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역사

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1)학살과 전쟁







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1)학살과 전쟁

  • 김영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7.10.30 15:12

어렸을 적 영화를 통해 접한 미국은 언제나 세계평화의 수호자였다.

소련의 음모를 아슬아슬하게 저지하고, 궤변이나 늘어놓는 테러리스트들을 보기 좋게 제압했으며

 심지어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지구를 구했다.


그리고 간혹 미국 대통령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전 인류를 위함’이라며 핵미사일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하기야 대통령이 람보가 돼서 테러리스트를 모두 제압하는 판국에

 핵미사일 버튼이야 현실 ‘고증’이 매우 충실한 편이었다.


아무리 영화라도 자신을 ‘세계평화의 수호자’,

 ‘인류의 히어로’로 자처하는 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도취지만

 문제는 이런 유아적 자기도취가 현실에 반영됐을 때다.


특히나 이 유아적 주체가 14.58조 달러의 GDP를 자랑하고,

전 세계 군비의 절반 가까이 지출하며(6261억 달러),

전 세계 곳곳에 군사기지를 가진 국가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독일의 ‘천년 제국’ 등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제국은 이와 비슷한 자기도취에 빠져있었다.


이번에 읽게 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 황성환 저>는

‘세계평화의 수호자’라는 미국이 대외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제국으로서의 미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세계평화의 수호자 미국’과 ‘제국으로서의 미국’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과연 미국은 인류의 히어로인가?

 아니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던 여느 제국들과 다름없는 제국에 불과한가?


미국의 실체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를 읽고,

 1장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

 2장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

 3장 미 제국의 중동·아프리카 침탈사,

4장 미 제국의 동남아·태평양 침탈사까지 내용을 요약정리해서 연재한다.


(글 내용은 절대적으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요약과 인용의 경우 모두 괄호에 페이지를 표기했고, 추가로 인용의 경우는 겹따옴표(“ ”)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텍스트를 참고한 경우에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 (1)학살과 전쟁


“하루는 3,000명에 달하는 원주민을 붙잡아 와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베고, 여자는 강간한 뒤 죽였다.

달아나는 아이는 창을 던져 죽이거나 붙잡아 사지를 잘라 죽이고, 일부는 끓는 비누에 삶아 죽였다.


또한, 개를 풀어 그들을 돼지처럼 몰아 죽이고,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낚아채 그들이 끌고 온 개에게 먹이로 던져주었다.

그리고 한칼에 사람을 두 동강 내거나 목을 베는 내기를 하고, 바위에 짓이겨 죽이기도 했다.” (22)


-1552년 라스카사스 신부 <원주민 사회의 파괴에 대한 소고>-


1492년 10월12일 콜럼버스 일행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19)

그들의 상륙은 ‘신대륙 발견’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

유럽인들에게는 마치 유토피아의 현존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개척하고 정복했고 그 결과 번성했다.

신이 부여한 운명에서 벗어나 인간의 의지가 마음껏 실현되는 공간,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이었다.


물론 모든 일에는 명암이 존재하는 법이라 유토피아의 발견은 디스토피아의 시작이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살던 약 1억 명의 원주민들은 급격한 절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일례로 콜럼버스가 “상륙할 당시 25만 명이던 카리브해 아이티섬의 타이노족은

불과 50년 만에 5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23)

집단적인 원주민 학살이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다.


▲ Massacre of Indian women and children in Idaho(1868)


원주민 말살 ‘신의 이름으로’


1991년 1월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기 전 아버지 부시는 두 볼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 95p) 그로부터 12년 뒤 아들 부시는 이라크를 공격하기 직전

국가 각료회의에서 마찬가지로 기도했다.

 어찌 보면 집안 내력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침략과 학살에서 ‘신’을 찾는 것은 원주민 학살 때부터 대대로 이어진 미국의 전통이었다.


- 피쿼트족 대학살 :

“1637년 5월 영국군과 청교도 이주민들은 한밤중에 피쿼트족 마을을 습격하여,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500명을 몰살하고 생포한 자들은 노예로 팔았다.

” 당시 지휘관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이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의 몸은 불꽃 속에 타오르고, 피는 흘러 작은 내를 이루었다.

불꽃이 삼키는 그 광경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으며, 더욱 끔찍스러운 것은 시신이 타는 냄새였다.

그러나 승리는 달콤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리를 위해 그리도 놀라운 일을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27)


- 샌드크리크 사건 :

 1864년 11월 콜로라도 지역 주둔군은 샤이언족과 아라파호족을 학살한다.

 당시 로키산맥 주변의 금광을 찾아 몰려든 백인들을 위한 일이었다.

학살을 지휘한 콜로라도 주둔군 사령관 존 쉬빙턴 대령은

“하느님이 세운 나라에서 인디언을 죽이는 일은 정당하며 명예로운 일이다”라며

원주민 남녀노소 약 600여 명을 도륙했다.(29)


이 외에도 원주민 말살 정책은 다양했다.


 원주민들의 전통신앙을 금하고 불응하는 원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원주민의 언어를 금하고 이름을 미국식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강제이주법(lndian Removal Act)을 근거로 원주민을 백인 주거지에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2~3만의 체로키 인디언 중 8000여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1만 명의 나바호족도 추위와 질병으로 1천여 명이 사망했다.(31)


이러한 원주민 말살 정책의 밑바탕에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었다.

이 정신은 이후에도 이어져 중남미에서, 중동에서,

아시아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꾸준히 반복되었다.



▲The Delaware Regiment at the Battle of Long Island(1776)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혹자는 이렇게 절규하기도 한다.

미국은 본래 위대한 나라였는데 후대가 그것을 잘 계승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추구한 정신은 미국의 위대함의 뿌리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은 그 위대한 정신을 투쟁으로 실현한 당당한 건국신화다.

미국은 태생부터 자유와 평등의 수호자이며, 이점에서 미국은 이전의 제국과 다르다.

 미국의 건국신화는 그간 미국인들 스스로에게 큰 자긍심이었다.


 하지만 자긍심은 자긍심으로 끝나야지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자기도취로 전락해선 곤란하다.

이 점에서 우린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독립전쟁 :

백인 이주민들은 본국(영국) 정부의 보호정책 덕분에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본국 정부가 농산물을 수매해주고, 프랑스 등 다른 수입 농산물에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 이 과정에서 이주민들이 본국 국민보다 소득이 더 높아졌다.

 여기에 식민지 확보에서 소모한 전비 보충이 겹치면서 영국 정부는 세금을 높이게 된다.

 그러자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대규모 선박 소유업자이기도 한 존 핸콕은

 배에 가득 싣고 온 와인을 밀반입한다.


1773년에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1775년 벙커힐 전투로부터 9년간 이어진 전쟁은 영국의 적대행위 포기선언으로 마치게 된다.(38~40)


미국은 독립전쟁을 부당한 대영제국에 맞선 해방전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대영제국에 맞선 군중들이 본래 아메리카에 살던 원주민들이라면 모를까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임을 생각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만약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차지하려고 자국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면

, 우린 그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41)


- 남북전쟁 :

부당한 중앙정부에 맞섰다는 건국이념은 지방정부들을 더욱 강력하게 했다.

19세기 전반, 미국의 남북은 다른 이해관계를 가졌다.

북쪽은 공업 우선 정책과 보호무역을 지지하고 남쪽은 자유무역과 노예제를 찬성했다.


링컨은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내전을 각오하면서까지 관세장벽을 높였다.

이에 맞서 1861년 2월7일 연방을 탈퇴한 7개 주는 남부 동맹을 출범한다.


 1861년 7월 북군의 침공으로 62만 명의 사망자와 30만 명의 부상자를 낸 남북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이 길어지자 링컨은 1863년 1월1일 북미 전역의 흑인 노예를 해방한다고 발표한다.(46~54)


노예해방선언과는 별개로 링컨 개인은 인종적, 계급적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휴머니스트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해방선언 후 북군이 조직한 20만 명의 흑인부대는 백인부대의 총알받이로 취급된다.


백인 남성은 300달러를 지불할 경우 징집을 면제해주는 법안도 공포한다.(55)

이전 상원선거에서 링컨은 “나는 모든 백인과 마찬가지로

백인종이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데 찬성합니다.”(51)라고 말했는데,

백인종 안에서도 부자들이 좀 더 우월하다는 말을 덧붙이는 걸 깜빡한 듯하다.


말하자면,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모두 해방과 인권을 위한 숭고한 전쟁이 아니라

백인 상류층들의 “권력 쟁탈전”(57)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치 원주민 학살이 ‘신의 이름’을 빌렸지만, 결코 숭고하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학살부터 전쟁까지 미 제국은 그야말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제국에 의해 흘릴 피에 비하면 글자 그대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김영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중동·아프리카 침탈사(2)이라크 : 후세인, 이라크전쟁, 제국의 오만

  • 김영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8.01.15 13:26

▲대영제국의 분할통치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터키에서 이라크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은 뒤

자국의 편의에 따라 1922년 12월 이라크에서 쿠웨이트를 강제 분리했다


. 그러면서 인종과 종파가 다른 쿠르드족은 이라크에 병합시켰다.


이 때문에 쿠르드족이 독립투쟁을 벌이자 영국군은 화학무기를 살포하여 이들을 학살했다.

이라크 석유자원은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제국이 각각 23.5%씩 차지했다.

단 6%만이 이라크 몫이었다.


1958년 7월 국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카심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한다.

카심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반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며 알제리와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후원했다.


영국계 석유회사가 독점한 토지는 저소득층에게 분배했다. 불공정한 석유 협정을 무효화했다.

그러자 미국·영국·이스라엘은 쿠웨이트에 작전본부를 두고

반(反)카심 군 지휘관 양성, 무장봉기 지원, 암살 공작 등을 벌였다.

1963년 CIA의 지원으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카심이 살해되고, 반제국주의 노선을 지지한 수천 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미국은 주소까지 상세히 기록된 5000명에 달하는 살생부를 쿠데타 군부에 전달했다.(231~233)


▲미국이 키운 후세인 :

사담 후세인은 범아랍주의를 주창한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영향을 받아 바트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68년 바트당 주도의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다.

바트당 정권에서 후세인은 혁명평의회 부의장을 거쳐, 1979년 대통령까지 된다.


1980년 9월 후세인은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기습 공격했다.

 대외명분은 양국 간 계속되어온 영토 문제였지만 배후에는 미 제국이 있었다.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함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에 첨단무기와 생화학무기, 심지어 핵물질까지 공급했다.

소국 이라크가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성장했다.

걸프전과 이라크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234~236)



1983년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특별 교섭인과 만난 사담 후세인, 출처 Iraqi state television

▲걸프전 유발 음모 :

걸프전의 실마리가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1922년 영국이 이라크 유전지대인 쿠웨이트를 독점하려고

이를 이라크의 바스라 주에서 강제로 분리한 데서 유래한다.

 1990년 이라크는 쿠웨이트 접경 지역에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미국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무모한 전쟁을 벌이려 하지는 않았다.

 1990년 7월25일 후세인은 두 나라의 영토분쟁에 대한 미국의 의중을 물었다.

글래스피 대사는 “아랍 내부 문제에 미국은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다.

 8월1일에는 이라크-쿠웨이트 회담이 결렬된다.


다음날 새벽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그런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까지 미국의 몇몇 행동은 다소 의심스럽다.

- 1989년 11월, 쿠웨이트 안보장관과 CIA 국장은 회담을 한다.

메모로 확인된 회담 내용은 ‘미국과 쿠웨이트가 국경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것,

 ‘CIA는 쿠웨이트에게 적절한 압력 수단을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 1990년 7월31일, 미 하원 청문회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질문에 미 국무부 켈리 차관은

 “(미국은)군사개입의 의무가 없다”고 밝혔다.


- 당시 PLO의장은 미국이 쿠웨이트에 이라크의 협상 제안에 응하지 말도록 지시해서 평화적 해결의 길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 쿠웨이트 국왕은 사석에서 “이라크 점령군을 이곳에 하루만 묶어둔다면 미국이 그들을 물리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종래의 입장을 180도 바꿨다.

실제로 쿠웨이트로 진입한 이라크군은 2000명이었다. 그

러나 미국은 2~30만의 병력이 쿠웨이트를 유린했다고 선전했다.

유엔 안보리는 통상금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236~239)



▲걸프전, 전쟁인가? 학살인가? :


 당시 부시 행정부는 미 상원에서 전쟁 동의를 구하기 위해 증언도 날조했다.

이라크 점령군이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신생아를 병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는 것이다.


 미 의회에서 이를 증언한 15세 쿠웨이트 소녀는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 ‘나이라’였다.

그 소녀는 줄곧 쿠웨이트가 아닌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증언 시나리오는 광고회사인 힐 앤 놀툰사 작품이었다.

아무튼 파병 결의안은 의회에서 근소한 차로 통과됐다.


1991년 1월17일 새벽, 이라크군 섬멸을 위한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됐다.

언론이 떠드는 정밀폭격 따위는 없었다.

 미군이 불과 6주 동안 퍼부은 폭탄 양은

파괴력으로 따질 때 히로시마 원폭 7배에 해당했다.


우라늄 미사일, 네이팜탄 등 1977년 제네바협약으로 금지된 폭탄도 사용됐다.


 미군은 도로·교량·전기·통신·수도·댐 등 공공시설을 초토화했다.

 이라크 주민은 오염된 강물을 퍼다 마시고 등잔불로 어둠을 밝히는 석기시대로 돌아갔다.


 유엔의 경제봉쇄는 식량과 의약품 부족을 일으켜 아사자와 병사자를 속출시켰다

.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고속도로를 통해 철수하던 이라크 군인들에게도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100km의 고속도로에는 이라크 군인과 난민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휴·종전협정으로 철수하는 군대에 적대행위를 할 수 없다는 국제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이라크 유전지대이지 이라크 국민이 아니었다.


 폭격과 경제봉쇄로 이라크 주민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이 가운데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는 60만 명을 넘었다.

 미군 희생자는 294명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오폭 등으로 인한 사고사였다.

미국은 1998년 10월 “이라크 해방법”을 선포했다.(239~242)



▲‘해방’을 위한 두 번째 침공 :


 2003년 3월20일 미국은 이라크에 선전포고와 동시에 이라크를 침공했다.


대량살상무기 개발, 테러조직과 연계 그리고 후세인 정부의 인권탄압이 명분이었다.


 평화와 인권을 위해 후세인 정부를 타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 무기사찰단에 의해 대량살상무기 개발·은닉 의혹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후세인은 이미 침공 직전에 제한 없는 무기 사찰을 수용하겠다며 사실상 항복선언을 한 상태였다.

 세계 각지에서 100만 명 이상이 반전시위에 운집했다.


이후 전쟁 명분이 된 증거자료가 날조된 것임이 하나둘 밝혀졌다.

 2008년 6월 미 상원 조사위원회 최종보고서는 부시 행정부의 침공 명분이 모두 사실무근임을 확인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미 행정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라크의 군사시설과 각종 무기는 모두 미국이 지원하고 감독했기 때문이다.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연관성도 신빙성이 없었다.


 부시는 “이라크 정부 고위층과 알카에다 요인이 서로 만났다고 말했지

 연관되었다고 말한 적은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궁지에 몰린 미국 정부는 1988년 3월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쿠르드족을 학살한 전력을 트집 잡았다.

 그러나 당시 이라크의 쿠르드족 학살을 지원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탄저균, 보툴리누스균, 브루셀라 등이 1980년대 초부터 1989년 11월 말까지

미 상무부의 승인 아래 이라크로 수출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유엔 안보리에서 생화학무기 사용문제로 이라크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려 하자,

 미국은 후세인을 감싸며 결의안 통과를 저지했다.(243~247)



▲민주주의 재건과 인도주의 :


미국에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 전쟁을 수행하여 호메이니 혁명을 견제하고,

 이슬람 국가들의 반미 정서를 분산시키는데 기여한 충견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자국의 충견인 후세인을 제거했는가?


이란과의 전쟁 후 이라크는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떠올랐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는 후세인을 방관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원유대금을 유로화로 받겠다는 이라크의 발표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침공 넉 달 전인 2002년 11월8일 미국은 이라크 무장해제를 골자로 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1441호를 상정했다.

 ‘이는 결코 이라크 침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외교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미국 대사는 말했다.


막상 침공 후에는 ‘이라크의 민주주의 재건과 인도주의 정신’을 강변했다.

이후 3년 동안 공습과 분쟁 등으로 이라크 민간인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주민 400만 명이 이라크를 떠났다.


불법구금, 고문, 포로 학대 등이 미군에 의해 자행됐다.

하지만 유엔은 미군과 그 종사자를 국제형사재판소 소추대상에서 면제시켰다.


 국제형사재판소 협약의 소급적용도 금지했다.


미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미국을 기소 대상국에서 제외하는데 동의하지 않는 나라는

 경제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편 미국은 애국법을 제정하여,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은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안 때문에 지금도 용의자로 분류된 이들은 미군 수용시설과 관타나모 해군기지 등에 수감되어 있다.

수감자 명단은 고사하고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미국은 중동계 유럽 시민도 테러범이라는 누명을 씌어 납치·고문을 자행했다

. 미국이 이라크에서 ‘민주주의 재건’에 힘쓰는 동안 미국 내 ‘민주주의’는 무너져갔다.(247~250)



▲제국의 오만 :

 전혀 뿌리가 다른 아랍족과 쿠르드족, 시아파와 수니파 등

각기 정서와 이념이 상충하는 집단을 한 우리에 몰아넣고

채찍과 당근으로 이들을 다스리려 한 제국의 무지와 오만은 이라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점령 후 미군 부상자가 3만 명을 넘었다. 전쟁 비용은 1조 달러를 넘었다.

괴뢰정부 지원비용까지 합치면 3조 달러를 소모했다.


 여론조사에선 75%가 이라크 침공에 부정적 의사를 표출했다.

 이라크는 점점 제2의 베트남과 같은 꼴이 되었다.

과거 맥나마라 전 국방부 장관은 베트남전 실패의 원인으로 미국의 무지와 오만을 꼽았다.

 하지만 제국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제국은 21세기 벽두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자신의 치부를 전 세계에 드러냈다.(252~253)


김영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3)파나마,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 김영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7.12.07 17:49

(글 내용은 절대적으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요약과 인용의 경우 모두 괄호에 페이지를 표기했습니다.

다른 텍스트를 참고한 경우에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쿠데타 개입, 반군 육성, 민간인 학살·고문 등 미국이 비록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찾아보면

그에 못지않게 선행도 있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기 마련인데 한쪽 면만을 부각해서는 진실이 호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이승만의 공을 찾아낸들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마치 일제 지배도 찾아보면 좋은 점이 있다는 식의 이런 접근은

‘객관성’을 핑계로 우리가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논리의 빈약함을 짚는 건 이 정도로 하고, 다시 미국의 선행 이야기로 돌아가자.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확산은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주요 논리였다.

미국은 경제 발전을 위해 가난한 나라에 경제 원조를 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부정선거나 인권유린을 바로잡고, 마약과의 전쟁 등 범죄행위에도 맞섰다.


 파나마에선 독재자 노리에가를 체포하고, 엘살바도르에는 40억 달러, 콜롬비아에는 50억 달러를 지원했다.

우린 이런 제국의 선행을 어떻게 봐야 할까?


파나마 : 제국, 독립 국가를 세우다


▲운하를 위해 세운 국가 :


파나마는 1903년에 콜롬비아에서 강제 분리되어 독립국이 되었다.

 미국은 분리 독립을 위해 파나마 반군을 육성했다.

1903년 11월, 파나마 반군이 독립선언을 하자 건국 비용으로 1000만 달러도 제공했다.


 이렇게 파나마가 콜롬비아에서 독립하게 된 것은 바로 ‘운하’ 때문이었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하는 최단거리 수송로가 필요했고, 콜롬비아의 파나마에 눈독을 들였다

. 하지만 콜롬비아 의회는 미국과의 조약 비준을 거부한다.

미국은 파나마를 분리 독립하는 길을 택했다.

독립 후 미국은 파나마공화국과 곧바로 협정을 맺어 파나마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얻는다.


1968년 파나마공화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토리호스는 빈민구제와 학교 증설, 토지개혁 등

사회개혁과 더불어 파나마운하에 대한 주권을 주장한다.

1977년 카터 행정부는 토리호스와 파나마운하 반환협정을 체결한다.

 1999년 12월31일 자정까지 파나마운하와 미군기지 등 파나마에 대한 모든 권한을 반환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군부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고 1981년 7월 토리호스는 의문의 비행기 폭발 사고로 사망한다.(131~134)


운하 때문에 만든 국가가 감히 ‘진짜 주권’을 주장한 후과였다.


▲파나마운하 협정에 서명하는 지미 카터 미 대통령과 오마르 토리호스 장군

▲버려진 독재자, 노리에가 :


토리호스 뒤를 이어 노리에가 정부가 들어선다.

그는 아메리카 군사학교(SOA)에서 훈련받았고, CIA 첩자 노릇을 했다.

 CIA의 보호 아래 마약계의 큰손 역할도 했다.


 그런데 1988년 이후 미국은 자신의 하수인인 노리에가를 축출하기로 마음먹는다.

 노리에가는 무엇 때문에 주인에게 버려진 걸까?

그는 연간 수십억 달러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제2의 운하 건설을 위해 일본기업과 협상을 벌였다.


게다가 파나마운하 지대에 있는 아메리카군사학교(SOA) 이전 시한 연장도 거부했다.

1999년에 운하를 반환해야 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통제 안 되는 하수인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1984년 아직 미국과 노리에가가 밀월관계였을 때,

 미국은 부정선거로 당선한 노리에가를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1989년 5월 대선은 정반대였다.

 CIA는 파나마운하 지역 조차권 연장을 주장하는 엔다라 후보 당선을 위해 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이러한 선거개입과 함께 미국 주류언론은 노리에가의 마약밀매, 인권탄압, 부정선거 등을 연신 보도했다.

용도폐기가 결정된 노리에가는 천하의 악당이 되었다.(135~139)


▲미군의 파나마 침공 :


선거공작이 실패하자, 미국은 군사침공에 나선다.


 1989년 5월, 1300명이던 파나마 주둔 미군이 2000명 이상 늘어났다.

10월에는 파나마 군지휘관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불발로 끝났다.

 쿠데타가 실패하자 미국은 1989년 12월20일 새벽 1시 스텔스 폭격기와 함께 2만7000여 명의 지상군을 투입한다.


주거지역에 무차별 공습이 이뤄졌다.

 미국 주류언론은 민간인 희생은 외면한 채 스텔스 폭격기의 정밀폭격을 자랑하기 바빴다.

 결국 노리에가는 붙잡혀 미국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외국 주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국제연합 헌장은 제국 앞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항복 후 노리에가의 상반신 사진

미군의 폭격으로 1만여 명의 파나마인이 죽었다.

“노리에가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무고한 파나마 시민을 희생시킬 만한 이유가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부시의 대답은 걸작이다. “모든 인명은 소중합니다.

그런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139~141)


엘살바도르 : 내전이라는 이름의 학살


▲민중 저항과 학살 :

인구 700만의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의 현대사는

소수 기득권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과 학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1932년 4만 명의 민중봉기 이후 독재자 마르티네스의 3만 명 학살,

1981년부터 1992년까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의 저항과 우익 군·경의 테러 및 학살이 그것이다

. 이 12년간의 시기를 국제사회는 엘살바도르 내전이라 불렸다.


내전시기 우익 군·경은 좌익 게릴라(FMLN) 출몰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좌익분자로 몰아 무차별 학살했다.

 엘모조테 학살이 대표적이다.

1981년 엘살바도르 정부군은 엘모조테 마을의 주민 1000여 명을 학살한다.


 12세 이상의 여성은 강간한 뒤 살해됐다.

시신은 화장됐다.

이들 정부군은 아메리카군사학교(SOA)에서 교육받은 군인들이었다.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레이건 정부는 엘살바도르에 자금과 물자지원, 특공대 훈련 지원 등 모두 4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엘살바도르의 엘모조테 학살 추모비


당시 미국 정부는 엘모조테 학살을

 “공산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의 교전 과정에 발생한 것”이라며 개입 논란을 일축했다.

 하지만 2004년 10월 TV대담에서 미국 부통령 딕 체니는

“우리가 7만5000여 명의 살바도르인을 죽인 것은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해 학살 개입을 시인했다.

엘살바도르 내전은 미국과 우익에 의한 일방적 학살극이었다.

국제사회가 말하는 ‘내전’이라는 규정은 이러한 민중학살을 합리화하기 위한 표현에 불과하였다.(142~145)


콜롬비아 : 마약 근절을 위한 50억 원조


▲유혈 내분 :


콜롬비아는 거의 60년 동안 유혈 내분을 겪는다.

발단은 1948년 친미 계열인 보수당에 맞선 자유당 후보 가이탄이 선거전 암살되면서부터였다.


그는 미국계 기업 및 소수 기득권이 독점한 농경지를 환수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희망이 꺾이자 항쟁이 폭발한다.

우익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무려 20만 명이 희생된다.

60년대에는 정부에 맞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민족해방군 등이 조직된다.

 콜롬비아 정부군은 더욱 무차별적인 학살로 대응했다.


▲미국의 원조 :

냉전 이후 미국은 콜롬비아 평화 안착과 마약 근절을 명분으로 콜롬비아 계획(Plan Colombia)을 수립한다

. 이에 따라 미국은 클린턴 시절부터 부시 행정부 때까지 7년 동안 콜롬비아에 50억 달러를 지원한다.


블랙호크 헬기 등 각종 공격용 무기 13억 달러어치,

아메리카군사학교(SOA) 콜롬비아 지휘관 훈련비용 14억 달러 등 군사원조가 이어졌다

. 연간 1만3000명의 군인이 미군 당국에게 훈련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작전지휘, 정보, 병참, 보급, 심리전 등 군의 핵심 부문을 담당할 미군 지휘관도 따로 파견했다.


이 모든 게 단지 마약 근절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의 원조가 늘어날수록 코카인 수확량은 줄지 않고 코카인 재배면적만 증가했다.

콜롬비아 정부군과 민병대에 의한 민간인 사망·실종자도 급증했다.


애초 국제사회에 미국이 발표한 “콜롬비아 계획”대로라면 지원액의 68%는 경제 재건에 투입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투입한 50억 달러의 85%는 민중 탄압에 쓰였다.

덕분에 노동자, 농민 그리고 비판적 지식인 등 매년 3000명 이상이 살해되거나 실종되고 있다.(149~153)


만약 미국이 콜롬비아에서 벌인 마약과의 전쟁의 성적을 매겨본다면 어떨까?


아마 ‘마약근절’ 영역은 낙제일 것이다.

 하지만 ‘민중학살’ 영역에서 만큼은 단연 우수하다.

미국은 원조를 통해 미군 학교에서 훈련받고, 미군 지휘관을 따라, 미국제 무기를 들고

자국민을 학살하는 괴물들을 만들었다.

 다만 그 괴물들이 니카라과에서는 반군이었다면

, 엘살바도르와 콜롬비아에선 정부군이었던 것이 유일한 차이였다.


과연 제국에게 중남미 민중의 가치는 얼마였을까?

 니카라과 10억 달러, 5만 명 학살,

엘살바도르 40억 달러, 7만5000명 학살,

 콜롬비아 50억 달러, 20만 명 학살 중남미 민중의 목숨값이었다.


김영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4)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페루
  • 김영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7.12.18 16:33

베네수엘라 : 차베스의 반제·반미 행보


베네수엘라는 20세기 초에 엄청난 규모의 석유가 발견되면서 미 제국의 주요 공작 목표가 되었다.

 미국의 후원을 받은 고메즈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1908~1935) 석유, 천연자원,

주요 농산물은 미국 기업의 차지가 된다.(155)


▲차베스 대통령이 베네수엘라 1999년 헌법의 초소형 견본을 자랑하고 있다. 사진출처 : Agência Brasil

▲볼리바리안 혁명 :

고메즈 이후 민주행동당의 베탄코트 대통령, 갈레고스 대통령은 개혁정책을 시행한다.

 하지만 페레스 히메네스의 친미 우익 쿠데타로 개혁정책은 좌초한다.

 80만 헥타르에 이르는 토지의 석유 채굴권이 미국 석유회사로 넘어갔다.


우익과 좌익 쿠데타를 반복하는 부침 끝에 1998년 12월 선거에서 차베스가 당선된다.

그는 남미의 독립운동가 볼리바르의 이름을 본떠 일명 볼리바리안 계획에 착수한다.


 헌법을 개정하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섰다.

전력과 통신 등 국가 기간산업 국유화 법령이 공포되었다.

 IMF나 세계은행에 대항하기 위해 남아메리카은행의 창설도 주도했다.

 2006년 9월 유엔총회에선 “미 제국은 지금 몰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진짜 악마는 미국이 지정한 북조선·이란 등이 아니라 바로 부시의 미국”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차베스 제거 공작 :


차베스의 행보를 방관할 기득권과 미국이 아니었다.

 2002년 4월 수구우익 방송국이 총파업을 선동했다.

 자본가들은 생필품 유통을 봉쇄했다.

사회 혼란을 명분으로 군부집단이 쿠데타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전국적 규모의 반(反) 쿠데타 시위와 명령을 거부한 하급 장교들의 저항으로

친미 쿠데타는 삼일천하로 끝나게 된다.

 쿠데타 당시 베네수엘라 오실라섬 공군기지에선 미 공군기가 대기했고,

미 해군 함정이 베네수엘라 영해에 머물렀다.


2004년 5월에는 콜롬비아에서 자국민을 학살하던 우익 민병대 126명이 베네수엘라 수도 인근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베네수엘라 군복으로 위장하여 차베스 암살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암살 음모가 성과를 내지 못하자 대통령 국민소환을 시도했다

. 하지만 2004년 8월 국민투표 결과로 차베스의 입지만 강화되었다.(156~160)


볼리비아 : 민중의 희망 모랄레스


▲체 게바라의 죽음 :


 볼리비아는 체 게바라가 최후를 맞은 곳이다.

20명 안팎의 게릴라를 이끌던 그는 1967년 10월8일 미군 특전사의 지휘를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생포된다.

그는 정식재판 없이 곧장 총살된다.

 본래 볼리비아 정부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해 체 게바라를 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미 대통령 존슨은 그를 즉각 죽이라고 명령했다.

시신도 곧장 화장하여 분골마저 없앴다.

재판을 통해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과 동정 여론을 조기 차단하기 위함이었다.(163~164)


▲사진출처 Bolivian Gas War, 2003

▲자원의 저주 :


 볼리비아는 은, 주석, 철, 마그네슘, 천연가스 등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일찍이 제국주의 수탈에 시달려왔다.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원주민들은 자원 수탈을 위해 광산, 농장 등지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제국주의와 기득권층에 의한 ‘자원의 저주’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유전·광산·통신·철도 등 국가 기간산업이 민영화되었다.

임금삭감, 노조 무력화, 사회보장제도 축소도 잇따랐다.

수돗물 공급권조차 미국계 기업으로 넘어가 2000년에는 물값이 300% 인상하는 일이 생겼다.

 월 70달러 버는 주민들에게 월 20달러가 넘는 물값을 부담시킨 것이다.


2003년 10월에는 국가의 가장 큰 수입원인 가스·유전 민영화를 둘러싸고

정부와 에보 모랄레스가 이끄는 시위대가 충돌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 국무부는 “볼리비아의 헌정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위대의 난동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협박 성명까지 발표했다.


 내정간섭을 금하는 유엔헌장의 문구는 무용지물이었다.(161~163)


▲에보 모랄레스 (2006) 사진출처 Agência Brasilia

▲민중의 희망 모랄레스 :


코카 잎을 재배하던 원주민 출신 에보 모랄레스는 2005년 12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500년 동안 이어진 불공평을 털어내겠다고 약속했다.

 천연가스와 광물자원을 국유화하고 원주민 언어를 학교 정규 수업에 포함했다.


코카 재배 근절을 외치는 미국의 정책에도 맞섰다.


코카 근절을 명분으로 화학물질로 농지를 파괴하고 농부들을 강제로 내쫓거나 학살하는데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는 2006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코카를 코카인으로 제조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미국 등 서구 제국”이며 코카 잎은 “안데스 산간 부족의 전통 식품이므로

 이를 불법화하는 미국의 조처에 순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부시 정부가 선언한 ‘악의 축’에 맞서 베네수엘라·쿠바와 함께 ‘선의 축’을 선언했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의 이런 움직임은 지난 세기

 미 제국의 수탈에 시달려온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반미·자주화 의식의 고조를 보여준다.(164~167)


브라질 : 우리 편이 아니면 적


아프가니스탄 침공 전 부시는

“미국 편이 아니면 당신은 테러리스트 편”이라며 국제사회에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미국의 이런 논리는 과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기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하지만 “친미 아니면 주적”이라는 막무가내 논리는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었다.


▲‘자주’는 미국의 적 :


 1960년 말 브라질 대선에서 자니오 콰드로스가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지만 정치적으론 중도에 가까웠다.

 그는 동구권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고, 미국의 쿠바 침공 지지요청을 거부했다.

그런데 취임한 지 7개월 뒤 콰드로스는

 “외국인을 포함한 극우세력의 가공할 위협으로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직서와 함께 돌연 사퇴했다.


헌법 절차에 따라 부통령 골라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는 정유산업 국유화, 외국기업 소유의 유휴 토지 개발, 이윤 유출 억제 등 국민자본 형성에 주력했다.


정치적으론 제3세계와 외교를 증대하며 비동맹 자주노선을 추구했다.

미국은 그를 두고 공산주의자라고 흑색선전을 벌였다.

 백만장자의 아들인 골라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의 자주노선은 미국의 이익과 상충했다.(168~170)



▲ 브라질 군사정부 기간 리오 데 자네이루의 탱크 행렬 (1968) 사진출처 Brazilian National Archives

골라트 정부 전복 :


미국 정부는 골라트를 축출키로 했다.

1962년 총선에 CIA는 극우 후보들에게 2000만 달러를 지원한다.

학생과 부녀자들 사이에 각종 친미단체도 조직한다.

 극우언론에 자금 지원도 병행했다.

 선거공작이 실패하자 쿠데타 공작으로 넘어갔다.

 ‘공산주의자를 타도하자!’는 대중 선동작업을 벌였다.

미 대통령 존슨은 “골라트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1964년 3월 브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은 자금·무기·연료 지원에다가 쿠데타 이후 군사원조도 약속했다.

게다가 브라질 군부 내 반 쿠데타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브라질 남부 해안에 전함도 급파했다

. 쿠데타 이후 의회는 폐쇄되고, 노조 활동과 정부 비판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고문·학살도 자행되었다.


특히 고문·학살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는 브라질 국립경찰을 만들어 10만 명의 경찰을 훈련했다.


이들은 상대를 공황상태로 몰아넣는 고문법을 배웠다.

 이에 따라 임산부 앞에서 남편 고문, 부모가 보는 앞에서 어린이 고문 등이 자행됐다.

미국의 고든 대사는 이 쿠데타를 두고 “민주적 반란”이라 불렀다.(170~173)


페루 : 원주민 멸족을 위한 불임시술


▲ 알베르토 후지모리 사진출처 : Gobierno Peruano

▲후지모리 독재정권 :


페루는 정부군과 게릴라 사이의 유혈 충돌로 약 7만 명이 학살당하거나 영구 실종되었다.

 페루 정부는 게릴라 출몰지역의 주민들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무참히 학살했다.

 특히 후지모리 정권에서 인권유린이 가장 극심했다.


1990년 7월 일본 이민자 출신 후지모리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1인 독재체제를 위해 야당 해산, 주요 정적 국외 추방, 의회와 대법원 폐쇄 등 폭거를 자행했다.

 이에 일부 유럽국가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미국도 페루와 단교를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은 후지모리가 페루 내 미군 주둔을 수락하자 곧바로 단교를 철회하고 적극적으로 후지모리를 두둔했다.


후지모리는 재임 기간에 좌익 동조세력이라며 산간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이들을 멸족시키기 위해 20만에 가까운 원주민들에게 강제로 불임시술을 했다.


이런 인권유린 및 부정부패로 국민적 저항이 커지자 후지모리는

 2000년 11월 APEC 회의 후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쳤다.


 후지모리 이후에도 페루 군부는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또 고급 지휘관의 상당수는 아메리카군사학교(SOA) 출신이다.

 미국의 그늘 아래 있는 한 페루의 진정한 민주화는 요원할 것이다.(175~179)


베네수엘라 반(反)차베스 쿠데타, 브라질 골라트 정부 전복

그리고 칠레 아옌데 정부 전복에서 보듯이

 미국은 상대 정부가 사회주의든, 민족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개의치 않았다.


 단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타도해야 할 적이었다.


선거에 개입하거나 하수인을 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만약을 대비해 군함과 전투기도 후방에 준비해뒀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후방지원을 위해 한국에 항공모함을 급파했던 것처럼 말이다.


김영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께 읽는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5)파라과이, 우루과이, 아이티, 온두라스   
  • 김영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7.12.27 14:26

파라과이 : 국가인가? 범죄 집단인가?


▲인권유린의 배후 :


 파라과이 근·현대사는 세 번의 대규모 전쟁과 내전의 참화로 얼룩져있다.

전쟁과 내전의 끝은 쿠데타였다.

 1954년 권좌를 잡은 스트로스너 장군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반공을 제1의 정책 목표로 설정했다.


 언론기관이 폐쇄되었다.

비밀경찰은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을 잡아다 고문·살해했다.

모스크바 전경이 인쇄된 그림엽서를 지녔다는 이유로 12살 소녀가 체포되기도 했다.


마틴 알마다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에게 인간다운 삶에 관해 가르쳤다는 이유로 끌려가 1년 간 고문을 당했다.

 비밀경찰은 그가 고문당하며 지른 비명을 녹음한 테이프와 피 묻은 옷가지를 가족에게 배달했다.

그의 아내에겐 “당신 남편은 죽었으니 시신을 수습해 가라”는 거짓말을 했다.


 정신적 고문을 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은 후 충격으로 숨졌다.


파라과이 비밀경찰의 고문·살해는 CIA나 FBI의 공조 아래 진행되었다.

 이들 비밀경찰은 미국 수사기관의 취조 매뉴얼을 들고 다녔다.

 1976년에는 미 FBI 국장이 파라과이 비밀경찰 대장에게 “FBI의 임무에 기꺼이 협조해주어 고맙다”는 서신을 보냈다.

 미국의 개입여부가 논란이 되자

 미 대사는 “통상적인 차원에서 파라과이 경찰을 교육했다”고 변명했다.(180~182)



▲ 마틴 알마다 By Maria Stella de Almada - Foto tomada por Maria Stella de Almada y cedida a Wikipedia


▲국제범죄 집단 :


파라과이 공권력은 마약 밀매와 무기 밀거래에 개입했다.


 7억 달러 상당의 무기가 파라과이를 거쳐 제3국으로 밀수출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여권 장사도 했다.

일반여권은 1만2000달러, 외교관 여권은 5만 달러였다.


세계각지의 마약 밀매범, 테러리스트 심지어 나치 전범까지 파라과이로 몰려들었다.

연간 수입 2400만 달러로 쏠쏠한 외화벌이였다.


 장기밀매를 위한 영·유아 납치도 성행했다.

 인구의 대다수가 백인계인 파라과이 영·유아들은 북미지역 환자들에게 적합한 상품이었다.

 1988년 12월 미 의회 보고서는 파라과이를 남미 국가들 가운데

 미국의 대외정책에 가장 협조적인 국가라고 서술했다.

글쎄, 파라과이가 미국에 ‘협조적’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국가’보단 범죄집단에 가까웠다.(182~183)


우루과이 : 고문은 예술이다


미국 국제개발처의 지원 :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비교적 민주적이고 평화롭던 우루과이는

 1976년 쿠데타로 친미 군부가 집권하면서 공포의 땅이 된다.


 미국 정부는 군부에 물자와 인력 지원을 대폭 증강했다.

고문 도구, 고문 기술자, 살상 장비가 공급됐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산하 OPS(공공안전국) 우루과이 책임자 딘 미트리온은

우루과이 경찰에게 고문기술을 가르치고 직접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생식기에 전기충격, 고환 압박, 손톱과 치아에 전기충격, 정신 고문 등 다양한 수법이 사용됐다.

그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체의 특정 부위에 적확한 고통을 가하는 것은 예술이다”라며 고문을 찬양했다.

 적확한 고통을 시험하기 위해 걸인을 붙잡아 죽이는 일도 있었다.


아메리카군사학교(SOA)가 미국을 위한 군인 간부 양성소였다면,

미국 국제개발처 OPS는 경찰 간부 양성소였다.


1981년 한 우루과이 정보기관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우루과이 군부에 제공한 교본은 고문 기술에 관한 것이었고,

 우루과이의 군·경 간부를 불러 파나마에 있는 아메리카군사학교에서 가르친 내용은

인체의 신경 부위 36곳에 가하는 전기고문 기술이었다”라고 폭로했다.(185~187)



▲우루과이 군부에 파견된 미국 국제개발처 요원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계염령>의 한 장면


아이티 : 진흙 쿠키로 기억되는 나라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 :


아이티는 콜럼버스의 첫 정복지다.

 본래 살던 원주민 타이노족은 멸족했고

지금은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데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이티 민중들은 해방투쟁을 통해 지구상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을 세웠다.

독립공화국이 수립되자 미국은 한 세기에 걸쳐 무려 25차례나 아이티를 침공한다.

1915년 7월에는 아예 아이티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든다.

미국은 아이티 주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뒤, 이를 내지 못하는 대다수 흑인을 강제노역으로 내몰았다.

또 자신에게 충성할 우익 기득권층과 군·경도 양성한다.(188~189)


▲미국의 민선정부 전복 :


2차 세계대전 종식으로 아이티도 표면적으론 주권국가가 되었다.

 최초의 민선에서 빈농 출신 에스티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산간지대에 유휴 토지를 개간해 소작농에게 집단농장을 공급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자국에 맞는 산업 모델도 선정했다.


국민들은 그를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우익 군부의 쿠데타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제거된다.

이후 막도르 군부부터 듀발리에 부자까지 이어진 독재는 1986년에 가서야 막을 내린다.


 독재가 아이티에 남긴 것은 3만 명 민간인 학살, 영·유아 사망률 아메리카 1위, 80% 이상의 문맹률이었다.

1987년 아이티에 민주화 요구가 일었다.

민중의 우상으로 등장한 아리스티드를 중심으로 총선실시를 요구했다

. 미국은 군부를 앞세워 이를 막으려 했지만, 국제사회 여론에 떠밀려 1990년 국민 총선거를 주선했다.


 미국은 아리스티드 당선을 막기 위해 우익후보를 내세웠지만, 아리스티드는 70%의 지지로 당선된다.

그는 부패 척결 운동을 벌이고 IMF 등 국제기구의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결국 아리스티드는 취임한 지 7개월 만인 1991년 9월

미국이 후원하는 군부와 우익 민병대(아이티 진보전선 FRAPH)의 쿠데타로 실각한다.(189~195)


▲아리스티드 재축출 :


 2000년 대선에서 아리스티드는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빈곤 탈출을 위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2004년 초 미국은 퇴역 군인과 우익 민병대(아이티 진보전선)를 통해 분란을 조성했다.


 이들 반군은 지방도시를 점령하고 대통령 관저에 침입시도도 벌였다.

 2004년 2월28일 백악관은 분란을 핑계로 “민주적 원칙을 지키지 않아 야기된 뿌리 깊은 혼돈과 폭력을 목격할 때

, 과연 그가 아이티의 지도자로서 적합한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 다음날인 2월29일, 아리스티드는 미국 비행기에 강제로 실려 중앙아프리카로 보내졌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나는 한밤중에 미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비행기에 태워져 국외로 추방되었다”고 폭로했다.

 미국은 아리스티드가 자발적으로 망명을 간청했다고 반박했다.


그가 해외로 추방되고 아이티에선 살육 광란이 재현되었다.

수도인 프린스항에는 수많은 시신이 산을 이루었다.

 유엔군 완장을 찬 미군은 아리스티드 축출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붙잡아 반군에게 인계했고, 반군은 그들을 학살했다


. 아이티의 새 정부는 공을 세운 민병대원에게 1인당 5000달러씩 격려금을 나눠줬다.

이들은 미국이 공급한 소형 기관총을 들고 거리 청소를 했다.

아리스티드를 지지하던 빈민층을 치우는 청소였다.(195~197)


아이티는 19세기 초 프랑스에 맞서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을 세운 곳이다.

빈농출신 에스티메와 아리스티드 등 사회개혁 의지를 품은 지도자도 배출했다.


하지만 미국의 계속된 침략을 겪은 아이티는 우리에게 ‘진흙 쿠키’로만 기억되고 있다.



▲ Haitian Dirt Biscuit by Feed My Starving Children


온두라스 : 니카라과 반군 기지

니카라과 반군 기지 :


 니카라과와 국경을 접한 온두라스는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을 위한 미국의 전략 거점이 되었다.

 미국은 이곳에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을 위한 반군기지를 조성하고, 약 1만5000명의 반군을 훈련했다.


 미국은 이들을 니카라과로 침투시켜 민간인을 죽이고 공공시설을 파괴했다.

아울러 온두라스 군부에 대해 지원도 병행했다.

 CIA는 온두라스 군부의 민간인 고문·학살을 지원하기 위해 ‘316 살인부대’를 창설했다.

 납치·고문·학살을 전담하는 부대였다.


최소 1만 명 이상이 이들에게 희생되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던 시위 학생, 임금 인상을 요구한 노조 활동가,

 군사독재를 비판한 언론인들이었다.

후일 미국 언론이 316 부대원의 만행을 폭로하자 당시 온두라스 미 대사는 금시초문이라며 발뺌했다.

 미국의 무기 제공이 오히려 더 큰 희생을 막았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198~199)


나가며


중남미의 비극은 중남미 민중이 열등하거나 무능력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300년이 넘는 기나긴 식민통치와 소수 지배층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대륙 곳곳에선 민중이 들고 일어섰다


. 1910년 멕시코 혁명

, 1959년 쿠바 카스트로 혁명,

 1970년 아옌데 당선,

1979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 등

 중남미 민중은 무기를 들어 저항하고, 정부를 구성하고, 사회개혁을 시도했다.


 다만 중남미는 재수 없게도 제국과 너무나 가까웠다.

수많은 열망이 제국에 의해 좌절됐다.

스페인 식민통치 때부터 형성된 반민중적 지배구조는 미국에 의해 더욱 견고해졌다.

마치 해방 직후 미 군정청이, 조선에 일본이 심은 식민지구조를 ‘양키식’으로 승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때때로 혼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다른 나라의 내전을 막는다며 각종 노력을 기울이다가,

 어디서는 내전을 부추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부정선거를 바로잡는다며 군사개입도 불사하다가, 다른 데서는 부정선거를 지원했다.

또 어떤 반군은 섬멸해야 할 ‘공산주의자’였지만,

어떤 반군은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부어야 할 ‘자유의 투사’였다.


 얼핏 오락가락해 보이지만 미국의 목표는 명확했다.

바로 ‘미국을 따르면 살리고,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이었다

. 즉 자주노선은 미국의 주적이었다.


미국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반군을 만들거나 쿠데타를 하거나 군사원조를 했다.

 정규군이든, 경찰이든 혹은 민병대든 상관없었다.


 테러리스트든, 마약 밀매범이든 누구든지 미국의 명령이라면

상대가 동족이라도 총을 휘갈길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무력을 지배하는 자가 이긴다는 명쾌한 논리였다.

대외정책에서 미국은 언제나 약육강식을 선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전형적인 제국이었다.


김영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