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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서초동광화문 군중은 예수를 죽이라고 외친 좀비군중

서초동광화문 군중은 예수를 죽이라고 외친 좀비군중


이인숙


2019.11.12



‘예수를 죽이라고 외친 군중들ㅡ진리의 핵심을 모르는 군중은 악마의 선동된 좀비일 뿐이다.

서초동 광화문 군중들이 그렇다’

라고 어제 페이스북에 올린 저의 글에 한 패친께서 다음 댓글을 다셨지요.


< 패친 댓글 : "토착왜구 반혁명 세력과

겨우 브르조아 민주주의 하자는 세력(서초동)이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역사는 발전하고 있지요! 나선형으로...” >

저도 예전에는 '그래도 역사는 발전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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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지도자가 있어 군중이 민중으로 거듭나서 들고 일어나면

 그때는 혁명이되고 역사가 발전한다.


80년대 부터 나는 "인민은 찍소같다" 라고 말했다.
백정놈들이 도살장에 끌어가도 순순히 따라가는 소,


그러나 그런 소가 분노하면 온 마을이 전전긍긍해야하고

 호랑이고 뭐고 도망가는 무서운 혁명적 존재가 되는 소!

10여년전 내가 신을 믿었을 때 까지만해도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과학은 발전해도,

인간사회는 자유평등평화가 확대되는 민주주의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모양(체제)를 달리했을뿐

 계급사회(고대노예,봉건사회)에서 한발자욱도 발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제국들의 침략으로 세계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으며,

 제3세계 옛귀족들이 서구 제국주의들과 결탁하여

 어떻게 과거 보다도 더 악랄한 착취계급사회를 형성했는지 보시라.  


우리 북부조국의 주체사회주의가 세계를 주도해 나가게 될때

인류역사는 양자도약(계단을 뛰어 넘는 식)으로 발전하게될 것이다.

우리 북부조국은 인민이 깨어있고, 하늘같이 존중 받는다.

지인이 잘아는 선교사가 미국 인디언 지역에서 살고있다.

그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그 인디언들에게 예수 이야기를 한마디도 할 수 없다고한다.


처음에는 뭣 모르고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이미 오랜 선조때 부터 그렇게 살아왔고

아예 너무도 당연하여 말하는 것이 오히려 우수쾅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그 선교사는 그 지역 주민들과 어린이들이 와서

편안히 쉬는 사랑방같은 역활만 한다고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과부와 고아 가난한자들을 돌보라' 라고했다고하면,

그 주민들은 오래전 부터 그 사회에서는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누구나 당연히 여기고 아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소리'가 된다.


유목생활할때부터 과부와 고아의 집을 가장 먼저 지어주고 사냥한 것과

식량을 가장 먼저 고아와 과부에게 주는 것이 관습이란다.

10여년전(?) 우연히,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며

남태평양의 어느섬을 소개하는 한국KBS TV방송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TV도 라듸오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전기도 없다.


마을 사람들이 같이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해서 요리도 없이

그냥 불에 굽거나 끓여서 모두 나누어 먹는다.

 사냥할때 가장 공이 큰 사람이 가장 맛있는 부위를 선택할수 있을 뿐이다.


상의할 일이 있으면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좌장이되어

온 마을 애들까지도 둘러앉아 서로 상의한다.
먹는 것도 "요리"와는 한참 멀고 '쇼쇼쇼'도 없지만 도데체가 근심걱정이 없어 보였다.


모두 같이 놀고 장난치는 모습들 -

 우리 어렸을때의 우리마을 모습 같았다.

지금은 옆집 할머니가 죽은지 몇달이 지나서야

 "아ㅡ 그래서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구나!"하는 지경이다.


내가 컴퓨터를하고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하여 행복지수가 높아졌는가?

과학발달 물질풍요가 인간행복의 발전과는 상관이 별로 없더라는 말이다.

자살에 내몰리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한다.

역사의 발전을 과학의 발전으로 평할 것인가,

인간의 행복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볼 것인가?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 살수 없는 존재라면,

그 사회는 어떠한 사회가 되어야 발전했다고 볼 것인가?

인민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체제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어떠해야할까?
민주주의란 우리의 최종 목표일뿐 지상 어느나라도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며

그에 이르는 과정으로 시도할 뿐이다.

가장 민주주의에 가까운 나라는 앞에서 말한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섬나라의 삶도 외부의 탐욕스런 과학사회 라스베가스자본주의문화가 소개되면서

 파괴되고있다.

악마는 천국을 파괴하고 지옥을 천국처럼 스팩타클하고 흥미진진 재미있게 보여준다.

  그래서 시골의 처녀 총각들이 도시로 라스베가스로 찾아간다.  


자본주의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밤새워 경쟁을 하기 때문에 문명이 빠르게 발전한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이 편리함을 줄지 언정,

 인간의 행복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 편리함을 위해 돈 벌이 노예로 전락시키고,

자원고갈 오염 인력낭비 인간관계파괴 등 폐악이 뒤에 쌓인다.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유럽사람들이 와서 땅을 팔라고 했다.

 땅은 우리의 어머니인데 어떻게 팔고사고 할 수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했다.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이고 모든 생명은 우리의 형제인데

내것이 어디있고 네것이 어디있겠는가? 


이런 마음이면 불교의 ‘마음을 비운’ – 도통한 사회가 아니겠는가?

이런 사회는 불법 정경유착 강남꼼수도 없을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자본주의의 추악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서구 기독교 자본주의 문명이 제 3세계를 침략하고

 지금도 중동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으며 지구를 오염 시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인민들의 삶이 가장 부유했던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 등을

지금 누가 어떻게 생지옥을 만들었는지 보라.

  (“가다피 시절 리비아에서는”

   http://c.hani.co.kr/hantoma/3026264 2016.02.28 Hojeong Nam, FB <한토마> )


악마가 천사를 죽여야하듯 돈귀신 자본주의는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체제 국가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 쿠바 우리 북부조국 들이 전쟁 타겟이 된 것은 필연이다.

산업이 발달 되면서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중세봉건시대의 혈통에 의한 계급제도가

돈이 많고 적음에 따른 계급 구조로 바뀐다. 


계급사회는 계급만큼 자유가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 있는 만큼 계급이 형성되고 돈있는 만큼 자유를 갖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의 계급에 대한 글에서 자유와 계급의 개념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떻게 바뀌여 졌는지 설명하였다.
( “[제 1부]북한사회의 계급에 대한……” http://blog.daum.net/win/104  )

민주주의가 이뤄지기위한 기본요소는 자유 평등 평화이며,

이 3가지 요소 중에 단 하나라도 미달이면

인민은 행복할수 없고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주지육림의 매국노 집 담장 밑에서 배곱아 쓰러진 어린 자식을 안고

 눈물흘리는 거지의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평등 없는 자유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감옥소에 갇혀있으면서 평등하다고 행복할 수도 없다.

자유 없는 평등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자유와 평등이 전쟁 난민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즉 자유와 평등을 누릴려면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 평등 평화는 민주주의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성립 안되는 핵심요소라는 말이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한국적 민주주의> 라는 말 처럼,

 민주주의의 정의도 모르는 언어모순 - 사기꾼들의 단어다.

그마저도 '악마가 만든 최고의 작품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란

 <자본의 자유>를 <인간의 자유>인양 포장한다.)

참고가 되도록 옛글의 일부를 발췌한다.
<< “야훼바울 악마교와 예수님의 민중교” http://blog.daum.net/win/7   >>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보면, 

 진리가 하늘의 뜻인 것 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고,

  바로 이어서 인간 세상에 대한 기도의 첫시작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며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말한다.


예수님은 내 이웃의 기쁨을 같이 즐거워하고

슬픔을 같이 슬퍼하고 서로 나누며 사랑하는

 “우리” 라는 관계 속의 사회를 천국이라 하신다.


이웃은 굶어 죽어 가는데 억만금을 쌓아 놓아야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 이 보장되고

 그날그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필요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인간들이 살았더라면 이땅은 벌써 천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의 최대작품 자본주의 사회가 대신하고 예수의 가르침은 철저히 실패하였다..….
내 생각은, 인간의 본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에는 너무 이기적이기에 실패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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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들은, 당연히 원시인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현대인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 과 “생식”이다.
이 “생존”과 “생식”에 실패한 종은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무엇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 우선 나 부터 살고 보자는 행동을 한 개체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고,

 따라서 지금까지 그런 이기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는 유전인자가

 대를 이어오며 동물의 본성으로 형성되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이기적인 유전자”라고 까지 이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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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말과 삶은 ‘나를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는 어려운 삶’ 을 살라는 말이다.
이것을 참진리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높은 가치의 실현이라는

 자기 만족과 행복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기적 존재인 인간이 몇명이나 그렇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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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이나 지났음에도 예수가 원하는 사회가 아직 미완성이라면

단순한 기득권자들의 종교 이용만의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문제 해결에 대한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즉 만일, 사회구조가 ‘생존’ ‘생식’을 보장하는 체제가 되면

 인간이 악할 필요가 없고, 인간의 이기적 성향도 바뀐다.

이기적 마음을 비우고 십자가를 지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어려운 주문보다는

 이기적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는 사회구조를 만드는 방법이 더 확실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개인적 삶의 지침으로는 예수님 사상을 따르는 것이 옳고,

공적인 삶에 있어서는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을 해야

예수님이 말하던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생존생식에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 착하다.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떤지는 자기 이익이 걸린 일에 맞다뜨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등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보면 비교적 정확하다 한다.


자본주의 인간들이 사회주의 국가 인간들 보다

영악 사악한 이유는 각개약진으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각 개인의 변화로 사회가 바꿔지는 것을 말한 것에 반해,

 만일 그 사회가 생존권 (무료의식주, 무료의료, 무료교육 등)을 보장한다면 

 사람들이 생존을 위하여 이기적일 필요가 없고

그 사회는 천국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빌레그레함 목사가 북부조국을 방문하고

, “예수가 와도 할 일이 없는 나라”라고 했다는 말이

지나가는 말로 듣기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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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면, 미국과 남녘 매국노정권이 끝임없는 침략위협과 조작 왜곡 음해로

 우리 북부조국을 위협하고 있으며

 국제 왕따를 만들어, 북부조국은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되고

개인의 자유도 어느정도 유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세계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기독교 인권국가 미국이

 “북한은 굶주리고 자유도 없다”라고 떠드는 꼬라지가,

마치 강도가 양민을 두두려 패고 옷 까지 다 빼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발가벗고 길 거리에서 자고있는 놈”이라고 욕하는 것과도 같다. 

(관련글: 2016.09.01 한토마 http://c.hani.co.kr/hantoma/3123418 )

그래서 인간이 행복해지고,

 이기적 욕망으로 아귀다툼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면,

가정성원 한사람 한사람으로 부터 국제사회 관계구조 까지,

인권과 주권을 존중하는 구조 즉 생존과 생식을 보장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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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조선은 예수가 꿈꾸던 세상이다” 쇠심줄 2018.12.25 

 http://blog.daum.net/win/83  >>

지금 우리 북부조국은 제국주의 조폭들의 온갖 위협 제재속에서도

 핵으로 방위력을 확보하고(평화보장),

인민을 하늘같이 여기며

온나라가 한가족 사랑으로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서로 헌신하는 사회를 이루었다.


그래서 “예수가 와도 할일이 없는 사회”

– 즉 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우리 북부조국이

세계를 지도할 때 인류는 예수가 꿈꾸던 지상천국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때를 바라보며 희망찬 깃발을 드높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