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메이슨단과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
기자명 이양재
2022.02.15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이번 글에서는 우리 역사에 대한 서양인들의 침탈,
특히 프리메이슨단의 침탈을 논하고자 한다.
다소 한국 개신교를 비판한 부분이 있더라도
타 종교에서 이를 종교 간의 대립적 논란에 이용하지 말기를 바란다.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와 그 성직자들은 프리메이슨단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연재글을 접한 홍일선 시인이 [단기]라는 시를 보내와
글을 시작하기 전에 공유하고자 한다.
단기 檀紀
여강농인
그간 한 갑자 좋이 써왔던
서기 이천 몇년 모월 모일 폐기하고
오늘부터 시방 당장
단기 4355년 2월 8일이라고
몽당연필에 침 발라 꾹꾹 눌러
달력 앞머리에 큰글씨로 쓰리라
단기라고 거룩한 단기라고
오월 못자리 논둑에 연둣빛 모포기로도 쓰리라
아픈 사대강 모래톱에 개망초 뿌리로도 쓰리라
서러운 돌무지 옆
야윈 솟대 쓰러진 장승들
눈빛 시키는 대로 쓰고 쓰리라
한 갑자 넘게 불쌍것들 시키는 대로 써왔던
서기 이천몇년 따위 조용히 버리리라
이번 대보름 날
만월 뵈올 때 정히 소지하여
허공에 바치리라
삼천리 하늘에 단기 두 글자 모시리라
2. 프리메이슨단 그리고 우리 역사 왜곡을 시도한 영국인 맥레오드(McLeod)
프리메이슨(Freemason)은 프리메이슨단(Freemasonry)의 단원(團員)을 말한다.
프리메이슨단은
‘롯지(Lodge, 작은 집)’라는 집회(모임) 단위로 구성되어 있던
중세의 석공(石工: Mason) 길드에서 비롯되었다.
1717년 런던에서 몇 개의 석공들의 롯지가 합쳐져
그랜드 롯지(Grand Lodge)를 형성한 것이 본격적인 조직화의 시초라고 한다.
이 조직은 18세기 중엽에 전 영국으로 확산하였을 뿐 아니라,
유럽 각국과 미국까지 퍼졌는데,
이때는 이미 석공들만이 아닌 지식인과 중산층 개신교인들의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계몽주의라는 시대적 사조에 호응하여
세계시민주의적인 의식과 함께 자유주의‧개인주의‧합리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종교적으로는 관용을 중시하며,
그리스도교에 소속된 교단 조직은 아니지만
강령에는 도덕성과 박애정신 및 준법을 강조하는 등
청교도적(淸敎徒的)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기존의 종교조직들,
특히 가톨릭교회와 가톨릭을 옹호하는 정부로부터
프리메이슨단은 탄압받게 되어 비밀 결사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프리메이슨단의 동북아 진출은
우리 민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게 한다.
영국인 맥레오드(McLeod)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여 1879년에 발행한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with Korean, Japanese and Israelitish Illustrations.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 한국, 일본, 이스라엘 삽화와 함께)』 표지.
하드카버, 1879년, 1책, 크기 : 28.5×17.8 cm. 필자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영국인 맥레오드(McLeod)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여
1879년에 발행한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with Korean, Japanese and Israelitish Illustrations.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 한국, 일본, 이스라엘 삽화와 함께)』 의 내부 표제.
[사진제공 - 이양재]
1991년으로 기억한다.
당시 영국 런던의 아시아 관련 고서 전문점
‘한산당(寒山堂, Hansan Tang Books)’에서 내게 보내온 ‘고서 매물 목록’을 보니
이상한 책, 한 책이 아주 고가에 매물로 나왔다.
나는 서둘러 팩스로 주문을 하고 청구서를 받아 송금하였다.
이 책은 조선에 기독교가 전래하기 직전에
영국인 맥레오드(McLeod)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여 1879년에 발행한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with Korean, Japanese and Israelitish Illustrations.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 한국, 일본, 이스라엘 삽화와 함께)』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보듯이
우리 조선인(Korean)과 일본인(Japanese)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열 지파에 속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약간의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우리 민족을 왜곡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입수하여 살펴보면서 일부 개신교인들과는 달리 분노하였다.
(1) 맥레오드는 누구인가?
영국 스코틀랜드 스카이
섬에 연원을 두고 있는 맥레오드 가문의 25대 수장(首長)
‘노만 맥레오드(Norman MacLeod, 1812~1895)’.
그는 ‘니콜라스 맥레오드’와 혈연관계로 보이는 인물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이 책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with Korean, Japanese and Israelitish Illustrations.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 한국, 일본, 이스라엘 삽화와 함께)』의 저자
니콜라스 맥레오드(Nicholas McLeod)는
스코틀랜드의 스카이(Skye) 섬(島) 출신인데,
그는 노만 맥레오드(Norman McLeod)로 불리기도 한다.
스코틀랜드인은 성 앞에 'Mac(맥)'이나 Mac을 줄인 'Mc(맥)'이 붙는 경우가 많은데,
Mac은 스코트 게일어로 '~의 아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McLeod는 MacLeod으로도 쓰는데 MacLeod 가문은 스카이섬의 대표적인 명문 집안이다.
(스카이섬 출신의 ‘노만 맥레오드’에 대해서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 :
①https://en.wikipedia.org/wiki/Norman_MacLeod_of_MacLeod
②https://www.geni.com/people/Norman-MacLeod-of-MacLeod/6000000003891387005)
니콜라스 맥레오드(Nicholas McLeod)는
스코틀랜드의 북서부 지역의 섬(島) 스카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출생과 사망 연도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그의 삶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극히 적다.
다만 그의 알려진 행적 연도는 1868~1889인데,
그는 1867년 혹은 1868년에
일본으로 이주하기 전까지는 청어(靑魚) 가공업계에서 일하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처음에는 회계사로 출발했지만,
나가사끼(長崎)에서 골동품 중계사로 일을 하다가,
이후에는 고베(神戶)로,
그리고 다시 요코하마(横浜)로 활동 지역을 옮겼다.
그 후에 아마도 사업에 실패한 후일 것이다
. 1889년에 홍콩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이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이다.
즉, 그는 약 22년간 일본에 체류하였는데,
일각에서는 그가 일본과 조선에서 선교사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주장은 그가 남긴 세 권의 책이
모두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찾고자 하는 열의에서 저술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그의 고향 스코틀랜드 스카이섬은
비밀결사 프리메이슨단(Freemasonry)의 중요한 근거지이며,
맥레오드 가문은 프리메이슨의 바탕을 이룬 가문이다.
즉 이 책을 저술한 맥레오드는 십중팔구 프리메이슨(Freemason)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노만 맥레오드(Norman McLeod)라고도 불렸는데,
노만 맥레오드는 당시 스카이섬 지역
맥레오드(MacLeod) 가문의 25대(代) 수장(首長)의 이름이기도 하다.
니콜라스가 노만 맥레오드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니콜라스와 노만은 동일인은 아니지만, 그 둘은 매우 가까운 혈족인 것 같다.
니콜라스 맥레오드가 일본에서 마지막 거주하던 요코하마는
일본에서 서양인 전용의 프리메이슨단의 롯지가 1865년에 처음 새워진 곳이며,
미국 개신교의 일본 선교의 거점이자,
또한 조선 선교를 하는 데 이용한 중간 거점이었다.
즉,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첫 기독교인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
‘마가복음’을 조선어로 번역한 곳도 요코하마이며,
미국 개신교가 조선에 파견한
북 장로교의 첫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감리교의 첫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인천으로 입국(1885년 4월 5일)하기 전에
중도 기착하여 조선어를 배우는 등 준비를 하던 곳도 요코하마이다.
(2) 맥레오드 저서의 의미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with Korean, Japanese and Israelitish Illustrations』에 실린 삽화. 이 책의 삽화로 실린 조선인과 조선 풍경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실물을 바탕으로 한다. [사진제공 - 이양재]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with Korean, Japanese and Israelitish Illustrations』에 실린 삽화. 이 책의 삽화로 실린 조선인과 조선 풍경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실물을 바탕으로 한다. [사진제공 - 이양재]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with Korean, Japanese and Israelitish Illustrations』
뒷부분 앨범. [사진제공 - 이양재]
맥레오드가 이 책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를 출판한 1879년이면,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확산하던 시기였고,
중국에서 [광개토태왕비]가 발견(1880년)되기 이전이며,
조선에서는 갑신정변(1884년)이 일어나기 이전이다.
즉 스코틀랜드 스카이섬 출신의 맥레오드는
일본에서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식민사관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이러한 변환 시기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시하며 유태인으로 규정하는 역사 왜곡에 들어갔던 것이다.
맥레오드는 일본에 체류하던 시기에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를 저술하기 이전에
이미 아래와 같은 두 권의 책을 먼저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1. 『Epitome of the ancient history of Japan』 / 간추린 고대 일본 역사서
. (cover title: Japan and the Lost Tribes of Israel) / 표제:
일본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들. 1878년 나가사키에서 출판.
2. 『Illustrations to the Epitome of the ancient history of Japan』
including illustrations to the guide book : 1878년 교토에서 출판.
맥레오드 저술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일본은 자신들을 유럽 일부로 여기는 잠재의식이 팽배해 있다.
유럽의 근대역사학이 일본에 도입된 뒤 시작된 일본의 근대역사학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호시노 히사시(星野恒)가
1890년의 논문(「本邦ノ人種言語ニ付鄙考ヲ述テ世ノ真心愛国者イ質ス」)1)에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하기 이전인 1879년에,
맥레오드는 ‘일선동조론’과 유사한 주장을 담은 책을 저술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을 유태인의 잃어버린 열 지파에 속한다”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맥레오드나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조선과 일본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려는 공통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이러한 ‘일선동조론’은 후일,
특히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민족사학계 일각에서
“조선이 고대 일본을 지배하였다”라는 역이론을 만들어 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점은 현대의 황당사관론자들이 깊이 되새겨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우리와 동일 민족이 아닌 민족이 창조한 문물이나 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중국인이라는 근거를 제공해 주게 되는 것이다.
(3) 일본의 프리메이슨단
일본의 계몽가이자 교육자 니시 아마네(西周, 男爵 ; 1829~1897)는
네덜란드 라이덴대학교 유학생 시절인 1864년 10월 20일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하였다.
그의 입회 문서는 레이덴 대학교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 (La Vertu Lodge No, 7, Leyden, October 20, 1864).
같은 해 말에 동료 유학생 츠다 마미치(津田真道, 男爵 ; 1829~1903) 역시
같은 롯지(Lodge)의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하였다.
이후 1865년 영국계 프리메이슨단이 요코하마 롯지를 창설하였고,
1870년에는 스코틀랜드계 프리메이슨단이
효고와 오사카에, 1872년에는 라이징산 롯지가 창설되며.
그들을 통합하는 일본지구 그랜드 롯지가 1873년 요코하마에 탄생하였다.
이후 일본의 근대화는 눈부시게 진척된다.
그런데 일본의 초대 주영 공사로 부임하였던
외교관 하야시 다다스(林董, 伯爵 ; 1850〜1913)는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영일동맹’(英日同盟, Anglo-Japanese Alliace)을 체결한 후,
이듬해 5월에 대영제국의 롯지에서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한다.
하야시의 프리메이슨단 가입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지시였다는 말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63년 서양의 해군학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 이듬해 귀국한 뒤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열강과 조슈번(長州藩) 사이에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争)이 일어나자,
전후 평화교섭 과정에 통역으로 참가하였는데,
그는 영국에 체재할 때 프리메이슨단의 존재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프리메이슨단이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지원 세력이었으며,
그들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현재 일본의 보수파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유럽에 속해 있다는 잠재적 소신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에서 프리메이슨단이 활동하면서 파생시킨 결과이다.
이렇듯 일본은 영국과 네덜란드 프리메이슨단의 동북아 전진기지였다.
(4) 일제의 조선 침략과 한반도 분단의 배후 프리메이슨
『Holy Bible, Masonic Edition(성경전서 프리메이슨 판(版))』, 3종, 필자 소장.
프리메이슨을 위한 『성경전서』 판본이다.
책의 앞부분에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자료가 수록되어 있고,
그 자료 가운데 프리메이슨단이 배출한 미국 대통령들의 명단이 들어 있다.
이 『성경전서』는 영국 국왕인 제임스 1세의 주도로 1611년에 영어로 출판된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 欽定譯)』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Holy Bible(성경전서)』, 이 판본은 1923년에 첫판을 내었다.
이 책은 1949년 판(9판 본)이다.
The John A. Hertel. Co., Chicago. 크기 : 25×30cm. 필자 소장.
챙의 앞부분에 미국의 프리메이슨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색채 판 초상을 싣고 있다. [사진제공 - 이양재]
『Holy Bible(성경전서)』, 이 판본은 20세기판으로 1925년에 첫판을 낸 이래, 여러 차례 중판되었다.
이 책은 1967년 판이다. A. J. Holman Company., Philadelphia. 크기 : 24.6×30.4cm. 필자 소장.
[사진제공 - 이양재]
대한제국 국권침탈기에 해당하는 시기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류스벨트와
윌리암 하워드 태프트도 프리메이슨단이 발행한 『성경전서(Holy Bible)』에 이름이 실려있다.
[사진제공 - 이양재]
미국은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7월까지 계속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하여 일본이 승리하도록 하며,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이 ‘가쯔라-태프트 밀약’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을 상호 용인한다는 밀약이다.
그런데 1901년부터 1909년까지의 미국의 대통령은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인데
그는 프리메이슨단 단원(團員, 회원, Freemason)이며,
1909부터 1913까지의 미국 대통령은 ‘윌리암 하워드 태프트’가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태프트’이고, 그 역시 프리메이슨이다.
즉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황제의 퇴위와
근대해산, 1910년 국권피탈의 시기의 미국 대통령은 모두 미국의 프리메이슨이었다.
이후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과 프리메이슨단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프리메이슨단의 일본 내 재산을 압류하며 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런데도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패망한 이후
일본 점령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의 프리메이슨단 그랜드 롯지를 부활시켜 활성화하며,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일본을 다시금 동북아 방어 및 진출의 거점으로 삼는다.
트루먼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의 미국 대통령이었는데
그가 대통령을 하던 1945년 한반도는 분할되고
, 1948년에는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수립되며,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다.
물론 ‘해리 트루먼’과 원자폭탄의 만주(滿洲) 사용을 두고 그와 맞섰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모두 프리메이슨이었다.
이를 보면 프리메이슨이 미국 대통령일 때는
일본 중심의 동북아 정책을 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우리 민족은 근현대사에서 프리메이슨의 밥이었다.
일본의 조선 반도 합병에 협력하고
한반도를 분단한 각 시대의 미국 대통령이 프리메이슨이었음을
내가 공식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자료가
바로 미국의 프리메이슨단이 발행한 그들의 『성경전서(Holy Bible)』이다.
나는 프리메이슨 『성경전서』 3종을 소장하는 등
프리메이슨단 자료를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
1990년대의 미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제42대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43대 대통령 W. 부시,
역시 프리메이슨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이, 특히 부시 부자가 대통령일 때
한반도에는 어두운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이후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도 프리메이슨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역시 대북 강경책을 구사하였으나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2차에 걸쳐 조미정상회담을 하였지만,
결국 조미관계의 개선은
트럼프 행정부에 포진한 네오콘(neocons)들로 인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네오콘에는 특히 유태인 출신이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5) 프리메이슨단의 핵심은 청교도 보수교단
『Holy Bible(성경전서)』, 1974년 이후, 크기 : 20.4×30cm. 필자 소장.
이 판본에는 발행일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1974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제럴드 R. 포드’가
프리메이슨 대통령 명단에 들어가 있어 1974년 이후에 출판된 판본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프리메이슨단과 그 실체에 대해서는 많이 왜곡되어 알려지고 있다.
실체를 왜곡하여 알려지게 함으로써 그들의 실체가 가려지게 한 것이다.
프리메이슨단은 흔히 ‘일루미나티(Illuminati)’와 동일시되고 있지만
1776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일루미나티와는 관련이 없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프리메이슨단이
미국 개신교와 무관한 것으로 주장하며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하지만,
실제로 프리메이슨단의 핵심은 미국의 기독교 보수교단이다.
미국의 개신교는 노예해방을 둘러싼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북부 교단과 남부 교단으로 분리됐는데,
미국의 각 교파 종단은 진보적인 북부 교단과
보수적인 남부 교단으로 나뉘어
수년 전까지만 해도 상호 간의 연계를 단절하여왔다.
기독교 청교도가 프리메이슨의 핵심이라는 것을
나는 그들이 발행한 『성경(Holy Bible)』으로 입증한다(사진 참조).
미국의 일부 개신교단이
프리메이슨단을 악마적인 이단(異端) 단체로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검토해 볼 여지가 있으나,
나는 그들을 공격하는 교단일수록 프리메이슨적 요소가 많은 교단으로 판단한다.
1884년 조선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 언더우드는
미국 북 장로교 소속이었지만,
이후에 남부 교단 소속의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한다.
조선 문화를 존중하였던 대부분의 선교사들,
특히 조선학자라 칭할 수 있는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 奇一, 1863년~1937년)은
미국 남부 교단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이다.
프리메이슨단은 반가톨릭 조직이므로
로마 가톨릭에서는 신도가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하면 파문(破門)시킨다.
미국의 여러 개신교단에서도 프리메이슨단 가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프리메이슨단의 강령은
영국에서 시작된 청교도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주지하다시피 영국 청교도 후예들은 미국을 건국한 중추 세력이었다.
즉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비롯하여
토머스 제퍼슨 등등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다수가 프리메이슨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프리메이슨단 가입을 금지하거나
프리메이슨단을 공격하는 일부 교단들조차도
프리메이슨단 조직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프리메이슨단 신념과 일부 보수 교단의 신앙에 유사점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리메이슨이 20세기 후반까지
미국 개신교와 공통으로 갖고 있었던 신념은 백인과 남성우월주의 신념이다.
현대의 프리메이슨 가운데는 일부 회교도(回敎徒)도 있다.
회교도 프리메이슨의 특성은 친미주의자라는데 있으며,
그들은 회교도이지만 유태인의 국가 이스라엘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6) 대한제국의 프리메이슨단과 이승만, 그리고 서재필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간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04년 8월 9일 특별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물론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하러 갈 때
게일, 언더우드, 벙커, 질레트,
스크랜턴, 프레스턴이 써준 추천서 19통을 가지고 떠났다.
선교사들의 추천서에는 옥중에서 거둔 전도의 성과와
이승만이 장차 한국의 복음 전파를 주도할 인물임이 강조되었다.
1907년 6월경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조지 워싱턴 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를 졸업한 이승만은
그해 12월에 시카고를 방문하였을 때,
프리메이슨 사원(Masonic Temple)에서 개최된
‘장로교 설교자회(Presbyterian Preachers Meeting)’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사실(이승만 일기, 12월 16일자)이 있다.
그런데 이 프리메이슨단의 사원은
외부 집회가 허용되지 않는 그들만의 비밀이 보장되는 그들 전용의 공간이므로
‘장로교 설교자회’란 비밀 모임을 위하여 내세운 이름으로 판단된다.
즉 이승만은 조선인으로서 프리메이슨단 집회에 최초로 공식 참여한 인물이다.
이승만이 프리메이슨단 사원에서의 모임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것을 염두에 두고,
그의 도미 유학과 ‘조지워싱턴대학교’ 재학 시절의 일화를 살펴보면
그는 조지워싱턴대학교 재학하던 시절에 프리메이슨단 단원이 된 것 같다.
이승만이 1904년 11월
미국으로 유락하러 갈 때 추천서를 써준 언더우드나 스크랜턴은
1908년 한양 롯지가 출범하기 이전부터,
그들이 미국에 있을 때부터 프리메이슨단 단원이었다.
이승만은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 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특별 입학한 직후
, 대한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학생 신분임에도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와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를 면담하였다.
이승만은 당시 한양에 있던 선교사들과 가까웠음에도 세례를 받지 않았고,
그해(1905년) 4월 미국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기독교에 입교한다.
이후 같은 해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2) 대통령과도 만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하였지만
,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 당시 미 대통령 루스벨트와 국무장관 태프트는 프리메이슨단 골수 단원이었다.
이승만은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논문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이 미국의 조지워싱턴대학교를 특별 입학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한 것은,
미국은, 정확히 프리메이슨단은
그를 일찍부터 주목하여 친미주의자로 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승만이 프리메이슨단 사원(Temple)에서의 모임에 참석한 거의 같은 시기에,
공식적으로는 1908년
서울에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Free Masonary Hanyang Lodge) 1048’이 창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한양 롯지 1048’을 만들기 위해
1907~8년에 몇 차례 준비 모임이 있었다.
당시 한국 거주 외국인은 외교관을 제외하면,
3M 즉 상인(Merchants), 광산업자(Miners), 선교사(Missionaries) 등의 세 부류였고
, 자연히 프리메이슨단 창립 단원은 이 세 그룹의 외국인 중에서 나왔다.
준비 모임 중 한번은
북 감리교 선교회에서 사임한 의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의 집에서 모였다
. 단원들은 본부에 보낼 롯지 창립 청원서를 작성하고 서명자를 찾았다.
광산 이사 알브리지(Walter H. Albridge)가
운산광산 관계자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첫 서명 단원 24명의 1/3이 광산 사업자들이었다.
공주에 부임하여 영명학교를 세운 윌리엄스(Williams) 목사는
창립 모임들에 참석은 했으나
선교 사역에 바빠서 24인 창립 서명자에는 들지 못했다.
청원서는 일본 효고와 오사카 롯지에 보내져 배서(背書)를 받아
일본 총 마스터인 와이마크(George W. Whymark)가 스코틀랜드 본부에 제출했다.
1908년에 개설한 한양 롯지의 단원으로는
첫 총무인 스크랜턴 의사,
대한매일신보 사장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세브란스병원 원장 에비슨(Oliver R. Avison),
해밀턴(Alexander S. Hamilton),
데쉴러(David W. Deshler),
프램프턴(George R. Frampton),
치과의사 한(David E. Han),
고샬크(Albert Goshalk) 등이 있다.
공주의 윌리엄스(Frank Earl Cranston Williams, 禹利岩, 1883-1962) 목사도
1909년 12월 모임 때 하비(William R. Harvey)와 함께 단원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영국인 언론인 베델의 프리메이슨 가입에 대하여
영국 거주의 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은
2018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베델)는 영국 선박업자 조지 쇼어의 소개로
일본 거주 시절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라고 말하며
“할아버지는 (비밀주의 원칙을 지키려고)
가족에게도 프리메이슨 내부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참조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727016004)
1909년에 ‘한양 롯지 1048’ 사무소를 개소한 자는
요코하마의 비단 사업가인
‘일본 프리메이슨의 아버지’ 그리핀(John Thomas Griffin)이었다.
그리핀은 한양 롯지 개소식에 참여하면서 한양 롯지의 단원도 되었다.
한양 롯지 첫 사무실은
서울에 전차를 개설한 기술자 모리스(James Henry Morris, 1871~1942)의 빌딩 2층이라는 설과
손탁 호텔의 한 방이었다는 설이 있다.
두 건물은 정동(貞洞)에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는데,
1922년부터는 모리스 빌딩 2층을 전용으로 사용하면서 모인 것은 확실하다.
모리스는 캐나다 출신으로 17세에 미국인이 되어
1899년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설치한 서울 전차 가설 때
한성전기회사의 기술자로 1899년 8월 30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1905년 일본이 한성 전차 노선을 차지할 때,
모리스는 서울에 남기로 하고
부동산과 보험업 회사를 설립하여 존경받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건립 시 실행이사로 활동했는데,
개신교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서울유니온, 한양구락부(서울클럽),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단원으로 활동했다.
모리스는 1909년 12월 11일부터 한양 롯지의 총무-회계로서 실질적인 리더로 활동했다.
조선총독부는 비밀결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리메이슨단 한양 롯지 1048는 서울구락부(Seoul Club) 형태로 존재했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만 입단이 허용되었고,
조선인은 단원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찰이 몇 차례 사무실을 조사하며
조선인 참석 여부를 조사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를 적발할 수 없었다.
물론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 강점기에
해외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승만과 서재필, 백낙준 등등 몇 명의 조선인은
외국에서 프리메이슨단 단원이 되었다.
그리핀과 스크랜턴 의사가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운산광산에 한 달간 머물면서
사업가들을 단원으로 받아, 에반스(Harry J. Evans) 등이 단원이 되었다.
이로써 1911년에는 단원이 30명이 넘었다
. 한양 롯지 초기의 회합을 이끈 것은 모리스와 프램프턴 두 사람이었다.
프램프턴(George R. Frampton)은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장으로 봉직하기 위해
1900년 12월 29일 서울에 도착한 인물로,
1931년 5월 서거할 때까지 한국의 청년들을 교육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와 그의 부인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광산 단원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서울 회합에 오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1922년 한양 롯지는
정동 미국영사관 바로 옆에 있는,
전에 외교클럽이었던 서울클럽(서울구락부)으로 이전했다.
1925년 화재로 서울클럽이 전소되면서,
한양 롯지는 설립 헌장과 초기 역사의 많은 기록이 소실되었다.
1920년대 클럽 재건에는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 부총무 홉즈(Thomas Hobbs)가 공헌했다.
그는 1911년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하여
1913년 영국성서공회 서울지부 부총무로 채용되었다.
밀러 총무와 함께 일하다가 은퇴하자,
1937년 한양 롯지 총무가 되어 1940년 추방될 때까지 총무로 봉사했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묻힌 영국인 언론인 베델 등
프리메이슨단 단원들의 묘비에서 프리메이슨단의 상징 표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1894년 5월 31일에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따며
이후 미국에서 미국인으로서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헌신하였다,
그는 1905년 문방구 사업에 뛰어든 이후 70여 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크게 성공하였는데.
그 무렵에 “서재필은 로터리클럽과
프리메이슨단 및 미국안보동맹 단원으로도 활동했다”라고 한다.
(출처: 재외동포신문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4280)
서재필이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국익을 추구한 충실한 미국인으로서 활동한 정신세계는
프리메이슨단의 신념에 따른 것인데
이를 보면 그의 프리메이슨단 가입은 이승만보다 앞선 시기일 가능성이 크다.
빠르다면 1905년 한양 롯지가 생기기 이전에
미국인으로 귀화하던 시기에 가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미국인의 이름으로 가입하였을 것이므로
따라서 그의 가입은 재미 조선인 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7) 대한민국의 프리메이슨단
『The History of Freemasonry(프리메이슨단의 역사)』, 4책, 1889년, John C. Yo ston & Co., Publishers. 필자는 Vol.1은 입수하지 못하여 초판본 3책만 소장하고 있다. [사진제공 - 이양재]
『Masonick Melodies, Hyms(메이슨식 가곡집, 찬송가(讚頌歌))』, 1818년,
1책, 크기 : 13.5×22.5cm. 프리메이슨식(式) 찬송가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국내에서 프리메이슨단에 입단한 첫 한국인은
서울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 오래 근무하였던 윤인식이다.
그는 해방 정국과 한국 전쟁 와중에서 협회의 자료를 보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 단원이 되었으나 그는 곧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후 국내에서 프리메이슨단에 입회한 두 번째 프리메이슨은
1958년에 입단한 연세대 총장 백낙준(白樂濬, 1895~1985) 박사이다.
이로써 연세대는 해방 이전에는 한양 롯지의 초대(初代) 회장이었던 에비슨 학장,
해방 이후에는 백낙준 총장이 프리메이슨이 되었다.
연세대와 연관된 언더우드 가문도 프리메이슨단과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겠지만,
기독교 사학자들은 언더우드가 프리메이슨임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한다.
백낙준 박사는 1938년에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이 되고
그해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장에 선출된 바 있는데
, 영국 왕립아시아학회는 영국 프리메이슨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전위단체이다.
이들 단체와 백낙준의 관계를 보면,
백낙준은 1938년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학술, 강연 활동을 돌아다녔는데,
그때 이미 영국의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의 급증과 더불어
한국에 있는 프리메이슨이 300명을 넘어가게 되는데,
미군 장교나 외국인 사업가들 다수가 단원이었다.
현재 한국에는 서울과 부산,
평택에 프리메이슨 그랜드 롯지나 롯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소수의 한국인도 단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자고 있다.
그러나 그들 한국인 프리메이슨은
대체로 미국과 서구 및 일본 프리메이슨의 침략 근성을 모르고 있다.
(8) 프리메이슨단의 정치행태
『An Encyclopaedia of Freemasonry(프리메이슨단 백과사전)』, 2책, 1921년
, The Masonic History Company, New York and London. 크기 : 19×26.7cm. 필자 소장.
[사진제공 - 이양재]
『An Encyclopaedia of Freemasonry(프리메이슨단 백과사전)』, 2책, 1921년,
The Masonic History Company, New York and London. 크기 : 19×26.7cm. 필자 소장.
[사진제공 - 이양재]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프리메이슨단의 대부분은
여성과 흑인이 입회하기 어려운 백인 남성 위주의 조직이었으나
일부 그랜드 롯지에서는 여성과 흑인의 입회도 승인하기 시작하였다.
2016년 말
미국 대선에서 도날드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 신념을 강조하여
미국 제4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 프리메이슨을 알려면 도날드 트럼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현재는 18~20세기 전반과는 달리
그들의 신념은 일부 개신교에 널리 확산되어 있어,
프리메이슨단의 특별한 선동이나 조정이 없어도
대부분 개신교는 친유태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에는 프리메이슨단의 조직이 비밀결사에서 차츰 벗어나 공개되고 있으나,
한국인으로서는 미국과 영국, 네델란드,
일본 등지에 산재해 있는 비밀결사체로서의 프리메이슨단과
프리메이슨을 끊임없이 경계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우호적인 일부 프리메이슨을 배척해서는 안 될 것이다.
프리메이슨단은 시오니즘(Zionism)과 결탁하여 있어,
유태인이 반기독교적이라 해도 프리메이슨은 친유태적이다.
미국과 서구의 친유태적인 정치 형태는
프리메이슨단의 신념과 개신교 보수 교단의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원래 프리메이슨은 백인 및 남성우월주의 그룹이었다.
불과 한 세기전 만 해도 여성과 흑인은 단원이 될 수 없었다.
최근까지도 여성이나 흑인을
단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롯지나 그랜드 롯지가 존재했다.
일본인이 일찍이 프리메이슨 단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맥레오드가
조선인과 일본인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라고 주장한 영향일 수도 있다.
맥레오드의 주장은
동북아에서 친 유대 세력의 확산을 염두에 둔 포석임이 확실하다.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신학자들은 아프리카인들 가운데
유독 에티오피아(Ethiopia) 인들에게서 검은 유태인을 주목하며 그들에게 우호적이다.
(9) 한국민족주의의 본질 ‘홍익인간’
한국의 개신교 교단이 교리상으로 유태인을 편드는 시오니즘을 정당화하고,
미국을 하나님이 세운 국가라고 선전을 해도,
우리는 유태인 혈통도 아니며,
미국에 종속된 국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 선조들의 사상적 맥락은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서
유태인의 신본주의(神本主義)와는 결이 다르다.
홍익인간으로 대변되는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는
폐쇄적인 국수주의(國粹主義)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국가주의자들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일제의 신도주의(神道主義)이나,
독일 나치의 나치즘(Nazism)과 유사한 것으로 폄훼하려 한다.
미국이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를 배척하는 이유는
청교도가 건국한 미국은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민족이 모인 합중국(合衆國)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인종이나 한 민족의 나라가 아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프리메이슨단이 주장하는 세계주의 같은 것을 추구하여야 나라가 유지된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소수민족 유태인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백인 상위의 국가이다.
미국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이유는
한국민족주의는 유태민족주의 이상으로 구심점이 강한 데 있다.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이나
백범 김구(金九, 1876~1949)가 암살된 이유는
그들은 민족의 분단을 반대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은 20세기 전반기에 미국과 유태인,
그리고 일본에게는 천혜의 혜택을 주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악마적 폭력을 행사한 배후였다.
이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를 배제한 상태에서 시오니즘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세계주의만을 우선시한다면 민족통일은 불가능해질 것이며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우리나라와 민족은 쇠락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주의의 철저한 근본 바탕,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 이념 위에서
세계주의가 받아들여져야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은 번성할 것이고 한반도는 평화로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개신교 목사들이 홍익인간과 세계주의는 상충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오이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주의,
곧 우리식 세계주의이다.
이는 민주주의 정신과도 상통한다.
‘홍익인간정신’과 ‘민주주의정신’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둘 다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구약은 신본(神本) 사회였다.
그러나 신약을 보면 예수는 인본(人本)을 중요시하였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보여지는 근본 사상은
인간정신의 구원이고
이는 예수의 인본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주>
1) 호시노는 실증주의 사학의 입장에서
『고사기(古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연구하여
일본 왕가의 선조가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도래하여 온 신라의 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신라의 왕은 먼저 현재의 시마네(島根) 지방에 정착하여
킨키(近畿)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진무동정(神武東征)을 거쳐 일본열도 선주민을 정복하여,
태양신으로 추대되었던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2)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00년,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이미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루스벨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
“우리는 도저히 일본에 반대하여 한국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가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주먹 한 방도 날릴 수 없었다”라며 냉소했다.
고종 황제는 “미국만이 한국의 우방이며,
미국 국민이야말로 한국이 장차 난경(難境)에 처할 때
강력하고도 사심 없는 조언과 충고할 국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조미수호조약 당시의 원조나 거중조정 조항에 대한 고종황제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외교 관리는 필요가 없다며 알렌을 파면시켰고,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에는 곧바로 한국주재 미국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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