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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기술

저는 지난 20여년동안 영적유희를 즐겨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를 어디로 몰아넣었는지 보십시오

 


   明나라.  당인,<위저취어도

 


 

 
 

저는 지난 20여년동안 영적유희를 즐겨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를 어디로 몰아넣었는지 보십시오.

 생활보호대상자가 되기 일보직전인 수준으로 내 몰렸다구요! 

 

 

한 입 가득 머금고 있던 속내를 드디어 쏟아냈구나.

그 체험을 남들과 공유했을 때 네게 공감할 그 많을 사람들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네 말을 한 문장씩 끊어서 네 진심에 답해주마.

그래야 우리가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고 또 그것을 하나하나 해부해볼 수 있을 테니.

 

먼저 너는 20년동안 이런 식의 "영적 유희"를 즐겨오지 않았다.

너는 그것의 가장자리에도 이르지 못했다.

네가 20년 동안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집적거려보고 가끔가다 한번씩 실험도 해봤다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는 네가 아주 최근까지도 그 유희에 진실로 정말 진심으로 몰입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영적 유희를 즐긴다" 는 건 자신을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 꼴로 창조하는 과정에 온 마음과 온몸과 온 영혼을 다 바친다는 뜻이라는 걸

확실히 해두기로 하자.

이것이야말로 동양의 신비주의자들이 말한 자기 실현의 과정이며

서양의 많은 신학들이 헌신해온 구원의 과정이다.

 

지고한 의식이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행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모든 순간을 선택하고 재선택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의식적인 창조이고 목적을 지닌 창조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창조도구들을 이용하는 과정이며

자각 상태에서 숭고한 의도를 가지고 그 도구들을 이용하는 과정이다.

이게 바로 "이런 식의 영적 유희를 즐긴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너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해왔는가?

 

저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군요.

 

한 쪽 극단에서 다른 쪽 극단으로 비약하지 마라.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도 말고 너는 이 과정에 헌신해왔다.

사실 네가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여기에 몰두했었다.

그러나 너는 20년 동안 줄곧 그렇게 해오지는 않았다.

그 비슷한 정도에도 이르질 못했고

하지만 사실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삶을 살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순간 그것에 몰두하고 있느냐,

중요한 건 이것 뿐이다.

 

네 표현으로 다시 가보자.

너는 우리에게 그런 노력이 "너를 어디로 몰아넣었는지 보라"고 했고

자신의 처지를 "생활보호대상자가 되기 일보 직전"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전혀 다른 게 보인다.

나는 부자가 되기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을 본다!

너는 자신을 한 걸음마져 더 가면 급료가 끊길 사람으로 보지만

나는 너를 한 걸음만 더 가면 열반이 주는 급료를 받을 사람으로 본다

(둘 다 잊음, 망각이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네가 어떤 걸 네 "급료"로 보는가,

그리고 네가 일하는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만일 네 삶의 목적이  안정을 얻는 것이라면

네가 뭣 때문에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기 일보 직전 수준의 급료"라고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평가도 정확한 건 못된다.

왜냐하면 내가 주는 급료를 받는다면

너는 물질 세상에서 체험하는 안정감을 포함하여 모든 좋은 것을 다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는 급료, 너희가 나를 "위해 일할" 때 받게 되는 수당에는

영적 평온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물질적 안락 역시 너희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역설은 내 급료가 주는 영적 평온을 일단 한번 누리고 나면

너희는 더 이상 물질적 안락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가족의 물질적 안락까지도 더 이상 네 관심을 끌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일단 신의 의식으로까지 올라서게 되면

너는 네가 책임져야  할 다른 사람의 영혼이란 없다는 것과

모든 영혼이 평온하게 살길 바라는 건 칭찬받을 일이긴 하나

각자의 영혼은 순간마다 자기 나름의 운명을 선택해야 하고

또 실제로 선택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남을 고의로 학대하거나 파멸시키는 게 그리 고귀한 행동은 아니다.

또 자신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도록 네가 만들어놓은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하는 것 역시

똑같이 온당치 못한 짓임도 분명하다.

그러나 네가 할 일은 그들을 자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너 없이 살아가는 법을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네가 필요한 한 너는 결코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기에.

네가 그들을 진실로 축복하는 것은 오직 그들이 너를 불필요한 존재로 느낄 때 뿐이다.

 

같은 의미에서 신에게 더없이 기쁜 순간은

너희가 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나도 안다, 나도 안다....

 내 말이 너희가 배워 온 모든 가르침과 정반대라는 걸.

너희 선생들이 가르쳐준 신은 분노하는 신, 질투하는 신, 의존하기 요구하는 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신성을 향한 신경증적인 대용품이지 절대로 신이 아니다.

 

참된 선각자는 가장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선각자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참된 지도자는 가장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참된 왕은 가장 많은 백성을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백성을 왕위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참된 선생은 가장 많은 지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갖도록 끌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참된 신은 가장 많은 머슴을 거느린 존재가 아니라

가장 많은 이들에게 봉사하는 존재, 그리하여 그들 모두를 신으로 만드는 존재다.

 

더 이상 자신의 신만을 거느리지 않고 신은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모두가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의 목적이요 영광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행복한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는 점을 이해하기바란다.

너희가 "구원"받지 않을 길은 없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경우만 빼고는 어디에도 지옥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부모로서 배우자로서 연인으로서

너희는 자신의 사랑을 꽉 붙들어매는 아교풀로 만들지 말고

처음에는 끌어당겼다가 돌아서면 반발하는 자석이 되게 하라.

 너희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너희를 꽉 붙들어야 한다고 믿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

이보다 더 진리에서 먼 일은 없으며 이보다 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세상에 내몰아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이 체험하게 하라.

이렇게 할 때야 비로소 너희는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이런 가정의 길은 크나 큰 도전이다.

그 길에는 허다한 심란함과 세속적 염려들이 버티고 있다.

금욕주의자들은 절대 이런 일들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빵과 물만 얻을 수 있다면 거기다 몸을 누일 간단한 깔개 하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시간을 기도와 명상과 신에 대한 묵상에 바칠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라면 신을 보기기 얼마나 쉽겠는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하지만 그들에게 배우자와 자식들을  딸려줘라.

새벽 3시에 깨어나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보채는 아기에게서 신을 보게 하고

월말에 지불해야 하는 청구서에서 신을 보게 하며

배우자를 덮친 병과 실직과 아이의 열과 부모의 근심에서 신을 보게 하라.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삶이다.

 

나는 네 피곤을 이해한다.

나는 네가 그런 투쟁에 신물이 났다는 걸 안다.

하지만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나를 따를 때 그 투쟁은 사라질 것이다.

네 신적 공간에서 살도록 하라. 그러면 모든 사건이 다 축복이 되리니.

 

 -신과 나눈 이야기 1부 가운데/닐 도날드 윌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