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을 주는 글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바람을타고 (kyun****)
지난 3월 24일 수다방에 [####
문학 신인상 당선 통지에 대한 의문점]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난 이후
나는 5월 말까지 이곳 이야기방 활동을 잠시 중단했었다.
그 글을 읽어보신 분은 어떤 내용인지 잘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간략하게 간추려보면, 당시 내가 직접 쓴 시를 #### 문학 신인 문학상 공모전에
우연한 기회에 도전하게 되어 운이 좋았는지 당선 통보 연락과는 별도로 온 메일은 열어 봤더니
이제 곧 시상과 등단 절차가 남아 있는데 내가 그러길 원한다면
지정된 날까지 심사비를 포함하여 문예지 발행 비용 50만 원을 입금하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글 쓰는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나 막상 신인상 당선 소식을 접하게 되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므로 많은 상금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고
시인으로 등단하는 일은 더더욱 생각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나에겐 그저 종이 증서 한 장으로도 충분 할 듯싶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무슨 심사비와 일정부수의 책값을 입금하라 그러는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 문예지의 특성이나 관례를 잘 모르고 있었던 나로선
이번에 든 의문점을 글로 작성하여 수다방 여러분은 어떠한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지 직접 여쭤보기로 했다.
다음 날 내가 쓴 글을 읽어보신 분들의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그럼에도 좋은 기회이니 참가비를 내는 샘치고
문예지에 등단도 하고 신인상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식으로든 심사비와 문예지 발행 비용을 요구하는 곳엔 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글 말미에도 조금 언급 했듯이 #### 문학 관계자의 요구대로 돈을 입금한 뒤
문예지 수십 권과 신인상을 받게 된다면
결국 내가 낸 돈으로 상을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 문학 관계자에게 신인상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내가 그쪽에서 입금하라는 돈이 부담스러워 고민하는 것으로 느꼈는지
며칠 더 신중히 생각해 보라며 예상치 못한 기한 연장까지 해주었으나 나는 그마저도 거절하였다.
등단은 곧 본인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기성 문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작가로 인정받는 중요한 관문이기에 한동안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지난 3월 24일 그날의 게시 글을 쓰면서
나는 작심하고 여러분에게 속인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여러 편의 자전적 이야기를 이곳을 통해 자주 올려 왔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나름 잘 다듬어지지 않은 수필을 발표 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 글에서는 신인 문학상 당선 작품이 수필이 아닌 시 부문이라고 거짓을 말하며
여러분이 남겨 놓으신 소중한 댓글을 보고 우리나라 문화 출판계의 흐름을 살펴보려고 했었다.
그럼 처음부터 수필이라 밝히지 왜 숨겼나 말하는 분이 더러 계실 것이다.
사실 요샌 세상이 무섭기도 하고 유별난데다가 아직은 시상식 전이여서
주최 측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도 혹시 모를 불이익을 받으면 안 되었기에
아직은 나를 조금 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싶었다.
다른 불순한 뜻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더욱 신기했던 건 막상 내가 시를 썼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데
아무도 나를 의심하는 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더라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내가 게시판에 올린 이야기 중에서 거짓으로 쓴 내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고백의 글을 쓰기까지 맘이 편하질 않았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첫 번째 #### 문학 신인 문학상을 거절한 며칠 뒤 비슷한 시기에
다른 글로 ## #### 신인 문학상 공모전에 응모한 수필이 당선되었다는 연락을 또 받게 되었다.
속으론 내가 뭔 글을 써놓기만 하면 이렇게도 쉽게 당선이 되는가 하며 우쭐해 하다
이번에도 그쪽에서 심사비와 책값을 요구해 올 것이 거의 확실하여
무슨 핑계를 대면서 상을 거절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또 혹시 모르는 일이라 수상을 하려면 일정 금액을 내야 하는지부터 먼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에선 그런 돈을 일절 요구하지 않는다 말했다.
출판계의 오랜 불황과 치열한 경쟁에서 문예지들이 스스로 살아남으려는 자구책으로 마련된
신인 문학상 대부분이 아마추어 글쟁이의 등단과 수상을 미끼로
심사비와 책값을 요구하는 사례가 너무 많이 있어서
본래의 뜻이 조금씩 변질 되어 가고 있는 마당에,
아직 이곳은 양심이 있는 믿을 만한 출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번과 달리 서울에서 예정된 시상식에 참석하기로 마음먹고
수상 소감문을 작성하여 보내게 되었다.
그리곤 약속한 날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행사장 입구로 들어서자 이미 많은 분이 오셔서 행사 준비를 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지정 좌석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니 테이블에 다과 접시와 책이 죽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이 저절로 갔다.
그 책 안에는 이번 신인상 수상 작품도 함께 수록 되어 있었다.
많이 배우고 사회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기 작가들이 쓰신 글 사이에
내가 써서 당선된 글이 자리하고 책으로 만들어져 나오긴 생애 처음이어서 무척 기뻤다.
예정된 시간을 조금 넘기고 나서 종합 문예지 출판 기념식과 신인상 시상이 있었다.
소설과 시 수필 그리고 아동문학에 응모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이번에 당선된 분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세 명이었다.
그날 수필 부문에서 당선된 사람은 나 혼자였다.
사실 그날 나는 서울역으로 향하는 KTX안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수상 소감문을 발표할 것에 대비하여 휴대폰에 미리 작성해 뒀었다.
행사 진행자가 대부분 그렇게 유도 하는 게 관례 인지라
많은 사람 앞에서 떨지 않고 당황스러워 하지 않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을 읽어 내려가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는 남녀 두 분 모두
자신이 미리 종이에 써온 글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 또한 그러리란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으나
우리 세 사람 모두 뭔가를 보면서 자신의 감정을 밝힌다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휴대폰을 꺼내지 않고 간략하게나마 신인상을 받게 되어 기쁘고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나보다 먼저 수상 소감을 밝힌 여성이 몇 달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매우 그립다며
눈시울을 붉혔는데 그게 나의 마음과 동했는지 자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나의 눈에는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그 순간 나는 평생을 술로 속을 채우며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여느 아버지처럼 이 못난 자식을 조금만 더 가르쳐 주셨더라면
나의 삶이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흔들어 대었다.
아버지는 지금 내가 이런 훌륭한 상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기나 할까?
만약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자꾸만 교차하다 보니
감정이 메말라 있던 나의 눈에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이 조금씩 계속 흘러내렸다.
요즘 이름도 없는 문예지를 제작하는 단체가 난립하여 백 개가 넘는다지만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신인 문학상에 당선된다는 일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기에
기쁨이 배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 무엇보다 내가 꺼내어 놓은 상패를 보며 딸아이가 자신의 일 인양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써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마음 따스한 글이 만들어지게 되면 이곳 이야기 방에 공개 하리라 다짐해 본다.
아래 글은 그날 KTX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길에 준비 하였으나 발표 되지 않은 소감문이다.
반갑습니다.
저는 10대 중반까지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던 고향 집에서 살고 있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흙을 밟지 않고 살아가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농촌을 몹시 싫어했었습니다.
외딴 우리 집 주변으로는 높은 산과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검은 빛의 바위들이 시야를 가렸고,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 산속에 흩어져 있는 손바닥만 한 밭뙈기 몇 개에 매달려 식량을 구걸했었습니다.
끝도 없이 구불거리며 이어진 신작로엔 찾아오는 인적조차 드물었기에
저와 우리 형제들은 외부의 새로운 환경을 체험해보기란 절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곳에서 14년을 살며 눈물 콧물을 한 바가지는 흘려야
콩을 팔러 읍내 5일 장으로 나가시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가 겨우 장터 구경을 해볼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저의 고향은 10년이 지나가더라도 발전은 고사하고
삶의 질이 전혀 나아지질 않은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자유롭게 흐르고 있던 계곡 물을 따라 갈수만 있다면
어디든 바깥세상으로 나서고 싶었습니다.
결국 가난한 삶은 초등학교 졸업 후 자연스럽게 배움의 길도 멈추게 하였고,
저를 설레게 한 도시는 중앙선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간 대구였습니다.
대 도시의 기차역 광장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 시골 촌놈이었던 저를 품어 주던 매캐한 자동차 매연은
오히려 달콤한 향기가 되어 저의 코끝을 자극하였으며
지금 제가 도시 한가운데 서 있음을 실감케 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부터 저의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열심히 일하며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버는데 몰두했습니다.
아무리 적은 월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몸으로 때워야 하는 육체노동은 힘도 많이 들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조차 몹시 거칠었습니다.
1979년 당시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 가는 조건으로 하루 일당 천원을 받았는데
그 돈을 아끼기 위해 남들이 쓰다가 버린 구멍 뚫린 장갑을 반대 방향으로 두개 겹치게 꼈어도
어느새 저의 손톱 밑으론 새까만 기름때가 자리 잡게 되었고
경험이 부족한 자그마한 손엔 영광의 상처들이 하나둘씩 늘어만 갔습니다.
그래도 저는 늘 흙만 밟고 살아가야 하는 저의 시골집보단 훨씬 더 좋고 행복하다 여겼습니다.
도시는 성실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구멍 난 고무신을 신지 않아도 되었고,
그 비좁던 월세 방이 전세 집이 되어 저의 삶도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단한 삶을 살아온 제가 어느 때부터 인지 확실 하진 않지만,
40대 후반에 들어서 자투리 시간이 생길 때마다 지나가 버린 저의 역사를 하나씩 글로
기억이 떠오르는 대로 정리 하곤 했었습니다.
그 첫 시작은 그저 낙서만도 못한 볼품없는 글이어서 누가 볼세라 감추고 겉으로 드러내길 몹시 꺼렸었습니다.
그럼에도 글 쓰는 취미가 몇 년이라는 시간이 쌓이다 보니
감히 이런 신인 문학상 공모전까지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떨어지면 뭔가 저한테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일 테니 당연한 결과라 여기며
그저 포기 하지 않고 다시 용기를 얻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는 말이 있듯 이제 저는 시작이 반이라는 긍정의 힘을 그대로 믿고 싶습니다.
지금의 이 행운은 아직 제가 못다 끄집어낸 응어리들이 남아 있기에
그것을 하나씩 펼쳐 보이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작은 바람이 있다면 제가 쓴 부족한 글이지만
힘들고 지친 많은 분이 잔잔한 감동과 새 희망을 품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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