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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나치 부역자 청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죄다>


침묵은 죄로 총살형 당한 프랑스 기자들도 괴로워했다.

침묵이 면죄부인줄 알았지만 드골은 용서하지 않았고 프랑스 인민들도 용서하지 않았다. 용서는 죄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 협력자 조사대상 150만~200만 명.


체포되어 조사 받은 자 99만 명,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서 재판된 사건은5만 7천 100여 건,

6천 766명에 사형선고,

 782명 사형집행,

2천 802명에게 유기징역형,

 3천 578명에 공민권 박탈했고,

시민재판소에서 11만 5천 건을 재판해 9만 5천 명이 부역죄를 선고받았고,

공직자 12만여 명은 시민재판소에서 행정처분받았다.


재판 받은 사람들은 군대 장교 4만 2천여 명,

정부 관료 2만 8천 750명,

경찰간부 170명,

판검사 334명,

헌법위원 18명이다.” 

 

<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을 본다. >

 

한국에서 친일파 진상 규명 등 과거사청산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지만,

독일의 나치통치를 겪었던 유럽의 각국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독일에 점령되었던 각국이 독일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다.


 서독이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각국에 큰 피해를 준 나치 전범을 철저히 사법 처리하여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나치 협력자 청산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는 프랑스에 관해서만 설명하고

, 부연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5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하여 왜 나치 협력자들을 숙청하는가에 대해 논의한다.  


영국에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던 드골은

프랑스 국내의 반나치 저항운동을 지휘하고 연합군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나치 독일과 싸웠고,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개선장군으로 입성했다.


그러나 프랑스 전국이 완전히 탈환된 것이 아니어 제헌의회를 구성할 수 없었지만,

 드골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지역에서는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드골은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 나치 협력자들의 숙청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이 당시 드골이 규정한 민족반역 범죄자는 자유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 공직자들과 추종자들,

그리고 나치 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인들이다.



드골은 나치협력자 숙청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 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정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 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당시 나치 협력자로 규정된 사람은 다음 3가지였다.



① 자유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②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잘못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 관료들과 추종자

③ 나치 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 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 사람

 

드골이 나치 협력자 청산에 있어 프랑스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제일 먼저 도마 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언론인들은 도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지식인과 작가는 사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책임을 물려야 한다.”



드골의 지식인에 대한 굳은 의지는

그의 『전쟁회고록』에서 저명한 작가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숙청해야 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적대진영을 선택한 작가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의 자극적 웅변술이

어떠한 범죄와 어떤 벌에 해당되는지를 너무나 잘 보고 있다.”


이 당시 숙청된 지식인들로는 《공화주의 리옹》을 발행한 사주 알베르 르전,

 클레망소의 전기를 쓴 역사가로 나치 점령 시절 비시정권의 일간지 《오늘》의 정치부장을 맡았던 쉬아레즈,

프랑스 최대 일간지 《르 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문사 사장, 언론인들이 민족반역자로 재판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끈 사람은

천재 대학교로 유명한 파리고등사범 출신(에꼴 노르말)

 작가이자 언론인인 브라야크로,

그가 1945년 1월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는 36세에 불과했다.


그의 재판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프랑스가 낳은 보기 드문 인재라는 프랑스인들의 인식 때문이지만,

그가 프랑스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검사로부터 더욱 큰 질타를 받았다.


검사는 “보통 사람의 배반보다 브라지야크와 같은 지식인의 배반이 수백 배 더 나쁘다”고 논고하며

그를 단순한 나치 협력 배반자보다 더 악질인 지성적 반역자로 규정했지만,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의 사형선고에 찬성하면서도

그의 ‘천재성’이 안타깝다고 사면을 바랐다는 점이다.


특히 브라지야크는 파리에서 철수하는 나치 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도망치자는 제의을 받았음에도

 이를 단연코 거부하고 자수했으므로 국민들의 호감도 받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며 레지스탕스 운동과 저항언론을 주도한 카뮈조차

 나치 협력자 청산을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감형탄원서에 서명하여 드골에게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 지식인 59인이 서명한 진정서를 받은 드골은 그들의 탄원을 기각했고,

 브라지야크는 사형선고를 받은 지 약 2주 후에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여하튼 지드와 같은 지식인에 대해 숙청설이 오갔다는 것은

그만큼 언론인, 작가들에 대한 숙청이 철저했다는 뜻이다.


 파리 해방 직후 프랑스에서 최초로 응징된 나치 협력자들은 모두 언론인들과 작가 등 지식인들이었다.

 이와 같이 드골이 처음부터 지식인들을 숙청 대상자로 삼았기 때문에

 나치 협력자 숙청을 둘러싸고 야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여론이나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잠재울 수 있었다.


 

드골은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

, 비시 정권의 고위 관리들을 숙청한 후 각계에 뿌리박은 나치협력자

또는 부역자들을 철저히 숙청하기 시작했다.


우선 민족을 배반한 경찰과 판검사가 나치 협력자를 심판할 수 없다는 대전제 아래

경찰과 사법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여 1944년 말에 이미 5천여 명이 경찰이 체포됐다.

403명의 판사들이 나치 협력혐의를 받았는데,

이것은 전체 판사의 17퍼센트에 이르는 수치였다.


나치 협력 외교관에 대한 숙청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는데,

 1945년 1월에 이미 대사 75퍼센트, 공사 40퍼센트, 참사관 25퍼센트가 처벌받았다.


 교육성도 무려 6천여 건의 나치 협력자 혐의사건을 심사하여

교육성의 고위 공직자 357명이 직위박탈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물론 초기 숙청이 다소 무리한 점도 있어 1953년 이후 5백여 건의 재심 청구가 들어와

모두 이유 있다고 판정되어 원상회복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드골이 매우 고심한 것은 군부의 숙청이었다.

 그는 우선 나치 독일에 대해

유리한 입장을 취한 군의 조직이나 단체에 가담한 장교나 하사관은

모두 파면시킨다고 선언했다.

1946년 말까지 모두 1만 270명의 장교들이 조사 받아 650명이 파면 당했고

2천 570명이 전역 당했다.


 지방공무원도 5만여 명이 나치 협력혐의로 조사 받았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공식적으로 1만 6천 113명의 고위공직자들이 응징되었다고 발표했다.

 

군‧관‧정계의 숙청을 단행한 드골은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지원한 대기업사주들도 예외 없이 숙청했다.

드골은 나치 협력 대기업 소유주의 재산을 몰수했고, 그 기업을 국유화했다.

 물론 국유화되는 기업들의 주식은 정부가 현 시가대로 보상하여

 선량한 주주에게는 손해를 주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의 기업,

 즉 경제부문에 대한 숙청은 정치, 행정, 언론 등 다른 부분에 비해 매우 관대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자동차회사인 르노는 국유화되었고

주 루이 르노는 옥중에서 사망하였지만,

기업의 대표가 구속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며 대체로 재산몰수형에 처해졌다.


드골도 전후 경제회복을 위해 기업활동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드골의 대숙청과 국유화 조치 등 경제개혁에 비판을 하지 못한 것은

 드골 개혁이 갖고 있는 고도의 공정성 때문이었다.

 

언론사의 경우도 예외가 없었다.

나치 점령군과 비시 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언론사는 물론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창간된 모든 신문과 잡지들을 대상으로

소유주가 재판을 받는 경우 모두 발행 금지시켰다.

또한 소유주가 실형을 받으면 그 언론사는 곧바로 폐간되었다.

 물론 문학과 스포츠 등 정치성이 전혀 없는 전문지는 이 조치에서 제외되었다.


신문사에 대한 재판은 1945년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1948년 말까지 모두 538개 언론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이중 1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폐쇄됐고,

 64개 사가 전 재산 몰수, 51개 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30개 언론사만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전쟁 전부터 발행되던 유력 신문사 중 살아남은 것은

《르 피가로》, 《라 크로와》, 《르 탕》 등 3개뿐이었다.


 이 신문들은 독일의 점령과 함께 파리에서 지방으로 피난하였으며,

점령 기간 중에 정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켰던 것이다.

출판사에 대한 숙청의 큰 골격도 마련됐다.


“출판사 등의 민족배반 행위를 법적으로 밝혀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멘트나 가죽을 적에게 팔아 단순히 돈을 버는 일보다

 장‧단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연예계에 대한 숙청도 빠지지 않았다.

먼저 예술직업인증명서 발부제도를 창안해 증명서 소지자에 한해

무대예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는데,

 나치 협력혐의가 조금만 있어도 증명서는 발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예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것은 프랑스 연예인들의 철저한 직업의식, 즉 예술가적 기질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나치 점령 시절 프랑스의 자체 영화산업은 거의 무너졌고,

독일자본으로 설립된 ‘컨티넨탈필름’이 프랑스 영화산업을 장악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선전영화가 프랑스인들에게 외면을 받자

 나치도 프랑스의 예술성을 인정하면서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나치 점령시대이기는 하지만

영화감독들은 점령 당국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 검열도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 당시 제작된 앙리 크루조 감독의 <까마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화사상 가장 걸작 중에 하나로 뽑힌다.


이것은 컨티넨탈 필름이 프랑스에 있는 독일영화사이지만

작품을 만드는 프랑스 감독들이 독립적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영화계의 숙청은 그야말로 미미하여 5명이 견책을 받았고,

1명이 직업 활동 금지령을 받았을 정도이다.




세계적인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도 독일 공연을 문제 삼아 조사했지만,

프랑스 포로의 수용소 탈출에 필요한 여권을 만드는데 협조한 것이 인정되어 역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오히려 재판부는 공식적으로 피아프에게 사죄까지 했다

(피아프가 만든 가짜 여권은 무려 147개나 됨).


드골은 초반부에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 정권의 최고 지도부를 심판해 가혹할 정도로 엄벌을 내린 후

 비시 정권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석학집단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 협력자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프랑스의 숙청 논리는 다음 말로 축약될 수 있다.

 

“나치 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이념을 달리한다고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역적’은 아니며,

 단지 국가의 관리와 경영을 달리하는 이념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드골의 정책 목표는 나치 협력 민족반역자를 신속히 숙청해야만 프랑스의 위상도 올라가고

 국내 질서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언론인 등 지식인들을 제일 먼저 숙청하여

 민심을 임시정부 측으로 돌려놓은 것이 가장 큰 성공의 요인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드골은 조속한 시일 안에 프랑스를 새로운 틀로 개혁시키기 위해서는

다소 인기몰이식인 언론인을 비롯한 지도층만 척결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드골은 부역죄(indignite nationale, 국민자격의 박탈)라는 특별법을 만들었다.  

 

부역죄는 나치 협력 반역혐의로 정식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나치에 협력을 시도하거나 도움을 주려고 한 일반인 등 경미한 나치 협력 사범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즉 부역죄는 나치 독일과 공개적으로 협력한 비시 정권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한 국민들,

 국가반역죄로 다스릴 수 없는 비시 정권 지지자들,

 나치 점령기간 합법성을 가장한 비시 정권의 법을 솔선해 준수한 자들을 다스리기 위한 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나치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상층부는 물론 하층부 사람들도 모두 속아낸다는 뜻이다.


부역죄의 큰 골격은 국적 박탈의 형벌이 자동적으로 병과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부역죄는 형을 선고받은 모든 나치 협력자에게 병과 되었고

심지어는 알제리에서 사형된 나치협력 반역자에게까지 소급해 적용됐다.


부역죄를 선고받은 부역자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 및 공직 진출권이 박탈되며,

공무원, 군, 변호사, 회계사, 교원, 노동조합원, 언론인과 모든 통신과 정보업무에서 추방되고,

심지어는 개인기업의 대표이사는 물론 이사로도 참여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물론 이와 같은 부역죄는 이중처벌이라는 반대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특히 자동적으로 재산몰수형을 가하는 것은 너무 심한 형벌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국민의 단결을 해치고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을 침해한 행위를 한 자가 바로 부역죄를 저지른 자’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하면서 여론을 유도하자,

프랑스인들도 빠른 시간 안에 프랑스를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법이라고 인식했다.


드골은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프랑스는 매국노가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치 협력자 숙청이란 결국 프랑스 사회를 완전히 정화해 줄 수 있는 방편이라는 뜻이다.

이 점이 바로 프랑스가 해방된 후 다른 나라와 같이 좌파와 우파가 분리되어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고

국민 전체가 나치 협력자 색출과 조국 건설에 앞장 설 수 있게 된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반면에 독일 점령기간 동안 프랑스를 위해 싸운 레지스탕스들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다.

사실상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인 프랑스인은 엄청난 숫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30만 명이 공식적으로 레지스탕스 경력자로 인정받았는데,

 이 숫자는 당시 성년 남자의 2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4년으로부터 194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주로 좌익으로 구성된 레지스탕스 세력은

정계의 다수를 이루었다.

상대적으로 전통적 우익을 포함하여 우익 정치세력은

비시 정권의 몰락과 함께 거의 회복불능 상태로 되었다.


특히 비시 정권에 손을 들어주었거나

직접 비시 정권에 참여하였던 302명의 하원 및 상원의원들이 피선거권을 잃었다.

 이 가운데 반이 넘는 163명이 1936년에 중도 또는 우익에 속하는 의원들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레지스탕스 신문들이 전체 일간신문 구독율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공산주의 계열의 신문 구독자 수는 전전보다 네 배를 넘어섰다.



시효가 없는 나치협력자 청산.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은 속전속결이 특징이다.

최고재판소가 형식적이나마 1960년까지 운용되었지만,

대부분의 숙청은 1951년에 종지부를 찍어 단 6년 만에 숙청재판을 종결했다.


 프랑스의 연감 『퀴드』 2003년 판은 나치 협력자 청산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치 협력자 조사대상 150만~200만 명,

 체포되어 조사 받은 자 99만 명,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서 재판된 사건은 5만 7천 100여 건,

 6천 766명에 사형선고,

782명 사형집행,

2 천 802명에게 유기징역형,

3천 578명에 공민권 박탈했고,

시민재판소에서 11만 5천 건을 재판해 9만 5천 명이 부역죄를 선고받았고,

공직자 12만여 명은 시민재판소에서 행정처분을 받았다.


재판 받은 사람들은 군대 장교 4만 2천여 명,

정부 관료 2만 8천 750명,

경찰간부 170명,

판검사 334명,

헌법위원 18명이다.”

 

물론 서슬이 시퍼랬던 나치 협력자 청산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워져

최초에 선고된 형량을 모두 채우는 나치 협력자들은 점차 줄어들었다.

1951년에 이미 강제노동형 수형자 406명이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나치 협력자들은 일부 가석방의 은전을 받아 풀려났더라도

 사회에서 부역죄라는 형벌이 계속 발목을 잡아 정상활동이 불가능했다.

 피선거권은 말할 것도 없고 투표권도 박탈당했으며,

공직은 물론 언론이나 국영기업체에도 진출이 차단됐다


폭풍우와 같았던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이들에 대한 사면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면의 당위성으로 프랑스인들의 관대함, 국가적 화해,

점령기간 동안에 범해진 범죄의 일정한 정치적 성격,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화해정책의 선례 등을 꼽았다.


여하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51년 1월 5일의 통과된 최초의 사면법은

 공민권 박탈 판정을 받았거나 1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사면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이 법은 강제로 징용되었거나 21세 이하의 청소년이었거나

 대부분의 형기를 채운 사람들에 대한 구제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중대한 범죄나 고등법원의 결정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1952년 7월에는 ‘국가적 일치’라는 기치를 내걸고 보다 총체적 사면을 약속하는 제안이 나왔다.

 이들은 “제4공화국은 이해와 인간성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


 가중되는 위기속에서 모든 프랑스 국민의 단합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우리의 조국이 내일 위험에 처한다면

그 방위를 위하여 프랑스의 모든 자녀로도 충분하지 못하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1953년 7월 두 번째의 사면법도 통과되었고,

특별히 심각한 범죄를 제외하고 당시까지도 복역하고 있던 부역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사실상 이 법에 의해 프랑스의 부역자에 대한 처단은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해방된 1945년을 기산으로 한다면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부역자 문제를 처리한 것이다.


1992년에는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 때 도주해

2차례나 궐석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폴 투비에도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79세의 고령이었다.

그럼에도 정상 참작은 없었고

두 사람 모두 감옥에서 사망했다.


1998년에는 비시 정권의 보르도 경찰서장 모리스 파퐁이 나치 협력자의 심판대에 올랐다.


그는 비시 정권 하에서 레지스탕스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드골의 집권 후에도 현직에 그대로 머물렀었으며,

오히려 랑드 주지사로 승진까지 했다.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 하에서는 예산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후 과거의 그의 행적이 보다 세밀하게 검토되면서 그가 숨겨온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일의 요청에 의해 유태인을 추방하는 문서에 파퐁의 서명이 계속 발견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있던 유태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행위는 물론

시효가 배제되는 비인도적 범죄에 해당되었고,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90세였다.


“반 세기를 넘긴 뒤에 나치 부역 행위자를 재판정에 세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르몽드》 기자가 한 중학생에게 위와 같이 질문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인간적으론 안 된 일이지만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학생의 답변은 역사란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협력한 배반자들을 ‘외세와 내통한 이적죄’와 ‘간첩죄’를 적용해

 대담하고도 대단히 가혹하게 심판하고 처벌했다.

그리고 반나치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좌‧우파 정치인과

 애국적 시민들로만 새로운 주체세력을 형성해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주적인 프랑스 국가를 건설했다.


드골은 프랑스를 새로 이끌 정부를 구성하면서 이념 문제에 크게 우려하지 않고

좌파든 우파든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세력을 총체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나치 협력자들이 프랑스 내에서 근거를 갖지 못하도록 차단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출처]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