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서산대사의 이 시(詩)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인용해 더 유명해졌다.
김구 선생은 이 시를 즐겨 읊으며
“내가 38선을 넘는 것은 어리석고 무분별하며 쓸데없는 짓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난 나의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질 줄 안다.
그리고 훗날, 나의 행적을 제대로 평가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듯 옳은 일에 목숨을 걸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백범의 삶에 시공을 초월해
영향을 끼친 서산대사(西山大師), 자신의 삶은 어떠했는가.
그는 조선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승병장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73세의 노구로 선조의 명을 받고 1500명의 승병을 이끌며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그는 “유(儒)·불(佛)·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해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중종 15년(1520)~선조 37년(1604)까지 살았던 인물로서
본관은 완산(完山), 속성은 최(崔), 자가 현응(玄應), 호가 청허(淸虛) 또는 서산(西山),
속명이 여신(汝信), 법명이 휴정(休靜)이다.
그는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아버지 세창(世昌)과 어머니 김 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병승이기 이전에 수행승이었다.
그는 “선화 너에게 장벽(墻壁)의 뜻을 묻노니, 도(道)와 마음도 아닌 그것이 무엇인가.
모름지기 바르고 치밀하고 상세하게 참구해야 비로소 모든 연(緣)을 쉬고
달마를 만날 것이로다”라는 내용을 담은 ‘장벽송’을 남겨
후학들에게 수행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한 채로 입적했다.
당시 나이 85세(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지었다는 불가(佛歌), 회심곡(回心曲)은 불교 포교의 한 방편으로 일반 대중이
잘 아는 가락에 교리(敎理)를 사설로 붙인 음악이다.
회심곡은 평염불(平念佛) 중 덕담부분을 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따로 떼어
만든 곡이다. 이는 ‘내세(來世)의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충성(忠誠), 효도(孝道)’를
강조하고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많이 불리고 있다.
“인간 백년 다 살아도 병든 날과 잠든 날과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을 못 사나니…
남자 죄인 처결(處決)한 후 여자 죄인 잡아 들여 엄형으로 묻는 말씀 너의 죄를 들어보라.
시부모 친부모께 지성효도 하였느냐 동생우애 하였느냐 친척화목 하였느냐…
착한 여자 불러 들여 소원대로 점지할제 선녀 되어 가려느냐 대신 부인 되려느냐…
네 원대로 하여주마… 선심하고 마음 닦아… 수신(修身)하소…
팔뚝같은 쇠사슬로 실낱같은 이 내 목을 한번 잡아 끌어내니 혼비백산 나 죽겠네,
사자님아 내 말 듣소 시장한데 점심 잡수...
신발이나 고쳐 신고 노자돈 가져가세 만단개유 애걸한들 사자가 들을소냐.”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