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립과 『환단고기』, 『다물구음』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6)
기자명 이양재
2022.08.02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이번에는 1979년 세상에 나온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다루고자 한다.
1979년 『환단고기』가 나오자,
이후에 이 책이 “위서냐? 아니냐?”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논란에서 논자(論者)들은
아무도 문화사적으로 이 책의 본질을 검토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각자가 이 책이 역사책이냐는 관점에서
“‘도’ 아니면 ‘모’로 검토”하였기 때문이다.
즉 “역사서로서 ‘전부 진실’이 아니면 ‘전부 거짓’으로 검토”해 온 것이다.
(29) 『환단고기』와 『다물구음』
『환단고기』의 진위(眞僞) 문제는 사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이에 대한 다른 분들의 연구를 필자가 소개하거나 언급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나는 『환단고기』가 가지고 있는 본질과 그 저자에 대해서만 간략히 논하고자 한다.
가. 『환단고기』의 본질
『환단고기』는 종교서인가? 문학서인가? 역사서인가?
그 본질을 정의하기 위하여 비교문화학
또는 비교문학, 비교종교학의 견지에서 기독교의 『성경』에 비견해 보자.
많은 기독교인이 『성경』이 유태인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비교문화사학자들이나 비교문학사 학자들은
『성경』을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이라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 역사 관련 내용이 있고,
문학작품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도, 『성경』은 본질은 분명 종교서이다.
비교문화사학자들이나 비교문학사 학자들은
『성경』의 「창세기」를 역사서라기보다는 문학작품, 또는 종교문학 작품으로 본다.
그러나 대부분 기독교인은 이를 역사서로 철저히 믿는다.
비교종교학에서 「창세기」는
종교 신앙을 바탕으로 쓰여 진 문학작품이라고 정의할 때
이에 대하여 이의를 달지는 않는다.
『구약』의 「아가(Song of Songs, 雅歌)」는 매우 상급의 연애 문학이며,
「욥기」는 사실(事實)이 아니라 가공된 문학 이야기이다.
「전도서」는 철학적 요소가 크며,
「잠언」은 불교의 「법구경」과 쌍벽을 이루는 종교 교훈서이다.
『신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묵시록)』은 계시문학서로 정의하기도 한다.
『구약』의 「출애굽기」는 역사성이 있는 종교서로서 문학의 요소가 크다.
반면에 「열왕기상」과 「열왕기하」,
그리고 「역대상」과 「역대하」는 역사서로서의 요소가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도 크다.
또한 『삼국유사』는
삼국시대의 여러 역사와 신화 및 설화를 담은 문학서이기도 하다.
특히 설화는 불교적 설화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신화 및 설화 부분과 역사적 부분은 분리해서 판단한다.
「고조선」조도 역사 부분과 신화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렇다면 『환단고기』는 어떠한 책일까? 역사서로 정의하기에는 더 많은 무리가 있다.
신화와 설화도 대부분이 과거에 없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환단고기』는 일부 역사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이 책은 이유립이 창교한 태백교의 종교문학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비교종교학 또는 비교문화학의 측면에서 보면
이유립은 유사종교 태백교의 창시자이며,
『환단고기』는 유사종교 태백교를 위하여
이유립이 내놓은 경전 성격의 유사(類似) 「역사서」로 볼 수도 있다.
이유립은 이 책을 현대에 내놓으면서
계시를 받은 계시서(啟示書)라고 표방할 수도 없었다.
나. 이유립과 ‘태백교’, 그리고 골수 친일파 출신의 제2기 민족사학자 문정창
가장 확실한 것은 이유립은 1963년에 태백교를 창교(創敎)하였고,
『환단고기』는 1979년에 ‘갑툭취’하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이 연재의 제17회 연재 “『제왕운기』와 히브리 기원(紀元)”의
‘아. 이유립의 태백교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이강오 박사는
해당 종교의 공식적인 주장하거나 제공한 자료에 의거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이 소개에서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
단학회라는 존재가 실존했던 것은 사실로 보이나,
“과연 이기가 단학회를 만들었으며,
이유립의 1963년에 만든 태백교가 과연 단학회를 계승하였느냐?”는 점이다.
1889년에 태어난 독립운동가 오동진(吳東振, 1889~1944)이 1911년에
목판본으로 출판했다는 이른바 『환단고기』의 출판비를 냈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듯이,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와
단학회 및 태백교의 관련성도 성립하기 어렵다고 필자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시금 언급하지만, 이강오 박사의 『한국신흥종교총람』(1992년)은
신흥종교를 주관적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각 교단이 주장하는 것을 정리한 책이다.
즉 이강오 박사가 태백교에 대해 언급한 것은
태백교가 공식적으로 제공한 자료에 의거하여 소개한 것이다.
따라서 이강오 박사의 『한국신흥종교총람』의 언급은
당연히 신뢰성에 한계가 있는 책이다.
많은 사람이 이유립의 선전을 믿는다.
그러나 이유립은 절대로 독립운동가가 아니고, 오히려 친일 의혹이 있는 인물이다
. 이유립의 친일 의혹은 친일단체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에 가입하고
그 기관지 『일월시보(日月時報)』에 기고를 하는 등 간여한데 있다.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 상‧하(上‧下), 문정창(文定昌), 1971년, 2책, 백문당.
[사진 제공 - 이양재] 문정창(文定昌,
1899~1980)은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 출신. 1943년 3월 황해도 은율군수를 거쳐,
1945년 6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으로 재직.
문정창은 해방 후에 『근세일본의 조선침탈사(近世日本의 朝鮮侵奪史)』(1964)와
『(군국일본)조선강점삼십육년사((軍國日本)朝鮮强占三十六年史)』(상·중·하, 1965~1967),
『단군조선사기연구(檀君朝鮮史記硏究)』(1968),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1969),
『일본상고사(日本上古史)』(1970),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상‧하, 1971),
『백제사(百濟史)』(1976), 『가야사(加耶史)』(1978) 등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그런데 의외로 제2기의 민족사학자 가운데는 골수의 친일파는 따로 있다.
그는 민족사학을 한답시고 나대면서도
친일파 전력을 자랑한 인물인데
바로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 출신의 문정창(文定昌, 1899~1980)이다.
나는 문정창의 한남동 자택을 1978년쯤에 가본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1941년)이라는 저술을 자랑스럽게 깨내서 보여 주었다.
문정창은 1899년 경남 부산에서 출생했다.
부산의 동명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 1923년 경상남도 동래군 서기를 지내다가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행정강습소에 입학해 이듬해 3월 졸업했다.
경기도 수원군, 1927년 경상남도 울산군, 1928년 동래군
, 1930년 경상남도 산업부 산업과(1930)
, 1932년 10월에는 조선 「소화(쇼와, 昭和) 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7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촌진흥과,
1941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정과,
1942년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등을 거쳤다.
1943년 3월 군수로 승진하여 황해도 은율군수를 거쳐
1945년 6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관직 생활 중 조선총독부 간행의 조선조사자료총서인
『산업조합 설립까지(産業組合設立まで)』(1932),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1941),
『조선농촌단체사(朝鮮農村團體史)』(1942) 등을 저술했다.
1945년 해방 후 월남하여 조선농회(朝鮮農會) 총무부장을 지냈으며
1947년부터 개인 사업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문정창이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기성 사학계의 도전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의 차원에서
일제침략사 및 한국고대사 연구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의 말년에 각색한 이야기이다.
그는 20대 초반의 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자신의 조선총독부 관리 시절을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 “제 증조부는 독립운동가로서
집안의 모든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쓰셨다”라고 말하자,
그는 당시의 만남을 서둘러 중단하였고,
그 후 나는 그를 두 번 다시 대면할 수 없었다.
문정창의 이름은 내 영혼에 그렇게 각인되었다.
문정창의 저서로는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近世日本의 朝鮮侵奪史)』(1964)와
『(군국일본)조선강점삼십육년사((軍國日本)朝鮮强占三十六年史)』(상·중·하, 1965~1967),
『단군조선사기연구(檀君朝鮮史記硏究)』(1968),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1969),
『일본상고사(日本上古史)』(1970),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상‧하, 1971),
『백제사(百濟史)』(1976),
『가야사(加耶史)』(1978)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문정창은 1976년 10월 8일 결성된 '국사찾기협의회'에 가담하기는 하였으나,
이유립이나 문정창, 박창암은
처음부터 ‘국사찾기협의회’의 주도 세력이 될 수가 없었다.
1970년대에 제2기 민족사학자로서 친일 의혹이 없는 사람은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던 안호상(安浩相) 박사와
만주국 관리시절 통화시를 중심으로
재만한인들과 항일조직 태극회를 비밀리에 조직해서 항일활동을 전개했던 김득황(金得榥) 박사,
일본대학 출신이지만
일제의 징용을 피하여 개마고원에서 3년간 화전민 생활을 하였던 최인(崔仁) 정도였다.
『신인본민주주의』, 최인(崔仁), 1963년, 영문사 발행, 1책.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는 이 책을 1977년 12월 10일 오후 12시 30분 경에 저자로부터 직접 받았다.
복초(伏草)는 최인의 자호(自號)이다.
『충효』, 안동준(安東濬) 서(書), 1980년. [사진 제공 - 이양재]
안동준(安東濬, 1919~2010)은 괴산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이다.
그는 ‘한국고전연구회’ 회장이었는데,
당시 ‘한국고전연구회’는 안호상, 임승국, 최인, 문정창, 이유립, 윤치도 등등
재야사학자들의 근거지였다.
『한족(韓族)과 고대일본왕실(古代日本王室)』, 안동준, 1책. 1978년(초판본), 경인문화사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1970년대 당시에 이러한 한일관계 고대사연구는 일본이 내 놓은 동조동근론의 도움이 컷다.
『한국고대사관견(韓國古代史管見)』, 안동준 임승국 공저, 한국고전연구회 편,
1978년, 경인문화사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책은 임승국의 첫 번째 저서이다.
임승국은 이 책에서 최인의 『한국학강의』를 무단 표절한 것을 후일 사과해야 했다.
최인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의 혹독한 고문(拷問)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적극적인 활동이 어려운 상태였기에,
단연 안호상 박사와 김득황, 임승국이 그 중심점이 되었고
, 괴산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 안동준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이 물주(物主, 후원자)였으며
, 용태용 변호사가 지원병이었던 셈이다.
당시 이유립은 몽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애당초 ‘국사찾기협의회’의 주도 세력이 될 수가 없었고
결국 이유립은 1981년 이후에 ‘국사찾기협의회’와 결별한다.
상세히 말하자면
1981년 개최된 국사교과서 공청회에 이유립은 끼지도 못했고
국사찾기협의회 측도 『환단고기』를 논거로 들지 않았다.
이에 이유립은
안호상 등 국사찾기협의회 인사들을 비난하는 글을 썼고,
안호상, 김득황, 임승국 등
당시의 국사찾기협의회 주도 세력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다. 내가 본 제2기 민족사학계 일각의 연구 태도
『환단고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1970년대, 제2기 민족사학계 현실은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35책과
일제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여
조선과 일본의 상고사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한 여러 저술은
비판적이면서도 우리 상고사 연구에 상당한 참고서 역할을 하였다.
『일본서기』, 舍人親王(日) 等編集, 1610년(慶長15) 판,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 [사진 제공 - 이양재]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은 일제의 ‘조선총독부도서관’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장서가 해방후 그대로 보관되었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는
조선왕조가 망하기까지 조선시대의 사학자들은 그 존재를 몰랐던 것 같다.
이 두 책은 우리 민족의 역사서라든가 역사 관련 저서에는 언급이 거의 없다.
이 두 책이 우리 사학계에 알려진 것은 일제 강점기이다.
다시 말하자면 제1기 민족사학자들도
그 초기에는 이 두 책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학자들에 앞서 일제 정한론파 사학자들은
이 두 책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교하여 연구하였고,
결국에는 조선과 일본을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엮어내었으며,
그러한 저술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그러한 일제의 서적들은 1970년대 중반
제2기 민족사학자들의 연구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일본의 왜곡된 저술이 길잡이로서의 역작용을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제2기 민족사학자들은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보지도 못했다.
그들이 일제의 학자들이 뽑아서 해석한 것을 보고,
일본의 논리를 우리에 맞게 바꾸는 것이 간편하고 연구하기에 쉬었다.
1970년대 초
소공동 시절의 국립중앙도서관 참고도서 비치실에는
『조선사(朝鮮史)』 35권이 비치되어 있었으며,
일제가 발행한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日鮮同祖論) 일서(日書)들은 쉽게 대출이 되었고,
또한 인사동의 통문관이나 숭문각 등등의 고서점에서는
그러한 책들을 어렵지 않게 매입할 수 있었다.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최동(崔棟), 1969년(재판본), 1책, 동국문화사.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책의 서문은
제1기 민족사학자 장도빈(張道斌, 1888~1963)이 1960년에 썼고,
저자는 권두언을 1963년에 썼으나, 이 책의 초판본은 1966년에 나왔다.
제2기 민족사학자 최동은 일본이 만주국을 세웠을 때
『조선문제를 통하여 보는 만몽(滿蒙)문제』(1932)를 자비 출판하여
일제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한 전력이 있는데, 해방후 그는 이 저술을 발표하였다.
당시 최동은 『조선문제를 통하여 보는 만몽(滿蒙)문제』(1932)를 자비 출판할 때부터
“만몽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일선 만 몽 및 한인을 융합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고 보았고
, 그는 각 민족의 조상이 같은 계통이며
서로 혈연이 가까우므로 각 민족간 융합은 쉽게 촉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 이 책은 제2기 후반부의 유사 역사가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 책의 근저에는 그러한 일제의 만선사관의 영향이 일부 보이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당시 제2기 민족사학자들의 여러 저서에서 한일 관계를 다룬 글들은,
많은 경우 일제 학자들이
동근동조론의 입장에서 저술한 책들을 1차로 참고하여 저술한 2차 저술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의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입각한 식민지교육과 그 이론은
, 지금도 우리 민족사학계 일각에서마저도
일본을 우리와 같은 동이족의 동족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잠재해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이완용 송병준 등등의 일진회의 매국노들도
일본과 조선을 동조동근으로 보았고,
지금 낙성대연구소라는 친일 집단도 똑같다.
이들 일제의 동조동근론자들은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을 바보짓이라 폄하하고 있는데,
그러한 친일적 사고가 제2기 민족사학자들 일각에서까지도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사학자로 위장하여 활동하는 현대판 사대주의 사학자들의 궁극적 목적은
적이 누구고 동족이 누구인지를 혼동케 하는 것이다.
나는 제1회 연재 「사색(思索)을 시작하며」(2022.02.08.)에서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말살시키는 두 가지 방법을 논한 적이 있다.
그 “첫째 방법은
사대주의를 만연시켜 역사를 개악하고 (중략)
식민지 사관을 주입하는 것이다. (중략)
둘째 방법은
식민지사관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작용을 이용하여
, 식민지사관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역사를 허구적인 것으로 뻥튀기시킨
‘황당사관(荒唐史觀 = 虛風史觀)’을
‘민족사관(民族史觀)’으로 오도하여 보급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것이다
. 그렇게 하여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를 모르게” 하면
“우리의 실체가 누구인지 민족 본연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게 된다”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금 말한다.
뻥튀기 황당사관은
지난 제25회 연재 「탐라국을 실증하는 고문헌」 서두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 것
, 즉 “탐라국이 중국 본토에서 건국했다”라는 주장과 같은 류(類)의 것이며,
이는 “제주인을 중국 사람”으로 만들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다.
현재 황당사관은 두 계열이 있다.
이유립 측과 황상기 측이다.
우리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면 이들 황당사관을 버리고
민족사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일제의 동조동근론 비수(匕首)에 다시는 당하지 말고,
이를 뒤이은 청나라의 아편에 우리의 민족정신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
라. 『환단고기』의 출현
『환단고기』는 1979년 단단학회(檀檀學會)의 설립자이자
태백교(太白教)의 교주인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이 펴낸 책이다.
범례에는 단학회(檀學會)의 계연수(桂延壽)가 민간에 은밀히 전해지던 4종의 문헌을 묶어서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아 필사한 뒤에 1911년에 인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나,
작자미상의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유립이 1970년대 초에 발표했던 다른 글들의 내용과도
1979년에 출간된 『환단고기』의 내용은 다른 부분이 많다.
『환단고기』는 1979년 한문 필사본이 소량 인쇄되면서 모습을 처음 드러냈으나,
그 초판본은 이유립의 의지에서 나온 책이 아니라고 한다.
어떻든 이유립은 계연수가 경신년인 “1920년에 자신에게 책을 전해주면서
다음 경신년(1980년)에 세상에 알리라는 유명(遺命)을 남겼다”라고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일어판, 카시마 노보루, 개정5판본(1985년). 1책. ㈜신국민사.
[사진 제공 - 이양재]
일어판 『환단고기』는 1982년에 초판본이 나온 이래, 1985년에 개정 5판이 나왔다.
정가가 일화 3만엔인 고가의 서적임에도
일본 극우들이 다투어 구매하였고, 일본의 극우 출판사 신국민사는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 책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82년에 일본의 변호사이자
극우 역사저술가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曻, 1926~2001)가 “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를 덧붙여
일본어 번역본 『환단고기』을 펴내면서부터이다.
카시마 노보루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기초가 된 대아세아주의(大亞細亞主義)에 기초해서
일본 신도(神道)와 연결해 이 책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환단고기요의(桓檀古記要義) ― 일한 민족 공통의 고대사(日韓民族共通の古代史)』 (일어판),
카시마 노보루, 초판본(1986년). 1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일본 극우파 사이에서 『환단고기』가 히트하자 카시마 노보루는
이 책을 저가의 보급판용으로 내 놓는다.
결과적으로 카시마 노보루는 이유립을 이용하고 그의 명예를 타살한 것이다.
즉 이 책을 본 일본 극우는 이 책이 일본과 조선의 동조동근론에 입각한 사료로 환호하였다.
그는 1990년에
다시 『桓檀古記要義 ― 日韓民族共通の古代史』라는 448면에 달하는 저서를 내놓는다.
얼마나 처참한 일인가?
제목이 이유립의 『환단고기』의 요의(要義)가 “일한민족 공통의 고대사”라는 말이다.
카시마 노보루의 이 저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청구기호 911.02-카175ㅎ)
1982년 『환단고기』의 일본어 번역판 출간에 자극을 받은 이유립이
1983년에 내용을 다듬어 국내에서 다시 출간했고,
1985년부터는 김은수, 임승국 등이 주해를 덧붙인 한글 번역본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잇달아 나왔다.
물론 저작권자 이유립에게는 한 푼의 인세 지급도 없었다.
어쨌든 이유립은 지난 30여 년간 『환단고기』 증후군을 불러일으켰고,
그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무단 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진정한 이유립의 제자들이라면,
이유립의 유족이 『환단고기』의 저작권료를 받도록 해야 했다
. 저작권의 유효기간은 사후 70년이다.
1986년 + 70년 = 2056년이다.
『환단고기』 신봉자들이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저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의 저작권을 짓밟는 행위는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환단고기』가 계연수가 편찬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계연수가 출판한 목판본은 없어졌고
이유립이 외운 것으로 복원하였다고 주장”하므로,
그 저작권은 이유립에게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단고기』를 번역한 모든 번역자와 출판사는 이유립이나
그 상속자에게 최소 5%, 적정선 10%의 원저작료(原著作料)를 주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유립의 『환단고기』는 우리 출판사 상
최대의 종교문학 작품으로서의 공전의 베스트 셀러인 것이다.
그러나 이유립의 아내는 매우 빈궁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민족주의자로서는 기가 막히는 일은,
일본 극우가 환호한 비정상적인 왜색풍(倭色風) 『환단고기』가
국내에서는 상고시대의 역사서로 둔갑하여 널리 신봉되는 것이다.
참담한 노릇이다.
마. 『환단고기』의 구성과 내용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를 다루었다고 하는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등 4종의 문헌이 묶여 있는 형태의 책이다.
「삼성기」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라는 세 성인에 관한 이야기이며,
여기서는 단군조선 이전에 환국(桓國)과 배달(倍達)이라는 국가가 있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은 각각 그 국가들의 군주를 지칭하는 칭호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환국은 7대 3,301년(혹은 63,182년) 동안 이어졌으며,
12개의 봉국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의 영토를 다스렸다고 하며,
배달은 18대 1,565년 동안 이어졌으며
, 처음에는 신시(神市)를 도읍으로 했다가 14대 치우천왕 때에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 단군조선은 47대 2,096년 동안 이어졌으며,
중국 주나라의 고왕(考王) 때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이라는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이 책의 주장은
기존의 모든 문헌 사료와 고고학적 역사학적 연구 결과와 대립하는 비합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역사의 기초도 모르는‥‥‥, 황당한 나이 자랑의 우화를 생각나게 한다.
「단군세기」에는 47대에 걸친 단군조선 군주들의 명칭과 재위 기간의 주요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제1대 군주인 왕검(王儉)이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했으며,
제3대 군주인 가륵(嘉勒)이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한글의 기원이 되는 38자의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북부여기」는 해모수(解慕潄)로부터 6대 214년 동안 이어지는 북부여의 역대 군주와
재위 기간의 주요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6대 군주 고무서(高無胥)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으며,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를 첨부해
해부루(解夫婁)에서 대소왕(帶素王)까지 3대에 이르는 동부여 군주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맥(李陌)이 전래하는 여러 문헌을 엮어서 펴냈다는 발문이 덧붙여져 있다
. 여기에는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환국본기(桓國本紀)’, ‘신시본기(神市本紀)’,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등 태초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 글들과 함께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와 같은 단군교의 경전을 다루고 있는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이 포함되어 있다.
바. 『환단고기』의 평가와 의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는 1457년 관찰사에게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등의 문서를
개인이 소장하지 못하게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를 통해 14~15세기 민간에 단군 숭배를 비롯한 다양한 도참사상이 유포되어 있었고
, 『환단고기』는 이렇듯 15세기 이전부터
민간에 은밀히 전해지던 문헌들을 엮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기」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가
계연수와 태천의 진사 백관묵(白寬默)의 집안에 전해지던 것을
각각 상편과 하편으로 수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도 고려 때의 이암(李嵒)과 범장(范樟)이 쓴 것이
각각 백관묵과 삭주의 진사 이형식(李亨植)의 집안에 전해지고 있었고,
「태백일사」는 이암의 후손인 이맥이 『조대기』 등의 문헌을 참고해 펴낸 것을
단학회의 창시자인 이기가 보관하고 있다가 계연수에게 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단고기』에 수록된 문헌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몇몇 연구자들에 의하면 “15세기 이전에 썼다는 문헌에서
19세기 이후에야 사용된 지명이나
근대적 표현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심지어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썼다는 「삼성기」도
안함(安含) 노원(老元) 동중(董仲)의 삼성(三聖)에 관한 기록인
『안함노원동중삼성기』의 제목을 따와서
적당히 창작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즉 『안함노원동중삼성기』는
안함, 원로, 동중 이라는 세 성인에 관해 민간에 전하던 도참설 문헌인데,
이것을 안함로와 원동중이 쓴 『삼성기』로 오독하면서
환인, 환웅, 단군을 중심으로 한 기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환단고기』는 15세기 이전부터 전해지던 문서들을 엮은 것이 아니라
, 일제 강점기에 나온 대종교 계통의 문헌과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기초로 하여
1950년 이후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책에 대한 내용서지학적 연구는 다른 연구자들의 논문을 참고하길 바란다.
『환단고기』에 대한 기존 사학계의 평가는,
“몽고의 침략 이후에 민족의식의 고양과 함께 민간에 확산된 단군 숭배 사상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떤 특성”과 변화를 지니게 되었으며,
“한국의 민족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라고 평가한다.
특히 “반고와 치우 등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들까지 끌어들여
상고시대에 한민족이 우수한 문화와 강한 국력을 가지고
중국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음을 강조하는 이 책의 주장은
한국의 민족주의가 지닌 복고성과 배타성을 보여 준다”라고 평가한다.
이런 기존 사학계의 평가는
단군 사상이 마치 몽고 침략기인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잘못된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잘못된 주장이 나오는 명분을 『환단고기』가 제공해 준 셈이 된다.
『환단고기』는 순작용보다는 역작용이 크다.
우선 이 책은 우리 민족에게 그나마 남아있는 『삼국유사』의 「고조선」기라든가
여러 역사서를 파괴하여 우리 민족의 본질을 허공으로 날려 버리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매우 심각한 공상과학 수준의 종교문학 작품이다.
사. 『환단고기』의 출현 정황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이유립은 1976년 집을 잠시 비운 사이
이유립이 도망쳤다고 오해한 집주인이 집에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목판본)을 팔아넘기면서
『환단고기』를 잃어버렸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유립은 『환단고기』를 달달 외운 덕에 복원할 수 있었다”라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 주장에는 『환단고기』 저술의 비밀이 숨어있다.
원래 목판본 출판은 전문 각수(刻手)가 다수 동원되어야 하므로
제작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30부 정도의 소 부수가 아니라 수백 부의 많은 인쇄물을 만들기 위하여 제작한다.
조선시대에 보편적인 예로서 30부 정도를 인출하기 위해서는 목활자를 사용한다.
목활자는 빌려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동학의 최시형이 『동경대전』을 목활자로 찍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서지학의 지식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환단고기』를 목판본으로 30부를 발행하였다”라는 주장을 검토하여 보면
, “『환단고기』는 1911년에 목판본으로 30부를 출판한 사실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래도 『환단고기』를 목판본으로 출판했다고 가정(假定)을 하고 검토해 보자.
1979년 광오이해사에서 영인한 『환단고기』 1책은 모두 138장이다.
1면에 10행 22자이니 1면에 220자, 1장에 440자, 138장이면 빈칸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
6만 자가 좀 안 될 것이다.
138장의 목판본을 만들려면 69장 이상의 목판이 필요하고,
판하서(板下書)를 써서 두 사람이 판각한다고 해도 5~6개월 정도가 걸린다.
종이는 또 몇 속(束)이 필요하겠는가?
요즘에 그 정도로 목판본을 만들어 30부를 인출한다면
최소 3,000만 원 이상의 경비가 소용될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만든 우리 고본(古本)의 어느 위조본(僞造本) 목판본을 본 적이 있는데,
일천만 원 정도 투입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책은 3부 이상이 복제되어 1부당 2,000만 원~3000만 원 선에서 거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항시 위조된 판본은 한 책만 나오지 않는다.
복수로 제작하여 공급한다.
어찌 되었건 1976년에 없어졌다는 『환단고기』는 1979년 세상에 공개된다.
“이유립의 제자인 조병윤이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환단고기를 출판한 것이다.
이유립은 이에 대해 분노하여 조병윤을 파문하고
1983년에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오자와 발문을 삭제한 새 출판물을 내놓았다.
이때 새 출판물의 출판 사항을 1979년으로 소급하여 기재했다”라고 한다.
서지학에서는, 위서는 출판 연도를 소급하여 표시하거나
저술연대를 올려 잡는 행위는, 일단은 위서 제작의 기본 요소로 본다.
그런데 “이유립은 1979년에 박창암에게 『환단고기』를 주었는데,
박창암은 이유립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일본인 유사(類似) 사학자(실제로는 극우 변호사) 카시마 노보루(鹿島昇)에게
『환단고기』의 주해를 부탁했다”라고 한다.
이후 “카시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와 맥을 같이 하는 저서로 왜곡하자,
이유립은 화를 내면서 ‘박창암에게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복사본을 돌려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유립의 주장과는 달리, 카시마 노보루가 펴낸 『환단고기』 일역본 해제에는
“1979년 가을에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직접 받았고,
그로부터 한문 해석 지도까지 받았다”라고 쓰고 있다.
기가 막힌 것은 “이유립은
『환단고기』 일역본의 출간을 축하하는 시까지 썼다”라고 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이유립은 카시마 노보루가 내놓은 일어 번역판에
일본 극우들이 환호하자 적잖이 당황했고
, 이에 국내에서의 변명 구실을 찾은 것 같다.
이유립이 타계(1986년)하고 4년 후인 1990년에
카시마 노보루가 『환단고기요의(桓檀古記要義) - 일한 민족 공통의 고대사(日韓民族共通の古代史)』라는
448면에 달하는 저서를 ‘신국민사’를 통하여 다시 내놓은 것을 보면,
이 책 『환단고기』의 최대 독자는 일본의 극우 핵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 극우는 신도(神道)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아무리 애써 외면한다고 외면될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판을 거듭하여 나왔다.
이러한 널리 알려진 이유립의 여러 일화에서,
특이 1976년에 『환단고기』가 없어졌다는 것을 보면,
이유립의 『환단고기』의 저술은 1976년 이전에 시작되었으나
그 초고를 1976년에 잃었고,
이후 집필을 다시 시작하여 1979년에 완성한 것이 된다.
즉 새로운 집필에 약 2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아. 『다물구음』의 출현
『다물구음(多勿矩音)』, 앞‧뒤의 표지
. 조선시대 후기의 닥지로 표지를 한 후에 오침장정(五針裝幀)을 하였다.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2020년 7월 13일, 이유립의 제자 모 씨를 여의도에서 만나 이 책 『다물구음』을 보인 결과,
그는 의외로 “이유립 선생의 필적”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이 책은 한글 현토(懸吐)가 붙어 있다.
나는 이 책을 한화 4,000,000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매입하였지만
, 만약 이 책이 계연수의 친필본이라면 최소 한화 100,000,000원의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이유립의 필적이므로 가치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한화 4,000,000원의 가치는 있다고 본다
. 이유립은 공전(空前)의, 그리고 희대(稀代)의, 우리 민족사 최고(最高)의 몽상가이자
종교문학가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1978년경에 이유립의 강화도 집을 임승국씨와 함께 가본 적도 있다.
제14회 연재 『민족종교와 경전,
「동경대전」 「삼일신고」 「천부경」』의 “자. 갑골문 『천부경』은 있을 수 없다”에서
나는 코베이(Kobay)의 현장 경매에서 거금을 들여 낙찰받은 자료 일부를,
즉 『천부경도해』 8면의 사진을 공개하였다
. 『천부경도해』를 공개하며
그 뒤에 붙은 『다물구음(多勿矩音)』은 후에 논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정확히 말하여,
나는 2020년 5월 27일,
코베이(http://www.kobay.co.kr)의 오프라인 경매에 한화 3,000,000원에 출품된
『다물구음(多勿矩音)』 필사본을 경합을 거쳐 한화 3,200,000원에 낙찰받았다.
당시 경매 수수료와 부가세를 포함하여 한화 3,728,000원을 지불하였고,
제주에서의 왕복항공비와 체류비를 포함하면
한화 약 4,000,000원 정도가 그 책을 입수하는데 지출되었다.
나는 왜 이 책의 입수에 그렇게 거금을 들였을까?
이 책은 앞부분에 「전문(前文)」 2면과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6면이 있고,
그 뒤에 『다물구음』 60면(본문) 분량이 붙어 있다.
「전문」과 『천부경도해』는 약 18.6×26cm의 갱지(更紙)에 앞뒤로 썼으며
, 『다물구음』의 전반부눈 약 20×26.4cm의 갱지에 한쪽 면 만을 썼다.
즉 두 문헌을 합책(合冊)한 형테인 것이다.
담묵(淡墨)으로 글을 쓴 갱지는 변색한 정도로 보아 1920년대의 종이라고 하기보다는
1960년대에 문구점에서 흔히 팔던 시험지를 반으로 잘라 묶은 것으로 보였다.
책은 오침(五針) 선장이었고, 표지는 우리의 고지(古紙, 楮紙)로 만든 솜씨를 보면
, 원래의 책을 경매에 출품하기 오래전에 책을 잘 아는 누군가가 개장(改裝)한 것으로 보였다.
주목되는 부분은 「전문(前文)」을 계연수(桂延壽)가 쓴 것으로 되어 있었고,
또한 경매에 출품된 2020년은
계연수란 인물이 사망한 지 100년으로 주장되던 해였기에 매입한 것이다
. 즉 나는 이유립의 필체를 모르는 상태였고,
이 책의 많은 곳에서 퇴고(推敲)가 보여,
낙찰받았을 때는 계연수(桂延壽)의 친필이 아닌가 여겼다.
그러나 이유립의 제자 모 씨를 2020년 7월 13일에 여의도에서 만나서
이 책을 보인 결과는 의외로 “이유립 선생님의 필적”이고,
만난 장소가 커피숍이므로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와 상세한 비교는 못 했지만,
언뜻 그 책의 일부로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최근 이 책을 면밀하게 검토하니, 고구려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책이었지만
『환단고기』의 「고구려국본기」와는 전혀 다른 책이다.
2020년 당시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밝히려다가 돌연 이유립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다.
『다물구음(多勿矩音)』 내표지.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1.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2.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3.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4.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5.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6.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7.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8.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9.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다물구음(多勿矩音)』 면10. 사진Ⓒ2022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제 『다물구음(多勿矩音)』 본문 60면 가운데 앞부분 10면을 여기에 공개한다.
독자분들은 기존의 『환단고기』의 같은 왕의 유사한 연도 부분과 비교해 보며 판단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다물구음(多勿矩音)』은
이유립이 1976년에 잃어버린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의 첫 번째 초고(草稿)의 일부분으로 판단하지만
, 최종 판단은 독자분들의 몫이다.
자. 맺음말
월간 『전통문화』 1986년 11월호,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는 여기에 「고서적 위조의 실상」을 기고하였는데
, 필자의 이 글은 우리나라 고서 감식의 기본적인 이론으로 평가된다.
나는 월간 『전통문화』 1986년 11월호 pp.136~143에 「고서적 위조의 실상」을 기고한 바 있다.
그 글에서 ‘고서의 변조와 위조의 실례’를 지적하며 “⑤판본을 새로이 제작한다. (중략)
⑭이론에 맞추어 저작한다”리고 그 예를 지적한 바 있다.
내가 31세 때인 36년 전에 발표한 글이기에
해설에서는 좀 수정할 부분이 있지만, 이 글은 지금도 유효하다
. 나는 고서 및 고문헌의 변조와 위조를 보면 감각적으로 알아챈다.
형태서지학적 측면에서는 고서에서의 외형적 발전과 변화가 중요하지만,
내용서지학적 측면에서는 고문헌에서의 논리적 발전과 변화가 중요하다.
지금 이 글에서
나는 『환단고기』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문헌의 진위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며
그가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기(李沂, 1848~1909)가 ‘단단학회’를 조직하였는가?”하는 문제가 나의 관건이다
. 이기는 이준 열사가 조직한
‘헌정연구회’를 개편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회원이었고,
한때 나철(羅喆, 1863~1916)의 동지로서
‘대종교(단군교)’의 출범 초기에 간여하였다가 결별한 인물이지만
, 그가 계연수나 ‘단단학회’ 및 태백교와 관련한 인물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분명한 것은 『환단고기』는 ‘갑툭튀’한 종교문학 작품이다.
『환단고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등 기존의 사서를 말살하고,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권덕규 등등 제1기 민족사학자들과
제2기의 중요 민족사학자들이 간고한 투쟁을 하면서 정립하였던 민족사관을 일시에 희롱하며,
즉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일본 극우 변호사
카시마 노보루의 목적에 이용한 전력이 있는 종교문학 작품이다.
카시마 노보루에 의하여 일어 번역본이 나온 이면에는
이유립은 이 책을 일본에서 먼저 나오게 한 후 역수입하여 국내에 퍼트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빗나갔고,
결국에는 일본 변호사 출신의 극우 카시마 노보루에게 이유립이 처절하게 이용당한 것이다.
아니 카시마 노부루는 이유립의 명예를 타살한 것이다.
황당사관론자들 일각에서는
“북한에서는 『환단고기』를 진서(眞書)로 인정한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밝힌다.
“북한의 역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사서(史書)로 인정하지 않는다.”
북측의 주체 사상적 역사관에 비추어 보면, 『환단고기』는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는 책이다.
한국의 민족사학은 『환단고기』가 망가트렸다는 것이 주체 사학의 기본 관점인데
어떻게 인정한다는 말인가?
북한의 주체사학적 관점을 총련 측 재일동포 사학자가 언급한 적이 있다.
“조선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므로 정치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창시자 ‘김일성 민족’이라 말할 수 있다.
『환단고기』 신봉자는 『환단고기』를 저술한 ‘이유립 민족’이 되는 것이다”라고 까지
심각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 주체사관을 중시하며, 나는 단군의 자손임을 믿는다.
우리는 단군민족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단군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여야
“우리 민족의 적이 누구이고 동족이 누구인가?”가 똑바로 보인다.
사학계 일각에서 『환단고기』는 대종교 측 문헌이라고 분류하는데,
그것은 틀린 분류이다.
대종교가 『환단고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대종교는 나철의 대종교가 아니라, 이유립 태백교의 한 분파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근래에 한 민족종단이 『환단고기』를 집어삼켰다는 사실이다.
원래 정상적인 종교는 타 종교의 경전을 받아들이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 기독교에서는 『성경』과 부합하는 내용이 이슬람교의 『코란』에 있어도
『코란』을 기독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태교가 『신약성서』를 받아들이면
유태교는 유태교의 정체성을 잃고 기독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문학에서도 적용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개신교의 『천로역정』이지
천주교나 유태교에서는 언급조차 않는다.
『환단고기』 논란은 소모적 측면이 크다.
소모적 논쟁은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
이유립이 머릿속에서 『환단고기』를 꺼내어 놓은 1979년 이전에 이 책은 없었다.
그러니 『환단고기』를 번역 재구성하거나 출판한 출판사는
저작권자와 그 상속자들에게 기본 예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
차. 추기(追記) ; 『환단고기』와 일본 국우
『환단고기』를 출판한 ‘신국민사’는
일본의 신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본의 재야사학자와 재야국학자들의 모임이고,
『환단고기』 일어판을 번역한 카시마 노보루는 이 모임의 핵심이다.
카시마 노보루는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의 한반도와 일본에는 고유한 종교가 있다”고 보았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도(神道)라 하고
한국에서는 선도(仙道)라 하는데,
가지마는 일본의 신도와 한국의 선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믿었다
. 중국에서는 유교 외에 신도나 선도와 비슷한 도교(道敎)가 생겼는데,
이 셋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게 카시마 노보루의 생각이다.
카시마 노보루는 한·중·일 3국의 토속 종교 간의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일본 신도의 이론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초석이라고 여겨
한국인보다 먼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한 것이고,
그는 『신도이론대계(神道理論大系)』라는 신도 교과서를 펴냈는데,
이 책의 「제5장 신교오천년사(神敎五千年史)」에서 그는 ‘귀도 단군교(鬼道 檀君敎)’란 문구를 썼다
. 즉 카시마 노보루는
홍암 나철이 만든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귀신 숭배하는 종교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군교는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라고도 왜곡했다.
즉 대종교를 그 뿌리부터 부정한 것이다.
카기마 노보루의 주장은 “고대에는 일본의 신도가 한반도의 선도나
중국의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겠지만
근대에는 거꾸로 일본의 신도가 한국과 중국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그 증거 자료로 이유립의 『환단고기』를 제시하니, 경악할 노릇이다.
나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로서 이러한 카시마 노보루의 망동에 격분할 따름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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