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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외교

[르포-탈북자를 만나다②] 서민 살기는 북한이 더 좋다고?



[르포-탈북자를 만나다②] 서민 살기는 북한이 더 좋다고?

nk투데이 문경환 기자
기사입력: 2015/03/01 [10: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내 탈북자가 27000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여건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어느덧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한국 내 북한 사람들.

이들 탈북자의 생활과 고민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들은 정부의 감시 아래 있어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탈북자들의 실명과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남과 북을 모두 살아본 이들은 남북의 차이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북한에서는 경찰한테 막 대들고 싸워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경찰한테 그러면 바로 체포되더라고요.”

 

“고난의 행군 시절에 먹고 살 길이 없어 밀주를 팔았어요.


경찰한테 걸려서 다 빼앗겼어요.

그래서 대판 싸웠지.

술통을 엎어서 땅에 다 쏟아버리고

당에 찾아가 신소하겠다고 막 소리 지르니까 술통은 돌려줍디다.”

 

뭐든 당에 찾아가 신소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다.

그런데 당에 찾아가기가 쉽지는 않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려면 지구를 6바퀴나 돌고 말을 해.

난 처음에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더라고.

 북한에서는 그렇게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일이 없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막 하지.

나 너 싫어, 저리가,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

그래도 아무 문제 없어.


그런데 여기서는 그러면 사람들이 상처받더라고.”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한 탈북자의 글이 떠올랐다.

 자기 오빠가 직장에 들어가면 석 달을 못 버티고 계속 해고당한다는 거다.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북한에서 하던 습관대로 직장 상사에게 수시로 쓴소리를 했단다.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한국은 언론의 자유가 있잖아. 말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대통령 욕해도 되잖아. 북한에서는 꿈도 못 꾸지.”


“북한에서는 지도자하고 당에 대해서만 입조심하면 돼요.

다른 건 다 말해도 되는데 지도자에 대해서는 절대 안 돼요.”

 

한국 언론의 문제점이나 카카오톡, 이메일 검열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니

그런 이야기는 다들 처음 듣는 눈치다.

 

“서민 살기가 남이나 북이나 힘들지만, 사실 북한이 더 좋아.”

 

“백 배는 좋지. 일단 거기서는 서민들이 스트레스는 안 받아.”

 

“난 다르게 생각해요.

아니 북한이 좋으면 북한 가서 살라고.

왜 한국에서 살면서 북한이 더 좋다는 얘길 해?”

 

위험한 이야기도 막 나온다.

한국에 살면서 북한이 더 좋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혹시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됐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 같지.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우리도 방송 나가면 할 말이 많아요.

그래도 함부로 얼굴 내밀지는 않아요.

똑똑한 사람일수록 그래요.


여기서 방송 나가고 이름 알려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어떡합니까?


자기만 잘 살면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난 이만갑 같은 데 나가서 없는 얘기 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요.

 북한에 있는 가족 친지들 걱정은 안 하나?”

 

“가족 친척 다 탈북했으니까 그러겠지.”

 

탈북한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이 고초를 겪는 것일까?

 

“난 지금 북한에서 행방불명자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내가 한국 방송에 나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보위부에서 가족들 찾아가서 어떻게 된거냐 귀찮게 물어보겠지.”

 

수용소에 끌려간다거나 그런 얘기는 없다.

 

이야기는 대북전단으로 이어졌다.

 

“아니, 그 사람들이 뭔데 탈북자를 대표한다는 거야?

우리한테 삐라 뿌려도 되냐고 물어본 적 있어?”

 

“거 괜히 쓸데없는 일 해서 우리만 피해를 본다니까. 그것 좀 안 했으면 좋겠어.”

 

“삐라 날려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야산에 떨어지는데 초등학생들 데려다가 손으로 만지면 손이 썩는다고 집게로 다 줍게 해서

 한꺼번에 모아서 태워버려요.”

 

“북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그런 것 보고 생각 절대 안 바뀌어요. 얼마나 철저히 교육을 받는데.”

 

북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북한 정부와 언론에서 하는 말을 다 믿고 사는 걸까?

 

“저번에 장성택 총살당했을 때 북한에 있는 동생한테 요즘 거기 정세 어떠냐 물어보니까

조국을 팔아먹은 배신자 잘 죽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은 생각이 쉽게 안 바뀌죠.”

 

신은미, 황선 통일토크콘서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니 <심장에 남는 사람> 부른 게 뭐가 문제야?

 그건 정치적인 노래도 아니잖아.”

 

“내가 신은미 씨 글 인터넷에서 다 읽어봤는데 틀린 얘기 하나도 없었어요.

 자기가 본 그대로, 있는 그대로 썼더라고요.”

 

논란이 됐던 세쌍둥이 얘기를 물어봤다.

세쌍둥이를 낳으면 헬리콥터가 뜬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하니까 모두들 맞다고 한다.

 

“에이, 그래도 몇 명 그런 사례가 있는 거지

모든 세쌍둥이 임산부를 다 헬리콥터로 나르진 않겠죠.”

 

말을 잘못 꺼냈다.

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무슨 소리야? 진짜로 전부 직승기(헬리콥터)로 실어 나른다니까?”

 

“우리 동네에도 세쌍둥이를 낳을 때가 되니까 직승기가 왔는데

날씨가 안 좋아서 회령에 들러 잠시 쉬었다가 평양으로 날아가더라고.”

 

“내 친척은 쌍둥이였는데 세쌍둥이인줄 알고 직승기 타고 평양까지 날아갔잖아.

그래도 선물 받을 건 다 받았더라고.”

 

“세쌍둥이 가운데 한 명은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선물을 많이 줘요.

은장도, 금가락지, 학교 갈 때까지 입을 옷이랑 이것저것 많이 줘요.”

 

지난 2월 21일 연합뉴스는 <“삼둥이는 당에서 책임집니다”…북한 출산장려책>이라는 기사를 통해

 “북한에서 세 쌍둥이(삼둥이)는 4살까지 육아비용을 국가가 부담하고

10번째 아이를 출산한 여성은 <모성 영웅>으로 추대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세쌍둥이 논란은 이제 끝낼 때도 됐다 싶다. (계속)



[르포-탈북자를 만나다③]이들에게 우리나라는 어디일까
nk투데이 문경환 기자
기사입력: 2015/03/01 [10:25]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한국 내 탈북자가 27000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여건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어느덧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한국 내 북한 사람들.

 이들 탈북자의 생활과 고민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들은 정부의 감시 아래 있어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탈북자들의 실명과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이들은 대다수 <고난의 행군> 시기, 그러니까 1994년부터 2000년 사이에 탈북했다.

중국에서 십여 년 정도 체류하다 불법체류자 단속을 피해 한국에 들어온 이들이 많았다. 

 

“조선족들 동네에서 살았는데 중국 경찰들도 그렇게 집요하게 잡아들이거나 하지는 않아요.

 한번씩 단속이 뜨는데 조선족들이 찾아와서 단속 떴으니 피하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별 일 없어요.

동네에서 인심을 잃은 사람들이 잡혀서 북한으로 송환되는 거지.”

 

이들 가운데는 흥미롭게도 해외 파견 근로자도 있었다.

러시아 벌목공으로 3년 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90년대 후반 언론에서 러시아 벌목공으로 일한 북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몇 차례 다뤘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 탈북자의 말은 전혀 달랐다. 

 

“벌목공이라고 해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 다 기계로 하는데 뭐.

북한에서는 해외에 돈 벌기 위해 나가는 걸 다들 부러워해.

 나갔다가 기간 채우고 북한에 돌아갔다가도 또 나가고 싶어서 안달일 정도야.

 한번 나가서 번 돈이면 북한에서 꽤 잘 살 수 있는 수준이지.”

 

최근 일부 언론에서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월급을

북한 정부가 모두 가져간다고 보도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니, 한국에서도 사장이 외부로 직원들 파견 보내면 벌어온 돈 일부를 가져가잖아. 똑같은 거지.


 당연히 수입의 일부는 정부에서 가져가지만 월급을 전부 가져간다고?

 그러면 뭣 때문에 다들 해외 파견 나가려고 안달이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탈북자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까? 

 

“남자들은 일용직 많이 뛰지. 일요일도 없어.

 오늘 오랜만에 작업이 없어서 나올 수 있었네.”

 

“저는 애들 봐주는 돌보미 서비스 일을 해요.

애들이 저 없으면 난리가 나요.”

 

탈북자들은 보통 한 동네에 모여 산다고 한다.

임대아파트 단지에 많게는 2천 명씩도 산다.

그래도 한 자리에 자주 모이지는 못한다고 한다. 

 

“탈북자들 위한 양로원 같은 게 있으면 자주 볼 수 있어서 좋겠어요.”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도 있는데 우리를 위해서 한 게 뭐가 있어?”

 

“난 이만갑 폐지하겠다고 공약 내 논 사람 있으면 찍어 줄 꺼야.”

 

“아예 자네가 출마하지 그래. 말도 잘 하는구먼. 허허.”

 

북한에는 토론문화가 발달했다더니 다들 언변이 대단하긴 하다.

말을 한 번 시작하면 방언 터지듯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조금 민감하지만 정치 얘기를 꺼냈다.

혹시 지지하는 정당이 있을까? 역시 조심스러운 답변이 나온다.

 

“그런 거 없어. 잘 몰라.”

 

“난 박근혜 찍었어. 여자가 대통령 한 번 해봐야지.”

 

“난 안 찍었어. 통일을 해야 할 거 아냐.

통일정책은 민주당이 더 낫더라고.”

 

“그래봐야 통일이 되겠어? 언제 통일이 되겠어?”

 

“그래도 통일은 해야지. 그래야 가족들 만날 거 아냐.”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지면서 몇 사람이 이제 그만 들어가야겠다고 한다.

술자리를 정리할 때가 됐다.

술자리를 끝내면서 문득 한국의 평범한 아주머니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2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한 시간만 부르고 가잔다.

 

“<심장에 남는 사람> 한 번 부르고 가야지!”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다들 노래방에 들어간다.

탈북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 나누고 놀 기회가 많지 않다고 한다.

어렵게 모였으니 신나게 놀아보자는 분위기다.

 

“자, 북한 대 한국 노래대결을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한국 대표로 노래를 불러야 할 처지가 됐다.

 다행히 노래방 기계가 고장이 났는지 100점이 나왔다.

그런데 탈북자들이 다들 가수 출신인지 노래를 빼어나게 잘 부른다.

 게다가 최신 유행가요도 많이 알고 있다. 

 

탈북자 입에서 <북한 대 한국>이란 표현이 자연스레 나온다.

 지난해 아시안게임 북한팀 시합 구경 간 후배 얘기가 떠올랐다.


자기 뒤에서 “우리나라 이겨라”라는 응원소리를 듣고 북한 선수단이 있는 줄 알고 뒤돌아봤더니

 탈북자로 추정되는 가족이 있었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가 북한을 두고 <우리나라>라고 부르더란다.


 탈북자에게우리나라는한국일까북한일까?

 

한 시간만 부른다더니 누군가 한 시간을 추가했다.

모두가 앞에 나와 춤을 추면서 신나게 논다.

마지막 곡은 예정대로 바이브의 <심장에 남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함께 불렀다.

노래가 모두 끝나고 아쉬움 속에 헤어졌다.

 다시 연락하고 만나자는 약속만 남긴 채.

 

문경환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르포-탈북자를 만나다④] “아오지탄광 강제노동? 거짓말이다.”
nk투데이 문경환 기자
기사입력: 2015/03/10 [08:22]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한국 내 탈북자가 27000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여건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 어느덧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한국 내 북한 사람들.

 이들 탈북자의 생활과 고민들을 공유하기 위해 NK투데이에서 연쇄 인터뷰를 준비했다.

 

 

[르포-탈북자를 만나다] 연재가 시작되자 작지 않은 반향이 나왔다


. 어떤 탈북자들은 자신들 사연도 인터뷰해달라며 연락을 해왔고,

또 어떤 탈북자단체에서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며 항의전화를 하기도 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가 3만 명을 바라보는데 어찌 한 목소리만 있을까.

그동안 언론에는 잘 소개되지 않던 이들의 이야기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탈북자들을 계속 만나며 그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현재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탈북자를 만나보았다.

청소년 시절에 탈북해서 한국에 정착,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이름을 밝혀도 되는지 물어봤다. 

 

“네, 상관없어요. 제가 무슨 유명인도 아니고,

뭐 이 땅에서 계속 숨어 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름은 조경일(88년생).

 그런데 유명인은 아니지만 고향은 유명한 곳이다. 

 

“제 고향은 경흥군입니다.

여기서는 아오지로 더 잘 알려져 있어요.

아마 평양 다음으로 유명하지 않나요?”

 

아오지 하면 아오지탄광이 떠오른다.

그럼 아버지가 광부였을까?

 

“아버지는 평범한 노동자셨고,

어머니는 탄광 일도 좀 하고, 농장 일도 했었는데 그냥 주부였어요.

 아오지라고 탄광만 있는 건 아니에요.

 그곳에도 남한만큼은 아니지만 공장들도 있고 농장도 있고 다양한 직업군이 있어요.”

 

혹시나 해서 탄광에 가 봤는지 물어봤다. 

 

“친구들하고 놀러 가봤죠.

갱도에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석탄도 주우러 다니기도 했죠.


그냥 탄광이에요. 탄광이 다 똑같죠 뭐 특별할 게 있나요?

언론에선 아직도 사람들을 아오지탄광에 보내서 강제노동 시킨다고들 그러는데 다 거짓말이에요.

수십 년 전 옛날이야기들을 아직도 언론에서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그런 거 없고 다 평범한 노동자들이예요.”

 

2000년에 처음 탈북을 했다고 한다. 어쩌다 탈북 했을까?

 

“살기 힘드니까 탈북 했죠.

어릴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두만강을 건넜어요.

여름인데 강물이 목까지 차오르더라고요.

새벽에 국경 경비 눈을 피해 건너는데 헤엄치면 물소리가 나니까 물속에서 까치발로 걸어서 건넜어요.

 제가 어릴 적부터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아직도 수영을 못해요.

물이 두려워요.”


북한에선 모든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준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건 과장된 얘기란다.

아무튼 탈북 후 중국에서 2년을 살면서 소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북한에 있을 때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생활이 너무 힘들어 2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단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었을 텐데 어떻게 학교를 다녔을까?

 

“저를 돌보던 분들이 가짜 호적을 구해줘서 중국의 학교를 다닐 수 있었어요.

학교엔 저 말고도 북한 학생이 세 명 더 있었어요.”

 

중국에서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듯하다. 

 

“어머니는 돈 벌어 살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찾아서 가야했고

저는 사랑의 집 같은 시설에서 교회 분들이나 선교사분들 보살핌 속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죠.”

 

그렇게 어머니와 떨어져 살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어느 날 중국 공안이 학교에 찾아와 체포했다고 한다.

 경찰이 소학교에 들어가 학생을 체포한 건 너무하다 싶다.

당시 탈북자 집중 단속 기간이었는지 많은 탈북자들이 체포돼 북송됐다고 한다. 

 

“중국 변방 감옥에서 40일 가량 잡혀 있다가 북송돼서 3일 정도 보위부 취조를 받고

 해당 지방으로 보내지는데 저는 당시 어려서 청진에 있는 청소년 시설로 갔어요.

수용시설이라기보다 고아원에 가까운 곳이라고 보면 되는데 실제로 고아들도 많았어요.

그래도 도망치지 못하게 관리는 하죠.”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체포됐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청진에서 한 달 정도 머물고 나서 고향으로 이송됐다.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고

그 후에 시설에서 나와서 아버지와 살게 됐다.

그 사이에 어머니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2004년에야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그 사이에 어머니도 대여섯 번 북송됐더라고요.

아무튼 그때 이미 어머니는 한국에 있었고

저도 어머니 찾아 다시 탈북해서 한국으로 바로 왔어요.”

 

대여섯 번 북송됐다는 건 그만큼 탈북을 했다는 것 아닌가.

 

탈북은 북한 입장에서 불법 월경인데 범죄자 관리를 전혀 하지 않는 걸까?

 “대여섯 번은 기본이고 심지어 20~30번 탈북한 사람들도 있죠.


 한 번 탈북 했던 사람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기억이 있으니까 또 탈북하게 됩니다.

 원래 90년대 초기에는 탈북하다 잡히면 중범죄로 처리됐어요.


그런데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탈북자가 굉장히 늘어났고

그 중 90%는 생계형 탈북이었어요.

그러니 그 사람들을 다 감옥에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한두 달,

아니면 반년이나 1년 정도 교화시설에서 사상교육을 다시 시키고 내보내줍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와 함께 탈북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외부 세계를 잘 모르시고, 성격이 일단 고지식하고,

중국에 가면 남자들은 살기 힘들다는 소문도 있고,

또 어머니와 어쩔 수 없는 이별을 한지 오래됐고

그사이 새 가정을 꾸렸고, 이런 여러 이유로 함께 탈북하지 못했어요.”

 

남아있는 가족은 피해를 입지 않을까?

 

“어느 정도 기간 감시는 받겠죠.

그런데 행방불명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어떻게 다 감시하겠어요?

가족이 탈북 했다고 해서 남아있는 사람이 다 요주의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정치적 이유로 탈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좀 더 심한 감시나 불이익을 받을 거예요.” 

 

한국에 들어와 합동심문센터 조사와 하나원 교육과정을 마친 뒤 어머니를 만나 함께 살게 됐다고 한다.

정착 과정이 힘들 지는 않았을까?

 

“2004년에 한국에 들어왔으니 벌써 10년 정도 됐네요.

 저는 비교적 어려움 없이 적응한 것 같아요.

 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어려움이라기 보단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려니 버스 탈 때 카드 찍는 것 등 사소한 것부터 다시 배워야하고

이 문화에 어느 정도 친숙하게 동화되는 시간이 걸리는데 이게 적응기간이었던 거죠.


반세기 이상을 서로 달리 살아온 체제잖아요.

그러니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 수 밖에 없죠.”

 

평생 시골 살다 서울 와서 살 때 겪는 어려움 정도라는 느낌이 들었다.

젊은 나이에 들어와서인지 다른 이들에 비해 빨리 정착한 듯하다. 

 

“저는 어린나이에 와서 바로 학교를 다녀서 구직난에 대한 어려움은 아직 없었어요.

학교 졸업하면 곧 겪게 되겠지요.

하지만 다른 탈북자들은 대부분 경제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고,

 돈 벌기 어렵고, 취업하기 어렵고, 취업해도 직장에 적응하기 어려워요.


그런 부분을 정부에서 조금 더 맞춤형으로 지원해주면 좋겠는데

사실 지금 한국에 기초생활수급자가 150만 이상 되고

탈북자는 3만 명이니 뭐 정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이해해요.


그리고 탈북자들이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부분도 있어요.

 해외로 이민 가서 정착한 1세대들이 세탁소와 식당에서 차별과 무시를 이겨내며 터를 다졌던 것처럼

어쩌면 저와 같은 탈북자 1세대들이 터를 잡기 위해 이겨내야 할 운명과 같은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요.”

 

탈북자들은 많은 차별을 받는다던데.

 “저는 개인적으로 아직 크게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주변에서 그런 경우는 많이 봤어요.

차별이야 언론에도 종종 나오잖아요.

탈북자들은 일단 억양이 다르기 때문에 고향 어디냐고 많이 물어보죠.

그러면 어떤 탈북자들은 그나마 북한이랑 비슷한 강원도에서 왔다거나

 혹은 조선족이라고 답하는 경우도 있어요.”

 

한국에 들어올 때 나이가 16살이었다.

학교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한국에서 나이에 맞게 중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북한에서선 초등학교 2학년이 학력의 전부이니 초등학교를 다시 가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나이에 어떻게 초등학교를 갑니까?

그래서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초충고 자격시험을 보고 바로 대학을 갔죠.” 

 

탈북자가 대학에 간다는 게 생소했다.

그런데 의외로 많다고 한다. 

 

“지금 3만여 명의 탈북자 중에 청소년, 청년 등 젊은이가 상당히 많아요.

그래서 탈북대학생들도 많아요.

아마 북한출신 청년들 중 70% 정도는 대학을 갈 겁니다.


하지만 그 중에 다시 70% 정도는 중도에 포기를 해요.

학업을 따라가기 어려운거죠.


남한의 대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도 다니며 공부를 했는데

 북한에서 온 친구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으니

당연히 그 공백 기간을 무시할 수가 없죠.


저만 해도 북한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밖에 못 다녔어요.

 배고픈데 학교를 어떻게 갑니까.

중국으로 가서 소학교 2년 정도 다니다 북송돼서

북한에서 다시 고등중학교 4, 5학년 2년을 다닌 게 다예요.


고등중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시험 볼 때 백지를 낸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남한에서는 대학 가서도 남한청년들 보다 두 배 세배 네 배는

더 공부를 많이 해야 따라갈 수 있어요.”

 

 

그래도 새터민특별전형이 있어 대학 입학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고 한다.

 게다가 정부에서 대학 등록금을 100% 지원해준다고 한다. 

 

“다행히 대학교까지는 정부에서 등록금이 6년 동안 8학기를 지원해줘요.


그러니까 그나마 대학교를 다닐 수가 있는 거지

 이게 없으면 북한에서 온 청년들은 아마 다들 벽돌 나르는 공사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대학교를 다닐 수 있어 다행이죠.

그런데 대학원은 정부 지원이 없기 때문에

장학재단이나 외부 단체 또는 후원해주는 분들의 지원을 받아야 다닐 수 있어요.”

 

대학 생활하면서 친구들과는 잘 어울렸을까?

 

“저는 입학하고 처음부터 북한에서 왔다고 얘기했죠.

 그래도 주변에서 신기하게 생각하거나 차별하지는 않더라고요.

 학교에서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는 본인 스스로에게도 달려있다고 봐요.

물론 문화적인 이질성과 구조적인 문제들이 다분하니

 개인이 혼자 노력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어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