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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의 첫 민정수석 문재인, 그게 제일 문제였다"
2015 .07.25
⊙ 호남 민심은 새정치 지도부의 ‘머슴 취급’에 지쳐… 이미 여의도에 신당 사무실 계약 마쳐
⊙ 새정치민주연합은 텃밭도 없고 곳간도 비어… 소멸할 일만 남아
⊙ 노무현이 변하는 걸 보면서 대통령책임제의 문제점 실감, 내각책임제 필요
廉東淵
⊙ 17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및 사무총장 역임.
그럼에도 비노를 중심으로 문 대표 사퇴론은 현재진행형이다.
호남발 신당 창당론도 끊이지 않고 있다.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호남신당’이란 의제가 거리낌없이 나오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4·29 재·보선에서 천정배 후보를 지원했던 ‘원조 친노’ 염동연 전 의원에게
“노무현 정권 실패는 첫 단추 잘못 꿴 것”
2002년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와 염동연 캠프 사무총장, 유종필 언론특보가 회의를 갖고 있다. |
그는 6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노무현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인데, 지금의 친노와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친노는 언론이 붙인 이름 아닙니까?
—문재인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일 친한 친구’라 했고,
“첫 민정수석, 그게 제일 문제였다는 겁니다.
노무현 정권이 왜 실패했습니까.
노무현을 대통령 만들겠다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선거전이 한창이던 2002년 11월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검찰은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대선이 끝나고 인수위원회가 활동하던 2003년 초까지
나라종금 사건은 전 언론을 뒤흔들었고,
선거전이 한창일 때, 언론과 여당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후보 정무특보인 염동연을
—당시 대통령이 뭐라고 하던가요.
“당선 며칠 뒤에 당선자가 나와 안희정, 이광재를 저녁 먹자고 불렀어요.
나라종금 사태가 잦아들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랬더니 그럼 정무수석은 누굴 시켜야 하냐고 하더군요.
—정권 초기 인사에 깊숙이 개입한 셈이군요.
“워낙 당선자와 막역하다 보니 늘 하는 얘기가 그거(인사) 아니겠습니까.
또 김각영 검찰총장처럼 임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공직자는 그냥 둬서
롯데호텔에 線 인사委 있었다!
—당시 여당에 공식적인 인사위원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대선 직후 당이 인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태랑 최고위원이 위원장을 맡고 이상수, 이미경 등
근데 그 위원회는 명목상의 위원회고 사실 대통령이 따로 만든 인사위가 있었어요.
—‘비선’이네요.
“비선이라 하긴 좀 뭐하지만… 언론에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습니다.
—문재인, 이강철 등의 이름은 없었군요.
“이강철은 여러 이유로 대통령이 깊이 신뢰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당선자가 문재인을 데려와서 ‘부산에서 활동한 문재인 변호사를 올라오라 해서
나는 문재인 실물을 그날 처음 봤어요.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겠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중적 태도라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명분은 그랬지만 솔직히 내 사심(私心)이 있었던 거죠.
이때부터 염 전 의원은
문재인 대표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격정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염동연 전 의원은 전남 보성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던 부친 덕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청소년기에 상경해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정치현실에 눈을 떴고, 한국청년회의소(JC)와 새시대새정치청년연합(연청) 등 조직에 몸을 담고 활동에 나서 문희상, 김홍일 등과 함께 일하며 동교동계 인맥을 쌓아 나갔다. 부산지역 국회의원(13대)이었던 노무현은 연청 사무총장이던 염동연에게 “연청에 깊은 관심이 있다”며 찾아왔다. 그의 설명이다. “연청이란 김대중 총재의 분신과도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김대중 총재의 전위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죠.
김대중 선생을 광신도처럼 믿어야 하는 조직이란 말입니다. 근데 노무현은 그런 것 같지 않았습니다. 연청이 워낙 큰 데다 충성도가 높은 조직이고, 내가 김홍일과 막역한 사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보니 나한테 관심이 있었겠지요. 어쨌든 가입은 거절했는데 노무현이 나이도 동갑이고 하니 자기와 친하게 지내자고 하더군요. 성향과 기질도 비슷하고 해서 그때부터 가족끼리도 많이 만나고 개인적으로 친하게 됐습니다.”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눈여겨보게 된다. 1997년 대선 당시 염 전 의원은 조직책임자로 영남지역 선거유세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무현 의원이 울산으로 지원유세를 왔다. “만약 DJ(김대중)가 이번에 져도 다음 대선에선 나이 때문에 출마하지 못할 것”이라며 “당신(노무현)은 영호남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인 만큼 다음 대선에 도전하라, 내가 돕겠다”고 제안했다. 노무현을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적극 추천한다.
해양수산부 장관이 된 노무현 장관은 2000년 9월 염 전 의원을 불러 “그때의 약속대로 캠프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안희정,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네 명을 불러 이른바 ‘금강팀’을 결성한다. 이 다섯 명이 금강팀의 원년 멤버다. |
노무현, 문재인을 부산시장 후보로 영입하려 해
—처음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접한 때가 언제입니까.
“200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후보 선출 전당대회와 당내 경선이 2002년 4월에 있었는데,
하나를 당선시키겠다,
실패하면 후보 사퇴하겠다’고 말을 한 겁니다.
. 근데 후보가 되고 나니 당장 지방선거가 걱정되는 겁니다.
—그때 노 후보는 문재인을 생각했던 걸까요.
“사실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문 대표는 인지도가 없었죠.
“4월에 노무현이 대선후보가 되면서 인터뷰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묻는 질문에
그런데 노 후보가 문재인을 내보내자고 하더군요.
새로운 인물을 내보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이) 거절했군요.
“단순히 거절했으면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 설득하러 갔던 캠프 후배가 이렇게 전하더군요.
노무현이 대통령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노무현 대통령 돼도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다더니…
—문 대표는 (대선 2개월 전인) 10월에야 선대위에 참여했죠.
“그때 우리가 겪은 어려움만 해도 책 여러 권 나올 겁니다.
동교동계는 후보직 내놓으라고 난리인 데다
우리 캠프 사람들이 그렇게 주변에 조금이라도 도와달라고 부탁하다 번번이 거절당하고
10월 돼서 당 선대위가 발족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그 두 명이 이름 올린 겁니다.
말 그대로 막차 탄 거죠.
—그 두 분은 정권 초기 요직에 임명됐죠.(문재인 민정수석, 이호철 민정1비서관)
“노 대통령이 그렇게 캠프에서 고생해 놓고도
이강철은 지금도 문재인 얘기만 하면 육두문자를 날리곤 합니다.
—어려울 때 외면했다면 그럴 만도 하겠군요.
“아닙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와 보니 당이 깨져 열린우리당이 생기고
2004년 4월이 17대 총선이니까 당이 총선준비를 해야 하는데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한테 얘길 했어요.
—그 대상에 문재인 민정수석이 있었나요.
“문재인 민정수석, 정찬용 인사수석, 이창동 문광부장관, 강금실 법무부장관
그때 내가 당에서 맡았던 직책이 ‘정무조정위원장’이었어요.
대통령 측근이라는 걸 다들 아니까 그런 자리에 앉힌 거죠.
대통령이 임명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그래서 내가 기자들 앞에서 ‘가빈사양처 국난사명상
나라가 혼란하면 훌륭한 재상을 그리게 된다)’이라며
그는 어느 범위까지를 ‘원조 친노’로 볼 것이냐는 질문에 “스스로 양심적으로 판단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희정이, 광재(안희정·이광재)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돌입할 때만 해도 30대 초반의 실무진이었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이제 광역단체장도 되고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될 만큼 성장한 것을 보니 역시 의리 있는 정치인이며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평가했다. 이강철 전 정무특보에 대해서는 “좌충우돌하는 성격 탓에 대통령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다”며 “정권창출 공신으로서 국정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렇게 어필했는데도 대통령은 대구에 출마해라, 싫으면 삼계탕집이나 하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모두들 대통령 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는데 후보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8월 재·보선에 나가려고 해 대통령에게 실망을 안겼고, 그 후 사이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부산대 학생 시절부터 노무현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사람으로 진정한 부산 친노는 조경태뿐”이라며 “야당 내부에서 조경태에 대해 탈당할 것이라는 등 음해가 많은데,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다만 현 지도부가 저렇게 엉망인 상태가 계속되면 탈당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
네팔 트레킹의 충격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염동연 전 의원은 “문재인은 노무현이 어려울 때 도와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
—그래서 ‘비선 실세’라는 시선을 받았던 거군요.
“대통령이 네 명 설득에 실패했다고 전화가 왔을 때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고 말했더니 허허 웃더군요.
그래서 기자들 앞에서 비난도 하고 총선 내보내려고 한 건데
‘염동연이 다 잘라 낸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 기자들 앞에서 문재인 수석을 특히 심하게 비판했던데요.
“대통령 어려울 때 대통령 뜻에 좀 따르라고 강조했습니다.
근데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건강상 사유 운운하더니 네팔로 트레킹을 간 겁니다.
정말 기가 막혀서 입이 안 다물어지더군요.
정말 그때 생각만 하면….”
그는 이 얘기를 하며 잠시 침을 삼키고 말을 멈췄다.
—선거 때마다 문재인 차출론이 있었잖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 전까지,
총선, 지방선거, 재·보궐선거 때마다 문재인에게 제안을 했어요.
김정길 후보가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해서 45% 득표했죠.
—문재인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입니다.
“《운명》(문재인 대표 자서전)이라는 책 봤죠.
그럼 그대로 조용히 있든가.
염동연 전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새천년민주당 인사위원 외에는 공직이나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수시로 청와대를 드나들었고 언성을 높여 쓴소리를 하곤 해 비선 실세로 지목됐고 야당과 언론의 적지 않은 공격을 받았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부부회동이 많았는데, 권양숙 여사는 ‘청와대 분위기가 너무 권위적이라 다들 쓴소리를 못하니, 자주 와서 쓴소리를 좀 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1시간 회의하면 55분 혼자 얘기하고 5분 박수받고 끝난다면서요? 그래서 되겠습니까?” 하고 따졌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인심 다 잃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다 조목조목 얘기해 줬어요.” 그가 ‘대통령을 등에 업고 정치장사 한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언론에 열린우리당 탈당 선언을 하면서부터였다.
, 그를 비롯한 현직의원들의 탈당으로, 합당에 반대하던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은 2007년 8월 합당을 하게 된다. |
호남 민심은 성났다
2003년 11월 11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열린우리당 창당대회. 염동연 전 의원은 “열린우리당 창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
—호남 민심을 간단히 얘기하자면 어떻습니까.
“호남사람들은 새정치민주연합이
호남을 머슴 취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호남에서 인기가 없는 것도 문재인 대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자초한 겁니다.
문 대표 스스로 호남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요.
원인이 뭘까요.
그 책 읽고 충격받은 호남사람들 많습니다.”
—야당 내부에서 호남을 홀대한 역사가 없었죠.
“MB정부, 박근혜 정부 거쳐 오면서 호남사람들은 고위공직에도 제대로 못 올라가고 있어요.
어떻게 야당 내에서 호남을 홀대할 수가 있습니까.
—4·29 재·보선이 호남 민심을 대변한 것 같습니다.
“정동영, 천정배 다 내친 야당이 무슨 수로 호남 민심을 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언론에서 연일 호남신당, 호남 자민련 얘기 나올 때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였어야 되는 건데
‘그래 한번 해봐라. 너희들이 갈 데도 없고 어쩔건데’라는 태도를 보인 겁니다.
염동연 전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씨가 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 행사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공개 비난한 것에 대해 “김무성을 향해 한 얘기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아내는 물론 아이들(노무현과 염동연은 각각 1남1녀를 두고 있다)도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노건호씨의 심정을 제가 모르겠습니까. 실명은 김무성을 거론했지만 그 연설은 여야 모두, 정치권 모두를 향한 얘기였어요. 아버지를 정쟁에 이용해 먹지 말고 가족들에게 돌려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새누리당을 향한 게 아니고 새누리와 새정치 모두 각성해야 한다는 겁니다.” 친노세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건호의 울부짖음이 친노세력에 시사하는 바가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노무현정신 운운하며 노무현을 이용하는 세력이 없었으면 하는 가족의 마음을 다들 좀 헤아렸으면 합니다.” |
‘친노’의 착각
—요즘 친노라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만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48%는 이미 자기네 것이고 2%만 선거운동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대선 당시 MB(이명박) 정권 인기도 바닥이었고,
이른바 독재자의 딸을 상대로 48%밖에 못 얻은 걸 부끄러워해야죠.
—당 운영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연하죠. 친노 패권주의의 폐해는 심각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박영선 전 원내대표입니다.
—현 야당이 호남 민심을 잡지 못하면 앞으로도 힘들겠군요.
“노무현이 왜 대통령이 됐는지 아십니까.
그래서 호남에서 김대중 대통령보다도 더 높은 투표율과 지지율을 얻었어요.
전통적으로 지지기반이 호남인 야당은
문재인은 대선에서 호남에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못 얻었고
—새정치민주연합이 혁신위원회를 만들어 변신하겠다는데요.
“아무짝에 쓸모없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염동연 전 의원은 “내가 나라종금 의혹으로 2003년 초 구치소에 100일간 있었던 사건이 노무현 정권 실패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왜 하필 그 중요한 시점에 있었어야 했는지…”라며 안타까워했다.
여당의 분당(分黨)과 열린우리당 창당을 구치소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염동연·안희정이 대통령을 옆에서 보필하지 못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언론이 떠들어대는데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광재만이 그게 아니라기에 이광재가 잘못 알고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대통령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냐기에 심신이 지쳐 병원으로 간다고 했더니 그날 저녁 병원으로 온다는 겁니다.
그 다음 날 권양숙 여사와 함께 찾아오더군요.
찾아와서 처음으로 하는 얘기가 그겁니다. ‘어쩔 수 없이 승인하긴 했는데 대체 당을 왜 깨야 됩니까?’ 하는 겁니다. 그때 알았죠. 대통령은 당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고, 대통령 옆에는 진정으로 그를 위하는 사람이 없구나, 알게 된 겁니다.
“민정 라인을 문재인-이호철이라는 이른바 부산팀이 장악한 것도 우리 입장에선 황당한데, 청와대에서 효자동에 따로 부산팀 사무실을 얻어 줬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지금도 염동연·안희정·이광재 세 명만 청와대에 있었으면 노무현 정권이 이런 평가를 받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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