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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르완다 대학살



르완다 대학살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최악의 비극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 1994년에 발생했다.

아프리카 르완다가 그 비극의 장소다.

3개월 만에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에 1만 명, 한 시간에 400여 명, 1분에 7명 넘게 죽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사람이 죽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원자폭탄이나 화학무기 같은 대량 살상 무기,

 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엄청난 자연재해나 전염병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1994년 4월부터 7월 초까지 르완다에서 벌어진 죽음은 그런 장치와 관련이 없었다.

대신 많은 주검에 칼과 도끼의 흔적이 있었다.


나치는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이기 위해 6년 동안 가스실을 사용했으며, (600만명은 거짓말?)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100만여 명을 죽이는 데 4년이 걸렸다.


그런데 르완다에서는 어떻게 그 단기간에 그런 대량 살상이 가능했을까?


답은 살인자 역시 많았다는 것이다.

살인자들의 신분과 성별을 하나하나 파악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했다.

군인과 부랑자는 물론 평범한 시민, 심지어 의사와 종교인도 포함되었다.

그 많은 살인마들은 ‘집단적 증오’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그 증오는 그들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타인이 불러일으킨 것이었으며,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성경》에 근거한 인종 우생학

《구약 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대홍수가 끝난 뒤 노아는 셈, 함, 야벳 세 아들과 함께 새로운 땅에 정착한다.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었다.

함이 이 모습을 보고 두 형제에게 알리며 아버지를 놀렸으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옷으로 가려주었다.

술이 깬 노아는 함을 크게 나무라며 그의 자손들이 노예가 되리라는 저주를 퍼붓는다.


〈창세기〉 9장에는 함의 자손이 흑인이라는 근거가 없다.


그런 상상력을 발휘한 이들은

유대교, 기독교와 함께 《구약 성경》을 공유하는 이슬람 학자들이었다.

8세기에 작성된 문헌에 의하면 이들 학자는 “함은 백인이었지만

 신이 그 자손들의 피부색을 바꾸는 저주를 내렸다.”라고 기록했으며,

그들이 바다를 건너 에티오피아의 해안가에 정착했다고 설명했다.


오래전부터 흑인을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 정도로 취급하며

노예로 부려온 백인들도 이슬람 학자의 해석에 동의했다.

그리고 의학과 인종학이 발달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접목한 철학자 스펜서가 제창한 적자생존의 논리가 강조되면서

 흑인은 더욱 열등 인종이 되었다.


나일 강의 수원인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한 영국의 탐험가 존 해닝 스피크는 한발 더 나아갔다.

인류학자이기도 한 그는 중앙아프리카 일대를 탐사한 후 1863년에 흥미로운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일반적인 흑인의 외양과 달리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상대적으로 백인의 외모에 가까운 흑인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스피크는 ‘바로 이들이 셈족(백인)의 피가 절반 흐르는 함족의 직계 혈통’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같은 흑인이라도 다 같은 흑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가설은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할 필요도 없을 만큼 강력하고 신선했다.

실제로 에티오피아에 살고 있던 흑인들은 다른 지역의 흑인과 다른 모습이었다.


인종의 우성과 열성에 대한 가설은 르완다에서 더욱 빛났다.

르완다에는 크게 두 인종이 살고 있었는데,

 ‘투치족’은 ‘후투족’에 비해 인구가 4분의 1도 안되지만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투치족이 바로 스피크가 주목한, 백인의 피가 절반 흐르는 ‘다른 흑인’이라는 이 터무니없는 가설은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1994년 4월에 발생한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


제국주의가 뿌린 분열의 씨앗

르완다는 땅이 비옥하고 연중 강우량도 풍부해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농업이 발달했다.

 산도 많아 ‘1000개의 언덕을 가진 나라’

 또는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종족은 체구가 작은 피그미족의 일원인 트와족이었다.

그러나 10세기 중앙아프리카 카메룬에 시원을 둔 농경민족인 후투족이 트와족을 몰아냈고,

14세기에는 후투족이 투치족의 침입을 받았다.

투치족은 소말리아 반도에서 출현한 닐로트족의 일파로, 전쟁에 능한 목축민답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수인 후투족을 지배했다. 식민지 시대에 이들 투치족은 함족으로 분류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투치족 ‘칸야루안다’가 최초의 왕 ‘므와미’가 되었는데, ‘르완다’라는 이름은 그에게서 비롯했다.

 18세기까지 르완다는 므와미를 정점으로 하는 군주제 국가였고,

왕은 신의 위탁자이자 생명의 근원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투치족은 정치, 군사 등을 관할하는 지배계층이었고,

후투족은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귀족의 하인으로 일했다.

두 민족의 사회적 신분은 명확했으나 교류는 매우 자유로웠다.

‘반투어’를 공용으로 썼고 결혼도 자유로워 나중에는 외모상의 차이도 상당히 흐려졌다.


종국에는 가난한 투치족을 ‘후투’라고 부르거나

부자 후투족을 ‘투치’라고 부르는 일이 늘었고,

투치와 후투는 인종보다 계급의 명칭에 가까워졌다.


르완다 국민은 자신들의 왕국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신은 다른 나라에 잠시 들르기는 하지만 밤이면 어김없이 르완다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고 믿었다.

 초승달의 뾰족한 양 끝은 르완다를 향하고 있으며

이는 신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메시지라고 여겼다.


이러한 신화는 므와미의 절대 권력을 지탱하고, 르완다 국민의 일체감을 형성했다.

 그러나 절대 권력보다, 신보다 더 힘이 센 백인들이 출현함으로써 왕국의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


아프리카 대륙은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노예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 재조명을 받았다.

식민지 시대가 열림에 따라 유럽 각국은 앞다투어 아프리카를 향해 돛을 올렸다.


 1876년에 벨기에는 콩고 분지로 진출했고,

이미 콩고 해안의 일부 지역을 점령한 포르투갈과 충돌을 일으켰다.


포르투갈은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른 독일제국의 비스마르크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그 결과 1884년 11월 베를린에 유럽의 열강들이 모였다.

이들은 스피크, 리빙스턴, 스탠리 같은 탐험가들이 작성한 아프리카 지도를 펼쳐놓고

 자신들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그곳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이때 확정된 선이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으로 정해졌다.


1885년 독일이 탄자니아를 식민지화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르완다 왕이 갑자기 사망했다.

절대 권력자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르완다는 정치적 격변에 휩싸였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투치족 간에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독일이 침공하자, 투치 귀족들은 이에 대항하기보다는 흥정을 선택했다.

결국 독일은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왕을 세우고

1895년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 카이저 빌헬름의 깃발이 휘날리는 식민지 기구를 설립할 수 있었다.


독일은 투치와 후투의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그대로 수용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과거에는 왕이 두 부족 간의 차별을 통제했으나 이제는 관료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르게 되었다.

르완다의 새 주인이 그 작은 차이점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배하면서

 르완다의 독일 통치도 1918년에 종말을 고했고,

르완다의 주인은 이웃 국가 콩고를 다스리던 벨기에로 바뀌었다.


르완다의 초대 주교로 부임한 몽세뇌 레옹 폴 클라스는

투치족이 함의 자손이라는 스피크의 가설을 눈으로 확인하자 흥분에 휩싸였다.

그는 ‘백인의 피가 섞인’ 투치족이 지배계급을,

후투족이 소작인 계급을 형성하는 중세의 봉건제도를 르완다에서 재현하고자 했다.

클라스 주교는 로마 교황청 및 총독과 본국에 인종 격리 정책,

즉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벨기에 과학자도 클라스만큼 흥분했다.

그들은 저울과 줄자와 양각 측정기를 가지고

체중과 키, 인종학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는 코와 두개골의 크기를 재면서 두 인종의 차이점을 분석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투치족은 좀 더 귀족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일반적으로 후투족은 얼굴이 둥글고, 체구가 땅딸막하며,

피부가 좀 더 검고, 코가 낮으며, 입술이 두껍고, 턱이 각지다.


투치족은 얼굴이 길고, 체구가 호리호리하며, 피부가 그리 검지 않고, 입술이 얇고, 턱이 갸름하다.

 코의 크기를 보면 투치족은 코 중앙이 후투족에 비해 2.5밀리미터 더 길고 5밀리미터 더 가늘다.”


과학적 분석은 클라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효과를 발휘했다.


벨기에는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화하여 후투족의 공민권을 박탈하고

공장이나 기업의 관리자도 되지 못하게 했다.

 수백 년 동안 산지 단위로 편성되어온 행정 구조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침으로써

 그나마 남아 있던 각 지역의 후투 자치권마저 사라지게 했다.

 투치족은 후투족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후투족의 노동력을 착취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누가 후투족이고 누가 투치족인가?

수백 년 동안 혈연 교류로 외모상 차이가 없는 사람이 많았다.

코가 낮은 사람이 투치의 자식이고, 키 큰 사람의 아버지가 후투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인종 격리 정책을 공식화한 이상 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판단한 벨기에 총독은

 ‘인종 신분증’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식민지민의 신분증 소지를 의무화하고

신분증에는 투치, 후투, 트와 등을 표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했지만 인구조사원과 공무원에게는 과학자만큼의 ‘객관적’인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모호한 사람에게는 소를 10마리 이상 보유했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물론 그 이상은 투치, 밑으로는 후투였다.

그 결과 14퍼센트는 투치족, 85퍼센트는 후투족, 트와족이 1퍼센트로 정해졌다.



이 아이들 중 후투족과 투치족을 구별할 수 있는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인위적인 인종 구분과 차별은 훗날 최악의 대참사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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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증 의무화에 따라 모든 영역에서 인종차별이 분명해졌다.

행정과 정치 분야는 투치족이 완전 독점한 반면, 농민과 공장 노동자는 후투족으로 대체되었다.


신분 상승의 기회는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특히 강제 노역장은 증오의 온상이었다.

벨기에 통치자들은 투치족에게 명령했다.


“후투족에게 채찍질을 가하라.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맞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흉금 없이 지내던 이웃에게 맞는 채찍은 더욱 깊은 상처로 남았다.


원래 후투족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강제 노역에 자주 동원되면서 땅을 경작할 수 없었다.

비옥한 땅이 버젓이 있는데도 가족이 굶어 죽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하는 후투족 가장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차별 교육은 분열을 고착시켰다.

콩고와 마찬가지로 교육은 교회가 독점했는데,

클라스 주교의 지시에 따라 투치와 후투의 학교를 분리했다.


투치 학교에서는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면서 투치족이 우월하다고 주입하고,

 후투족을 통치하는 기술을 가르쳤다.

 교사는 두 학교 모두 투치족 출신이었다.

편향적 교육을 받은 투치족 젊은이들은 사회에 진출하여 후투족을 더욱 거세게 채찍질했다.


후투족 학교에서도 기본 교육은 실시했다.

 장차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최소한의 신앙이라도 가지려면

 후투족 어린이들도 글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클라스 주교의 생각에서였다.

차별이 심해질수록 후투족은 증오의 칼끝을 벨기에가 아닌 투치족을 향해 세웠다.

한순간에 뒤바뀐 지배 인종

영원할 것 같았던 아프리카 식민 통치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승자인 미국은 유럽의 제국주의 기득권을 용납하지 않았고,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에서도 민중의 자각과 함께 민족주의가 생겨났다.

식민지 지배는 급격히 해체되었는데,

전쟁에 직접적 영향을 받은 리비아, 이집트,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1950년대 초에 먼저 독립을 쟁취했다.


1960년에는 17개국이 한꺼번에 독립하여 ‘아프리카의 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46년, 르완다는 벨기에의 통제 아래 유엔의 신탁통치령으로 바뀌었다.

유엔은 선거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 후 독립을 승인한다는 원칙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그런데 벨기에는 예전과 달리 투치를 제쳐두고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과 독립국가 건설을 논의했다.

1957년에 후투족 지식인 아홉 명이 《후투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들은 다수가 다스리는, 즉 후투족이 지배하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을 주장했다.

 그리고 ‘함족 신화’를 역이용했다.

투치족이 외래 혈통이며 따라서 침입자라고 규정해버렸다.

투치족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첫 메시지였다.

벨기에가 인종 신분증의 철폐를 요청했으나 후투족 대표들은 이를 거절했다.

 과거에는 자신들을 옭아맨 족쇄였던 신분증이 이제는 기득권을 보장하는 증표였다.


인용문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뿌리는 벨기에 제국주의였다.

벨기에는 르완다를 지배하면서 주민등록증에 인종을 표시하도록 하고

 소수파인 투치족이 다수파인 후투족을 억압적으로 지배하게 했다.

 그런데 르완다가 독립하는 시점에서, 지배권을 후투족에게 넘겨버렸다.

다수인 피해자들의 복수극은 그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1959년 7월, 투치족의 마지막 왕이 부룬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투치족 사이에는 왕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사회적 분위기가 흉흉한 가운데 4개월 뒤에

 투치족 청년들의 집단 폭행으로 후투족 정치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 날, 이에 분개한 후투족 유랑민 무리가 투치족 관료들을 폭행하고 집을 불태웠다.


그동안 쌓였던 증오심이 드디어 폭발했고, 짧은 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약탈, 방화, 살인을 제재하는 공권력은 없었다.

르완다는 순식간에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었다.


《후투 선언》 지식인들은 오히려 “혁명이 시작되었다.”라며 이를 환영했다.

벨기에 사령관은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원칙에 집착하여 폭력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

 1959년 11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투치족 1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왕족을 포함한 20만 명이 우간다와 콩고로 피난했다.


한편 벨기에 사령관은 유엔의 통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지자체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당선자 90퍼센트가 후투족이었다.

 1960년 10월에는 《후투 선언》의 공동 저자인 그레구아르 카이반다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1961년 1월에 후투족 지도자들은 스스로 독립을 선언했고, 벨기에 사령관은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유엔은 “어느 한 종족이 독재를 야기해,

 하나의 압제 정권을 또 하나의 압제 정권으로 대체하는 데 그쳤다.”라며

“언젠가는 투치족을 상대로 폭력이 행사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의 압력으로 벨기에는 독립 인정을 철회했지만 선거 결과는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1961년 6월, 후투족 계열 정당들은 유엔 감시하에 실시된 총선거를 압도적인 승리로 장식했다.

이듬해 1월에 의회는 카이반다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그해 6월에 유엔은 르완다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했다.


이로써 1895년부터 시작된 67년의 식민 통치는 끝났다.

독립은 투치족이 던졌던 탄압의 부메랑이 선회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카이반다는 독재자라기보다는 교활한 지도자였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또는 정치적 위기를 피하기 위해 종종 투치족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독립 후 정권의 탄압이 노골화되자 투치족은

우간다, 부룬디, 탄자니아, 콩고 등으로 피난해 국경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부룬디에서 활약하는 게릴라 수백 명이 국경을 넘어

 르완다 안으로 30킬로미터를 진격했으나 벨기에 지휘관이 이끄는 부대에 격퇴당했다.


 카이반다는 독립 후에도 자신을 후원하는 벨기에군에게 계속 주둔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카이반다는 이 침입을 빌미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바퀴벌레를 죽여 숲을 깨끗이 청소하라!”라고 지시했다.

투치족 게릴라는 스스로를 ‘바퀴벌레’라고 칭했다.

바퀴벌레처럼 몰래 다니고 박멸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196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게릴라가 침입한 지역에 살인과 방화가 시작되었다.

 그곳 지역민이 게릴라들을 도왔다는 이유였다.

정부의 첫 번째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유네스코에서 파견된 한 교사는 ‘명백한 제노사이드’라고 《르몽드》에 기고하며

불과 5일 만에 투치족 1만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이 대대적인 ‘박멸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투치족 게릴라들은 기습할 때마다 본국의 동족들이 학살당하는 데 지쳐 무장 활동을 중단했고,

결국 1966년에 군대를 해체했다.


인기가 높아진 카이반다는 인종 격리 정책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했고,

투치족은 9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공무원, 교사, 군인 등 각 분야마다 투치족을 그 비율만큼 정확히 할당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투치족을 향한 폭행이 일상화되었는데,

1972년의 부룬디 사태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부룬디는 르완다와 같은 나라라고 할 정도로 언어와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비슷했다.


부룬디에서도 후투족과 투치족이 계속 갈등하다가,

 1962년에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후 격렬한 싸움 끝에 르완다와는 달리 투치족이 기득권을 유지했다.

 1972년에 브룬디 투치족은 후투의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후투족 10만~20만 명을 학살했고,

 이에 인종적 동질성을 느낀 르완다의 후투족은 투치족을 폭행했다.

1973년에만 르완다에서 투치족 난민이 10만 명 넘게 발생했다.


독재가 시작되다

카이반다는 후투족의 민족정신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 1973년 ‘국가안전위원회’를 발족하고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소장을 위원장에 임명했다.


군을 장악한 하비아리마나는 야심가였다.

유력한 후투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여 정치적 기반도 탄탄했다.

그는 위원장으로 임명되고 몇 개월 뒤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카이반다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실각했다.


하비아리마나는 정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투치족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듣고 투치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춤을 추며 새로운 권력자의 출현을 반겼다.


그러나 하비아리마나의 선언은 쿠데타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의식한 제스처에 불과했다.

오히려 인종 격리 정책은 더욱 정교해졌다.


9퍼센트의 할당 비율을 더욱 세밀하게 점검했고

국회에는 단 두 석만 투치족 출신에게 할애했다.


 후투족 군인과 공무원은 투치족과 결혼할 수 없게 했다.

하비아리마나가 독재자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이반다 잔당 세력을 완전하게 뿌리 뽑고 나서 1975년 ‘국가개발혁명운동’이라는 정당을 조직했다.


 그런 뒤 의회를 장악하고 모든 국민이 당원이 되게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정부의 허가 없이 거주지를 옮기는 것도 금지했고, 치 떨리는 강제 노역장도 부활시켰다.


그러나 밖에서 보기에 르완다의 정국 안정은 내전에 휩싸인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인상적이었다.

교회 출석률도 높았고, 범죄율도 매우 낮아졌으며, 의료와 교육 수준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근대화를 신봉하는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의 지원은 다른 나라를 압도했다.

경제 건설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고 좋은 조건으로 농산물을 공급했다.

 프랑스어 학교를 세우고 군사원조도 제공했다.

하비아리마나로서는 새로운 후원자를 얻은 셈이었다.

프랑스는 독재자의 전횡을 눈감았고 국제사회에서 그를 변호했다.


프랑스에 못지않은, 아니 더 강력한 하비아리마나의 후원자는 그의 부인 일가였다.

대통령은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영부인 아가테 칸지가의 집안은 쟁쟁했다.

쿠데타의 배후였던 그들은 요직을 차지하며 대통령의 정보원 노릇을 도맡았다.


 르완다에서 이들은 ‘아카주’라고 불렸다.

정권의 실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집’이란 뜻이지만 그만큼 결속력이 강했다.

 아카주는 종종 최고 권력자도 무시했다.

대통령이 수족처럼 아끼는 부하를 죽이고, 그 범인을 기소한 검사도 살해했다.


창창한 하비아리마나 정권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1986년에 르완다의 주요 수출품이던 커피와 차의 국제가격이 전례 없이 폭락했고,

 원조에 의존하는 취약한 경제구조로 인해 대량 실업에 직면했다.

가뭄까지 덮쳐 대규모 기근도 발생했다.

 파리의 호화 생활이 취미인 아가테의 낭비는 국고 탕진에 가속도를 붙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사건도 하비아리마나에게는 악재였다.

냉전 체제가 붕괴한 후 원조국들은 르완다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1990년 6월, 하비아리마나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권고에 따라 다수당 체제의 도입을 언급했다.

르완다에도 정치적 해빙기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야당 성향의 후투족 정치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비아리마나는 개혁 조치를 계속 미루었다.

무엇보다 아카주들이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인 및 지식인 들에게 테러를 가했고,

이에 겁먹은 많은 후투족 정치인이 대거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투치족들도 정국이 불안에 휩싸이자 짐을 쌌고,

우간다에 머물고 있던 투치족 난민들은 고국의 사태를 예의 주시했다.


바퀴벌레 박멸을 위한 십계명

1990년, 아카주의 핵심 인사들은 정부에 비판적인 잡지 《캉구카》에 맞설 《캉구라》를 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캉구라》 창간의 숨은 목적은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 아카주의 기득권 유지였다.

그래서 하비아리마나의 개혁 조치를 적당히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아가테가 임명한 편집국장 은게제는 《캉구라》 초판에서

 하비아리마나를 과도하게 비판해 아카주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통령 경호부대는 은게제와 《캉구라》의 발행인을 체포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국제사면위원회를 비롯한 서구 인권 단체들이 언론인의 석방을 촉구한 것이다.

졸지에 은게제는 언론의 수호자라는 영예를 얻었다.

감옥 생활 3개월 동안 은게제는 아카주의 본뜻을 알았다.

이후 석방된 은게제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0년 10월 1일에 ‘르완다 애국전선’이 전격 침공한 것이다.


당시 우간다, 부룬디, 콩고에 피신한 투치족 난민은 100만 명이 넘었다.

그중 최대의 난민촌이 형성돼 있던 우간다는 당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투치족 난민들은 우간다의 야권 지도자 무세베니의 ‘국민저항운동’에 참여해 내전에 깊이 관여했다.


오랜 전쟁 끝에 1986년 국민저항군이 승리하자,

 무세베니는 투치족 난민들에게 임시 국적을 부여했고,

지도자였던 폴 카가메는 정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우간다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한 투치족 지도자들은 각국에 흩어진 동족들을 규합해 1990년에

‘르완다 애국전선’을 결성했고, 폴 카가메는 최고 사령관에 올랐다.



1990년에 결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의 최고 사령관 폴 카가메

몇 년 뒤 그는 지옥의 수렁에 빠진 르완다를 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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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아리마나가 독재를 멈추지 않고,

투치족뿐만 아니라 후투족 지도자들의 망명도 속출하자 애국전선은 결단을 내렸다.

 1990년 10월 1일, 애국전선은 하비아리마나 독재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병사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했고, 폴 카가메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였다.

 이들은 키갈리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고 하비아리마나 정부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개입하면서, 금방 끝날 것 같던 내전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애국전선이 침공하자 은게제는 양심적 언론인과 어용 언론인이라는 상반된 신분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캉구라》 10월호는 후투족을 노예로 만들려는 애국전선의 문건과,

투치족에게 은밀히 협력하는 후투족 정치인의 명단을 특종인 양 폭로했다.


사실 애국전선이 강조한 것은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고,

 명단에 오른 이들은 정권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었다.

명백히 의도된 오보였으나 르완다 국민은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분노했다.

은게제는 1990년 12월에 “후투 십계명”을 발표하여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투치족 여성과 결혼하거나 투치족을 첩, 또는 비서로 둔 후투족 남성은 배신자이며(제1조),

후투족 딸들이 고귀하고 성실하며(제2조),

투치족은 패권만을 추구하는 데다(제4조),

르완다 군은 후투족으로만 구성해야 한다(제7조)는 등

후투족 이데올로기로 채워진 “후투 십계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중 가장 많이 인용된 것은 제8조 “후투족은 투치족에 대한 일체의 동정심을 끊어야 한다.”였다.

국영 라디오 방송도 “후투 십계명”을 선전하며 투치족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르완다 정부군은 프랑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병력을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1990년 10월에 9000명이었던 군인이 1년 만에 2만 8000명으로 불어났고,

각 병영에는 프랑스 교관이 배치되었다.

 덕분에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하비아리마나는

‘내부의 적’을 색출하는 데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후투족 출신의 지방 공무원 수백 명이 투옥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투치족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 1991년 6월, 하비아리마나가 국제 여론을 의식해 다당제를 채택한다고 발표하자

곧바로 12개 정당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 대다수는 아카주가 세운 허수아비 정당들이었다.


나중에 살인 집단으로 변신하는 ‘인테라함웨’라는 민병대도 이즈음 출현했다.

아카주에 속한 바고소라 대령이 은밀히 조직한 이 민병대는 1991년 말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함께 공격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인테라함웨는

경제 불황에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헤매는 청년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아카주는 술과 음식을 제공하면서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후투 십계명”으로 무장한 인테라함웨의 목표는 ‘바퀴벌레 박멸’로,

 제일 먼저 한 일은 투치족과의 공존과 민주화를 주장하는 후투족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인테라함웨는 1992년 3월 ‘실전’에 나섰다.

라디오 국영방송은 수도 키갈리의 남동쪽에 있는 부게세라에서

후투족을 학살하려는 투치족의 계획을 포착했다고 보도했다.

 이 역시 의도된 오보였다

. 방송 다음 날부터 사흘 동안 인테라함웨는 부게세라에서 투치족 300명을 살해했다.

이 학살에 대해 서방국가들은 우려를 표시하는 선에서 그쳤고 프랑스는 침묵했다.

하비아리마나는 몇몇 책임자를 체포했으나 ‘정당방위’ 및 ‘군중의 우발적 분노’였다며 모두 석방했다.


그러나 1993년 8월, 하비아리마나는 애국전선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했다.

국제 원조 단체가 휴전하지 않으면 지원을 중지하겠다고 압박했고,

 프랑스로서도 깨진 독에 계속 물을 부을 수 없었다.

협정 내용을 22개월 내에 야당과 애국전선을 포함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애국전선 일부 부대와 유엔 평화유지군 1300명이 르완다에 주둔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아카주 및 군부에겐 청천벽력이었다.

군부의 핵심인 대통령 경호부대를 폐지하고, 이들을 포함해 총 1만 6000명이 군복을 벗어야 했다.

공중분해의 위기에 처한 인테라함웨는 더욱 분노했다.

아카주는 하비아리마나가 우유부단하다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평화협정은 하비아리마나에게 독배가 되었다.


20세기 최악의 인종 대학살

아카주는 1993년 초에 ‘후투 파워’를 결성했다.

르완다를 영구 집권하기 위한 전위 조직이었다.

 후투 파워는 아카주의 핵심 세력에서 시작해 티 안 나게 조금씩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추장, 정치인, 고급 장교, 언론인, 인테라함웨의 지도자 들이 주요 멤버였다.

 후투 파워는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국제사회를 비난하면서 대통령이 이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며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르완다에 사는 투치족 전체를 말살하는 인종 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협정 체결 후에는 대통령을 변절자라고 부르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그리고 《캉구라》보다 파급력이 높은 라디오 방송국 RTLM을 창립했다.

방송에서는 하루 종일 투치족에 대한 증오 섞인 이야기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후투족이 싫어요.”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후투 파워의 성명과 주장이 정권의 그것보다 더 권위를 가졌다.

짧은 기간에 후투 파워는 르완다를 장악했다.


후투 파워는 각 지역마다 몰래 창고를 마련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몰래 수류탄, AK 소총, 총탄을 그곳에 비축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정글을 헤치거나 열매를 딸 때 쓰는 칼 ‘마체테’가 58만 개 이상 수입되었다.

마체테의 종착지는 시골이 아닌 창고였다.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관은 인종 대학살의 구체적 증거를 급히 알렸지만 유엔은 병력 증강을 결정하지 못했다.

 1993년에 소말리아에서 평화유지군이 겪은 치욕스러운 패배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화협정에 의하면 1994년 2월까지 임시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국제사회,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은 하비아리마나를 강하게 비난했다.

 유럽연합처럼 아프리카 경제공동체를 설립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인종 격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취임이 확실해졌다.


반면에 르완다에서는 대통령을 향한 후투 파워의 비난이 수위를 넘고 있었다.

 《캉구라》는 “하비아리마나는 바퀴벌레들에게 매수된 후투족에게 살해당할 것”이라고까지 경고했다.


1994년 4월 6일, 하비아리마나의 전용기가 탄자니아 공항에서 이륙했다.

 비행기에는 부룬디 대통령과 각료 몇 사람도 동승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대통령은 평화협정 이행을 논의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 8시 15분경, 비행기가 키갈리 공항에 접근하면서 착륙을 시도했다.

그때 인근 야산에서 발사된 미사일 두 발에 비행기는 대통령궁 공터에 추락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누군가에 의한 암살이었다.


RTLM이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방송은 대통령이 피살된 지 한 시간 만에 바고소라 대령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의장직을 맡았다는 사실은 은폐했다.


온건파 수상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그에게 통치의 기회는 없었다

. 4월 7일 새벽, 바고소라 대령은 대통령 암살이 르완다 애국전선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그 발표 몇 시간 전, 누군가가 마체테가 가득 담긴 창고 문의 봉인을 해제하고 있었다.

마침내 대학살의 문이 열린 것이다.


키갈리 곳곳에서 인테라함웨 소속 청년들이 총과 칼을 들고 무리 지어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들은 대통령을 암살한 투치족에게 복수하자고 외쳤다

. 투치족 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총을 쏘고 마체테를 내리꽂았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도시 각처에서 살육이 진행되었다.

 대통령 경호부대는 주로 ‘배신자 후투’를 향해 총을 쏘았다.

죽는 자의 비명과 죽인 자의 환호가 4월 7일 키갈리의 밤하늘에 퍼져나갔다.

이튿날 해가 밝자 이미 거리에는 셀 수 없을 만큼 시체가 쌓여 있었다.


RTML은 축구 경기를 중계하듯 이 소식을 전했다.

 “바퀴벌레들아, 이제 너희에게도 살과 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살육의 광란은 전국에 빠르게 퍼졌다.


 인테라함웨가 앞장서고 평범한 후투족들이 뒤를 따랐다.

 마체테가 없는 사람들은 도끼와 낫을 들었다.

 이웃과 동료가,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환자를, 학교에서는 선생이 제자를 살해했다.

여성과 어린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인을 고무하기 위해 약탈한 재산을 ‘전리품’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강간도 보장해주었다.

투치족의 머리당 30센트를 준다는 소문도 퍼졌다.


1994년 4월 초는 부활절 주간이었다.

 성직자들은 투치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교회로 불렀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으로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사이, 교회 문이 밖에서 닫혔다.


이어 군인들과 인테라함웨 대원들은 교회 안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자동소총을 발사했다.

도망가는 길목에는 마체테, 도끼, 낫을 든 후투족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모든 교회에 예외가 없었다.

4월 15일 키갈리 인근의 한 개신교 교회에서는 반나절 만에 신자 7000여 명이 살해되었다.

같은 시각, 인근 성당에 모인 피난민 5000명 전원이 불도저에 압사당했다.


인용문


“엘리자판 타키루티마나 목사님, 저희 가족은 내일 살해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중재에 나서서 시장님과 이야기해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이 예정된 저희를 인도하실 은덕을 목사님께 베푸셨으니

, 유대인을 구한 에스더가 그러했듯이 목사님의 중재는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느 투치족 목사의 편지)

“나는 당신들을 도울 방도가 없다. 최후의 순간이 되었으니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죽음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타키루티마나 후투족 목사의 답신) 

               

르완다 대학살 전범 재판 증언에서

수천 명이 떼죽음을 당한 교회

1994년의 참혹했던 흔적들.

ⓒ flickr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르완다 시골에서는 비명이 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모이는 전통이 있다.

자주 출현하는 야생동물로부터 서로를 지키기 위한 사회적 규범이었다.

 그러나 1994년 4월 이후 이 아름다운 전통은 죽음의 사이렌이 되었다.

 한 여성이 마을 사람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여성을 구하기 위해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갔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총과 마체테로 무장한 ‘인간 야수’들이었다.


새로운 재미를 위해 여성과 어린이를 강물에 뛰어들게 하는 ‘자비’를 베풀기도 했다.

강물을 헤쳐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르완다 강의 종착지인 빅토리아 호수에는 시신 수만 구가 떠올랐는데,

 상처 없는 익사체가 부지기수였다.


술과 약물에 취한 부랑자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녀 후투족마저 이들을 피해야 했다.

르완다에 주둔한 애국전선 부대는 벌떼처럼 몰려드는 살인자들을 물리쳤는데,

국영방송 및 RTLM은 이마저 투치족의 만행이라고 역선전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중과부적으로 대사관을 보호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총리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간 벨기에인으로 구성된 유엔 부대원 10명이 잔인하게 살해되기까지 했다.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학살을 멈추기 위한 추가 군대 파견을 논의했으나 일부 국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평화유지군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RTLM의 보도는

 살인자들을 더욱 기세등등하게 했고, 투치족들에게는 마지막 희망마저 꺾이게 만들었다.



벨기에인 유엔군 10명이 살해되었던 건물

1994년의 참혹했던 흔적들.

ⓒ flickr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의 카니발은 100일 동안 르완다 전국에서 열렸다.

시체가 쌓여 처치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RTLM은 처음에 희생자를 집계하며 자랑했으나,

 그럴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살인은 일상화되었다.


너부러진 시체의 부드러운 부위만 먹는 개들을 몰아내는 사람은 없었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강물은 오염되었다.

시체를 먹기 위해 독수리와 까마귀 들이 하늘을 맴돌았는데,

 그 광경은 살아남은 투치족들에게는 그곳에 가지 말라는 신호가 되어주었다.


들판에 쌓인 시신들

1994년의 참혹했던 흔적들.

ⓒ Rose Reynolds/wikipedia | public domain


대통령 경호부대, 인테라함웨, 갑자기 생겨난 후투족 자경단, 부랑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후투족들이 이 살인 대열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수많은 후투족이 살인의 주범, 또는 공범이 되었다.


그 결과 단 100일 만에 80만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중 10만 명이 ‘배신한 후투족’이고 나머지는 투치족이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트와족은 비록 희생자 수는 적었지만 씨가 마를 정도였다.


또한 여성 20만 명이 이 기간에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이전까지 6년 동안 600만 명을 죽인 나치와 4년 동안 100만 명을 죽인 크메르 루주 정권의 학살이

 20세기 최대의 참상이었으나, 20세기가 저무는 시점에 르완다 후투족은 이 기록들을 갈아치웠다.


비이성을 바로잡는 것은 결국 이성이다

애국전선은 살육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경우 르완다로 진격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후투 파워와 후투족 국민 대다수는 전쟁 불사를 외쳤다.

결국 1994년 7월 4일, 폴 카가메의 총출동 명령을 받은 애국전선의 전 병력이 우간다에서 국경을 넘었다.


르완다 정부군은 애국전선의 진격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우군이던 프랑스도 더 이상 지원할 명분은 없었다.

 후투 파워는 방송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며 후투족 국민을 안심시켰지만,

며칠 만에 수도 키갈리는 함락되었다.


키갈리를 포위한 애국전선을 목격한 후투족들은 사색이 되었다.

애국전선은 일방적으로 승리했고, 그 결과 후투족 난민이 100만 명 넘게 발생했다.


르완다 국민 3분의 1에 이르는 20세기 최대의 대규모 탈출이었다.

난민 대열에 낀 인테라함웨 소속 대원들은

투치족이 우간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콩고에서 난민촌을 병영화했다.


대학살 당시 콩고민주공화국의 고마 지역에 설치된 르완다인 난민촌

ⓒ Marv Krause/wikipedia | public domain

르완다인 난민촌에 식수를 지원한 유럽 다국적군

ⓒ UN multimedia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94년 7월 말, 애국전선은 내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폴 카가메는 후투족에 대한 복수는 없다고 누차 강조했다.

이어 후투족 출신을 대통령으로 하는 신정권을 발족시키고 자신은 부통령 겸 국방장관에 올랐다.

새 정부는 후투족과 투치족 출신을 균등하게 각료로 임용하고, 곧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집단 종족 학살의 죄, 반인류 범죄 및 전쟁범죄는 공소시효를 갖지 아니한다(제13조).”

“르완다 국민은 르완다에서 추방되지 아니한다(제24조).”

“혈통, 인종, 종족, 씨족, 지역, 성별, 종교

 또는 기타 차별을 야기할 수 있는 구분에 근거하는 정치조직은 허용되지 않는다(제54조).

” 그리고 새 정부는 키갈리에 학살 기념관을 건립해

더 이상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폴 카가메의 평화 정책이 일관성 있게 지속되자

국경을 넘었던 후투족 난민들이 이듬해부터 다시 르완다로 돌아왔다

. 정부는 학살 관련자를 처리하기 위해 르완다 전통 사법제도인 ‘가차차’를 활용했다.


 가차차는 ‘마을 주민들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모이는 풀밭’이라는 뜻으로

, 2001년에 전국 1만 2100개 마을에 가차차가 설치되었다.

 살해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대체로 낮은 징역형이나 공익형 노역을 선고했다


. 피해자의 집에서 일하거나, 소 같은 개인 재산을 제공하는 방법도 동원했다.

하지만 학살 주동자임에도 이를 부인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가차차는 10만 명을 법정에 세워,

이 가운데 65퍼센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2012년 6월에 막을 내렸다.


2003년 8월 25일 대통령 선거에서 폴 카가메는 약 95퍼센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뿐이다.

 그런 다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93퍼센트의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만 3세 때 우간다로 피신해 난민촌에서 자란 폴 카가메는

 ‘르완다를 지옥에서 건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1994년 11월, 탄자니아에 유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설치되었다.


1997년 1월에 첫 번째 재판이 열렸는데,

르완다 총리였던 장 캄반다는 1998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바고소라 대령은 1996년 카메룬에서 체포되어

 2008년에 학살을 주도한 다른 군인들과 함께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은게제는 2003년에 35년 형을, RTLM의 설립자인 나이마나와

 이사 바라야그위자는 각각 30년과 32년 형을 선고받았다.

아가테는 1998년에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으나 국제체포영장이 발부되어 2010년에 체포되었고

2015년 현재까지 재판 중인데, 자신은 학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대다수의 지식인은 르완다 인종 학살의 궁극적인 책임은 증오를 부추긴 벨기에와

 학살을 묵인한 프랑스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들 두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투치족과 후투족의 차별은 르완다 왕국 초기부터 존재했다.

그렇지만 두 인종 간에 증오의 싹이 튼 것은 이방인에 의해서였다.


 효율적인 식민지 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어처구니없는 인종차별 때문에

르완다는 도마 위 생선처럼 반 토막이 났다.

 투치와 후투는 자신들이 왜 링에 올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는지 의문을 품지 못하고,

 오로지 상대방에게 칼날을 세웠을 뿐이다.

분쟁을 사주한 타인을 보지 못한 점이 르완다 비극의 본질이다.


평범한 개인이 집단의 일원임을 확고하게 인식하면 소속 집단의 사고와 행동에 지배를 받기 십상이다.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집단’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비이성적 기간은 대개 짧기 마련인데,

르완다에서처럼 오래 지속된 이유는

아카주 같은 기득권이 폭력과 분노를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했기 때문이다.


 집단적인 인종적 편견도 알고 보면 기득권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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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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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완다 : 천 개의 언덕을 가진 나라』, 한국국제협력단 WFK모집교육팀 엮음,
  •  한국국제협력단 WFK모집교육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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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지음, 이순희 옮김, 휴머니스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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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통아프리카사 : 우리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진짜 역사』, 김시혁 지음, 다산에듀, 2010 
  • 『한눈에 보는 세계 분쟁 지도』, 마스다 다카유키 지음, 이상술 옮김, 해나무, 2004
  • 「아프리카 난민 발생요인과 해결방안에 관한 연구 :
  • 르완다 사태를 중심으로」, 김희자 지음, 한국외국어대학교, 1997
  • 「아프리카 인종분쟁과 국제적 개입의 효과 : 수단, 소말리아, 르완다를 중심으로」, 장찬영 지음,
  •  한양대학교, 2012

정찬일 집필자 소개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기자, 광고 카피라이터, 홍보 등 줄곧 글 쓰는 업무에 종사했다.

출처

비이성의 세계사
비이성의 세계사 | 저자정찬일 | cp명양철북 도서 소개

사회가 위태로울 때 마녀사냥은 시작된다. 집단 광기에 휩쓸린 보통 사람들 이야기다수가

 근거 없이 한 개인이나 집단을 공격하는 비이성적 현상, 즉 ‘마녀사냥’은 세계사..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