강성해지자 17세 인종 때에 이르러 군신君臣 관계를 강요하였습니다.




당시 고려 조정의 유학자들은 현실 안주론자가 되어 금의 압력에 굴복, 사대事大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며 금나라를 떠받드는 사금事金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무렵, 인종 때까지 80년간 5명의 왕에게 무려 9명의 왕비를 들인 인주 이씨 가문의 이자겸이 제거되고, 금나라에 사대를 해서라도 체제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김부식이 그 빈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인종은 사대주의자 김부식을 멀리 하고, 금에 대한 사대를 끊고 고려를 황제국으로 선포하자는 묘청, 정지상 등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묘청, 정지상 등은 기존 지배세력인 김부식 등과 맞서며 금나라의 외세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서경천도설과 금나라 정벌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서경 천도를 하자는 묘청의 주장이 김부식 등의 반대로 실패를 하면서 묘청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김부식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파를 역도로 몰게 됩니다. 결국 묘청은 한 달 만에 내부의 모반자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1136년).


묘청을 제거한 김부식은 고려 조정의 일인자가 되었습니다. 김부식이 주도권을 쥔 고려 조정은 더욱 깊이 사대주의에 빠져 들었습니다.


인종 16(1138)년에는 궁궐의 전각과 궁문 이름의 격을 낮추고, 50개에 달하는 그 현판을 왕이 친히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금나라의 눈치를 보며 삼국사기가 편찬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보다 우리 스스로 국력이 약화되는 과정 속에서 사대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중국을 높이고 우리 자신의 역사를 깎아내린 바가 더욱 큽니다.




자주파와 사대파의 싸움에서 자주파가 패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대주의 시각에서 우리나라의 혼을 말살한 대표적인 사가史家가 바로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인 것입니다.


사대주의에 입각해서 쓰여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를 폄훼하고 대진국(발해)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 삭제했습니다. 김부식은 우리의 북방사를 절단해 버렸습니다.














































? 신채호선생이 묘청의 난을 일천년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강력한 국풍과 다물 사상을 지녔던 묘청이 패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스스로 사대주의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한 기록이지 우리의 고대사 기록이 아닙니다.

 




김부식은 외세에 의존해 국가안존을 유지하겠다는 사대주의 외교노선의 중심세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자주권을 내준 것입니다. 묘청의 난 실패이후 국풍파는 주력에서 밀려나고 조선 역시 유명조선有明朝鮮(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 하여 명나라를 사대事大하며 중화중심의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였습니다.






국력이 약해지면서 국교國敎였던 신교神敎대신 1천 년 가까이 외래 종교를 국교로 삼으며 점점 자주권을 상실되게 된 것입니다.




고려시대는 ‘불교사관’, 조선시대는 ‘유교사관’, 현재는 ‘기독교사관’이 한국의 역사정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외세 사대사관이 한국의 주류사관입니다. 결국 그 나라 민족 고유의 종교정신을 내준다는 말은 역사정신을 내준다는 의미입니다.





일제식민사관, 중화식민사관그리고 다양한 외래 종교역사관의 공통점은 단군은 신화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외래사관은 민족정신을 분열시키고 한민족의 민족사관을 파괴해서 자주 민족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민족 고유 역사정신과 잘 융화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도 역사왜곡의 중심에는 일제 식민사관 외에 외래 종교사관의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구한말 자주독립세력이던 동학과 독립운동세력, 민족종교 역시 외세에 패하며 현재 까지도 외세에 의존하는 사대주의자들이 한국사회의  중심세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묘청의 난 이후, 근 천년 가까이 외세 사대주의자들이 한국사의 기득권층이 되며 우리 역사는 외세 중심의 식민사학이 주류가 되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북방을 다스리며 중국을 제압했던 고구려를 ‘진나라와 한나라 이후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던 작은 나라’로 깎아내렸습니다. 또 ‘중국의 국경을 침범한 고구려 때문에 한민족이 중국의 원수가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게 된 것도 천자(天子) 나라인 수·당에 거역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 시조의 출생에 관한 확인되지 않은 이설’을 주석으로 달아서 비류와 온조가 고주몽의 친자가 아닌 것으로 오해받도록 했습니다. 즉 ‘비류와 온조는 상인 연타발의 딸인, 고주몽의 둘째 왕비 소서노가 고주몽에게 재가하기 전에 낳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본래 북부여 6세 고무서 단군의 딸인 소서노를 상인의 딸이자 과부로 만들고, 고주몽과 두 아들 사이의 천륜을 끊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주몽>이 몇 해 전 전파를 타고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셋째, 고구려를 계승하여 만주 대륙을 호령하던 발해(대진)의 역사를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한민족 고대사의 무대가 한반도 내로 축소되었습니다.


              




넷째, 강렬한 자주 정신으로 당나라에 씻을 수 없는 패배와 수치를 안겨 준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을 ‘권력에 눈이 멀어 임금을 잔인하게 죽인 천고의 역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주군 영류제를 죽여 토막을 내서 구덩이에 묻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게 아닙니다.




영류제는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당나라에 굴욕적인 자세로 일관하였습니다. 임금이 된 영류제는 선왕들의 법을 모두 버리고 당나라에서 도교를 수입하여 강론을 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이 만류하는 간언을 올리자, 이를 언짢게 생각한 영류제는 대신들과 짜고서 연개소문을 변방으로 좌천시켜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연개소문은 대신들을 열병식에 초대하여 모두 제거하였습니다.

변고가 생기자 영류왕은 변복을 하고 몰래 달아나다가, 송양에 이르러 병사를 모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따르지 않음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고 맙니다(『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이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한편 김부식은 연개소문을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만든 반면,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늙기 전에 취하려 한다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 태종을 현명함이 세상에 드문 임금이라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한 이유를 ‘연개소문의 악행으로 고구려 백성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김부식의 이 기록은 중국의 사서에서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철저한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때문에 연개소문은 20여 년간 당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나라를 지킨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를 망하게 한 대역죄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삼국사기』는 중국에 사대하느라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 역사의 계승 맥을 전면 부정하여 국통맥을 혼란에 빠뜨린 소국小國주의 사서요, 한민족의 역사와 영토무대를 한반도로 축소시킨 극치의 반도사관 역사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