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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점점 싫어지는 이유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 (2) 6.15와 반미자주 |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한국의 가장 큰 의식변화는 ‘반북’정서가 줄고, ‘반미’감정이 높아진 것이다. 1993년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북한 44% Vs 미국 1%]로 응답한 반면 2005년에는 [북한 14% Vs 미국 55%]로 조사됐다. 특히 대미 의존형 한미관계를 탈피해야 한다는 여론도 2002년 28%에서 2005년 72%로 급성장했다.
반북의식이 사라진 이유는 이해가 간다. 6.15이후 평양 방문자 4만여명, 금강산 관광객 200만 시대였으니, 북한(조선)을 직접보고 느끼면 반감이 없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반미의식은 왜 이렇게 폭발하게 됐을까? 해방이후 미군정 기간 재등용된 토착왜구와 그 후손들의 숭미주의를 제외한 대부분 우리 사회 친미의식은 크게 두 가지 우려 때문에 생겨났다. 하나는 주한미군이 없으면 북한(조선)이 남침할 수 있다는 걱정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은 강대국이며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이 2000년 6.15 공동선언 발표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6.15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반북 정서는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주된 명분이 되었다. 예속적인 한미관계도, 독재정권의 폭압도, 과도한 군사비 지출도 모두 북한의 ‘적화통일’이니 ‘남침 위협’ 따위의 반북 선전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주한미군 주둔으로 인한 주권 침해도, 주둔비 부담도, 끊임없는 범죄와 환경오염도 모두 북한(조선)에게서 한국을 보호해준다는 명분 때문에 우리 국민이 참아야 했다. 그러나 6.15공동선언에서 ‘우리민족끼리’가 강조되면서 남침으로 인한 전쟁위협은 사라지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남과 북이 잘살아보자는 기운이 넘쳐나면서 미국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이 터지면서 반미의식으로 폭발했다. 오죽했으면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에 NO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 미국에 사진이나 찍으러 가진 않겠다”고 했을까. 이런 발언은 반미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고, 득표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가능했다. 이 같은 국민적 의식변화에 힘입어 2000년대 반미투쟁은 활화산처럼 번져갔다. 부산 하야리야 미군부대 투쟁, 용산 군산 미군기지 폐쇄투쟁,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투쟁, 평택 미군기지 폐쇄투쟁, 경산 함안 대전 등 전국으로 번진 미국의 양민학살 진상규명 등 반미자주화 투쟁에 봇물이 터졌다 .
6.15공동선언 발표 19년,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이 있은지도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의 자주권은 오히려 후퇴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국의 승인 없이 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는 모욕적인 말을 대놓고 내뱉었다. 판문점선언에서 약속한 남북 철도•도로 연결,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적대행위 중지, 종전선언 등이 미국의 노골적인 방해와 거부로 중단돼 있다. ‘9월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설치,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 동서해 관광특구,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등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길이 미 국무부 일개 관리에 의해 차단됐다. 스티븐 비건을 미국측 단장으로 하는 한미 워킹그룹은 마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행세를 하며 남북관계 발전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방해한다. 비건의 워킹그룹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까지 미국의 승인을 받으라며 통제하고 있으니 아연실색할 일이다. 6.15시절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효순이•미선이 추모촛불을 들었던 것처럼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반미자주의 촛불이 거대한 횃불로 번질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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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끼리”라면 개성은 열린다[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3) 6.15와 경제협력 |
“개성공단에서는 개성공단에 맞는 운전면허증을 발급합니다. 면허증 일련번호 마지막 숫자는 ‘615’로 통용됩니다. 개성공단이 남과 북, 6.15공동선언이 만든 ‘옥동자’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이 한 라디오(팟캐스트)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이다. 2000년 발표된 6.15남북공동선언 4항.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6.15선언 발표 이후 남북은 착실히 합의를 지켜나갔다.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라 하는 ‘개성공단’.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조선) 아시아태평양위원회의 <개성공단 건설 및 운영 합의서> 체결을 시작으로, 12월 남북이 장관급회담을 열어 <남북경협 4대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2003년 6월 개성공업지구 착공식을 연다. 1년만인 2004년 6월, 시범단지 2만 8천 평 부지조성을 완료하고 15개 입주업체를 선정해 입주 계약을 체결한다. 2005년 3월엔 남측 지역에서 개성공단으로 전력공급이 시작됐고, 2005년 12월엔 개성공단과 남측 지역 간 통신이 연결됐다.
개성공단이 위치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봉동리는 군사분계선에서 최단거리가 2.5km, 비무장지대에서 서쪽으로 고작 500m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개성공단이 들어서기 전 북한(조선)군 6사단, 64기갑사단, 62포병여단이 배치돼 있었다. 북한(조선)은 개성공단 부지조성을 위해 이 지역 군병력을 10~15km 뒤로 물렸다. ‘ 군사지역’을 ‘경제협력지역’으로 변화시키고 남과 북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개성공단이 담당했다. 김진향 이사장이 개성공단을 “평화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개성공단을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개성공단은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노동력과 토지를 활용해 진정한 의미의 ‘남북 상생의 경제협력모델’을 창출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징’이라는 표현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개성공단이 처음 가동된 2004년을 시작으로 10년간 개성공단 기업체 수는 8배, 생산액은 30배로 늘었다. 2005년 1500만 달러로 시작해 10년간 누적 생산액은 23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개성공단 방문 인원은 누적 94만 명에 달했다. 2000년 이후 남북교역액은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되기 전까지 꾸준히 증가해, 2015년 남북교역 규모는 27억 15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교류 건수에 있어서도 2000년 이후 총 470여 건, 이중 개성공단 관련 사업이 총 390건으로 약 80% 이상을 차지했다.
남북의 경제협력, 나아가 남북 간 긴장 완화와 관계발전에 기여했던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했다. 2010년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북한(조선)에 대한 남북교역 중단과 대북 신규투자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북제재 조치 ‘5.24조치’를 발표해 개성공단을 축소하고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교역도 모두 중단했다. 2 013년 4월 한미합동군사훈련으로 인해 잠시 가동중단을 겪기도 한 개성공단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북한(조선)의 4차 핵실험을 이유로 2월 전면 중단에 이른다. 남북경제교류협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남북철도 연결, 그리고 금강산관광이다. 6.15시대였던 지난 2003년 경의선을, 2005년 동해선 일부를 복원한 남과 북은 철도로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다. 2007년, 한국전쟁 이후 56년 만에 경의선이, 57년 만에 동해선이 남북을 종단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활발하게 추진된 남북철도연결 사업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된다. 1998년 금강호 첫 출항 이후 6.15의 바람을 타고 2005년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한 후 금강산관광은, 2008년 이후 10년 이상 멈춰 있다. 그간 금강산을 찾은 관광객은 200만 명이 넘었다. 6.15공동선언 발표로 활발했던 남북경제교류협력은 결국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모두 멈춰 섰다. 대북제재로 멈춰선 남북경협… 공동선언 정신으로 돌아가야
지난해,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엔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4월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 나가기로 했다. 9월 평양공동선언에선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하기로 했다. 연내 동·서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도 갖기로 했다.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개성공단 전면 중단의 이유이기도 하면서 미국이 대북제재를 시행한 이유는 북한(조선)의 핵실험이다. 북한(조선)은 이를 1년이 훨씬 넘도록 중단했다. 그러나, 원인은 해소됐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개성공단은 여전히 폐쇄상태에 있다. 미국의 대북제재, 그리고 한미워킹그룹의 간섭과 통제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한국은 미국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발언에 이어,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한 직후 개성공단 기업인의 방북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1월 비건을 미국 측 대표로 해, 대북제재와 남북관계를 조정하는 ‘한미워킹그룹’ 출범 이후 미국은 사사건건 남북관계의 속도를 조절했다. 미국은 남북철도 연결, 그리고 금강산관광 재개 역시 제동을 걸었다. 지난해 8월,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합의에 따라 남과 북은 남북철도 연결을 위한 경의선 북측구간 남북공동조사를 추진했다. 그러나 유엔군 사령부의 통행불허로 무산됐다. 연내 치르기로 한 동·서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은 한미워킹그룹을 거치고 나서야 지난해 12월26일 겨우 치를 수 있었다. 전문가들도 “대북제재와 관련없다”, “행정명령으로 재개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금강산관광 역시 대북제재에 묶여있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의 대북제재는 더욱 노골화됐다.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해 “아직 적기가 아니”라고 말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제재 유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철도·도로 연결 등 남북경제협력에 노력을 기울이던 문재인 정부에 한미워킹그룹은 한미사이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자리가 아니라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로 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김연철 통일부 장관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의 발전과 발을 맞춰야 한다”면서 남북관계 발전에 속도조절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제재가 남북경제협력에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2의 6.15시대, 판문점선언 시대를 열겠다는 시민, 사회단체들의 여론은 쉬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리얼미터가 지난 2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한 국민여론을 조사한 결과, 찬성 68.9%, 반대 26.5%로 집계됐다. 지난 2017년 6월에 실시한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국민여론’ 조사 (찬성 49.4% vs 반대 39.9%)에 비해 찬성 여론이 약 20%p 확대된 결과다. (사)겨레하나는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을 앞두고 지난 14일, 6150명이 작성한 금강산 방문신청서를 통일부에 직접 접수하는가 하면, 금강산 가기 운동은 지역과 단체들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북남 사이의 협력과 교류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 온 겨레가 북남관계개선의 덕을 실지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4월 시정연설에선 “(대북제재는)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전인 것만큼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도 방관시 할 수도 없다…”면서 제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사 또한 명확히 했다. 6.15공동선언, 판문점선언을 합의했던 정신으로 돌아와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북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의지다. 지난달 17일, 정부는 3년 만에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자산점검을 위한 방북신청을 승인하면서 “기업인들의 조기 방북이 성사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남북경제협력과 남북관계 개선, 대북제재를 대하는 남쪽의 선택 역시 다른 데 있지 않다. 6.15공동선언과 이를 계승한 판문점선언에 답이 있다. “나라의 통일 문제는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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