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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미국의 원폭투하 없이도 일본은 항복했다




미국의 원폭투하 없이도 일본은 항복했다

 




<번역> 히로시마 신화 : 숨겨진 전쟁범죄와 거짓의 미군역사

 



 

필자: 게리 G. 콜스/번역: 정성희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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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03  13: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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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게리 G. 콜스 박사
번역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출처 : <글로벌리서치> 2013년 7월 31일자

 

 


오는 2013년 8월 6일 화요일은 히로시마 원폭 68주년이다.

그런데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이 10일이 지나 1945년 8월 15일

대일전승 기념일을 축하한 이후 모든 진실이 검열되고 신화화되어 왔다.

 

 

나의 지루하고 감동없는 역사 선생이 가르쳐준 한심한 수업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군대가 한 모든 것은 존경스럽고 자기희생적이었으며

그들의 적이 한 모든 것은 야만적으로 묘사한 애국적이고 검열된 교과서를 사용했다.

 

 

나의 졸업동기생 26명 모두는 전후 선전내용을 담은 역사교과서를 외웠다.

대일 전쟁의 영광스런 승리를 배웠던 것이다.

 

 

 물론,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시작으로 전쟁을 정당화하는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된

 거짓정보가 주입되고 과도한 애국주의 역사로 짜맞추어졌음을 지금은 알고 있다.

 

 

맥아더가 원폭투하지점에서 일어난 진실을 왜곡하는 총검열권을 갖고 있었다.

일본총독으로서 권한을 인계받은 이후 첫 번째 작업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피해를

 담은 모든 사진 증거를 압수하고 인멸하는 것이었다.

 

 

 맥아더, 원폭피해 증거 인멸

 

 

1995년 스미소니언 연구소는 원폭을 다루는 정직하고 정확한 전시회를 추진하면서

50년 가짜 애국신화를 수집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우익 재향군인들과 기타 애국 그룹

(연구소에 대한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뉴트 깅그리치의 공화당이 지배하는

 미 의회를 포함하여)으로부터 격렬한, 짜맞춘, 반동적 항의로 이야기의 중요 맥락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반갑지 않게 검열당했다.

 

 

그래서 지도층에 대한 평균적인 미국사람들의 신뢰를 흔드는

 ‘비애국적’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실제 역사를 대폭 변경하는 정치그룹의 또 다른 사례를

우리는 다시 갖게 되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수천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무고한 아프간인들을 대상으로 전쟁의 개를 풀어놓도록 만든(www.ae911truth.org 참조),

 2001년 9월 11일 3개 세계무역센터의

파괴장면을 검열하는 것이다.

  

▲ 폐허로 변한 나가사키. 맥아더 장군이 일본총독으로서 권한을

인계받은 이후 첫 번째 작업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피해를 담은 모든 사진 증거를 압수하고 인멸하는 것이었다.

[사진제공 - 소통과혁신연구소]

 

 

물론 스미소니언의 역사학자들이 자승자박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기업 지배 주요 언론과 이를 접하는 대중들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그 것은 다름 아니라 전쟁이 1945년 여름의 원폭투하 없이도 이미 봄에 끝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미 해병과 육군 수천명의 오키나와 대살육전이 없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후 선전캠페인의 기초가 되고 무방비의 시민들에 대한 원폭 사용을 정당화했으며

국제전범이요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한,

미국의 동남아 식민지 땅에 대한 일본의 침공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를 깊이 연구해보면,

 히로시마를 불태우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리기 수개월 전에

미국 정보기관은 일본이 명예롭게 항복하는 길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1980년대 발표된 정보 테이타는 미국의 대규모 침공 비상계획이 불필요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1945년 4월쯤 모스크바 대사를 통해 평화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이 수년전에 비밀코드를 차단하고 일본의 군사적 외교적 메시지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트루먼은 이런 사태 진전을 잘 알고 있었다.

 

 

1945년 7월 13일 외무장관 토고는 “무조건적인 항복(주권을 포기하고

 특히 천황을 폐위하는)이 평화의 유일한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트루먼과 그의 고문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일본의 신으로 여겨졌던 히로히토 천황을 전후 일본의 상징적 중심으로 양보하는

 외교적 방식을 통해 전쟁이 끝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합리적 조정안이, 루즈벨트와 처칠의 1943년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처음 제기되고 트루먼 처칠 스탈린의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재확인된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일본은 협상을 통한 명예로운 전쟁종식을 계속 찾았다.

 

 

전쟁기간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조차 이렇게 말했다.

 

 

 “진실된 물음은, 원폭 사용 없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더 빨리 항복시킬 수 있는 다른 외교적 군사적 방안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이다.

 

 

일본 내각의 다수도 1945년 봄에 이미 마지막 합의와 같은 조건을

실질적으로 수용하려고 준비했다.

” 다시말해 스팀슨 장관도 미국이 전쟁을 불필요하게 끌고간다고 느꼈던 것이다.

 

 

미국, 왜 일본 항복 받지 않고 핵폭탄 사용했나

 

 

일본이 항복한 이후 맥아더는 정신적 우두머리로서 천황을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굴욕적인 ‘무조건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 지도층을 설득하기 위한

적당한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막 뒤에 무엇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2개의 본질적 질문에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왜 미국은 천황을 유임시키는 일본의 항복 조건을 거부했는가..?

 

2) 왜 원폭이 태평양전쟁 승리가 이미 확정적이었을 때 사용되었는가..?

 

2차 세계대전 직후 군사전문가인 핸슨 볼드윈은 이렇게 썼다.

 

 

 “일본은 군사적 측면에서 1945년 7월 26일(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을 주장한)포츠담 선언에 의해 절망적인 전략상황에 놓여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군사수석보좌관, 윌리엄 리히 제독은 전쟁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의 야만적인 무기 사용은

우리의 대일 전쟁에서 물질적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게 나의 견해다.

효과적인 해상봉쇄와 기존무기를 통한 성공적인 폭격으로 

 일본은 벌써 패배했고 항복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암흑시대의 야만인들에게

 일반적인 윤리기준을 적용했었다는 게 나의 느낌이다.”

 

 

그리고 아이젠하워 장군은 원폭 투하 수주 전에

트루먼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방문하고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아이젠하워는 1963년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협상조차 해보려고 하지 않고 원폭을 사용하는...

민간인들을 죽이고 공포에 떨게하는

 그런 끔찍한 일은 이중 범죄이다”라고 말했다.

 

 

트루먼의 원폭 사용 결정에 기여한 몇 가지 요인이 있다.

 

 

1) 미국은 3개의 원자폭탄을 생산하는데 시간과 정신과 돈(1940년 기준으로 20억 달러)을 

  엄청나게 투자해왔으며 그 가속도를 중단할 용기와 성향이 없었다.

 

 

2) 미국 군부, 정계 지도층은 - 많은 일반 미국인들도 그랬지만 -

 진주만 공습으로 엄청난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미군이나 전쟁에 지친 대중들 속에 자비는 없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임무는 의문의 여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국가안보를 위해

살균하는 버전의 이벤트로 받아들여졌다.

 

 

3) 히로시마 폭탄의 핵분열 물질은 우라늄이었고 나가사키의 폭탄은 플루토늄이었다.

 

 

 과학적 호기심이 핵폭탄의 완성으로 떠미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맨하탄 프로젝트 과학자들(과 그 프로젝트 미군 담당, 레슬리 그로브 장군)은

 

 

 1개의 우라늄탄과 1개의 플루토늄탄을 사용했을 때 도시전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2가지 원폭 사용은 1945년 8월 이전에 결정되었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과학실험을 진전시키는 게 아니었다.

 물론 히로시마 원폭이 일본의 즉각적인 항복을 강요하도록 설계되었지만,

 2가지 원폭 투하의 3일 간격은 비정하게 짧았다.

 

 

일본의 통신 교통 능력이 난장판이어서 누구도, 미군조차도, 일본 지휘부도

극소수 이외에는 히로시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맨하튼 프로젝트는 태평양 전체 전쟁터의 총사령관, 맥아더조차 히로시마 원폭투하 5일전까지 몰랐을 정도로 매우 극비사항이었다)

 

 

4) 러시아는 유럽 전승일, 5월 8일 이후 90일만에 대일전쟁에 들어갈 것임을 선언했으며,

 히로시마 원폭투하 2일후에 실제 참전했다.

 

 

러시아는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나가사키가 불에 탈 때

만주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러시아에게 항복하거나 전리품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러시아는 곧 유일한 또 다른 초강대국-미래의 적국-이 되어 냉전의 첫 번째 핵위협

 ‘메시지’를 보냈다.

러시아는 기대했던 것 보다 실제 훨씬 적은 전리품을 받았다.

 

 그러나 두 초강대국은 감당하지 못할 핵무기 경쟁과

그래서 인류 멸종 가능성을 초래하는 냉전 교착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 결과는 상호 두 나라의 도덕적 재정적 파산이었으며

그 군사광기는 그 후 몇 세대에 걸쳐 이어졌다.

 

 

약 8만명의 민간인들과 2만명의 비무장 청년 징집병들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즉사했으며, 수십만명 이상이 화상, 방사선병, 백혈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남은 여생을 불치의 감염으로 고통받았다.

 

 

생존자의 자손 세대도 질병, 암, 조기 사망을 유발하는 무서운 방사선에 시달렸으며

 아직도 계속 고통받고 있다. 은폐되어온 또 다른 부끄러운 현실은,

 미군사령부가 알려준 존재들인데,

12명의 미 해군 조종사들이 운명의 날 히로시마 감옥에서 소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태평양전쟁 종식에 대한 전쟁부서의 공식적 승인 버전은 긴 목록의 신화들 속의

새로운 신화 배치였다. 그 수많은 신화들은 기업 군대 정치 언론의 지도층에 의해

끊임없이 공급되고 전쟁의 비참함이 과정상의 영광으로 탈바꿈했다.

 

 

북한, 이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레바논, 그라나다, 파나마, 필리핀, 칠레, 엘살바도르, 니콰라과, 과테말라, 온두라스, 아이티, 콜롬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아프간 등

미군의 침공과 점령에서 실제 일어났는데 숨겨진 다른 검열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목록이, 미군기지가 있는 150개국(뇌물 제공이나 제재 위협으로 허가를 얻는다)

 에서 자행되는 펜타곤과 CIA의 무수한 비밀작전과 암살 음모를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도 옳든 나쁘든 내 조국에 대한 불안한 애국심에

사로잡혀 있다.

 

 

 전쟁으로 폭리를 취하는 기업 엘리트들(그들의 정치인들, 군부 지도자들,

 그들을 헤드라인으로 다루는 언론을 포함하여)이 평화, 정의, 평등, 자유를 위해 일하고

 약탈자본주의로부터 세계 안전을 도모한다는 교활하게 조작된 신화를 필사적으로

 믿으려 한다.

 

 

미군이 죽고 다치는 필요한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폭군을 가끔 만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군 철수를 확신하는 “경건 공산주의자들”, 반미 “폭도들”, “자유전사들”의 그 것과

미국의 전쟁 합리화는 똑같지 않다.

 

 

부수적 피해 또는 오발사고라고 왜곡하여 표현하지만, 불가피하게 인간 대량 학살을

가져오는 전면전의 정치적 평가와 역사적 은폐에 있어

1945년 8월 6일과 9일은 깜짝 놀랄만한 2개의 뇌 세척 사례이다.

 

 

 미국의 전쟁범죄에 침묵하지 말라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인도주의-평화만들기 미국으로 개조되고 소생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납치하는 기업을 효과적으로 자제시키기에도 너무 늦었다.

 

 

우리의 세계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오만하고 탐욕적인 지배엘리트를 성공적으로

쓰러뜨리기에도 너무 늦었을지 모른다.

 

 

내가 '친절한 미국파시즘'이라 부르는 쿠데타 아닌 쿠데타가 벌써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전쟁상인들이 펜타곤과 무기업체, 의회 앞잡이의 도움으로

 세계 도처에서 일으키는 전쟁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양심있는 사람들이 역사의 모든

 진실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무수한 전쟁범죄에 대한 공부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거리로 나아가 대중적 항의를 전개하고 미국을 범죄불량국가로

전락시키는 사람들과의 협력을 용기있게 거절해야 한다.

 

 

그 범죄불량국가는 결국 독일 나찌와 일본 파시스트가 그랬듯이

우리 국경 밖 수십억명의 고통스런 희생자들에 의해 붕괴될 것이다.

 

 

우리의 특권, 과소비, 지속가능하지 않는 미국인의 삶 보다는,

전 인류를 위한, 변화를 위한 올바른 실천이 정말 영광, 진짜 애국

, 진정 평화로 가는 중요한 출발이다.


(수정,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