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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예수는 왜 죽을 때 불교주문을 외웠나요.

 

예수는 왜 죽을 때 불교주문을 외웠나요.

예수의 마지막 외침.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면서 제자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한 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Eli Eli Lama Sabachthani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로 번역되어 왔음) 라는 말 한마디를 크게 소리친 뒤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예수의 최후의 말씀은 티벳 라마불교의 진언(眞言)인
"엘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 다라니"
(Eli Eli Lama Sammach Sam Bori Daranii
성자시여 위대한 바른 지혜로 드러내주소서 !'
라는 뜻으로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극도로 탈진해 생사를 가늠하는
마지막 순간에 라마불교의 주문을 암송한 것입니다.

왜 예수는 마지막 순간 불교의 주문으로 구원을 받으려 했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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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에게 걸어서 강을 건너게 하고
빵 한 조각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먹였다는 등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 원전 불경을 읽다보면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대목이 너무 많고
성경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은

불경식으로 이해하면 해석이 쉽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대 문헌 공개 - 예수는 부처의 제자이다.

< 잃어버린 예수의 청년시절 행적 공개>

 

한국의 기독교 간부(목사, 장로, 등)는 예수 청년 시절 기록을 알고 있습니다.

공식 교육 수료자는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현재 한국내 모든 성경책과 기독교 기록에는

예수의 젊은 시절 종교 공부하던 내용이 고의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현재의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비범한 기질을 나타내기 시작한

 12세때부터 30세까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

별이 뜨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 오는 등의 묘사를 생각해 볼 때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짐작하면, 그 까닭은 앞에서 언급한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에서
교파간의 이해득실로 빚어진 우여곡절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1.복음서를 통해 본 예수의 행적 

 
한 복음서는 신약성서의 4대 공관복음서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빠져 있는 예수의 12세부터 30세까지의 성장과정과 구도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예수가 전한 가르침의 진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복음서를 통해 잃어버린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인도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는

이스라엘의 제례에 참석하러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을 보고 예수에게 인도의 수학을 주선해 주게 됩니다.

2) 라반나의 권유로 예수는 이스라엘을 떠나 인도 쟈간나스의 한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을 하며 베다 경전과 마니 법전을 공부합니다.

3) 이 수행을 마친 예수는 의술을 배우기 위해 당시 인도에서
명성이 가장 높은 '우도카라'라는 의사의 제자로 입문합니다.

4) 예수는 의술을 배우며

유대의 [시편]과 [아베스타]경전을 읽고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익히게 됩니다.

5) 당시 예수는 평등사상에 심취했는데

결국 인도에서는 <카스트>라는 그들의 신분제도를
혼란시킨다 하여 예수를 논죄하기에 이릅니다.

6) 생명의 위협을 느낀 예수는

'라마나스'의 도움으로 인도에서 네팔로 피신하게 되고
그곳에서는 '비자빠찌'라고 하는 성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7) 네팔을 떠난 예수는

티벳으로 가서 당시 요동 최고의 성자인 '멘구스테'를 만나
티벳에 비장되어 있는 수많은 경전을 섭렵합니다.

8) 24세때 수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예수는

 페르시아에 들러 자신이 태어날 때 찾아온
마기교 승려 '홀', '룬', '메루'의 3인의 동방박사와 재회합니다.

9) 집에 돌아온 예수는

오래지 않아 다시 아테네로 건너가 [아포로]라고 하는 성자와 대화를 나누며
희랍의 정신세계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10) 25세가 된 예수는

이집트로 건너가 형제단이라는 성자들의 모임에 입회해 활동하며
최고의 칭호인 그리스도라고 하는 법명을 수여 받게 됩니다.

11) 30세가 된 예수는

비로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이릅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님의 인도·티벳의 구도 생활을 밝혀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입니다. 

 
이 외에도 12세에서 30세까지의

예수의 행적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여러 문헌에 의해
역사적으로 고증되고 있습니다.


13세부터 29세까지 예수는 과연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을까요? 

 

그동안 서양의 수많은 연구가와 종교학자들은 이른바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탐구와 연구를 계속해 왔었고,
의문에 싸인 <예수의 17년>을 밝혀내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의 저술가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1887년 인도와 티벳 지방을
여행하다가 라닥지방의 수도인 레(Leh)근처의 하이미츠(Himis) 사원에서
티벳어로 기록된 예수에 관한 기록을 발견하여, 1894년 불어판으로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 - 성 이사(Issa)의 일대기>를 출판함으로써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1894년이면 상당히 오래전으로 그때부터
이미 예수에 대한 재조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수많은 학자, 탐험가들이 인도와 티벳을 방문,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불교사원의 고문서들을 목격,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밝혀진 수많은 기록과 자료,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명확한 구절들이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고 있으므로,
기독교에서 반박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득력이 부족한 현실입니다.

한양대 불문학 교수 민희식 박사는 <법화경과 신약성서>라는 책에서
신약성서의 수많은 내용이 불교의 <법화경>에서 옮겨간 것임을 주장하고 있고,
또 1980년대에 프랑스의 학자 필립 드 슈아레는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를 써서
유럽의 종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 토마스 복음서>는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었는데

상형문자와  희랍문자를 겸용한 고프트어로 쓰여진 것으로

슈아레의 연구에 의해 세상에 밝혀졌으며,
이런 <토마스 복음서>는 예수의 말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114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하나님은 너희들 속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불교에서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의 표현이고,

또 그 다음에 계속된 문장은
<법화경 방편품>의 <여아등무이 如我等無異>의 표현과 똑같습니다.

슈아레의 논고에 따르면

불교에 영향받은 예수의 사상(기독교)이
유태교가 부르짖는 메시아, 즉 구세주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점과
또 기독교가 전파될 때 당시의 지중해 세계에 있어서 권위가 있었던
희랍철학에 맞추려한 점 때문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토마스 복음서의 예수의 사상이 불교 사상,

그 중에서도 불성내재를  역설한 법화경과 유사한 것은 입증되었고,

신약성서 속의 <탕자의 비유>도
법화경의 <장자 궁자 長者窮子>의 비유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틀림없는 증거가 있지만...
과연 정말 예수는 과연 인도와 티벳에 가서 불교 사상을 배웠을까요...?

이런 의문에 대해, 티벳의 히미스 사원에 보관된 <이사(Issa)전>을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최고의 인자, 성인 이사(Issa)전>으로
출판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이사(Issa)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1장에서 4장 중반부까지로 여기에선 이사의 강생과 출생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 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은 4장 나머지 부분에서 8장까지로 <잃어버린 생애>로 알려진
13세부터 29세까지 그는 인도와 히말라야에서 공부를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9장에서 14장까지로 이 부분은 팔레스타인에서
그가 전도활동을 하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Issa)가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후의 이야기는 복음서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 이사(Issa)전>에는 세레 요한이 나오질 않고 부활에 대한 언급도 없으며,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빌라도가 이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마침내 사형을
선고한 반면 유대인 사제들과 장로들은 그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현존하는 복음서의 기록보다 더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전가시켰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유대인들이 데모하여 할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유대인 박해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하면,
빌라도가 이사(Issa)와 두 강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명령하여 이사는 죽었다.
빌라도가 대중들을 의식하여 이사의 시신을 그의 친척에게 건네주자
그들이 사형장 근처에 이사를 묻었다. 

 
3일 후 빌라도는 이사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이사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묻으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은 무덤이 열린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성자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이사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박해와 이사의 제자들이 전도를 떠나는 장면,
그리고 그들이 이교도의 왕과 전사들과 대화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 처형이 있은지 3,4년 후

그 사건을 목격했던 상인들이

인도에  전한 목격담을 기초로 해서 쓰여졌다고 추정되었으며,

이 책이 출판되자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등에서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노토비치가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이사전>의 존재 여부에 대한 공방이 벌어졌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사전>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반면,
노토비치의 지지자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회 전도사인 이뽈리뜨 데시데리(Hippolyte Desideri)는

티벳을 방문하여

기독교와 티벳종교의 유사점을 탐구했는데,

티벳종교가 삼위일체의
신의 개념을 가졌으며

기도나 주문을 외울때 염주를 사용하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예수회의 그루에베와 캐푸친 포교단장인 호레이스 데 라 페나(Horace Dela Penna)는
터어키의 종교와 그들 자신의 종교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을 지적하였으며
그들의 추측은 다음과 같은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1) 라마승의 옷,

그것은 고대 그림에 나타나 있는 열 두 제자의 옷과  비슷하며

예수가 두르고 다녔던 홍포도 이와 유사하다.

 
2) 그들의 종속관계, 그것은 교회의 계급제도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3) 그들의 의식과 로마 카톨릭의 의식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4) 그들의 강생 개념
5) 그들의 도덕성에 대한 격언들도 카톨릭교와 비슷하다.

호레이스 데 라 페나는 또,
"그들은 유일신과 삼위일체, 그리고 이상향과 지옥과 연옥을 믿는다.

 응도(목사)와 헌금,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한다. 

 

그들은 수도승과 수사들로 가득찬 많은 수도원을 갖고 있는데,
그들은 청빈, 복종, 정숙의 세 가지 이외에도

몇가지 다른 명세들을 지키고 있다. 

 

그들에게는 고해신부들이 있는데,

그 신부들은 그들의 절대자에 의해 선택되며
라마승이나 사제로부터 그들의 신분증을 받는데 그것 없이는 고백을
들을 수 없으며 고해성사를 강요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은 성수와 십자가들, 그리고 염주를 사용하고 있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헉(Huc)씨는 1844년부터 3년 동안 티벳을 여행한 뒤,
라마교와 카톨릭 교리 사이의 유사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주교관, 부제복, 법의(라마승들이 여행할 때 걸치는 옷),
이중창단과 함께 드리는 예배, 찬송가,

악령추방, 다섯줄의 사슬에 매달린 향로,
감사기도, 작은염주, 성직자의 독신 생활, 정신적인 은거,
성자들에 대한 숭배, 단식, 성체 행렬과 탄원기도, 성수,
그들의 대라마는 로마 카톨릭교도 사이의 교황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점 ... 

 
이 모든 것들이 티벳 불교와 카톨릭 의식 사의의 유사점이라 할수 있다. 

 

이렇듯 수많은 연구가들이...

오랜세월 동안... 숱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반해, 정작 기독교계에서의 반론은 이들의 주장을 뒤집어 엎을 정도로 그렇게
충분치도 않을뿐만 아니라 원론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펌^^
**

종교는 어쩜 하나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하나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든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든.그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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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BC 다큐멘터리 -

예수님은 인도와 티베트에서 16년 이상을 보낸 이사(Issa)이라는 이름의 불교 승려였다]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는 사실 미스테리한 공백으로 가득 있다.

13 세에서 29 사이에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예수님의 행방이나 활동에 관한 성서적, 서양적, 중동의 기록이 없다

. "잃어버린 "라고 알려진이 공백

 1887 탐험가의 주목할 만한 발견 때까지 신비로 남아있었다.


9 세기 러시아 의사 니콜라스 노토비치(Nicolas Notovitch)

인도,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발견을 1894 년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책에 기록했다.

한때 그의 항해 노토비치는 1887 년에 다리를 부러 뜨렸으며

인도 북쪽의 레(Leh)시의 티벳 불교 사찰에서 지내며 회복했다.

수도사들이 노토비치에게 티베트어로 쓰여진 개의 노란색의 책인

 이사의 삶(The Life of Saint Issa) 보여준 곳이다.

수녀원에서 노토비치 (Notovitch) 1 세기에 태어난 이스라엘의 가난한 가족에게

예수라는 이름의 아이 (, Issa = "하나님의 아들") 실화를 전하는 문서를 번역했다.

예수님은 13 세에서 29 사이의 성스러운 불교 본문에서

그를 가르쳐 주신 베테랑 학자들에 의해 "신의 아들"이라고 렸다.

노토비치는 문서에서 224 개의 200 개를 번역했다.

1887 년에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명의 라마는 노토비치에게 예수님께서 도달하신 모든 범위와 극단적 계발을 설명했다.

'이사(예수)는 22 명의 부처 다음에 처음으로 등장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라고

티벳의 라마는 노토비치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어떤면에서 모든 달라이 라마보다 큰 존재였.

왜냐하면 그는 우리 주님의 영성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계몽을 주신 , 경솔한 종교 속에서 경솔한 자들의 영혼을 되찾아 주시고,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하도록 허락하신 분이 바로 그분이다.


그의 이름과 행동은 우리의 신성한 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분의 경이로운 존재를 읽으면서

그릇되고 어리석은 이교도들의 끔찍한 죄에 우리는 눈물을 훔쳐야 했다.

그들은 예수를 고문 후에 죽게했다.

인도에서의 예수 시대의 발견은 예수의 잃어버린 해와 중동에서의

그의 출생의 중요성의 정도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위대한 불교 신자 또는 성스러운 사람 (라마) 사망하면

현명한 현자가 별자리와 다른 전조를 상의하고

종종 라마의 환생 유아를 찾기 위해 대단히 여행을 떠난다.

 


아이가 충분히 자랐을을 아이는 부모에게서 떠나서  불교 신앙 교육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3 명의 현자에 대한 이야기의 근원이라고 추측하며,

 13 세에 인도로 끌려 가서 불교도로 가르쳤다 믿어지고 있다.

 당시 불교는 이미 500 전의 종교였으며 물론 기독교도 시작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 땅과 카시미르를 방문하여 불교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는 부처님의 법과 지혜에 영감을 받았다 "

헤르미스(Hemis) 수도원의 고위 라마가 IANS 통신사에게 말했다.

 

헤르미스 (Hemis) 수도원을 이끄는

드랄 불교 분파의과 귤란 드루 (Gwalyang Drukpa)도 이 이야기를 확증했다.


이후 2252 년에 러시아 철학자이자 과학자 니콜라스 로리히 (Nicholas Roerich)

1952 수도원에서 예수님의 시간을 기록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문서화되었다.


예수는 베나레스(Benares)

바라나시와 같은 인도의 여러 고대 도시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삭은 그가 지시하고 도와 Vaishyas Shudras 평화롭게 살았으므로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Roerich 쓴다.

 

 

 

 

 

 

예수는 불교를 공부하는

고대 성지 자간나트 (푸리), 베나레스 (우타르 프라데시),

 라자 그리하 (비하르)에서 가르쳤다.


독일 학자 ​​홀거 케르 스텐 (Holger Kersten)

 또한 인도에서

예수의 초기 동안 인도에서 살았던 예수의 책을 쓴다.

젊은이는 상인들의 회사 신디(Sindh 지역 -인더스강가에 위치) 도착한다.

그는 자신을 완성시키고

위대한 부처님의 법을 배우려는 의도로 아리아 인들 사이에 정착했다.

 

그는 다섯 ( 자브) 땅을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자가나(Jagannath) 여행하기 전에 자인스(Jains)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BBC 다큐멘터리에서 예수님은 불교 승려였다.

전문가들은 예수님 께서 십자가에 박히셨다는 것을 전문가가 이론화하고

 30 중반 30 후반에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땅으로 돌아 왔다.

그는 죽음을 피할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유대인 정착민들과 함께

유대인 황제 느부갓네살의 독재를 피하여 도망 쳤다.

현지인들은 예수님 께서 카슈미르 계곡에서 다음 년을 보냈으며

80 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 음을 확인했다.

지역에서 16 동안 젊음을 보냈고,

마지막 45 년도 

인도와 티베트 인근 지역에서 61 년에서 65 년을 보냈다.

현지 주민들은

인도가 통제하는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 (Srinagar)에있는 로자 신전에 묻혔다 생각한다.

 


아래는 BBC 다큐멘터리이다.

 

 

[ Jesus was a Buddhist Monk - BBC Documentary]

 

https://www.youtube.com/watch?v=QAaW6BYhfNM&feature=youtu.be

 

[한글 자막, 클릭하는 법] 

 

영상 하단 우측에, 중앙 쪽 <네모> 클릭, 

옆에 <톱니바퀴> 클릭, <자막(1)> 클릭, 

우측 ,<자동번역>클릭 후, <한국어>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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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예수1 - 예수의 무덤이 인도에 ]

https://www.youtube.com/watch?v=Web8KtiiBZA

 

 

[인도에서의 예수2 - 예수의 유학경로 ] 

https://www.youtube.com/watch?v=lErENgIsqlQ

 

 

[인도에서의 예수3 - 뿌라나 속의 예수]  

https://www.youtube.com/watch?v=1nTJvgxZnxg

 

 

[인도에서의 예수4 - 노토비치의 연구]

https://www.youtube.com/watch?v=PMIb5rfA27w

 

 

 

[인도에서의 예수5 - 목사와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DWIT-iFqOEs

 

 

[인도에서의 예수6 - 현지 학자와의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Iji0L2vsE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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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머 리 말

 

1973년에
나는 예수가 인도에서 살았다고 가정하는 이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예기치 않은 우연한 기회였다.
그때 나로서는 그 문제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면서도 다소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 기회에 예수의 실제 생애를 탐사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곧 나는 학술적으로 밝힐 만한 자료나 예수의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 사람은 정말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가?
 왜 그는 동시대인들의 눈에 그토록 이상하고도 신비롭게 비쳤는가?
그리고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탐사를 진행해 가면서
마침내 인도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나는 (인도에서의 예수)라는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해 온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으며,
그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값진 후원은 물론 놀랄 만한 정보도 얻게 되었다.
 
이 책을 출판하는 형식에 있어서
나는 이 책의 간결하고도 논리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받지 않도록,
 그리고 세세한 내용들이 소흘하게 넘어가지 않도록,
 너무 학술적인 형식으로 기술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많은 내용이 대담하게 보이거나 어떤 것들은 있을 법하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아뭍든 이 책은 여러 관련분야에 있어서 보다 넓은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사실 이 연구작업은 어느 한 사람이 혼자서 추진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다.
모든 불합리한 주장들을 밝히는 일이나
 거기에 상반되는 것들을 입증한다는 것은 기존교회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종교관을 손상시키거나
일반 독자들의 순수한 믿음을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표나 의도는 아니다.
 
그리스도 메시지의 영원하고도 중심적인 진리,
 그것을 밝혀 주는길을 다시 한번 찾아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종교적인 권위를 남용하는 다분히 세속화된 기관의 야심에 의하여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흔들려 왔다.
그러므로 이 책은 새로운 믿음의 선포가 아니다.
다만 이시도는 참으로 영적이고 종교적인 과거의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로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하겠다.
 

 

내가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 일어나 반론을 펴라 !

 

전(全)교회의 역사는
오류와 권세의 뒤범벅이니.
요한 몰프강 폰 괴테

1983년 3월

 

프라이 부르크에서

홀거 케르스텐

 
◇영문판에 덧붙여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의 영역판을 완성시키는 데 2년 이상이 걸렸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이 책의 7판이 나오고 있다.
 이 번역은 요즘의 지식에 맞게 여러 번 개정되었다.
 
나는 영국 독자에게 나의 필치가 약간 껄끄럽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나는 설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사실들을 가볍게 보지않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흔하지 않은 솔직함을 가지고 썼다.
나는 영국에서도 탁월하게 인내심이 있고 편견이 없는독자들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어쨌든 주교(더칩 DHrtdm의데이빗 젠킨스 fr frv Dav펴 J.nkins)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인의 견해와 관련된 그의 개인적인의문점들에 대해
그의 부활절 메시지에서 설교할 만큼 용기가 있다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가능하다
(데일리 텔리그라프 Daiiy Telegraph, 1981년 3월 30일子).

 

1986년 9월 H K

 

개요

과학과 기술의 득세는 우리 세계의 급격한 세속화 및 종교의 침체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합리주의에 대한 예찬과 인간 존재의 모든 양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신비롭고 종교적이며, 정서적인 삶, 심지어는 (휴머니티) 자체에 까지 막대한 손실을초래했다.
 
기존교회의 행동은 종교와 과학,
 신앙과 지식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원인을 조성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세속 세계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상실하는 것을 우려해서
 기존 교회들은 전혀 경험적 지식에 토대를 두지 않은 그들의 권위를 내세웠다.
이것은 단지 권위의 영역에서 보다 큰 차별에 대한 요구를 심화시켰다.
 
사실 과학적 사고와 종교적 신앙 사이에서 비롯되는 분열은
현대인을 극복하기 힘든 양분상태로 몰아 세웠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진실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면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점점 논쟁거리로 되면서 영감은 차차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심지어 중앙집권 체제까지 교회의 전통 속에 닻을 내렸다.
하나님, 그리스도, 교회,
그리고 계시 같은 것들이 신학자들과 평신도 사이에 다같이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의 가장 중심적이고 기본적인 가르침들이
교회 자체의 엘리트들과 행정가들 사이에서 조차
 순수한 진리로서 더이상 받아 들여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의 몰락이 멀지 않다고 하겠다.
텅빈 예배석이 말해 주는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
 
1979년에 집계된 통계에 의하면
서독 시민 가운데 3분의 1만이 기존교회의 교리에 순종한다고 한다.
반면에 교회에소속하지 않고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77%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어느 집단에 속하든지 간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낸 (하느님의 사자)라는 것을 대다수가 믿지 않았다.
 
그것은 기존의 공공 교회들이 기독교 정신 분야의 발전에 대하여
그들의 교구민들에게 알리는 것을소흘히 해 왔으며,
종교에 대한 역사적이고 비판적힌 접근에 있어서
그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존교회들은 계속해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고집해 왔고,
성경 해석에 있어서 교리를 담고 있는 문자에 지나치게 집착해 왔기 때문에
 들은 기독교정신의 쇠퇴를 가속 시켰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의 성향에 있어서 전혀 비종교적이거나
반 기독교적인 경향을 갖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 같은 결과를 빛었다.
 
오늘날 기독교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널리 펴고자 했던 사상이나 그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시피 하다.
그것은 원래의 사상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차라리 (바울주의Paulinism)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교리라는것이 그리스도의 메시지와는 본질적로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사실 본래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사고방식이 달랐던 바울의 유산이다
.
우리가 인지하듯이 소위 기독교정신이라는 것은
바울주의가 공인종교로서 받아 들여졌을 때 발달했던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인 만프레트 메츠거 (ManfredMezger)는
 그 문제에관하여 에밀 브루너 (EmiIBrunner)의 말을 인용한다.

 

에밀 브루너는 교회를 일종의 오해라고 했다.
간청에 의해 교해지고, 자유로운 결합으로 성직이 구성되었다.
 그것은 모든 점에서, 그리고 전적으로 우리가 의도했던 것과는 상반된다고 할 수도 있다.

 

확실히, 현존하는 여러 기구들에 대한 정당성과 합법성을 조사하는 일은 허용할 만 하다고 하겠다 !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들이 사로 잡혀 지는 믿음, 의무,
복종의 불확실한 조목들의 증식으로부터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떨까?
 
아무것도 모른 채 단지 기존교회의 영향 아래에서만 성장해 온 우리는
 이제까지 오랫동안 그렇다고 인정되어 온 것들은 당연히 옳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황량한 지평선 위에 사랑과 선의,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 찬 메시지를 가지고 나타났다.
 인류는 그 메시지로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그것을 문서와 장황한 말, 권력과 사업으로 바꾸어 버렸다 !
 예수는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그 모든 행위들을 원했을까?
 
대담한 젊은 예수가 처음으로 교회의 관료주의, 율법, 상징적 지도자들,
 강직성, 성직과 교리해석 문제를 둘러싼 분쟁, 유일한 권위에 대한 요구,
예배의식, 우상숭배와 파벌주의 등등으로 가득 찬 교회의 세력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려고 애쓴 이래로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직접적인 교통을 원했고
어떠한 종교적 권력에도 연연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의 음성은 더 이상 본래 그대로 우리에게 이르지 않는다.
 예수의 음성은 특권을 지닌 전문가와 전문적인 집단의조정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다.
예수는 관리되고, 거래되고, 성문화되고, (책으로 엮어져) 왔다.
진실하고 살아 있는 믿음이 작용하고 있다.

 
신학자인 하인쯔 짜아른트 (Heinz Zahrnt)는 말한다.
나는 신학자의 길을 걸머오면서 필은 상처를 입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나 불경스럽지만
매우 인간적인 대중 주의론자틀이 아니라 교리주의자들, 
 
즉 문자 그데로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논란에 의해서
 나는 굴욕감과 모욕감과 불명예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나는 가장 치명적인 곳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곳은 바로 내 삶을 이끌어 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종교적인 경험의 가치에 대한 확신은 지적 능력의 발달에 비래하여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성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믿음의 현실에 대처하는 수단으로서
자신을 비추는 신앙의 자리를 차지해 온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성장>과정 동안 종교적인 감정을 비(非) 이성의 범주는 영역이므로
비 현실적인 것으 간주되어 버린다.
논리적인사고와 행동만이 현실만을 걱정하는 것이다. 
 
교육수준이 향상될수록 초월적인 것들은 감소할 뿐 아니라
살아 있는 경험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현상의 주된 요인으로는 하느님의 개념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들 수 있다.
성스러움은 유토피아 처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개개인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이 무한자(無限者)와 조화를 잘 이루도록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유한한 존재인 우리를 영원한 존재의 일부로서 인식케 해준다.

 

몇백 년 동안 서구인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서 생각하는 것을 배워 왔다.

 

그러나 이 개화된 20세기의 서구인들에게는 대부분의 고대인들이 생각한 하나님과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점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하기 위한 확신이 부족한 것 같다.
 
전세계를 통하여 새로운 영적 중심들이 나타났는데,
이 새로운 영적 중심들은
고지식한 교회 관료주의가 답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답을 주고자 시도해 왔다.
이 일종의 혼합주의적인 미래의 세계종교는 상승세에 있다.
 
그것은 완전한 자아실현과 종교적 계몽을 위한 연구.
 개개인의 존재들을
우주의 구성물로 하는 신비한 모든 것을 포함한 비전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은 관조, 자아성찰, 그리고 명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종교의 내면화에 대한 결정적인 힘은 동양에서, 특히인도에서 비롯되었다.
인류는 (다시 동양화한다 - 동양으로 향한다)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동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동양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적 경험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우리는 신에 대한 믿음의 마지막 종말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영적이고 종교적인 타락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사실 우리는 영혼의 씨앗이 싹튼다는 희망과
우리에게 지금까지 기약만 되어 온 초월적인 내적 세계의 삶을
사후 세계에서는 영위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종교의 전반적인 몰락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신비한 자각의 개화가 우리에게 비밀스럽게 주어져 있다.
 이것은 엘리트나 (선택받은) 사람들 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종교의 초교파적인 배경을 모두포용하는 데 있다.
 
이 종교는 그들의 목표를 피상적이고 침체적인 세계에 두는 것이 아닐 뿐 더러
외관에 과다한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심원한 영적 자각과 초월적인 가치들로의 전환에 중점을 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악()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는 진정한 길이리라.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악들은 사라지리라
참으로 깨달은 자는 의연하며
문명의 구름을 걷어 버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빛나듯이.

 

- 붓다 -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흘거 케르스텐은 1951년 동독의 막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2년에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이주했다.
73년과 74년에는 동양으로의 첫번째 여행을 떠나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여행 했다.
 1974~79년까지 그는 퐁교교육 교사가 되기 위해
프라이부르.핀에 있는 개신교 계통의 한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후에 비밀에 싸인 예수의 생애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하기위해
인도에 몇 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1982년까지 프라이부르크 근처의 직억 학교에서 종교교육 교사로 있었다.
 
그 이후로는(새로운 시대 (New Age) )를 위한 각종신문에 자유 기고가로 일했다.
그의 여행의 행선지는 대부분 동양이었다.
저자의 사무실은 현재, 프라이 부르크에 있다.

 

 

 

 

 

 

 

 

저자 : 홀거 케르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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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외침, 티벳불교 진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https://www.youtube.com/watch?v=y0IdQvB1N-M

 

 

인도 유학 시절 예수는
모든 인간의 해탈의 가능성을 철저히 가르치는 
불교에 매혹 되어 승려가 된 후 ,
베나레스, 넉야원, 부다다야, 헬리오폴리스
등지에서 오랜 수도 생활을 하였으며
티벳을 마지막으로 19세때 귀국을 하였다.
 
인도 및 티벳 등지에서 에수에게 심령 치료의 비법을 전수해준 밀교계 고승인
우도라카와 멘구수테 등 예수의 스승들은, 예수에게 도술을 이타적으로 쓰되 
남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귀국 후 예수는 유일 산교인 유대교파들에게 모든 인간의 절대 신성을
부르짖으며 여러가지 초월적 이적을 행하고 , 군중을 모아 신의 사랑과
평등 사상을 전파하엿다.

결국 예수는
유대교 성직자들의 질시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는데,
이때 예수는 제자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한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 한마디를 크게
소리친 뒤 혼절하였다.

이때 예수가 외친 이 최후의 말씀은,
티벳 라마불교의 진언(眞言)인
('엘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라는
 다라니 (dharani, 陀隣尼, 총지 摠持, 능지 能持) 라는 주문(呪文)
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이 주문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가 죽은 수 십 년이 흐른 후 예수의 언행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 말씀의 의미가 잘못 기록 된 채 번역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예수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극한 상황 에서 라마불교의 진언을 암송했다는 

이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의 인도 티벳 의 구도 생활을 밝혀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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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108CultureCenter/Df9x/2089?q=%EC%98%88%EC%88%98%EB%8B%98%EC%9D%80%EC%A0%8A%EC%9D%84%EB%95%8C%EC%9D%B8%EB%8F%84%EC%97%90%EC%84%9C%EC%8A%B9%EB%A0%A4%EC%83%9D%ED%99%9C%EC%9D%84%ED%95%98%EC%98%80%EB%8B%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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