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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400년전 무덤에서 발견된 한글편지


안동대학교 박물관_사랑과 영혼의 환생


숱한 박물관 중에 선뜻 발을 들여놓기 어려운 곳이 대학 박물관이다.

일단 ‘대학’ ‘박물관’이란 이름에서 풍기는 학술적이고 교육적인,

뭔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인터넷에 상세 정보가 무수히 떠도는 여타 박물관들과 달리

소장품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고, 대체로 규모가 작다는 점도 한몫 한다.


그러나 들어가 살펴보면 말 그대로 보석같은 유물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가득 품은 대학 박물관도 있다.

 ‘사랑과 영혼’ 이야기의 진수를 만나러, 경상북도 안동시 안동대학교 박물관으로 간다.

 “사랑, 사랑 해도 이렇게 애절하고 감동적인 얘긴 드물 겁니다.

” 안동대 박물관 조규복 학예연구사는

 “이 사랑 얘기가 깃든 유물을 만나보는 것만으로도

안동대 박물관을 찾은 보람을 느끼실 것”이라고 말했다.

 

 

“머리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널리 알려진 대로, 10년 전 한 무덤에서 발굴돼 큰 감동을 주었던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 이야기다.


 420년 동안 무덤 속에 들어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빛을 보게 된 이 편지는,

 가볍고 얕은 사랑이 일상화한 우리 시대에,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가슴을 친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성 이씨(固城 李氏) 이응태(李應台1556~1586).

아이를 뱃속에 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

부모형제를 두고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 안동대 박물관 3층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내용을 알고 가도 직접 만나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워늬 아바님께 샹백--병슐 뉴월 초하룬날 지비셔

’(원이 아버님께 올림--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라는 제목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편의상 아래 아는 ㅏ로 표기해 옮겼음).


“자내 샹해 날다려 닐오대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함께 죽쟈 하시더니

 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

날하고 자식하며 뉘 긔걸하야 엇디하야 살라하야 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난고.

”(당신 늘 나에게 이르되, 둘이서 머리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자식은 누구한테 기대어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이응태 무덤에서 나온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

이응태 무덤에서 나온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


가로 58㎝, 세로 34㎝의 한지에

 붓으로 빼곡히 써내려간 한글 편지엔,

서럽고 쓸쓸하고 황망하고 안타까운 한 아내의 심정이 강물처럼 굽이친다.


 함께 누워 속삭이던 일에서부터 뱃속 아이를 생각하며 느끼는 서러운 심정,

꿈속에서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애절한 간청까지 절절하게 녹아 흐른다.


 “함께 누워서 당신에게 물었죠.

 여보,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도 우리 같은가 하여 물었죠.

당신은 그러한 일을 생각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가득 쓰고도 모자라 위 여백까지 빽빽이…남편 호칭은 ‘자내’


한지 오른쪽 끝에서부터 써내려간 편지는,

왼쪽 끝까지 가득 채우고 모자라 위 여백으로 이어진다.

그러고도 모자라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다시 글 첫머리 쪽 여백에 거꾸로 씌어 있다.


 뭉클해져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조규복 학예연구사가 냉정하게 설명했다.

 “여백을 활용해 쓰는 이런 편지 양식은 당시로선 일반적인 것이죠.


첫째 종이가 귀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둘째 쓴 이의 마음, 즉 할 말이 이토록 많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백까지 활용해 글을 꽉 채웠으면서도,

읽는 이에게 풍성한 느낌을 주면서 지루하지 않게 읽히도록 한 방식이기도 하지요.”


더 감동적인 건 함께 출토된 미투리다.

미투리란 삼껍질 등을 꼬아 삼은 신발이다.


여기서 나온 미투리는 삼과 머리카락을 함께 꼬아 삼은 것이다.

이 머리카락은 원이 엄마의 것으로 추정된다.


미투리는 한지에 싸여 있었는데,

한지엔 한글 편지가 적혀 있으나 훼손돼 “이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 등 일부 글귀만 확인된다.

 조 학예사는 “남편이 병석에 누운 뒤 쾌유를 빌면서 삼기 시작한 미투리”라며

“끝내 세상을 뜨자 함께 무덤에 넣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덤에선 아들 원이가 입던 옷(저고리)과 원이 엄마의 치마도 나왔다.

형(이몽태)이 동생에게 쓴 한시

 ‘울면서 아우를 보낸다’와

형이 쓰던 부채에 적은 ‘만시(輓時)’도 있었고,

이응태가 부친과 주고받은 편지도 여러 통 발견됐다.


발굴된 의복은 40여벌에 이른다.

부친과 나눈 편지엔 전염병 관련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은 당시 전염병을 앓다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건

이응태가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고 조 학예사는 말했다.


“당시(임진왜란 전)엔 결혼하면 시댁살이와 함께

처가에 가서 사는 것도 일반적이었습니다.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뜻하죠.


임란 전엔 재산 분할도 아들딸 차별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식은 편지에도 드러나 있어요.


” 원이 엄마의 편지에 나오는 남편에 대한 호칭이 ‘자내’다.

지금은 아랫사람에게 쓰는 호칭(자네)으로 바뀌었지만,

임진왜란 전까지는 상대를 높이거나 최소한 동등하게 대우해 부르는 호칭이었다.

 

  • 1 원이 엄마는 남편의 무덤에 아들 원이가 입던 옷도 함께 넣었다.
  • 2 미투리는 삼과 머리카락을 함께 꼬아 삼은 신발이다.
  • 3 이응태의 무덤에선 형 몽태가 사용하던 부채와
  • 아우에게 보내는 한시도  함께 나왔다.

 





400년전 무덤에서 발견된 한글편지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
 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갖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무덤에서 같이 발견된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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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1998년, 택지 개발이 한창이던 경북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

주인 모를 무덤 한 기의 이장(移葬) 작업이 있었다.

시신을 보호하는 외관(外棺)은 갓 베어 놓은 듯 나뭇결이 살아 있어

혹시 최근에 조성된 무덤이 아닌가 추측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야간까지 이어진 유물 수습 과정에서

무덤은 수백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유물을 절반쯤 수습했을 무렵 망자의 가슴에 덮인 한지(韓紙)를

조심스레 벗겨서 돌려 보니 한글로 쓴 편지가 있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이 편지는

수백 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전하며 심금을 울렸던 이 편지는

남편의 장례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씌어진

죽은 남편에게 그 아내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내는 지아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하고픈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종이가 다하자 모서리를 돌려 써내려 갔다.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자

아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거꾸로 적어 나갔다.



편지 외에도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유물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지만 겉을 싸고 있던

한지를 찬찬히 벗겨 내자 미투리의 몸체가 드러났다.


조선시대에는 관 속에 신발을 따로 넣는 경우가 드문데다

미투리를 삼은 재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져

이 미투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검사 결과 미투리의 재료는 머리카락으로 확인되었다.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았는지

그 까닭은 신발을 싸고 있던 한지에서 밝혀졌다.


한지는 많이 훼손되어 글을 드문드문 읽을 수 있었다.

"내 머리 버혀........(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그리고 끝에는 "이 신 신어 보지..........(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내용들이 얼핏얼핏 보였다.


편지를 쓸 당시 병석에 있던 남편이 다시 건강해져

이 미투리를 신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를 풀어 미투리를 삼았던 것이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이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은 것이다.


유물 중엔 아내의 편지 외에도 2편의 시와 11통의 서신이 있었다.

이 편지들 가운데 9통은 망자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것으로,
모두 묻힌 이가 죽기 1년 전에 쓴 것들이었다.


한문 초서로 흘려 쓴 이 편지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발견 되었다.


아들 응태에게 부치는 편지(子應台寄書)에서 피장자의 이름이

응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31년 아우와 함께했다"는 형의 글에서

뭍힌 이가 서른한 살에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물에서 확인한 단서를 정리하면

묻힌 이는 고성(固城) 李氏 가문의 응태라는 남자였고

그에겐 형이 있었으며 서른한 살(1586년)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아내는 남편을 자내(자네)라고 부르기까지한다.

"자내다려 내 닐오되(당신에게 내가 말하기를)........".

"자내 몬저 가시난고(당신 먼저 가시나요).......". 등

이응태의 처는 남편을 가리켜 "자내"라는 말을 모두 14번 사용했다.


요즘 부부라 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을 자네라고 부르는경우는 드문데

어떻게 자내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을까?


순천 김씨의 간찰(簡札)에서 아내가 남편을

그 사람이란 의미의 3인칭으로 지칭한 예는 있어도

이 시기에 씌어진 글에서 아내가 남편을 대놓고

"자내"라고 부르는 경우는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응태 처의 편지는 임진왜란 전까지 부부가 모두

자내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기본적으로 이런 "하소체"는 서로 대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

이응태 아내의 편지는 그들이 살던 시대에 남녀가

대등한 관계였음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400년 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소망했던 이응태 부부의 육신은

비록 떨어져 있을지언정

그들의 영혼은 지난 세월 동안에도 줄곧 함께였다.


죽음조차 갈라 놓을 수 없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


긴 어둠의 세월 속에서 이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남편의 가슴에 고이 품어 묻어둔 마지막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