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흥남철수는 인도주의적 구호가 아닌 협박강요된 군사작전이었다
라스베가스 한동상 동포 기고문과 함께 본인이 보관중인 대주민용 삐라 공개
흥남철수작전은 남쪽에서 알려진것처럼 북의 체제가 싫어서 주민들이 남쪽으로 따라간 사건이 아니라 미군과 국방군의 치밀한 선전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강요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대다수 무고한 피난민들이 미군의 선전에 따라 폭격위협을 피해 북 지역을 일시적으로 대피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라스베거스에 거주하는 한동상선생은 이같은 사실을 알려주는 기고문과 함께 본인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의 삐라를 본지에 보내어 왔다. 여기 그가 보내온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역사적진실에 대한 증언을 싣는다 <편집자 주>
나는 고향이 이북인 사람으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나는 몇년전 한국에서 제작된 흥남철수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국제시장’을 본 적이 있었다. ‘국제시장'은 한국전쟁과 전쟁이 끝난 후인 1960년대 당시 험난했던 시절, 독일에 간 광부들과 간호원들, 월남파병, 이산가족 상봉에 이르기까지 그 어려웠던 시절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민족의 비애를 느끼면서도 뭔가 본질이 잘못 알려진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수가 없었다.
그러던중 얼마전 이 흥남철수사건의 본질을 다시금 깨우치게 해주는 일이 벌어졌다. 다름아닌 내가 있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사는 현장 목격자의 증언을 듣고나서 흥남철수사건의 본질에 대해 반드시 알려야한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흥남철수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미군들의 흥남철수 작전은 유엔군이 장진호 전투에서 공산군에 쫒겨 후퇴하여 흥남항에서 배로 후퇴한 해상 철수작전인데, 남쪽에서는 마치 피난민을 후송하기 위한 인도적인 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마치 피난민 후송작전인것 같은 인상을 주고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나는 독자들에게 올바른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기위해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작전의 역사적 진실을 사실대로 상세히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후미에는 당시에 피난민들이 높은 파도때문에 멀미하여 구토하는 모습이 더럽다고 바다에 쳐던지는것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의 눈물겨운 증언이 나오니 독자들은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1950년 12월, 미군과 한국군은 함경남도 북단의 개마공원내의 장진호 전투에서 조선인민군과 중국 연군에 포위공격 당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미공군의 격렬한 공중폭격 지원하에 겨우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와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후퇴하여 흥남항에서 미군역사상 최대의 해상철수작전을 시도하였다.
맥아더사령관의 작전 참모인 알몬드 (Almond) 소장 휘하의 미 제10군단과 미제1해병사단이 함경남도 북부 산악지대인 장진호에서 한만국경을 향하여 북진하고 있었던 그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는 혹한의 겨울이었다. 압록강을 건너온 중국군 12만 병력의 제 9군단과, 인민군 2개사단이 합세하여 미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은 제2차대전때 태평양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미군 전투부대였다.
함경남도 북부 개마고원내 장진지방의 하가리와 고도리에서 미공군기들의 폭격지원을 받아 싸웠으나, 우세한 중국군과 인민군에게 포위공격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악전고투끝에 겨우 빠져나와, 퇴각을 시작한 미국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며 최악의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고 미군사 역사가인 로이 애플맨 (Roy Appleman)은 말했다.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82명, 부상자 2,872명의 전투손실과 6,200여명의 민간인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흥남 대철수 작전은 12월하순의 엄동설한에 흥남항에 후퇴한 미군과 한국군을 1백32척의 미해군함정과 일본 민간선박으로 전쟁물자와 9만1천명의 피난민들을 실고 후퇴한 대 철수작전이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이 중국군에게 밀려 38도선으로 철수하고 있을때,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미 제3, 제7,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1군단 (수도,제3사단)이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12월 24일 마지막 철수부대가 승선할 때까지 20일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것이 미군역사상 최대의 해상 철수작전이었다. 이 철수작전에서 미제10군단의 병력 10만명과 1만 4천여대의 차량, 연료 2만9천여드럼, 탄약 9천톤 등 3만 5천톤의 화물과 군사장비까지 싣고 황급히 철수하였다. 미군수물자를 만재한 후 빈자리에 피난민들을 실고 후송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가들은 미군들이 장진호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후퇴하여 철수가 이루어진 사실은 국민들에게 상세히 알리지 않고 미군의 작전이 마치 이북 피난민을 위한 철수작전인것처럼 포장하였다. 철수작전이 마치 피난민 철수작전인것처럼 포장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미군들이 장진호에서 공산군에게 대패하였다는 전황을 정치적 의도에서 발표할수가 없었을것이다. 미군들은 후퇴하면서 약 5~6만톤의 폭약을 흥남부두와 모든 공장들과 시내건물에 장진하여 전부 폭파하였다. 아울러 약 9만 1천명에 달하는 흥남지방과 그 근처지방의 피난민들을 미군함정과 일본 민간선박으로 후송했다. 이때 대대적으로 민간인들에게 삐라등을 뿌리며 선전을 하며 적진을 동공화하기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이 흥남철수작전은 도일(Doyle) 해군제독이 총지휘했다.
내가 아는 당시의 상황과 역사적인 진실은 이렇다.
첫째, 흥남철수작전은 피난민 수송작전이 아니고 미군 및 한국군 병력과 군장비를 우선하고 남는 공간에다 피난민을 실은 작전이었다.
흥남 부두가에는 피난민들의 대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미해군 수송선마다 미군 및 한국군 병력과 군장비를 먼저 실고 남은 빈칸에 피난민들을 수용했기 때문에, 차례를 기다리다 배에 타지못한 가족끼리 서로 헤여져, 수송선이 차례로 떠날때마다 헤여진 가족들끼리 서로 이산가족이 되는 찰라 흥남부두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부모형제가 서로 떨어져야 하는 이산가족들의 슬픈 현장이었다. 가까스로 배에 올라타긴 했으나, 부두에 남은 부모형제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짓는 어린 소년 소녀들도 많아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수가 없을 정도였다. 만선의 배 선창가에서 배를 탈려고 시도하다가 차가운 바닷물에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볼수 있었다. 바닷물에는 시신들이 보였으며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수없는 피난길의 참상이었다.
둘째, 당시 배에탔던 그 수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미군기의 폭격을 피하여 잠시 동안만 남한에 피난갔다 오면 고향에 다시 돌아올수 있을것이라고 믿고 떠난 사람들이었다.
셋째, 당시 현장에서 한국군인들이 말하기를 앞으로 미군기들이 후퇴후 대대적인 폭격을 할것이고 정세가 불리하면 원자탄을 쏠 것이다. 그 대대적 폭격을 피해 살기를 원한다면 잠시동안만 남한에 피난갔다 오라고 독촉하므로 사람들은 폭격을 피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뜻밖의 이산가족이 되어 부모형제들의 생사, 안부조차 모르고 지난 세월이 무정하게 70년이 흘러간 것이다.
넷째,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평범한 보통 소시민이었고 대다수는 지금까지 알려진것처럼 무슨 정치적이고 사상적으로 이유를 가지고 월남한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엔 가족과의 잠시동안의 헤여짐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고향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일부 어떤 사람들은 국군이 들어 왔을때 국군에 협력하여 인민군이 다시 들어 오면 그 보복이 두려워 피난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말카산’(MalKassan)은 그의‘한국전쟁' 저서에서 “당시 미군과 한국정부 당국에서 될수 있는대로 많은 북한주민들을 남한에 피난 갈것을 권한것은 순수한 인도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북의 많은 사람들이 고향땅을 등지고 남으로 넘어 오게 함으로써 북정권에 인적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이념투쟁에서 서방 자본 민주주의가 공산사회주의 체제보다 우월하다는것을 전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 또한 그 밑바닥에 깊이 깔려 있었던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될수있는대로 많은 북쪽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하기를 권장했다”라고 지적하고있다. 전쟁전술상 이는 당연한 논리이다.
다섯째, 흥남철수작전은 북의 유생역량, 즉 인적자원이 되는 모든 주민들을 소개시키려는 의도된 작전이라는 물적인 증거를 나는 아직 보관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군이름으로 돌린 삐라에서도 잘 나타난다.
흥남철수 작전이 인도주의적 구호가 아니라는 점은 또한 다음과 같은 비참한 목격담을 통래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동원된 일본 어선을 타고 남으로 피난하고 있었던 당년 17세의 한 젊은 처녀 (한증녀씨, 현 86세, 라스베가스 거주)는 필자에게 울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들을 태운 배가 강원도 근처 동해바다를 지날때 난류와 한류가 부딪치는 곳에서 파도가 격렬하게 높아지자 많은 사람들이 배멀미에 시달려 심하게 구토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 일본선장이 밖에 나와 보고서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더럽다고 일본말로 큰소리로“조센진, 기다나이. 에잇! 쿠사이, 쿠사이 !”하며 그의 선원들에게 “저자들을 모두 바다에 쳐 넣어라, 스데데오 !”라고 바다를 향해 손짓하며 큰소리로 명령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5-6명의 그의 선원들이 그 구토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두사람이 번쩍들어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계속 사람들을 파도가 심한 바다에 내 던졌다. 내가 탄 그 일본 배는 3층이나 되는 큰 어선이었는데 당시 나는 2층에 있었다. 그 3층 모두에 피난민들이 수천명이 빼곡 빼곡타고 있었음으로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던져 죽었는지 알수 없다. 우리 층에서 내가 본 사람들은 5-6명이 되지만 나는 당시 공포에 질려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숙여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모두 볼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속에 던저 죽었을 것이다. 그 선장은 30세정도 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산채로 바다속으로 던져 죽게한 끔찍한 현장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공포속에서 떨었다.”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 참상을 필자에게 겨우 증언했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만행인가. 피난민을 구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들을 짐짝보다 못한 취급을 했을리가 있었을까. 그들이 만일 미국이나 일본사람들이었다면 그렇게 바다에 던져죽였겠는가. 한증녀씨는 그 살인현장을 직접 목격한 살아있는 산 증인으로서 그녀의 증언은 역사상 처음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귀중한 증언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에서는 반공법때문에 이 증언을 할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미국에서 큰 용기를 내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증언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미국에 대해 잘못 알려진 역사의 진실은 밝혀져야 마땅한다. 나는 조국의 동포들이 하루빨리 눈을 뜨길 바랄 뿐이다.
한동상/ 재미동포, 라스베가스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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